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7년 5월
구판절판


집은 물리적일 뿐 아니라 심리적인 성소가 되었다.집은 정체성의 수호자였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소유자들은 밖으로 떠돌던 시절을 끝내고 돌아와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했다.-11쪽

스토아학파 철학자나 제네바 호숫가의 성 베르나두스의 태도를 본 따, 궁극적으로 건물이 어떤 모양인지, 천장에 무엇이 있는지, 벽을 어떻게 처리하든지 별 상관이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그러나 이렇게 거리를 두는 자세는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움이 부재하는 곳에 우리 자신을 완전히 열었을때 마주하게 될 슬픔을 빗겨가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다. -14쪽

우리가 감탄하는 건물은 결국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가 귀중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상찬한다. 즉 이런 건물은 재료를 통해서든,형태를 통해서든, 색채를통해서든, 우정, 친절, 섬세, 힘, 지성 등과 같은 누구나 인정하는 긍정적인 특질들과 관련을 맺는다.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좋은 삶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서로 얽혀 있다. 우리는 침실에서 평화를 연상하려 하고, 의자에서 관대와 조화의 비유를 찾고, 수도꼭지에서 정직하고 솔직한 분위기를 구한다. 우리는 우아하게 천장과 만나는 기둥, 지혜를 암시하는 낡은 돌계단, 부채꼴 채광창으로 장난스러움과 예의바름을 동시에 보여주는 조지 왕조 시대의 문간에서 감동을 받는다.

시각적 취향과 우리의 가치 사이의 친밀한 제휴를 가장 투명하게 표현한 사람은 스탕달이었다.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다."-104쪽

스탕달은 인류가 윤리적인 취향만이 아니라 시각적 취향을 놓고도 늘 갈등을 일으킨다는 점을 이해했기 때문에 이렇게 덧붙였다.
"행복을 바라보는 관점만큼이나 아름다움의 스타일도 다양하다."-108쪽

우리가 환경에 민감한 이유는 인간 심리의 곤혹스러운 특징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우리가 우리 내부에 수많은 자아를 품은 방식 말이다. 그 모든 자아가 똑같이 '나'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불협화음 때문에 어떤 분위기에 들어가면 스스로 나의 진정한 자아라고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졌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그런 순간에 그리워하는 자아, 즉 우리 인격 가운데 진정하고, 창의적이고, 자발적인 면은 손에 잘 잡히지 않아 마음대로 불러낼 수가 없다. 우리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우리가 우연히 머물게 된 장소에 따라, 벽돌의 색깔, 천장의 높이, 거리의 배치에 따라 그런 자아에 접근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도로 세 개에 의헤 목이 졸리는 호텔방에서, 또는 황폐한 고층빌딩으로 이루어진 황무지 같은 곳에서는 낙관주의와 목적의식이 구멍 난 그릇의 물처럼 새어나가기 십상이다. 심지어 우링게 야망이 있었다는 것, 활기차게 희망을 품어볼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환경이 우리가 존중하는 분위기와 관념을 구현하고,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워주기를 은근히 기대한다.-110쪽

건물이 일종의 심리적 틀처럼 우리를 지탱하여, 우링게 도움이 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유지해 주기를 기대한다. 우리 내부에 필요한 것-그러나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를 잊을 위험이 있는 것-을 표현해주는 물질적 형태들을 주위에 배치한다. 벽지, 벤치, 그림, 거리가 우리의 진정한 자아의 실종을 막아주기를 기대한다.-111쪽

매일 하루를 마감하고 스톡홀름 북부 레에 있는 그런 집으로 퇴근할 수도 있다고 상상해 보라. 직장에서 보내는 하루는 정신없고 지저분할 수도 있다. 회의가 빽빽하게 잡혀 있고, 예의상 악수를 해야 하고, 잡담을 나누고, 관료제에 시달려야 한다.동료를 이기려고 믿지도 않는 이야기를 하고, 따지고 보면 마음에 들지도 않는 목표 때문에 질투심을 느끼거나 흥분할 수도 있다.

그러다 마침내 집에 돌아와 혼자 있게 되어 복도 창 밖정원 위로 어둠이 깔리는 것을 보면, 서서히 더 진정한 나, 낮 동안 옆으로 늘어진 막 뒤에서 공연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나와 다시 접촉을 하게 된다.
...신을 섬기지 않더라도가정적인 건축 하나가 사원이나 교회와 다를 바 없이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기억하는 일을 도울 수 있다.-125쪽

우리는 우리의 일그러진 본성을 바로잡아주고, 우리를 지배하는 일 때문에 희생해버린 감정들을 되살려주는 능력 때문에 어떤 건물들을 귀중하게 여긴다. 경쟁심, 질투심, 호전성, 이런 것들은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찾아온다. 그러나 광대하고 숭고한 우주 한가운데서 느끼는 겸허, 저녁이 시작될 무렵의 고요를 향한 욕망, 엄숙과 친절에 다가가고 싶은 갈망, 이런 감정들은 우리의 내적 풍경의 한 자리를 지속적으로 차지하기가 힘들다. 안타깝게도 그런 부분들이 우리 안에 없기 때문에 그런 감정들을 집과 연결시키려 하는지도 모른다.-127쪽

집이라는 개념과 예쁘다는 개념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인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더 넓은 세상이 무시하는, 또는 우리의 산만하고 우유부단한 자아가 잘 붙들지 못하는 중요한 진실들을 더 일관되게 우리에게 제공할수 있는 곳일 뿐이다. 우리는 글을 쓰듯이 집을 짓는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기록해 두는 것이다.-127쪽

브라질리아에도 결국 여느 도시와 다를바 없이 거지와 빈민가, 널찍한 도로 위의 타버린 풀과 성당 벽의 갈라진 틈이 생겨나게 되었지만, 건축에서 이상화의 옹호자들은 그 정도로 단념하지는 않았다. 베로네세의 천장 밑에서 목격되는 배신과 무능 애시니엄 클럽 안의 어리석음, 핀란드의 알코올중독과 절망, DZ 은행 사무실 내의 구제불능의 권태에 기가 죽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149쪽

예술의 이상화 이론의 영향 하에서 만들어진 건축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의 선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수준 높은 예술은 이념에서 자유로우며, 순수하게 그 자체로 감탄을 자아낸다고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전'이라는 말은 어떤 학설이나 믿음의 장려를 가리키는 말이며, 그 자체로는 아무런 부정적 함의가 없다. 그런 장력의 대상이 주로 밉살스러운 정치적 상업적 의제였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인데, 그것은 그 말 자체의 결함이라기 보다는 역사의 우연이다. 예술 작품은 그 자원을 이용해 우리를 뭔가로 이끌 때, 그래서 우리가 어떤 목적이나 관념에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도록 우리의 감수성이나 마음 자세를 고양시키려고 할 때 하나의 선전이 된다. 이런 정의를 따른다면 예술작품 가운데 선전으로 꼽지 못할 것이 거의 없다.-152쪽

...우리가 아름다운 것들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우리 인생이 여러가지 문제들로 가장 심각할 때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낙담한 순간들은 건축과 예술로 통하는 입구를 활짝 열어준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것을 사고 싶다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지만, 우리의 진정한 욕망은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기보다는 그것이 구현하는 내적인 특질을 영원히 차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것을 구매하는 것은 사실 그것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갈망을 처리하는 가장 무미건조한 방식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과 자려고 하는 것이 사랑의 감정에 대한 가장 무딘 반응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158쪽

천장을 받치는 기둥을 어떻게 놓느냐에 따라 우아함과 그 반대의 길이 결정적으로 갈리곤 한다. ...기둥은 우리 자신이 우리의 짐을 감당하는 방식을 비유로 보여주는 것 가같다.-223쪽

"우리는 교외를 없애야 한다." 르 코르뷔지에는 그렇게 말했다. 그가 이런 식으로 거부감을 보인 것은 교외 거주자들이 말뚝 울탈와 빌라들의 미학만큼이나 그들의 편협한 정신적 전망을 증오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도시에서는 도시가 주는 즐거움을 모두가 누릴 수 있을 터였다. 헥타르당 1천 명의 인구밀구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편안한 집에서 살 수 있을 터였다. 심지어 수위도 자기 서재를 가질 수 있다. -260쪽

우리는 슬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상황에서 화를 낸다. 적당한 위생 시설과 가로등을 도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래된 거리를 그냥 부수어 버린다. 우리는 만족의 근원을 이해하려고 헛된 노력을 하다가, 슬픔으로부터 그릇된 교훈을 배운다.-267쪽

우리의 감각을 통해 받아들인 많은 것들 가운데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어떻게 가치를 할당할지 판단하는 데 도움을 주는 힘을 우리는 '교양'이라고 부른다.-279쪽

1900년 일본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는 영국으로 여행을 와서 자신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에 영국 사람들이 전혀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약간 놀랐다. "한 번은 눈 구경을 하자고 어떤 사람을 초대했다가 비웃음을 샀다. 또 한 번은 일본인의 감정이 달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고 이야기 했는데, 듣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나는 스코틀랜드에 초대를 받아 궁궐같은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어느 날 주인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다가 줄지어선 나무들 사이의 작은 길에 이끼가 두텁게 덮인 것을 보았다. 나는 칭찬을 하면서, 그 길들이 멋지게 나이를 먹은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하였다. 그러자 주인은 곧 정원사에게 이끼를 모두 긁어 내게 할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280쪽

우리는 책, 시, 그림 덕분에 인정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살았던 우리안의 감정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곤 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런 현상을 휘슬러가 템스 강을 그리기 전에는 런던에 안개가 없었다는 말로 재치있게 표현했다. -282쪽

르 코르뷔지에는 심술궂게 한 마디 했다.
"우리는 도시의 운명이 시청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한다."-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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