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여행자 도쿄 김영하 여행자 2
김영하 지음 / 아트북스 / 2008년 7월
절판


휴대폰은 주변을 시끄럽게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덕분에 남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공짜로 엿들을 수 있는 즐거움을 준다. 이건 여담이지만 나는 휴대폰이 도시 미관에 기여한 공로가 있다고 생각한다. 휴대폰이 나오기 전까지는 거리에서 활짝 웃는 사람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히죽거리며 거리를 걷고 있다. 지하철에서 내 앞에 앉아 있던 새침한 여학생이 벨이 울리자 만면 가득 미소를 지으며 통화를 시작한다. 나는 그럴 때 휴대폰에 감사한다. -183쪽

도쿄의 젊은이들은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하다. 타인보다 자기 자신을 더 잘 견딜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과연 그럴까?)-218쪽

인간의 뇌는 실제의 보상보다 보상에 대한 기대에 더 달아오르도록 진화했다고 한다. 보상을 기대할 때, 뇌의 흥분은 최고에 달하지만 막상 그 보상이 제시되면 뇌의 흥분은 가라앉아버리는 것이다. -240쪽

거품이 맥주 그 자체를 대신하는 것, 꽃꽃이가 꽃 그 자체를 대신하는 것, 수집벽이 그 물건의 가치를 초과하는 것, 그런 일종의 전도야말로 일본 문화의 특징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장인이라는 존재가 필요해진다. 불필요할 정도로 과도한 숙련, 무가치한 초과, 장인은 그 모든 것의 '거품' 속에서 위태롭게 존재하는 눈부신 잉여이다.-241쪽

현대의 어떤 행위들은 그것의 궁극적 물질성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유사한 곤란에 처해 있다. 웹아트를 하는 미술가가 자신이 실은 미켈란젤로나 로댕과 같은 예술가임을 입증해야 하는 문제, 휴대폰 소설을 쓰는 작가가 하이쿠 시인 바쇼와 자신이 같은 존재임을 증명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는 것이다.-256쪽

처음에는 여행자가 여행안내서를 선택한다. 그러나 한 번 선택하면, 그 한 권의 여행안내서가 여행자의 운명을 결정한다.

...저자들은 자신이 경험한 아주 일부만을 우리에게 전한다. 거기에는 저자 자신의 한계와 지면의 한계, 편집자의 한계 같은 것이 작용할 것이다. 나는 1995년에 영어판 론리 플래닛을 들고 유럽에 갔다가 보름 동안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 같은 영어권 국가에서 온 배낭여행자들과 같은 숙소에서 지내야 햇고 사랑하는 모국어를 거의 쓰지 못했다. 영어판을 들고 갔기 때문에 나는 론리 플래닛이 소개한 숙소와 식당에만 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일본어판을 번역한 세계를 간다 시리즈를 들고 가면 사방에서 일본어가 들려온다.
...분명한 것은 이 여행안내서 역시 여행자와 도시를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도시를 여행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여행안내서 안을 열심히 돌아다니다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262쪽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 10년. 서울의 가장 큰 변화는 상점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상점은 한 개인이 자신의 경력과 취향, 판단력에 의존해 운영해가는 가게를 말한다. 이런 의미의 상점은 급속하게 사라져가고있다. 과일가게나 야채가게는 대형마트의 매장으로 흡수돼버렸다. 옷가게는 인터넷 쇼핑몰이나 아울렛 매장의 한 귀퉁이로 들어가버렸다. 개인의 취향을 고집하는 가게들은 몰락하고 대기업의 체인점, 브랜드 매장만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용산전자상가에 몰려 있는 전자제품 가게들은 이름만 가리면 모두가 똑같고 백화점들도 대동소이하다. 길을 걷다 잠깐 들어가 책장을 들출 수 있는 서점들도 거의 모습을 감췄다. 서울에서의 쇼핑은 그래서 점점 재미가 없어져간다. 책이나 전자제품은 온라인 쇼핑몰에서 사고 옷은 백화점에서, 야채와 과일은 대형 마트에서 산다. 취향과 고집을 가진 주인과 물건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 그가 권하는 물건을 믿고 가져올 수 있는 상점들은 이제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서울의 상점가는 거대한 브랜드의 전시장 혹은 대기업의 대리점들로 변해가고 있다. -279쪽

...서울에서는 김밥집을 차려도 이름이 난 체인의 일개 점포가 되고자 하고 옷가게를 차려도 텔레비전에서 광고를 하는 브랜드의 매장이 되고자 한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에서 개인들은 대기업이나 이름난 브랜드의 신뢰를 빌려야만 한다. 동네 야채가게에서는 중국산을 국산으로 속일지도몰ㄴ다고 생각한다.그러나 대형마트의 식품 매장은 그럴리ㅣ가없다고 생각한다.동네의 옷가게는 반품을 받아주지 않지만백화점이나 케이블 홈쇼핑은 받아줄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ㅡ것은 많은 경우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대기업이나 체인점 본부에 일정 수익을 갖다 바치면서 장사를 해야 한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비용을 신뢰비용이라고 한다. 대기업이나 체인점 본부는 신뢰를 보증하는 대가로 지점이나 대리점으로부터 가만히 앉아 돈을 받는다.-280쪽

신뢰의 비용이 적은 곳이기 때문에 창업하는 사람의 몸도 가벼울 수바껭 없다. 도쿄의 젊은이들은 참 간단하게도 가게를 차리는 것 같다. 어떤 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취향으로 가꿔가다가 어느 경지에 이르면 그것을 남과 나눠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취향을 남과 공유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상점을 여는 것이다.
...됴코의 젊은이들을 관찰해보면 창업에 이르는 생각의 경로가 우리와는 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먹고살려면 뭘 하는 게 좋을까?'라고 생각하는 게 우리라면, '내가 좋아하는 걸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고 생각하는 게 도쿄의 젊은이들 같다.
...전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취향과 고집을 가진 인간들이 친절하기까지를 기대하는 것은 본래 무리한 일이다. 오직 도쿄만이 그 예외이다. -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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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8 00: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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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8 20: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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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4 00: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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