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 - 분노와 콤플렉스를 리더십으로 승화시킨 정조
김용관 지음 / 오늘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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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3년 상이 끝나는 1778년 6월 4일 포고문을 발표했는데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내용은 혁명적인 것들이 포함돼 있었다. "과인이 집권한 것이 이제 3년, 깊은 못의 얼음을 밟듯 하고 있다. 선왕의 부묘도 끝나 곤룡포를 다시 입고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겠다. 무릇 '서경'에 보면 '사람들이 부유하면 바야흐로 착해진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우선 중국의 고사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정전'만큼 유효한 토지제도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전 이란 중국의 하.은.주 시대 실시된 토지제도, '정'(井)자 모양으로 9등분해, 주위를 여덟 집이 나눠 농사를 짓고 가운데는 공전으로 국가에 세금으로 바치게 하는 제도다.
정조가 말한 토지제도 정전법은 중국의 삼대시절 채택한 것이지만 원시공산사회를 의미한다. 당연히 여러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달리 산도 많고 논과 밭이 절반씩이며 오히려 세금이 중복 징수되는 것이 문제이며 정밀하게 토지를 조사해서 세금을 합리적으로 보과하는 것이 먼저 시급하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정조의 주장은 혁신적이지만 맹자 사상의 핵심이며 성리학자들이 항상 따르고자 한 주나라 제도였다. 그러나 이미 그-109쪽

제도를 시행하기에 조선이란 나라는 문벌가문의 독점 경제가 너무 퍼져있었다. 조선 사대부들이 말하는 유교의 이상사회는 막연한 꿈이며 책에서나 만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정조가 국정운영 방향을 발표하며 정전법을 도입하겠다고 하니 노론이나 기득권층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정조는 개혁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천하의 일은 크게 변혁하면 크게 유익하고 작게 변혁하면 작게 유익한 것이다. <역경>에는 이른바 '개혁하면 통해지게 되고 통해지면 오래간다'라고 한 말도 있다" (즉위년 1776년 5월 28일)-110쪽

정조의 개혁은 거창하고 요란한 것이 아니라 작지만 실천 가능한 것부터 시작했다. 집권한 뒤 1777년 3월 22일, "조선은앞으로 서얼들도 정치 참여의 길을 트겠다. 공자를 섬기는 나라로 서얼이란 이유로 차별하는 나라는 조선뿐이다"라고 서얼과의 소통을 강조했다. 그리고 1784년 4월 16일, 성균관 유생들과 식사를 함께하다 서얼들을 따로 한 줄로 서게 하고 식사를 맨 나중에 하게 하자, 성균관 대사성을 그날 파직시키고 다시는 그렇게 서얼들을 차별하지 말 것을 엄명했다. 성균관에 대한 개혁은 문제를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한 가지는 서울 경기 기역 중심의 문벌가 위주의 교육과 관료 독점을 해소하기 위해 규장각 각신들을 각 지방에 보내 그곳 유생들을 대상으로 직접 시험을 치러 성균관에 입학시키는 제도를 실시했다. 이것은 교육 혜택이 지역 차별 없이 골고루 돌아가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120쪽

"땅은 농사를 짓는 농민들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소수의 특권 부자들이 땅을 다 소유하고 그 땅에 과다한 세금을 물리고 있으니 백성들이 살길은 막막합니다. 이런 암담한 현실에 하늘이 전하와 같은 성인을 내려 개혁을 이루라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윤면동은 당시 양극화 문제도 언급한다. "부자들은 담벼락에 약간이라도 흠이 나면 다시 개축한다고 난리들이고 집 한 채 값이 5천, 6천 금으로도 부족한 실정입니다." 집값 폭등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서로 사고팔면서 투기를 일삼는 형국이었다. 당시 조선의 수도 한양의 집값 폭등은 지방의 유지들도 뛰어들어 대낮에 마차에 돈을 잔뜩 싣고 와서 집을 사려 하지만 어떤 집은 무려 10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다는 상황이라고 상소는 지적하고 있다. 부동산 투기가 만연한 오늘날과 아주 유사하다. 정조 집권 무렵 조선이란 나라도 상업이 발달하면서 자본주의 여러 병폐들이 함께 등장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125쪽

정순왕후는 수렴청정 기간 동안 항상 자신의 수렴정치는 정조의 의리정치를 기본으로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적어도 겉으로는 노론과 소론을 균등히 배분하는 정책들을 편다. 그리고 정조가 집권 기간 내내 강조했던 공사노비 혁파를 1801년 1월 28일 실시한다. 이날 대비와 영의정 심환지는 많은 대소신료들을 돈화문 앞에 집결시킨 뒤 선왕 정조가 그토록 소원했던 정책을 완수한다고 발표했다. 그것이 바로 조선 역사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공노비 석방'이란 이벤트다.
보수정권에서 이렇게 획기적인 개혁 조치가 등장한 것은 이후 많은 일들을 저들 뜻대로 하겠다는 당근의 하나이기도 하다. 아무튼 1801년 1월 28일 돈화문에서 조선 각 관청에서 갖고 있던 1209권의 노비 명단을 모두 불태웠다. 정조는 집권 기간 내내 공자가 살던 시대에도 공자는 노비가 없는 세상, 평등한 세상을 외쳤다며 신분상 노비제도를 이제 그만 거둘 때가 됐다고 신하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그 일을 끝내 완수하지 못하고 죽었다. 정순왕후와 심환지가 정조의 개혁정치를 완수한 일은 딱 그 한가지다. 그렇게 해서 이날 그 명단에 기록된 왕실을 관리하던 내수사 노비 -203쪽

3만 6974명과 다른 관청 노비 2만 9093명을 모두 해방시켜 주었다. 모두 공공기관 노비들 6만 6067명을 그날로 노비 신분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정조를 가장 존경했던 고종은 1886년(고종26) 1월 2일 공노비 해방 85년 만에 개인노비의 세습을 철폐한다는 개혁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실상 조선이란 나라는 정조가 그토록 이야기하고 주장했던 신분 차별 없는, 노비가 없는 평등한 세상을 비로소 실천한 것이다. 공공노비를 해방시킨 것은 링컨의 1863년 1월 '노예해방선언'보다 한참 앞서 있었다. -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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