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소파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깬 적이 있었다. 눈을 떠보니 미연이 일을 끝내고 돌아왔는지 슬립 차림으로 거실 구석에 있는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지우고 있었다. 군살이 좀 붙긴 했지만 슬립 위로 드러난 미연의 몸매는 아직 탄력이 있어 보였다. 그녀는 화장을 다 지운 뒤에도 한동안 거울을 들여다보며 일어설 생각을 안 했다. 어딘가 처연한 표정이었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얼굴에서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른 식구들은 모두 방에 들어가 잠들었는지 집 안이 고요했다. 나는 일어난 기척을 할까 했지만 왠지 미연의 비밀스런 순간을 엿본 것 같아 그냥 자는 체하고 있었다. 그녀는 삼십 분도 넘게 목석처럼 앉아 자신의 얼굴을 뚤어지게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미연은 도대체 자신의 얼굴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이미 지나가버린 젊음의 흔적? 아니면 유난히 신산스러웠던 인생의 뒤안길? 또는 안개처럼 불투명하고 생각할수록 두렵기만 한 미래의 자화상?-103쪽
나는 여자의 그런 뒷모습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기시감이 들었다. 그것은 미연이 아니라 중년 무렵의 엄마였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이었을까? 엄마는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지우다 말고 지금의 미연처럼 오랫동안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엄마가 입고 있던 낡은 슬립은 여기저기 기운 자국이 남아 있어 그저 가난하고 각박하게 살아온 세월의 두께만이 무겁게 얹혀 있을 뿐 여자의 속옷이 주는 특유의 성적 긴장이나 평온한 휴식 같은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그때 나는 엄마의 쓸쓸한 뒷모습을 훔쳐보며 희미하게나마 엄마의 부서진 희망 같은걸 감지했다. 그런데 훌쩍 시간을 건너뛰어 또다시 여동생의 뒷모습에서 여자의 무겁고 숙연한 운명을 들여다보고 있다니, 여자의 인생은 그렇게 대를 이어 반복되는 것인가?-104쪽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주노라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왔노라-147쪽
자존심이 없는 사람은 위험하다. 자존심이 없으면 자신의 이익에 따라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다. 그것은 그가 마음속에 비수 같은 분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존심을 건드리면 안 되는 법이다.-222쪽
하지만 캐서린은 곧 냉정을 되찾고 능숙한 솜씨로 내 상처를 돌봤다. 낯선 나라에 가서 가족들을 힘겹게 건사하며 쌓은 내공이 느껴졌다. 그녀는 이민 초창기에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가 없어 가족들이 아파도 웬만한 응급처치는 자신이 직접 했다고 했다. 오랜 외국생활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얼굴엔 '플리이즈'라고 쓰여 있었다.-262쪽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헤밍웨이처럼 자살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고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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