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이 되기 전 캠코더 한번 들어본 적이 없는 나는 미학이 기술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기술은 미학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감독은 또다른 세상을 그리는 판타지만 품고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다. 예술이란 게 개인의 판타지를 세상에 어떤 현실물로 구체화하는 전 과정이라면, 좋은 판타지만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기술이 도와준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23쪽
어쨌든 나는 영화감독이 되어다. 남들 하는 공식을 따르지 않고 조금 특별한 삶의 행로를 통해 이 길에 들어섰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다. 잘못 들어선 길이 지도를 만드는 법이니까. -25쪽
결국,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비극성은 천재와 범인이 한데 묶일 수 없는 범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관심과 무관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예를 들어 살리에리가 모차르트가 끼적거려둔 악보를 보고 "아니, 이럴 수가? 이 자식은 천재가 아닌가... 음....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은 뭘 먹지?" 하고 시큰둥했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살리에리의 삶이 그렇게 비루하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다. 여기에서 나는 타이느이 재능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지독한 자기혐오와 타인 부정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다는 것에 섬뜩해지는 것이다. 재능이 없다면 쿨해지기라도 해야 하는데, 살리에리에겐 그런 요량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종종 야심가의 모습을 띠곤 하는데, 야심이란 '재능은 없고 욕심은 많은 어떤 것'의 또다른 표현이 아닐까 한다. 내가 아마데우스를 놓고 관심과 무관심에 대한 이야기를 너저분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두 가지 유형의 인간형들이 존속해 내려오며 비극적 드라마를 만들어오기 때문이기도 하고, 오늘날 이 땅 이구석에도 살리에리 같은 인간형들이 도처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33쪽
10년 전 난생처음으로 서유럽으로 무전여행을 떠났을 때 정말로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서양 아이들의 그 완전히 맑게 풀린 눈이었다. 사슴도 아닌 인간들이 저렇게 고요하고 평화롭고 멍청한 눈을 가지고 있다니. 한국땅 그 어디서도 보지 못한 눈이었다. 도시에서 시골로 갈수록, 동에서 서로 갈수록, 남유럽에서 북유럽으로 갈수록 눈은 더더욱 깊이 풀려 있었다. 맑게 풀린 눈은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의 눈을 보았다. 반짝반짝, 이글이글, 활활 타오르는 눈. 모임이 있는 자리에서 모르는 사람과 첫인사를 나눌 때가 있는데 손을 내밀며 눈에 무슨 초능력이라도 있는지 눈을 부릅뜨고 강렬하게 쏘아보며 힘을 주는 마초들이 아주 가끔씩 있다. 저 눈빞에 맞으면 아프겠다. 속으로 생각하며 웃지도 못하고 살짝 피한다. 지겨운 인간들. 이 험한 세상. 눈빛으로 맞장뜨마, 이런 각오로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정말 그런 사람과 안자 있기란 고역이다.-97쪽
<8과 1/2>인가에 나온 대사 중에 이런 게 있는데요, 예술하는 이유에 대해 "진실을 드러낼 때는 어떤 누군가는 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데, 예술은 혹은 영화는 상처를 최소화하면서 진실을 드러내는 매체"라는 대사가 있었어요. -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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