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소설 - 상
미즈무라 미나에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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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나의 마음은 미래로만 열려 있었다. 좀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넓은 세계와 만나야 한다, 유학생이 넘치는 보스턴 대학가에 가면 인생과 예술과 국가에 대해 검은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도도하게 일본어로 이야기해줄 일본인 청년이 있고, 소설에 나올 법한 사랑이 거기에 있을 것이 틀림없다-이렇게까지 분명하게 생각한 건 아니지만, 옛날 소설을 읽으며 자랐기 때문에 석기시대 같은 꿈을 이상형으로 그리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보통 소녀였기 때문에 남자가 나보다 교양이 풍부하길 원했던 것인지, 어쨌든 내 사랑의 상대가 내가 읽지도 못한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만은 의심할 나위도 없는 대전제였다.

나는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그때 내가 왜 그렇게 집요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알 수 없다. 술에 취해서, 여러 가지 감정이 혼연히 가슴속을 왕래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처녀 시절, 나는 남자의 외관-용모의 미추나 성적 매력 같은 것에 무척 둔감했다. 여자의 외관은 신경도 쓰이고, 나도 아름다워지고 싶다, 매력적이고 싶다, 라고 절실히 바랐지만, 남자라는 것은 그야말로 그 정신밖에는 보지 않았다. 정신이란 높은 지조를 뜻했다. 무엇을 가지고 높은 지조라고 하는지 나 자신도 단언할 수 없었지만, 말하자면 저 멀리 종잡을 수 없이 막연한 무언가를 바라는 크고 늠름한 마음 같은 것이었다.

이문화의 인간이 서로 깊은 유대관계를 맺으려면 물건의 매매가 매개가 되는 것보다 더 적절한 방법이 없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가진 자가 가난한 자에게 의무적으로 베풀어야 하는 기독교 전통은 미국 세법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 기부는 몽땅 면세를 받는다. 미국에서 부자와 기부는 달맞이와 술병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자선사업에 관여하기 시작했다는 말만큼 부자가 되었다는 실감을 주는 표현도 없다. 그것은 개인 제트기를 가지고 있다는 말보다 더 부의 무게를 묵직하게 전해주었다.

눈 앞의 젊은 남자는 이미 그런 일본의 공기에 감싸여 있지 않았다. 일본에서 막 온 일본인은 백화점의 새 포장지로 감싼 것처럼 일본의 공기에 싸여 있는 법인데, 젊은데도 불구하고 지친 인상의 이 남자는 이미 정신이 이국의 어딘가에 침식되기 시작한 듯했다.

어느 날 가루이자와에 갔다 왔다며 땀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아저씨가, 배낭에서 끈으로 묶은 책 다발을 꺼내서 내 앞에 놓았습니다. 역 근처 고서점에서 샀다고 했습니다. 도쿄의 책방에는 이제 책다운 책은 다 사라졌다는데 과연 가루이자와야, 라면서 "피난 온 도쿄 아가씨들의 책이야. 읽고서 `레이디`다워져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비슷하게 아름다운 얼굴 셋이 나란히 있으면 아름다움이 세 배가 아니라 삼십 배로 느껴지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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