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장바구니담기


나는 따분함이야말로 부랑자 최고의 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허기나 불편보다도, 심지어 언제나 남 보기 망신스럽다는 느낌보다도 더한 것이지 싶다. 무지한 사람이라고 해서 온종일 아무 할 일 없이 가두어둔다는 건 어리석고도 잔인한 짓이다. 개를 통 속에 가둬놓고 묶어두는 일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감금을 견딜 수 있는 건, 자기 안에 위안거리가 있는 배운 사람들뿐이다. 거의 대부분이 무학인 부랑자들은 빈곤에 대해서도, 아무 영문도 모르고 의지할 데도 없이 당할 뿐이다. 그런 그들이니 10시간 동안 불편한 의자에 꼼짝없이 앉혀놓으면 뭘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할지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생각나는 게 있다 한들 불행을 푸념하거나 일자리를 갈망하는 것밖에 없다. 그들에겐 무위의 끔찍스러움을 견딜 자산이 없는 것이다. -15쪽

열대의 풍경에선 이상하게 사람만 빼놓고 모든 게 눈에 잘 들어온다. 말라붙은 땅도, 석류도, 야자수도, 먼 산도 눈에 잘 뜨인다. 그러나 밭에서 괭이질 하고 있는 농부만은 꼭 놓치게 된다. 그것은 그의 피부색이 흙색과 같으며, 그래서 보는 재미가 훨씬 덜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굶주리는 나라들이 관광휴양지가 되어가는 건 바로 그래서다. 아무리 싸도 불황이 횡행하는 곳에 놀러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 피부가 갈색인 곳에서는 빈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프랑스인에게 모로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렌지나무 숲이나 식민기구의 일자리다. 영국인에겐? 낙타, 성곽, 야자수, 프랑스 외인부대, 놋쇄 쟁반, 도적떼다. 그러니 여기서 몇 년을 살아도 인구의 9할은 다 침식된 토양에서 얼마 안 되는 먹을거리를 짜내느라 늘 허리가 부러지도록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게 현실이란 걸 전혀 모를 수도 있는 것이다. -72쪽

1914~1918년은 무의미한 대학살로 무시될 뿐이었고, 그때 목숨을 잃은 사람들조차도 어떤 식으로든 책임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나는 "아빠는 전쟁 때 뭘 했어요?"라고 묻는 모병 포스트를 생각하면(아이의 질문에 아빠는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모른다) 그리고 그 바로 그 포스터에 꾀여 입대했다가 나중에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아니었다며 자식들한테 무시당하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헛웃음이 나온다. -80쪽

영국에선 정의니 자유니 객관적 진실이니 하는 개념들을 자기도 믿고 있다. 그것들은 허상일지 모르나 대단히 강력한 힘을 지닌 허상이다. 그런 것들에 대한 믿음이 행동에 영향을 끼치며, 그 때문에 국민 생활이 달라지는 것이다. -98쪽

영국 좌파 지식인들의 정서는 몇 개의 주간지와 월간지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이들 신문을 보면 당장 두드러지는 것은 대체로 부정적이고 불만 가득한 태도와, 언제나 건설적인 제안이라곤 없다는 사실이다. 권력을 잡아본 적도 없고 그걸 바라지도 않는 사람들의 무책임한 트집 잡기 말고는 볼거리가 별로 없는 것이다. -116쪽

세계를 실제로 형성해가는 에너지는, 민족적 자존심, 지도자에 댇한 숭배, 종교적 신앙심, 전쟁에 대한 사랑과 같은 감정에서 솟아나는 법이다. 그런데 진보적 지식인들은 그런 감정들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기고 무시해버린다. 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도 그것들을 너무 철저히 파괴한 나머지 행동할 힘을 다 잃어버린 것이다. -126쪽

안전하고 문명화된 생활의 결과 중 하나는 원초적이고 중요한 감정들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지나친 민감함이다. 그래서 아량이 비열함처럼 불쾌하게 느껴지고, 감사가 배운망덕처럼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게 가능한 것이다. -143쪽

지식인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가장 크게 내는 사람들이지만, 상황이 절박해지면 상당수가 좌절하여 패배주의에 빠진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승산이 없다는 걸 알 만큼 멀리 내다볼 줄 알며, 매수당하기도 쉽다. (그래서인지 나치는 지식인들을 매수하는 데 상당한 가치를 둔다) 하지만 노동계급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을 농락하는 수법을 간파하지 못할 정도로 무지하여 파시즘의 헛된 약속을 쉽사리 받아들이지만, 언제나 머지않아 투쟁을 재개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들은 파시즘의 약속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언제나 자기 몸으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을 영영 자기편으로 만들자면 파시스트들은 전반적인 생활수준을 높여야만 할 텐데, 그럴 수도 없거니와 아마 그럴 마음도 없을 것이다. 노동계급의 투쟁은 식물의 생장과도 같다. 식물은 맹목적이고 어리석을지라도 빛을 향해 계속해서 위로 뻗어나가는 것만큼은 알며, 끝없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밀고 나간다. 그러면 노동자들은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가? 그야말로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며, 이제 그들은 그런 삶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152쪽

그런 목표에 대한 의식은 조수처럼 빠져나가기도 하고 밀려들기도 한다. -152쪽

행운을 빈다네, 이탈리아 병사여!
하지만 행운은 용감한 자의 것이 아니니,
세상이 그대에게 무얼 갚겠는가?
그대가 준 것보단 언제나 적으리. -161쪽

민주주의와 민족자결의 위대한 시대는 머스킷총과 소총의 시대였다. 부싯돌총이 발명된 뒤부터 뇌관이 발명되기 전까지, 머스킷총은 꽤 효과적인 무기였고 동시에 아주 단순해서 거의 어디서나 만들어낼 수가 있었다. 머스킷총의 장점 덕분에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의 성공이 가능했고, 민중의 봉기가 지금 시대보다 훨씬 심각한 사건이 되었다.
...
그러나 그뒤로는 모든 군사기술의 발전이 국가에게 유리하고 개인에겐 불리하게, 또 산업화된 나라엔 유리하고 후진국엔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럴수록 세력의 중심 국가도 그 수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9년에 이미 대대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나라는 다섯밖에 되지 않았고, 지금은 셋뿐이다. (아마 결국엔 둘만 남게 될 것이다) -211쪽

글의 주제는 그가 사는 시대에 따라 결정되겠지만(적어도 우리 시대처럼 격동적이고 혁명적인 시대에는 그렇다) 그는 작가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미 나름의 정서적 태도를 갖게 되며, 그것은 그가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무엇이다. 물론 그는 마땅히 자신의 기질을 다스려야 하고, 미성숙한 단계에 고착되거나 비뚤어진 심기에 매몰되는 경우를 피해야 한다. 하지만 일찍이 받은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버린다면, 글을 쓰고자 하는 충동 자체가 없어져버릴 것이다. -292쪽

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많고 이기적이고 게으르며, 글 쓰는 동기의 맨 밑바닥은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책을 쓴다는 건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이다. 거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귀신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한 절대 할 수 없는 작업이다. 아마 그 귀신은 아기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마구 울어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본능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기만의 개별성을 지우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지 않는다면 읽을 만한 글을 절대 쓸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ㅏ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대는 어김없이 '정치적'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30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