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구판절판


대학생이 되자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얼굴을 마주하고 밥을 먹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아버지는 사회악의 화신이었고 부패한 독재정권 그 자체였다. 그녀는 바이런과 워즈워스는 던져버리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정신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결별했다. 그 시절엔 그런 자식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모두들 대수럽지 않게 여겼다. 어쩌면 조금 부러워하는 친구도 있었을 것이다. 태생부터 가난했던 학생들이 누릴 수 없는 정신적 사치가 거기 있었다.부유하고 부도덕한 부모를 버리는 사치. 그들이 부모인 한 언젠가는 그 부와 권력을 제 자식을 위해 쓸 것임을 가난한 집의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57쪽

"미국 서부영화를 보면 순 그 얘기잖아. 누군가 자기 집과 농장을 빼앗으면 죽을 때까지 저항하고, 그래도 안 되면 복수를 하잖아. 우리에겐 왜 복수의 문화가 없을까? 그렇게 심한 일들을 당하면서 왜 복수하는 얘기는 발달하지 않았을까? 우리 소설 중에 복수를 다룬 소설, 형은 본 적 있어?"
"없는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용서는 많이들 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내 생각에는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해서 서양 사람들처럼 깊은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옳고 그름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니까 복수도 맥이 빠지는 거야. 알고 보면 걔들도 다 불쌍한 놈들이다, 이런 식으로 끝내잖아"-245쪽

"소지, 넌 작가잖아"
"응 그런데?"
그녀가 대답했다.
"혹시 작가로서, 그 어떤 일이 인생에 일어나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설마 이런 생각 하는 거야?"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 지난 몇 년간 너무 평탄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거든.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에, 앙드레 말로는 마오의 대장정에 참여했잖아. 그런데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이제 혁명의 가능성은 사라졌고 어디에도 위험은 없어. 오직 불륜밖에는. 그러나 그 흔하디흔한 모험에는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283쪽

그녀가 눈을 빛냈다. 대학 시절의 그녀를 보는 것 같았다. 기영은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은 슬픈데,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어린 모습을 간직한 채로 늙어가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늙어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년은 늙어 소년이 되고 소녀도 늙어 늙은 소녀가 된다.-2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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