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이름들 - 제3회 박상륭상 수상작
안윤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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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그런 건 제대로 된 희망이 아니라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누가 알맞은 정도의 희망을 논할 수 있을까. 희망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때때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건 체념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 일상에 푸른 잎을 내보이는 희망이다. 나는 그런 희망이 나쁘거나 틀린 것,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P1

병원에서 맞이하는 계절이 거듭될수록, 절망의 이유가 더 구체적으로 길어질수록 환자의 가족들은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무력감과 미움은 서글프게도 그들이 깊은 사랑으로 묶여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증거는 증거일 뿐, 증거가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어쩌면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사람을 깊이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무력감과 자신을 향한 미움을 전부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 P2

경험, 그건 양성종양 같은 거예요. - P3

우리 심신에 닥쳐오는 고통은 대부분 불운이지요. 보살핌을 받고 더 나은 상태가 되어야 함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렇다고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마냥 응석을 부려도 되는 건 아니지요. ...고통은 고통일 뿐이에요. 신화가 아니지요. ..고통이란 녀석은 사소하게 취급해서도 안 되고 너무 떠받들어서도 안 돼요. 여간 까다로운 녀석이 아니지요. 당시에 나는 나지라 당신이 고통을 대하는 태도랄지, 균형감각이랄지 그런 걸 애초에 가지고 태어난 사람 같다고 생각했어요. - P4

자연과학대학의 낡고 스산한 복도를 걸으면서 나는 내 청춘의 맨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젊음의 한가운데에서도, 그로부터 한참 비끼어 이쓴 현재에도. 나는 청춘을 살고도 내 청춘의 얼굴을 모른다. 청춘의 얼굴만이 아니다. 사람은 일평생 거울이나 사진을 통해서만 자기 얼굴을 볼 수 있으니 영영 제 얼굴을 제대로 한번 바라보지 못한 채로 세상을 등지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기는 한 걸까. - P5

하지만 확실한 건,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건 아니라는 거지.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우리 곁에 머물게 되지. 보이지는 않지만.

좀 무서운 얘긴데요?

너한테도 이 얘기가 무섭지 않게 될 때가 올 거야.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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