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장바구니담기


가오리 씨, 결혼 축하드립니다. 나도 한 번밖에 결혼한 적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별로 좋지 않을 때는 나는 늘 뭔가 딴생각을 떠올리려 합니다. 그렇지만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좋을 때가 많기를 기원합니다. 행복하세요.-86쪽

혹시 여기에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늘 그 알의 편에 서겠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자 하나의 알이라고. 더없이 소중한 하나의 영혼과 그것을 감싸는 깨지기 쉬운 껍질을 가진 알이라고. 나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저마다 높고 단단한 벽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 벽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시스템'입니다.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를 요약하자면 단 한 가지 입니다. 개인이 지닌 영혼의 존엄을 부각시키고 거기에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우리 영혼이 시스템에 얽매여 멸시당하지 않도록 늘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자,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역할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쓰고, 사랑의 이야기를 쓰고, 사람을 울리고 두려움에 떨게 하고 웃게 만들어 개개인의 영혼이 더할나위 없는 소중함을 명확히 밝혀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진지하게 허구를 만들어나갑니다.-91쪽

오디오 잡지에서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젊을 때는 기기보다는 우선 음악에관해 열심히 생각해보는 편이 좋다고 봅니다. 훌륭한 오디오 장치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고 나서 갖춰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젊을 때는 음악도 그리고 책도 마찬가지지만, 조건이 조금 나쁘더라도 저절로 마음속 깊이 파고들게 마련이잖아요. 얼마든지 마음속에 음악을 쌓아갈 수 있어요. 그리고 그런 저축은 나이를 먹은 후에 큰 가치를 발휘하게 됩니다. 그런 기억이나 체험의 컬렉션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만의 것이죠. 그래서 그 무엇보다 귀중합니다. 그러나 기계는 돈만 있으면 비교적 간단히 갖출수 있으니까요.-102쪽

나이를 먹어서 좋을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지만, 젊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인다거나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건 기쁜 일입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전보다 전체상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혹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면서 지금까지 알아채지 못했던 디테일에 불현듯 눈뜨게 됩니다. 그게 나이를 먹어가는 기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경험은 인생에서 하나를 얻은 것 같은 흐뭇함에 젖어들게 합니다. 물론 반대로 젊을 때만 이해할 수 잇는 음악이나 문학도 있지만요.-114쪽

나에게 음악이 가진 최대의 훌륭함은 무엇일까? 그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차이를 확실히 구분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큰 차이도 알고 중간 정도 차이도 알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미묘한 작은 차이도 식별할 수 있죠. 물론 그것은 나한테 좋은 것, 나한테 나쁜 것이라는 뜻이니 그저 개인적인 기준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 차이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인생의 질이라고 할 만한 것까지 크게 달라지게 만드니까요. 끊임없는 가치 판단의 축적이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갑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그림일 수도 있고 와인일 수도 있고 요리일 수도 있지만 내 경우는 음악입니다. 그런 만큼 정말로 좋은 음악을 만났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듭니다.-115쪽

결국 대부분은 스쳐지나간 과거가 되어버렸다. 그 시대에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고 몸속을 꿰뚫을 것만 같던 것들이 십 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보면, 교묘하고 번드르르하게 꾸며진 약속 같은 것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된다.-117쪽

나는 바다 바로 옆에 살았지만 안타깝게도 세토 내해에는 서핑을 하 ㄹ만한 멋진 파도가 일지 않았다. 파도다운 파도가 치는 것은 태풍이 올 때뿐이었다. 그러니 서핑 같은 건 할 수도 없을뿐더러 서핑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다. 재킷 사진을 보고 대충 이런 거로구나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난생처음 진짜 서핑을 본 것은 그로부터 이십 년이 지난 1983년, 서른 네 살 때였다. 나는 겨울의 마카하 해변에서 믿기지 않을 정도의 높은 파도를 타는 사람들을 보고 '그랬구나, 저게 바로 서핑이구나'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쨌든 '서핑'이라는 말의 울림은 열네 살인 나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이국적이고 매력적이었다. 그것은 낮선 사람들이 손이 닿지 않는 머나먼 곳에서 즐기는 멋진 미지의 스포츠였다. 모두가 즐겁게 그런 것을 즐기는 곳이 세상 어디엔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당시 우리에게 캘리포니아란 그야말로 달과 다름없는 곳이었다.-181쪽

...그렇지만 내가 그에 못지않게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그 음악의 훌륭함에 우리 자신의 마음이나 육체의 소중한 일부를 위탁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190쪽

솔직히 나는 사회가 열악해지고 있다고 쉽게 단언하지 못하겠다. 사회는 딱히 좋아지지도,그렇다고 나빠지지도 않고, 그저 나날이 다양한 형태의 혼란에 빠질 뿐이지 않을까, 라는 것이 나의 기본적인 관점이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사회란 애당초 열악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악해도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압도적 다수는-그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나갈 수밖에 없다. 가능하면 성실하고 정직하게. 중요한 진실은 오히려 그것이다. -247쪽

나이를 잘 먹는 것은 어려운 일 같습니다. 나 역시 나이를 처음 먹어보니 잘될지 어떨지 솔직히 자신은 없습니다. -414쪽

내가 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느 정도 간단히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다들, 살면서 어떤 하나의 소중한 것을 찾아헤매지만 그것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혹시 운 좋게 찾았다 해도 실제로 찾아낸 것의 대부분은 치명적으로 손상되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그것을 찾고 추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가는 의미 자체가 사라져버리므로'라고 정리됩니다.-444쪽

온기를 자아내는 소설을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이십대 초에 갓 결혼했을 무렵, 너무 돈이 없어서 난로 한 대도 살수가 없었다. 그해 겨울은 도쿄 근교의 외풍이 파고드는 몹시 추운 단독에서 살고 있었다. 아침이면 부엌의 얼음이 땡땡 얼어붙었다. 우리는 고양이 두 마리를 키웠는데, 잘 때는 사람과 고양이가 서로를 꼭 끌어안고 온기를 나눴다. 당시에는 어찌 된 영문인지 우리집이 근처 고양이들의 커뮤니티센터 같은 장소가 되어 늘 불특정 다수의 고양이 손님이 우글거렸다. 그래서 그런 녀석들까지 끌어안고 사람 두 명과 고양이 네다섯 마리가 뒤영켜 잠드는 일도 있었다. 살아가기에는 고달픈 나날들이었지만, 그때 인간과 고양이들이 애서 자아내던 독특한 온기는 지금도 종종 생각난다.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캄캄하고 밖에서는 초겨울 찬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치는 밤에 다 함께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소설.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까지가 동물인지 알 수 없는 소설. 어디까지가 제 온기고 어디부터가 다른 누군가의 온기인지 구별하 ㄹ수 없는 소설. 어디까지가 자기의 꿈이고 어디부터가 다른 누군가의 꿈인지 경계를 잃어버리-456쪽

게 되는 소설. 그런 소설이 나에게는 '좋은 소설'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밖의 기준은 내게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45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