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과 이야기 - 에세이와 회고록, 자전적 글쓰기에 관하여
비비언 고닉 지음, 이영아 옮김 / 마농지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애컬리는 자신이 가족사의 퍼즐을 맞추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사건들을 차례로 배열하고 세부 내용을 정확히 기술하기만 하면 전부 착착 들어맞을 거야, 하고 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착착 들어맞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존재가 아닌 부재를 묘사하고 있구나. 이것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못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누구였는가? 나는 누구였는가? 왜 우리는 서로 엇갈리기만 했을까? - P25

상상력으로 쓰는 글에서는 대상에 대한 공감이 꼭 필요한데, 정치적 올바름이나 윤리적 온당함 때문이 아니라, 공감이 없으면 마음이 닫혀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감이란 상대에게 감정으 ㄹ이입함으로써 입체감을 부여하는 수준의 공감이다. 우리 독자들로 하여금 타자를타자 자신의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감정이입이야말로 글을 진전시킨다. 서술자는 아무 잘못 없는 사람, 서술 대상은 괴물로 묘사되는 회고록은 상황이 정지 상태로 머물러 있기에 실패작이 된다. 드라마가 깊어지려면, 괴물의 외로움과 무고한 자의 교활함이 보여야 한다. - P43

늙어가는 것이 아우슈비츠보다 더 나쁘다고 그는 결론 내렸다. 무시무시한 강제수용소보다 "늙어가는 경험의 내적 공포와 고통이 더 크다." 이 공포와 고통이 그의 화두가 되었다. -늙어감에 대하여 - P72

젊을 때 우리는 공간과 시간의 한가운데 서 있지만, 나이가 들수록 공간 감각은 사라지고 오로지 시간만이 밀려들어 와 일상을 채운다. 우리는 늘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방인이 된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반대편에서 우리를 쳐다보는 얼굴에 경악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흠칫 놀란다. 영영 헤어나지 못할 이 충격이 매일같이 우리를 따라다닌다. 자연계 역시 낯설어진다.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산을 바라보고 싶은 이가 있을까? ..문화적 노화는 더 심각하다. 우리는 주변 세계와 하나 된 기분을 더는 느끼지 못한다. 예술, 정치, 패션의 새로운 발전이 당황스럽거나 노엽거나 불편하다. 거기에 우리의 경험이라곤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 P73

모든 인간의 생에에는 현재의 자신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시점이 있다. 세상이 더 이상 우리의 미래를 믿지 않고, 더 이상 우리의 가능성을 보지 않으려 한다는 깨달음이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온다. 어느덧 우리는 잠재력 없는 생물체가 되어 있다. 이제는 누구도 우리에게 "뭘 하고 싶으세요?"라고 묻지 않는다. 이룬 바를 이미 계산당하고 저울질당한 노인들은 폐품 판정을 받는다. - P77

인간은 가장 깊숙한 내면의 자아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그리고 가장 깊숙한 내면의 자아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때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아! 그러려면 그 깊숙한 곳으로 뛰어내려야 한다. - P78

프리쳇은 회고록에 대해 "중요한 건 필력이다. 인생을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칭찬받을 수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 P108

삶이란 한 사람의 인격을 완전히 형성하는 사소한 선택들의 합에 지나지 않는다. 신사는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지 않는다. 남자는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지 않으며, 이런 말을 하고, 저런 말은 하지 않는다. - P127

외로움에 대한 혐오는 삶의 욕구만큼 자연스럽다. 그게 아니라면 인간은 굳이 문자를 만들지도, 한갓 짐승의 소리에서 단어를 빚어내지도, 그저 남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려고 대륙을 횡단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P165

이 책은 15년간 예술대학 석사 과정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으로부터 나왔다. 그동안 내가 깨달은 점이 있다면,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극적 표현력, 구조를 이해하는 본능적 감각, 서술의 표면 아래 언어를 가라앉히는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P1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이어도, 일이 아니어도 - 만화와 요시나가 후미: 요시나가 후미 인터뷰집
요시나가 후미 지음, 김솜이 옮김, 야마모토 후미코 인터뷰이 / 문학동네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의 친필사인본이라고 이해하고 샀는데 친필사인 ˝인쇄본˝ 임. 문동정도 되는 출판사가 왜 표지뿐 아니라 마케팅도 이렇게 짜치게 하는지 이해가 안감. 책값이 싼 것도 아니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이어도, 일이 아니어도 - 만화와 요시나가 후미: 요시나가 후미 인터뷰집
요시나가 후미 지음, 김솜이 옮김, 야마모토 후미코 인터뷰이 / 문학동네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 표지가 학급문집 수준의 재질이라 독서에 방해가 될 정도. 표지가 힘이 없으니 책을 잡거나 쥐고 읽기 힘들고 쉽게 구겨져 책 형태가 변형됩니다. 내지 또한 일반 단행본보다 얇은 종이를 쓴것 같은데 2쇄 인쇄부터라도 당장 바꿔줬으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비비언 고닉 지음, 서제인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거리는 내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내게 해준다. 거리에서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 P11

뉴욕 거리는 자기 자신의 역사라는 징역형으로부터 도망쳐 열린 운명이라는 가능성으로 들어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 P22

‘어디서든‘ 꽃을 피우려면 사람은 주변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낼 만큼 뛰어나거나, 속한 환경에 맞춰 살 만큼 겸손하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한다. 둘 중 어느 쪽도 아니라도 아니라면 뜻이 맞는 최소한의 사람들이 곁에 있어야 한다. 그것은 평범한 식물들이 교외의 잔디밭에 심어지는 것과 풍요롭게 가꾼 정원에 심어지는 것의 차이다. 정원에서는 똑같이 수수한 나무와 꽃인데도 한데 모인 그 풍셩함 덕분에 ‘있어야 할 자리‘에서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8번로에서는 여자가 경험한 것들이 그를 흥미진진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남부의 어느 도시 대학에 데려다 놓는다면, 그는 이내 쓸쓸한 사람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 P24

레너드와 나는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어느 베이커리 쇼윈도 앞을 지나가는 중이다. 빛나는 판유리 뒤에 마들렌이 한 접시 가득 놓여 있다.

"마들렌은 한 번도 안 먹어봤네." 내가 말한다. "저건 맛이 어때?"

"맛있어." 레너드가 대답한다. "폭신폭신하고." 그가 덧붙인다. "그걸로 여섯 권짜리 장편소설을 쓸 정도는 아니지만." - P31

"그 사람들은 어른인 척하 거야." 레너드가 말했다. "그뿐인 얘기지. 40년 전에 사람들은 결혼이라고 불리는 벽장에 들어갔어. 벽장 안에는 옷이 두 벌 있는데 너무 뻣뻣해서 저절로 서 있을 정도야. 여자는 ‘아내‘라고 불리는 드레스 속으로, 남자는 ‘남편‘이라고 불리는 정장 속으로 걸어 들어갔지. 그게 다야. 그 사람들은 옷 속으로 사라졌어." 레너드는 성냥을 켜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지금 우리는 척을 하지 않아. 벌거벗은 채로 여기 서 있지. 그런 거야."

"나는 이 삶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야." 내가 말한다.
"누군들 적합하겠어?" 레너드가 내 쪽으로 연기를 내뿜으며 말한다. - P41

생각을 할 때 나는 덜 외로워졌다. 내게는 나 자신일는 친구가 있었다. 나 자신이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새로워진 지혜의 힘을 느꼈다. 그리스인들로부터 체호프를 거쳐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까지, 인간의 외로움이라는 본성을 탐구하는데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던 모든 사람은 오직 일하는 자기 자신의 생각만이 자아의 고독을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 P60

나는 방 한가운데 알몸으로 섰다.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켰다. 사랑이라는 환상은 침해처럼 느껴졌다. 내게는 해야 할 생각들이, 배워야 할 생각들이, 배워야 할 기술이, 발견해야 할 자아가 있었다. 고독은 선물과도 같았다. 혼자서 발을 들여놓을 의지만 있다면 나를 반겨줄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옷을 입고 문으로 걸어나갔다. - P70

세상에서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갈망과 세상에서 존재를 인정받아야 하는 일에 대한 적대감이... - P128

"내가 젊었을 때는 말이야." 그가 안드레아에게 말했다. "남자들이 메인 요리였어. 하지만 지금은 그냥 양념일 뿐이지. 조언하자면, 가능한 빨리 그 단계에 도달하길 바라. 인생은 그때가 돼야 해볼 만해지거든." - P159

기질을 공유한다는 것은 한 벌의 톱니바퀴가 작동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발상은 복잡하지 않아도 톱니바퀴의 맞물림은 완벽해야 한다. 거의 정확한 정도로는 안 되고, 완벽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톱니바퀴는 돌아가지 않는다. - P172

어째서인지 뉴요겡서는 하루를 얼마나 녹초가 되어 보내든 간에 시간이 여전히 현실감 있게 느껴진다. 고립이라는 개념에 한계가 정해진다.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고 있지는 않더라도 내가 호흡하는 공기 속에 격렬한 감저이 가득하다. 내가 정치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매일의 대화 속에 정치가 담겨 있다. 내 욕망이 강렬하지 않지만, 욕망은 분명 이 도시에서 통용되는 화폐다. - P1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값비싼 독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5
메리 웨브 지음, 정소영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전집은 지금까지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던 책들을 초역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독자로서 반갑고 출판사에 감사하는 마음까지도 들지만. 책을 읽어보면 어쩔 수 없이, 이 책이 지금까지 소개되지 않았던 이유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문학을 A급이라 한다면 이걸 B급이라 불러야 할까? 거칠다거나, 세련됨이 부족하다거나, 평면적이라거나. 하나의 작품으로서 개성은 있지만 전체적 총점의 차원에서는 확실히 유명한 고전에 비해서는 부족한 지점들이 있다. 이 책은 언청이 여주인공이 동네의 잘 생긴 총각을 사랑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이 책의 홍보 문구) 궁금해서 보기 시작했는데 사실 매력적인 캐릭터는 언청이 여주인공보다는 그녀의 오빠인 기디언이다. 계급상승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집념을 가진 그는 폭풍의 언덕 히스클리프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소설의 캐릭터로서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건 여주인공이 아니라 오히려 조연인 기디언이며 그렇기에 여주인공의 행동이나 사건의 진행은 수동적이며 우연에 기대는 부분이 많다. 한마디로, 문학으로서의 수준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단점은 결말에 이르러 극대화된다. 이 책의 매력은 고대나 중세 문학에서 다루는 '비극'을 그 시대의 배경에서 잘 살리고 있다는 점. 한계라면 이미 문학은 그 수준을 넘어 다른 차원으로 진화했는데 우리 시대에 이 이야기를 읽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는점. 다시 말하자면 그 시대엔 왜 인기가 있었는지 잘 알겠다는 뜻도 된다. 승자만 살아남는 냉정함은 자본주의 세상에서보다 문학의 세상에서 더 극단적으로 드러나는지도 모른다. 독자들이 읽는 이전 세대의 작가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여전히, 탑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뛰어났던 작가와 작품을 돌아보는 이 기획은 유의미하고 이런 책을 읽을 기회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지만 21세기 독자로서 큰 기대는 살짝 접는 것이 실망도 적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