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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조건 - 하버드대학교. 인간성장보고서, 그들은 어떻게 오래도록 행복했을까?
조지 E. 베일런트 지음, 이덕남 옮김, 이시형 감수 / 프런티어 / 2010년 1월
평점 :
이 책은 하버드 출신 집단, 천재 여성 집단, 하층계급 출신 집단을 대조군으로 선정하여 각 집단에 속하는 이들의 유년기부터 사망까지의 삶을 관찰.연구한 결과를 담고 있다. 처음에 책을 고를 때는 단순히 '하버드를 나온 사람들의 행복의 기준은 일반인의 행복의 기준과 다를까?'란 호기심에서 시작했지만 서문에서 소개되는 이 광대하고 방대하며 엄숙하기까지 한 연구의 구조와 스케일에 대한 개략적 설명을 접하자 그런 얄팍한 기대따윈 던져버리고 수십년의 연구결과인 이 책을 그 자체로서 소중히 여기고 아끼며 읽어야겠단 마음이 들었다. 좋은 시작이다.
서술은 주로 케이스를 끌어다 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예를 들어, 행복의 열쇠 중 하나가 '건강'이라면 하버드를 졸업하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다가도 알콜중독에 빠져 비참하게 죽음을 맞은 경우와 어릴 적 부모의 폭력에 노출되어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근면한 태도로 자수성가하고 건강을 챙겨 행복한 노년에 다다른 하층계급출신의 경우를 대조하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행복의 조건이라고 하는 것들이 하나씩 소개되긴 하는데 사실 이런 내용이 책의 대부분을 이루기는 하나 행복이라는게 어떤 절대적 공식에 의해 도출되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주관적 안녕'감'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에 여기서 연구의 결과로 제시되는 행복의 조건이란 것들은 '확률'적으로 행복을 가져다 줄 가능성이 높은 조건일뿐이란 소리이다. 당연한 소리이고, 그래서 개인적으로 그냥 흥미롭게 읽어갔을 뿐 행복하려면 이래야 하는거야 저래야 하는거야 얽매이는 마음은 없었다. 그렇게 독자를 압박하는 류의 글도 아니다. 이건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연구결과'니까.
수십년의 연구결과를 정리해 학문적으로 여러 케이스를 대조하며 행복을 결정짓는 요인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은 비전공자에겐 약간 지루할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단 결과가 나온다면 이는 종교가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야 하는걸까? 아니면 행복한 사람들이 종교적 활동을 선호한다고 해석해야 하는걸까? 어마어마한 연구이니만큼(한 학자의 인생을 건 연구이니까) 이런 분석에도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며 이 사례 저 사례 다 끌어다 어떻게든 모든 결론을 담아낼 수 있는 포괄적이고 유연한 결론을 이끌어내려 노력하는데 나같이 비학문적인 독자는 그런 학문적 엄밀성엔 별 관심이 없었고 그런것 보단 노화를 성장의 과정으로서 접근하는 연구자의 태도와 그 증거로서 제시되는 실제로 존재했던 나이가 들수록 더 아름다워졌던 수많은 인생의 궤적들에 폭 빠져버렸다.
이 책은 사람의 인생을 나무에 비유한다. 죽는 날까지 성장한다는 의미이다. 보통 스무살 정도를 성장의 마침표를 찍는 시기라 보고 그 이후의 인간은 죽음까지 노화해간다고 보는 경우가 많고- 나 역시 거기에 동의했었는데(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사람이 변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스무살 이후의 성장에 대해 회의적이었음) 연구를 통해 인간의 생애를 관찰해보니 사람은 변하더란 말이다. 두터운 책을 읽으며 나에게 다가온 하나의 메세지는 학력, 가족, 흡연유무 등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 사람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거, 그래서 끊임없이 성장의 여지가 있다는 점 그 하나였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경험을 통해 사교적으로 변해가고 타인을 따뜻하게 대하는 방향으로 '성장'한다고 한다. 얼마나 멋진 연구결과인지!
내 나이가 이 책을 감동적으로 읽는 데 영향을 준 한 요인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올해 한국 나이 스물 다섯인데, 촌스럽게도 아직까지 '이제 너 꺾이는구나'소리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런 소리에 위축되는 사람은 아닌데 스물다섯이면 이제는 보다 성숙한 나이먹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나이는 되었다고 생각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고 스물다섯쯤 되면 인생의 방향이 대략 눈앞에 펼쳐질 줄 알았는데 왜 아직도 이렇게 모든게 불분명한 걸까? 젊음이 가지는 아름다움과 에너지에 대해 과도하게 세뇌되어 있던 사고방식이 '이건 아닌거 같다'고 아우성을 쳤다. 정말 젊음이 그렇게 완벽한 것이라면 그 완벽함의 십년 뒤로 노화만을 위한 수십년의 세월은 왜 필요한 거지? 이 책은 우리가 이십대에 육체적으로 가장 근사한 시기를 맞이하고 그 뒤론 노화를 경험하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 노화란 특정 영역에 한정된 것일 뿐, 특정 영역에선 여전히 발달과 성장이 일어나며 때문에 노인이란 쓸모없는 '잉여'가 아니라 보석같은 삶의 지혜를 간직한, 젊은이들과 똑같이 존중받아 마땅한 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라며 내 물음에 답했다.
개인적으로 노화에 대해 접근하는 그런 새로운 시각이 참 좋았다. 학부생으로서 접하는 사람이 늘 젊은 사람들이다 보니 노화나 노인에 대해서는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할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상당부분 정리가 된 기분이다. 이전에는 추상적으로 '나이'란 아무것도 아니란 정도의 생각을 했었다. 어리지만 누구못지 않은 밝음과 성실함을 가진 스물 둘 어린친구들을 보며 또 나이 거꾸로 먹고 나이 들수록 얼굴만 두꺼워지는 사람들을 보며 나이가 중요한게 아니고 중요한건 인간의 본질이자 삶의 태도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은 없지만 이런 생각은 든다. 성공은 젊을 적에 할 수 있지만 진정한 행복을 찾는 것은 세월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성공한 젊은이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던 많은 고민과 삶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 사랑에 대한 갈구, 존재로서 필연적으로 직면해야만 하는 외로움 등등은 세월이 전제된 성숙에 의해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진정한 행복의 조건은 책에서 이야기하는 고학력, 비흡연 등등 보다도 가장 먼저 세월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세월이 흘러야 그만큼 성숙할 여지도 생기는 거니까. 나도 나이 먹는다고 징징대지 말고 좀 생산적으로 나이들수록 향기로워지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