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를 위하여 - '아웃사이더' 편집진 산문모음
김규항 김정란 진중권 홍세화 지음 / 아웃사이더 / 1999년 11월
절판


군대 가서 사람된다느니 사내다워진다느니 하는 얘기는 그저 농담이다. 사람이 되는 게 권위에 무작정 복종하는 일이고 사내다워지는 게 힘없는 사람에게 일수록 불량스러워지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군대도 군대 나름이겠지만 이 나라의 평범한 아들들이 가는 군대란 언제나 고되고 삭막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고시며 아차 하면 병신 되거나 죽는곳임 도무지 배울 게 없는 곳이다. 돈을 먹여서 군대를 빠지는 일이 끔찍한 죄인건 단지 신성한 국바으이 의무를 다 하지 않거나 남 하는 고생을 피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대신 군대에 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마님 아들 빠진 자리를 머슴 아들이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39쪽

...더군다나 박정희 시대의 정치적 폭압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층에서 발견되는 박정희 향수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이다. 그들은 박정희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지, 그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영웅을 구하는 사회는 유약한 사회이다.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을 제시할 수 없는 사회가 영웅에 기댄다. 내가 못하겠으니까, 나 대신 해주셔요, 하고 영웅을 소환하는 것이다. 결국 영웅주의는 패배주의적 운명주의의 뒤집힌 이름에 불과하다.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순진한 대중을 정신적으로 유약한 상태에 묶어두려고 하는 이 상징조작이 두렵기 그지없다. -61쪽

자의식 없는 사람들은 국가나 민족과 같은 집단과의 동일시 속에서만 제 정체성을 찾는 법. 그래서 조국과 민족이 군사적 성공을 거두는 허구의 소설을 통해서만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엔 애국자도 많고, 민족대표도 많다. 너무 많다. 그래서 난 슬프다. -108쪽

...우리나라에서 예술이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어느 예술적 상상력도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그 엄청난 일들의 스케일을 따라잡지 못할 게다. 가령 헐리우드적 상상력이라도 지진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백주에 멀쩡한 백화점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300명의 사망자를 내다는 시나리오를 생각해낼 수는 없을 게다. 또 어느 시나리오 작가가 정지상태의 버스가 다리 위에서 강물로 잠수하는 기상천외한 모티브를 생각해낼 수 있겠는가? 또 정치인들이 하는 뻔뻔한 농담, 언론은 또 어떻고?
,,,이 현실의 희비극. 순전히 미적 관점에서만 본다면, 신문을 읽는 것처럼 신나는 일은 없다. 로마 시내에 불을 질러놓고 그 불길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시를 읊는 네로 황제가 된 기분으로 본다면. 그런데 한가지 조그마한 문제가 있다. 즉 현실은 허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양자 사이에는 거대한 존재론적 장벽이 놓여 있다. 다시 말해 그 장대한 희비극의 스펙터클을 여유 있게 음미하고 신문을 덮는 순간, 나는 다시 느긋한 유미주의 황제의 입장에서 목숨을 부지하려고 불길에 휩싸인 로마시내를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하는 가련한 로마 평민의 주제로 되돌아와야 하는 것이다.-124쪽

100년의 시차를 느끼게 하는 것은 지식인의 '지식'이 아니라 '양심' 이다. '여기 이 땅'의 '진리'와 '진실'에 대한 목마름 없는 '양심'을 '지식'으로 대신할 순 없는 것이다.-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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