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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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작가에게는 문학상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주 많다 라는 것이겠지요. 그 하나는, 자신이 의미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실감이고, 또 하나는 그 의미를 정당하게 평가해주는 독자가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실감입니다. 그 두 가지 확실한 실감만 있다면 작가에게 상이라는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것이니다. 그런 건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혹은 문단적인 형식상의 추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문학상의 심사위원을 맡은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부탁받은 적도 없지는 않지만, 그때마다 "죄송하지만 저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거절해왔습니다. 문학상 심사위원을 밭을 자격이 나에게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유는 간단한데, 나는 너무도 개인적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인간 속에는 나 자신의 고유한 비전이 있고 거기에 형태를 부여해나가는 고유한 프로세스가 있습니다. 그 프로세스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포괄적인 삶의 방식에서부터 개인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글을 쓸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만의 오리지널 문체나 화법을 발견하는 데는 우선 출발점으로서 나에게 무엇을 플러스해간다는 것보다 오히려 나에게서 무언가를 마이너스 해간다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그러면 무엇이 꼭 필요하고 무엇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지, 혹은 전혀 불필요한지를 어떻게 판별해나가면 되는가. 이것도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하자면, 매우 단순한 얘기지만 그것을 하고 있을 때 당신은 즐거운가 라는 것이 한 가지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가를 지망하는 사람이 할 일은 재빠른 결론을 추출하는 게 아니라 재료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축적해나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원재료를 많이 저장해둘 여지를 자기 자신 속에 마련해둘 일입니다.

장편소설을 쓸 경우, 하루에 200자 원고자 20매를 쓰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좀 더 쓰고 싶더라도 20매 정도에서 딱 멈추고, 오늘은 뭔가 좀 잘 안되다 싶어도 어떻든 노력해서 20대까지는 씁니다. 왜냐하면 장기적인 일을 할 때는 규칙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방식으로 소설을 쓰면 됩니다. 우선 딱히 예술가가 아니어도 괜찮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편안해집니다. 소설가란 예술가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때에 나 좋을 대로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자유인의 정의입니다.

요즘에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옛날 작가들 중에는 마감에 쫓기지 않고서는 소설 같은 건 못 쓴다고 호언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문인답다고 할까 스타일로서는 꽤 폼나게 보이지만 그렇게 시간에 쫓겨 급하게 글을 쓰는 방식이 언제까지고 가능한 게 아닙니다. 젊은 시절에는 그걸로 잘 풀렸더라도 또한 어느 기간에 ㄱ런 방식으로 뛰어난 작품을 써냈더라도 긴 스팬을 두고 부감해보면 시간의 경과와 함께 작품이 점점 묘하게 비쩍 마른 듯한 느낌이 듭니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자면 어느 정도 자신의 의지로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입니다. 시간에 컨트롤 당하기만 해서는 안되지요. 그래서는 역시 수동적이 되고 맙니다. 시간과 밀물 썰물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그쪽에서 기다릴 생각이 없다면 그런 사실을 분명하게 받아들이고 이쪽의 스케줄을 적극적으로, 의도적으로 설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실감`을 믿기로 하십니다. 주위에서 뭐라고 하든 그런 건 관계없습니다. 글을 쓰는 자로서도 또한 그걸 읽는 자로서도 `실감`보다 더 기분 좋은 건 어디에도 없습니다.

내가 생각건데 사람은 원래 누군가의 부탁을 받아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강한 개인적 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내적인 힘을 바싹바싹 느꼈기 때문에, 나름대로 고생해가며 열심히 소설을 쓰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날들을 하루 또 하루, 마치 기와 직인이 기와를 쌓아가듯이 참을성 있게 꼼꼼히 쌓아가는 것에 의해 이윽고 어느 시점에 `그래 뭐니 뭐니 해도 나는 작가야`라는 실감을 손에 쥘 수 있습니다. ...미국의 금주 단체 표어에 one day at a time 이라는 게 있는데 그야말로 바로 그것입니다. 리듬이 흐트러지지 않게 다가오는 날들을 하루하루 꾸준히 끌어당겨 자꾸자꾸 뒤로 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묵묵히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서 뭔가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것이 일어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립니다. 당신은 그것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만 합니다. 하루는 어디까지나 하루씩입니다. 한꺼번에 몰아 이틀 사흘씩 해치울 수는 없습니다.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에 따라 사고 능력도 미묘하게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사고의 민첩성, 정신의 유연성도 서서히 상실됩니다. ...많은 작가들이 그런 자연스러운 쇠퇴를 문장 기법의 향상이나 성숙한 의식 같은 것으로 보완하지만 거기에도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뇌 내에서 태어나는 해마 뉴런의 수는 유산소 운동을 통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고 합니다. 유산소 운동이란 수영이나 조깅 같은 장시간에 걸친 적당한 운동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새롭게 태어난 뉴런도 그대로 두면 28시간 뒤에는 별 쓸모도 없이 소멸해버립니다. 정말 아깝지요. 하지만 막 태어난 뉴런에 지적인 자극을 주면 그게 활성화해서 뇌 내의 네트워크와 이어져 신호 전달 커뮤니티의 유기적인 일부가 됩니다. 즉 뇌 내 네트워크가 좀 더 확장되고 촘촘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습과 기억 능력이 높아집니다. 그리고 그 결과, 임기응변으로 사고를 전환하거나 비범한 창조력을 발휘하기가 쉬워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생활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면서 나의 작가로서의 능력이 조금씩 높아지고 창조력은 보다 강고하고 안정적이 되었다는 것을 평소에 항상 느끼고 있습니다. 객관적인 수치를 내보이면서 자 이렇게요 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자연스러운 감촉으로서 실감으로서 그런 게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원래 소설을 쓰는 재능이 다소나마 있었다고 해도 그건 유전이나 금광 같아서 만일 발굴되지 않았다면 깊고 깊은 땅속에 하염없이 잠들어 있었겠지요. `강력하고 풍성한 재능이 있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꽃피는 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느낀 실감으로는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재능이 땅속의 비교적 얕은 곳에 뭍힌 것이라면 그대로 놔둬도 자연스럽게 분출할 가능성이 있겠지요. 그러나 만일 그것이 상당히 깊은 곳에 뭍힌 것이라면 그리 쉽게는 찾아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풍성하고 뛰어난 재능이라고 해도, 만일 마음먹고 좋아 이곳을 파보자 라고 실제로 삽을 들고 파내지 않는다면 땅속에 묻힌 채 영훤히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절절히 그렇게 실감합니다. 모든 일에는 물때라는 게 있고, 그 물때는 한번 상실되면 많은 경우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인생이란 때때로 변덕스럽고 불공평하며 어떤 경우에는 잔혹한 것입니다. 나는 우연히 그 호기를 제대로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지금 돌아보면 그야말로 행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ㄴ

살아간다는 것은 지겨울 만큼 질질 끄는 장기전입니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육체를 잘 유지해나가는 노력 없이, 의지만을 혹은 영혼만을 전향적으로 강고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지극히 일반적인 의미에서 `지금 이곳의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 현재진행형의 나 자신은 웬만해서는 파악하기 어려워요.

또 하나의 요인은 내가 일본인 작가라는 사실을 테크니컬한 의미에서 일단 보류해두고 처음부터 미국인 작가와 똑같은 링에서 뛰어보기로 결심했던 것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직접 번역자를 찾아 개인적으로 번역을 의리하고 그 번역본을 직접 체크하고, 그렇게 영어로 번역한 원고를 에이전트에게 가져가 출판사에 판매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에이전트도 출판사도 나를 미국인 작가와 똑같은 스탠스로 다룰 수 있습니다. 즉 외국어로 소설을 쓰는 외국인 작가가 아니라 미국 작가들과 똑같은 그라운드에 서서 그들과 똑같은 규칙으로 플레이를 하는 것입니다. 우선 그런 시스템을 내 쪽에서 분명하게 설정했습니다.

적극적으로 미국 시장을 개척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은 그때까지 일본 국내에서 이래저래 재미없는 일이 많이서 이대로 국내에서 어물어물해봤자 별 볼일 없겠다고 통감한 것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소설가의 역할은 단 한 가지, 조금이라도 뛰어난 텍스트를 대중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텍스트라는 것은 하나의 총체, 영어로 말하자면 whole 입니다. 말하자면 블랙박스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덩어리의 텍스트로서 기능합니다. 텍스트의 역할은 각각의 독자에게 저작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만약 독자의 손에 건너가기 전에 저자에 의해 풀리고 저작된다면 텍스트로서의 의미나 유효성이 대폭적으로 손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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