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녀를 사랑했네 - 개정판
안나 가발다 지음, 이세욱 옮김 / 북로그컴퍼니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스포일러 주의)



스웨덴에 살 적에 이혼을 대하는 스웨덴인들의 쿨한 태도에 놀라 "너희는 헤어지면 안 아프니?" 이런 무식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러자 고작 스물이 된 솜털 보송한 스웨덴 아이가 하는 말  "물론 힘들지. 하지만 둘이 문제가 생겼을 때 참고 산다는 건 불행한 인생을 지속한다는 말이잖아. 이혼을 통해서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면 헤어지는 게 맞는거야." 지지고 볶고 서로를 괴롭히면서도 절대로 '헤어지지 않는 것'이 결혼이란 제도의 본질이라고 믿었던 나에겐 꽤나 신선한 답변이었다. 


북유럽.서유럽의 합리주의적 사고방식 그리고 이혼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 시킨 뛰어난 복지제도는 헤어짐에 대한 가치 판단 자체를 중립으로 만들어 버린다. 헤어짐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어떤 헤어짐이냐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 배경지식이 없이 한국적 사고방식으로 보자면 이 책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아들이 바람나서 집을 나가 버리고 며느리는 아이 둘 데리고 남겨져 마음이 너덜너덜한데 시아버지가 찾아와서는 하는 말이 '사실 나도 젊은 시절에 바람 좀 피웠단다.'이니 말이다. 이 책은 그 시아버지의 바람 스토리이다. 그가 어떤 사랑(불륜)을 했고 어떤 파국을 맞이했으며 그리고 그 결과 그가 인생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 한국의 상식으로 보자면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상황이지만 이 책은 프랑스 인이 쓴 프랑스 소설이므로, 소설 속 프랑스인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지난 사랑 이야기를 꺼내어 들려주는 것에 대해 사이코패스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개인적 이야기를 들려주는 진솔함에 고마움을 느낀다.  


"나는 조금 괴롭다고 해서 모든 걸 망쳐버리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어. 헤어지는게 괴롭다고 해서 계속 함께 살다가 평생을 망쳐버리는 사람들 말이야... 그래 내 나이쯤 되면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지. 그들이 아직까지 함께 사는게 뭐 그리 대단한 건줄 아니..? 온갖 타협을 거치고 갖가지 갈등을 이겨낸 결과가 고작 그것인 셈이지.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 꿈, 친구 등 모든 것을 땅에 묻었어. 그리고 이제 곧 그들이 묻힐 차례가 될거야. 그들은 일종의 은퇴자야. 모든 것에서 은퇴한 사람들이지. 그들은 자기들 나름의 만족감에 빠져 있어. ‘우리는 꿋꿋하게 잘 버텨왔어‘라고 말하고 싶겠지. 하지만 그렇게 잘 버텨온 대가가 뭐지? 아쉬움, 회한, 상처, 비겁자라는 낙인이야. 그런 것들은 아물지 않아.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스러지지 않아."


시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자신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옹호하기 보다는 하나의 인간으로 측은히 바라보며, 자신의 지난 삶을 돌이켜 봤을 때 아들이 자신의 행복을 찾아 떠나는 것은 아들 본인 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애정이 남지 않은 무의미한 관계를 지속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그런 행복하지 않은 부모 밑에서 자라는 건 자식들에게도 불행한 일이라며. 


이 책에서 중요한 건 누가 옳냐 그르냐가 아니다. 떠나는 이도 남겨진 이도 운명 앞에선 무력한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라는 약간은 철학적인 명제가 이 책을 지배하며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고백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자신이 못나서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남편이 운명을 거부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이 프랑스에서 그렇게나 사랑받은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사랑 앞의 운명'론이 프랑스적 정서와 잘 맞아 떨어졌고 시아버지의 사랑 이야기가 서정적으로 잘 쓰여 있기 때문인것 같다. 읽기 쉬운 단문으로 쓰여져 있는데 그리 특별할 것 없는 담담한 이야기 들인거 같다가도 한 번씩 이건 정말 사랑해본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구나 싶은 대사들이 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는 게 좋아요. 당신이랑 함께 있으면 싫증이 나질 않아요. 서로 아무 말 안 하고 있어도 좋고, 서로 살을 비비고 있지 않아도 좋아요. 한방에 같이 있지 않아도 쓸쓸하지 않아요. 당신이랑 있으면서 한 번도 쓸쓸함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당신을 신뢰하고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당신이 가진 것 중에는 내 눈에 보이는 것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있어요. 나는 그 모든 걸 사랑해요. 물론 나는 당신의 결점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결점이 내 장점과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어요. 당신이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과 내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서로 같지 않아요. 당신의 악마들과 내 악마들이 동시에 들이닥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이런 부분에서 독자들이 감동 하는 것이 아닌지. 이국의 정서를 느껴보고 싶은 독자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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