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구판절판


그 나자는 거의 매일 같이 부대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미군부대의 잡역부들은 일자무식으로부터 대학을 나온 사람까지 다양했지만 다들 어딘지 켕기는 데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병역 기피자가 많았다. 정식으로 허락된 건 아니지만 군복을 입을 수 있고,꼬부랑글씨로 된 신분증이 나오니까 요령만 좋으면 큰소리 쳐가면서 검문을 피할 수 있었다. 찌들고 떳떳치 못한 사람들은 군복이 썩 잘 어울리고 건강하고 거침없어 보이는 미남자에 대해 이것저거 궁금해했다. 동생뻘되는 친척이라는 소리는 안 했으면 좋았을 것을. 아무도 안 믿었다. 사지가 멀쩡한 상이군인이라는 신분은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우린 그런 것들을 즐겼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행복감을 상승시켰다. 남이 쳐다보고 부러워하지 않는 비단옷과 보석이 무의미하듯이 남이 샘내지 않는 애인은 있으나마나 하지 않을까. 그가 멋있어 보일수록 나도 예뻐지고 싶었다. 나는 내 몸에 물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는 나를 구슬 같다고 했다. 애인한테보다는 막내 여동생한테나 어울릴 찬사였다. 성에 차지 않았지만 나도 곧 그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구슬 같은 눈동자, 구슬 같은 -37쪽

이슬, 구슬 같은 물결....어디다 그걸 붙여도 그 말은 빛났다.
그해 겨울은 내 생애의 구슬 같은 겨울이었다. 안감냇가 말고 애인들이 갈 수 있는 데는 많지 않았다. 우리는 둘 다 대학생이 되고 고드악교 때의 금기의 장소에 미처익숙해지기도 전에 난리가 나고 서울은 폐허가 돼버린 것이다. 그나마 극장이 남아 있는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전시의 극장은 난방이 안됐다. 그는 내 옆에 꿇어앉아 자기 털장갑을 뒤집어서 내 발끝에 씌워주곤 했다. 손가락장갑을 바닥만 뒤집으면 그 안에 다섯 손가락이 뭉쳐 있게 되고 그걸 발끝에다 신으면 아무리 꽁꽁 언 발가락도 스르르 녹으면서 훈훈해진다. 그는 어떻게 그런 신통한 생각을 해낼 수가 있었을까. 그건 일석이조였다. 언 발가락이 따뜻해졌을 뿐 아니라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 당하고 있다는 만족감까지 맛볼 수 있었으니까.-38쪽

앉은 자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여긴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경양식도 같이 파는 찻집은 자리가 꽉 차 주로 쌍쌍인 젊은이들이 내가 앉은 테이블의 빈자리는 잠시 넘보다가 나가버리곤 했다. 주인의 시선이 따가울 수밖에 없었다. 연탄갈비집도 영업을 시작했을 시간이다. 그 가게 앞을 카바이트와 연탄불 냄새를 그리워하며 천천히 걸어가는 늙은이가 눈에 선하다. 그는 누구일까. 애무할 거라곤 추억밖에 없는 저 불쌍한 늙은이는.
나는 마지못해 자리를 떴다. 쌍쌍이 붙어 앉아 서로를 진하게 애무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늙으닝 하나가 들어가든 나가든 아랑곳없으련만 나는 그들이 그 옛날의 내 외설스러운 순결주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뒤통수가 머쓱했다. 온 세상이 저애들놀아나라고 깔아놓은 멍석인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101쪽

나에게 그가 영원히 아름다운 청년인 것처럼 그에게 나도 영원히 구슬 같은 처녀일 것이다. 우리는 그때 플라토닉의 맹목적 신도였다. 우리가 신봉한 플라토닉은 실은 임신의 공포일 따름인 것을. -9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