부모와 다른 아이들 1
앤드류 솔로몬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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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대만에 가서 여행하며 알게 되었던 친구를 다시 만났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상처를 주고 받을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 친구가 이러는 거다. "아프리카 여행하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뻔한 적이 있었는데 아프다가 깨어나니까 애를 가져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승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죽음 직적에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고 싶다는 동물적 본능 때문이든 뭐든, 그 순간에 나는 내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확신이 생겼다. 부모가 우리에게 상처를 준 것은 맞다. 하지만 네 자신을 봐라. 넌 정상이고 꽤 괜찮은 사람으로 자랐다. 인간은 생각보다 강하다. 그리고 나는 네가 좋은 엄마가 될 거라고 확신해' 이런 말을 하며 친구가 권해준 것이 바로 이 책. 한국 와서 실물을 보고 좀 놀랐다. 800권짜리 책이 2권. 레퍼러가 100페이지쯤 된다고 해도 무척 방대한 책이다. 


저자는 사람의 정체성을 부모로 부터 물려받는 '수직정 정체성'과 부모와 달리 독립적으로 타고나는 '수평적 정체성'으로 개념화 하고 수평적 정체성을 카테고리화 하여 부모와 어떤 문제를 겪고 어떤 인생을 살게 되는지를 십여년에 걸쳐 연구했다. 수평정 정체성은 장애, 성적지향, 범죄, 신동 등. 사실 책을 읽으며 나는 친구가 말한 그런 종류의 '감화'를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 친구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혹은 내가 얼마나 부모로서 강인해질 수 있는지 등을 자극받길 바랬던 것일텐데 되려 나는 책을 읽을수록 더 부모로서 자신이 없어졌다. 아이가 자폐와 정신분열으로 평생 회복의 가능성이 없고 벽에 똥칠을 할 때 나는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강간으로 임신된 아이가 태어나 그 아이를 볼 때마다 강간의 경험이 떠오른다면 나는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신동이라서 내 인생 모두 뒤로 미루고 하루종일 서포트 해줘야 하는 아이가 내 자식이라면 나는 그 아이를 지원하는 것으로 내 인생의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 모든 대답에 나는 책장을 넘기며 속으로 노, 라고 답했다. 


내가 이 책에서 찾은 의미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한 재고보다는 삶의 다양성에 대한 배움에 더 가깝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보통 사람이 상상하기도 힘든 아주 특수한 상황의 자녀를 가질 때 인간이 보이는 모습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들의 모습이 우리가 그들을 타자화하여 만들어 낸 스테레오 타입과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배움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이 불쌍하다 생각하고 그런 자녀를 가진 부모에게도 안쓰러운 시선을 던지지만 그들은 병원에서 다른 장애를 가진 아이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한다. '우리 애가 쟤보다는 낫지.' 우리는 장애가 불행이기에 장애를 가진 부모들이 정상아를 낳기를 바랄거라 믿지만 상당히 많은 장애인 부모들은 자식들도 자기와 같은 장애를 가지기를 바란다고 한다. "우리는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거에요." 신동을 자식으로 낳는 건 다운증후군이나 청각장애아를 낳는것보다 훨씬 좋은 일일것 같지만, 아이에 맞추어 부모의 인생을 갈아넣어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별반 다를바가 없다. 오히려 더 어려울 수 있다. 자식에게 결핍이 있다면 부모는 무조건적으로 그들을 사랑하면 되지만 자식이 신동이라면 사랑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 부모역시 전문적인 수준의 해당분야 지식을 쌓고 자식을 이끌어줄 선생을 찾아 전세계를 돌아 다녀야 한다. 자녀와의 관계도 외줄타기처럼 어렵다. 자식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게 엄격한 훈련을 하다가 자칫 아이가 엇나가거나 관계가 망가질 수 있고 반대로 아이가 혼자 인생을 헤쳐나가도록 자유롭게 내버려두면 재능을 발현할 때를 놓친 아이는 뒤늦게 부모를 원망한다. '왜 내 재능을 방임했나요!' 세상의 단순한 생각과는 달리 신동을 낳는 것은 장애아를 낳는 것 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힘든 일이다. 


책 속의 부모들은 자신과 너무나도 다른 아이들(far from trees)에게 대체적으로 애정을 보이고 많은 경우는 죽는 날까지 어떻게든 그 아이들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들 나름의 지원을 한다. 인간의 존엄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그들이 자식을 평생 사랑한다는 부분보다도 그들이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볼 때 후회를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장애아를 낳고, 자식들 병원비를 내느라 홈리스가 되고, 자식이 죽은 다음에 장학재단을 설립해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돕고, 혹은 늙어서도 제 앞가림 하지 못해 평생 부모가 자식을 걱정해야 함에도 그들은 자식이 있어서 자신의 삶이 더 풍요로웠다고 말한다. 자신의 몫을 했다는 실감이 있다는 말일테다. 그것이 유전자의 확률게임에서 패한 자의 정신승리라 할지라도, 그들의 인터뷰를 읽으며 그들의 영혼에는 신이 비추는 햇살이 내리쬐고 있을거라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부모로서의 역할에 대한 자신감이 더욱 없어졌지만 저자는 오히려 부모로서의 역할에 자신감이 생겨 아이를 갖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용감히 기형검사도 하지 않고 아이를 출산한다. 많은 부모들을 보며, 어차피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아이를 사랑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책은 성경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신성에 대해 막연히 감이 있는 사람에게는 와닿을 책 하지만 나처럼 신성과 모성에 대해 메마르고 메마른 사람에겐 영적으로 와닿는 부분은 없는 그냥 좋은 책. 어쨌든 이 책이 좋은 책임은 부정할 수 없다. 번역에 대해서는 참 실망스러웠지만 우리가 아는 삶의 모습을 더욱 입체적으로 살려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모르는 실제의 삶이란 이런 것이란 점에서, 이 책을 읽고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들을 조금이나마 더 알게 되었다는 점에 감사한다. 그러니 이런 것이다. '트렌스젠더'라는 챕터를 보면 트렌스젠더들의 사망률이 일반인에 비해 수배나 높다는 것을 알수 있다. 성전환 전에는 정체성 위기로 자살을 하고 성전환을 한 다음에는 혐오범죄의 타겟이 되기 때문이다. 트렌스젠더에 대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막연히 조금은 불편한 존재로 생각하던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게이로 추측되는 한 연예인이 SNS에서 자신의 성적 지향을 '대놓고'드러내며, '나댄다'고 비웃는 인터넷 게시물에 이런 댓글을 달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비난받거나 비웃음 당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케이스를 조사한 것이기에 한국과는 상황이 다른 점이 많지만 저자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국적과 인종 세대를 뛰어넘는 것이기에 한국의 독자들도 충분히 의미있는 무언가를 이 책에서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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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4 09: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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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다른 아이들 2
앤드류 솔로몬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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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아동과 마찬가지로 신동은 부모에게 그들의 특별한 요구를 중심으로 부모의 삶을 재설계하도록 강요한다.

레온의 원숙함은 지극히 자각적인 성격에서 기인한다. 그가 말했다.

당신은 작품을 연주할 때 자신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일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연주할 수도 있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서술자처럼 연주할 수도 있어요. 예컨데 ‘옛날 옛적에 어떤 사람이 있었어요‘라고 이야기하듯이요. 그리고 서술자처럼 연주하면 표현이 훨씬 풍부해질 수도 있어요. 이렇게 함으로써 청중의 상상력을 보다 자유롭게 해줄 수 있거든요. ‘내가 이렇게 느끼고 있으니 당신들도 이렇게 느껴야 한다‘고 명령하는게 아니에요.

1945년에는 전 세계를 통틀어서 피아노 콩쿠르가 오직 다섯 개밖에 없었다. 오늘날에는 750개가 있다.

연주는 감수성을 혹사시키는 행위이며, 감수성은 부서지기 쉬운 부싯깃 같은 것이다. ...연습을 좋아하고 다른 활동은 상상조차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외로움은 창조적인 행위의 핵심이다.

스콧은 적절한 가사를 찾기만 하면 순식간에 영감이 떠오른다고 설명했다. 내가 곡 작업이 즐거운 과정처럼 들린다고 이야기하자 그가 말했다.

음악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복이 있는 지형들이 존재해요. 하지만 내 작품들은 대체로 아픔을 토대로 합니다. 내 인생 경험에서 후회와 체념, 절망 등으로 윤기가 더해진 새깔들이 나오는 거죠.

그가 자신의 아이폰에서 다섯 살 때 찍은 사진 한장을 내게 보여 주었다. 사진 속의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게 증거물 에이 이고요.

그리고 자신이 목용하는 항우울제 목록을 내밀었다.

이것이 증거물 비 입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자신이 모든 감정을 경험했다는 착가그이 덫에 빠지기가 정말 쉽습니다. 하루 종일 그런 감정들을 재생산하고 있으니까요. 중년이 되면서 나는 삶을, 내가 늘 책에서 읽었거나 영화에서 봤거나 다른 사람의 집에서 목격했던 그런 삶을 갈망하기 시작했어요.

대학에 다닐 때 나는 루이즈 매커런이라는 사람을 알았다. 그녀는 피아니스트로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20대 초반에 케네디 센터에ㅓ 데뷔를 앞두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친구들과 친척들을 공연장에 태워갈 버스까지 대절했다. 하지만 공연 이틀 전에 사람들은 그녀가 부상 때문에 연주를 못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지나친 연습으로 반복성 스트레스 손상을 입었을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단순히 새끼손가락을 다쳤을 뿐이었다. 이후로 25년이 지나도록 그녀는 공연 일정을 잡지도, 대중 앞에서 공연을 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아파트에 피아노를 두 대나 놓고 매일 여덟 시간씩 연습하면서 혼자 살았다. 예술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넣어야 하기 때문에 데이트나 결혼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가끔은 파티에 참석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자신을 콘서트 피아니스트라고 소개했다. 물론 그녀가 콘서트를 한 적은 없었다.

재능을 파괴하기는 매우 쉽다. 반대로, 양육을 통해 없던 재능을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원래부터 재능이 있는 경우 전체적으로 재능이 차지하는 비중은 10퍼센트에요. 재능이 없는 경우에는 수치가 90퍼센트로 상승하죠. 재능의 부재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중국어와 그 밖의 성조가 있는 언어는 영유아에게 청각적인 예민함을 길러 주고, 전형적인 중국인의 손은 손바닥이 넓고 손가락 사이의 공간도 넉넉해서 피아노를 치는 데 특히 유리하다.

사춘기가 되었다고 해서 성숙했다는 뜻은 아니다. 음주, 투표, 성관계, 운전을 할 수 있는 연령은 오래전부터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생물학적 증거를 통해 사춘기의 뇌가 성인의 뇌와 구조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고, 이는 성인 범죄와 청소년 범죄를 구분하려는 움직임을 뒷받침한다. 예컨대 열다섯 살의 청소년은 전전두엽 피질에서 자기 통제를 관장하는 영역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상태이다. 이외에도 뇌의 많은 부분이 대략 스물네 살이 되어야 성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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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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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남아있는 나날에 이어 읽은 이시구로의 두번째 작품. 소재는 전혀 달랐지만 1인칭 화자가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고 기억을 더듬으며 서술한다는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상당히 유사했다. 


이시구로는 문장이나 표현력도 좋지만 한 편의 소설을 완결된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빚어내는 능력이 너무도 탁월하다. 한 권의 책이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나면 그의 소설은 아름다운 오브제가 되어 입체적인 형태로 내 머릿속에 둥실 떠오른다. 저런 예쁜 것을 나는 읽은 것이다. 줄거리나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한 두줄 문장으로 남는 다른 책들과는 다르다. 사실 일반적인 출판물은 독자의 기억에 그 한두줄 메시지만 남긴다 하여도 성공이다. 이시구로는 급이 다르다. 


'나를 보내지 마'는 장기기증을 위해 태어난 클론들이 단체 기숙학교에서 성장한다는 설정으로 클론인 주인공과 친한 친구 두 명의 인생을 그리고 있다. 이런 종류의 소설에 있게 마련인 과다한 설정 설명 같은 건 전혀 없다. 오히려 이시구로의 스케치가 너무 빠르다 보니 독자들이 이 소설 속 세상의 얼개를 이해하는데 다소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의 사고는 '클론'이라고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클론이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인간을 해칠 것이다'식의 지루한 가설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그리는 세상은 오히려 반대이다. 클론들은 온순하고 순종적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에 대해 반항을 하지도 않는다. 소설은 주인공과 그의 친구들의 성장과정을 그리며 하나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흘러가는데, 클론들의 미스테리한 이야기에 홀려 두근거리며 페이지를 넘기던 독자들은 마지막에 가서야 깨닫게 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읽은 것은 클론의 인생이 아니라 인간의 인생이었음을. 


이시구로의 소설 속 인물들은 치밀하게 사고하고 상대와 대화를 주고받을 때는 행간의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본인들의 화법같다고 해야할까? '남아있는 나날'에서는 화자가 '집사'라는 특수한 신분이기에 이런 서술이 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보내지 마'의 경우에는 화자가 어린 영국인 소녀인데도 상대방의 행동과 의도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내용이라 조금 어색하다는 감이 있었다. 일본 소설 '세설'이 연상되었다고 할까? 작가의 민족적인 뿌리가 이런식으로 영향을 미치는건가 싶은데, 그의 나머지 작품들을 더 읽어보며 판단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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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하게 살지 않겠습니다
야마자키 마리 지음, 김윤희 옮김 / 인디고(글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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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하게 살지 않겠습니다'란 확신에 찬 제목을 보고 도대체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일까 궁금하였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는 시시하게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적이 없다. 태어난 환경과 양육자의 양육방식부터 평범하지 않았고(시시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의 인생은 시시하게 살겠다 살지 않겠다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스펙터클하게 흘러간다. 14살에 혼자서 유럽을 가고 17에 이탈리아 미술유학을 시작하고 스물일곱엔 임신 사실을 확인한 다음 무능력한 남편과 헤어지고 싱글맘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만화 공모전에 입상하여 받은 상금으로 비행기 표를 사서 겨우겨우 빈손으로 일본에 돌아가는데...(이것은 그녀 인생의 서막일뿐!)


"피렌체에 머무는 10년 동안 나는 두 분의 은인을 먼저 떠나 보냈다. 그러면서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하고 싶은 일을 후회 없이 하다가 생을 마감한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봤다. 이 경험이 훗날 내가 세상에 나갔을 때 인생에 소중한 거름이 되리라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글은 평범하다 싶으면서도 이렇게, 보통 사람은 경험해보지 못한 이야기를 툭 던져서 독자들을 놀래키고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시시하게 살지 않은 사람의 인생력.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녀의 에세이는 삶의 굴곡에 비해  내용적인 측면에서 플랫하다는 느낌이다. 결혼 이혼 출산 커리어성공 등 인생이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순간들을 그녀는 한두문장으로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휙휙 지나가 버린다. 작가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노출하고 싶지 않아서 선택한 의도적 연출인가 싶기도 한데,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쉽다. 그녀의 삶이 무겁다는 건 분명한데 그녀의 문장으로 느낄 수 있는 건 가벼운 것들 뿐. 


최소한 그녀가 대단한 삶을 살아낸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별 다를 것 없는 보통의 인생을 짜내어 써낸 감성에세이들 보다야 훨씬 낫다만, 완성도의 측면에서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소재에 이 정도 문장력에! 조금 더 속을 터놓고 썼더라면 조금 더 생명력이 긴 책이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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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하게 살지 않겠습니다
야마자키 마리 지음, 김윤희 옮김 / 인디고(글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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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흐르는 대로 휩쓸려가지 않고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멈춰 서서 고민하고 사색하는 것. 즉, 의구심은 인간이 진지하게 살아가려고 마음먹었을 때, 그 사람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에너지가 된다.

이제 정말 틀린 걸까, 이대로 객지에서 죽는 건 아닐까, 극단적인 생각까지 드는 그 순간 문득 ‘믿을 건 나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지금 나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내 옆을 스쳐가는 사람도 일본에 있는 엄마도 아니다. 어느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다. 나는 나를 믿고 의지해야 한다.
‘믿는다, 나를‘
‘믿을게, 이제 너밖에 없어‘
스스로에거 속삭이던 그 순간, 나에게 ‘자신을 지탱해줄 또 하나의 나‘라는 운명공동체가 나타났다. 잔혹한 상황에 휘말린다 해도 ‘또 하나의 나 자신‘이 있으면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 존재가 그 후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얼마나 큰 힘이 되었던지.

피렌체에 머무는 10년 동안 나는 두 분의 은인을 먼저 떠나 보냈다. 그러면서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하고 싶은 일을 후회 없이 하다가 생을 마감한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봤다. 이 경험이 훗날 내가 세상에 나갔을 때 인생에 소중한 거름이 되리라는 것을 느꼈다.

나에게 실패란 아픔이 아니다. 실패를 하면 할수록 다만 내 사전의 어휘가 늘어날 뿐이다.

다양한 국적과 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는 곳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라는 융통성이 허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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