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
샤오루 궈 지음, 변용란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아주 오래전, 15년쯤 전에 이 책을 읽었었다. 예쁜 표지, 그리고 제목과 달리 내용은 무척 현실적이고 삶과 사랑의 초라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내용이라 그 당시엔 재독이 힘들거 같다 생각했었다. 일부러 소장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다시 읽고 싶어졌다. 클로이 자오 감독이 아카데미 수상을 한 뉴스를 보니 중국 여자들의 예술에 대해 다시 관심이 갔고 내가 예전에 본 그 작품이 그 당시엔 그리 유쾌한 작품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다시 볼만한 작품은 된다는 어렴풋한 확신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읽은 이 작품은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더 대단한 작품이었다. 중국이 지금보다도 훨씬 구지고 후진 취급을 받던 시대의 작품이기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단 아쉬움도 남는다.  


형식적 측면에서 이 책은 '책'의 형태에 가장 가까울 뿐 실제 내용으로는 이전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란 생각이 드는데 그게 이 작품의 가장 탁월한 점인것 같다. 책은 여성 주인공이 영국에 어학연수를 위해 도착한 뒤 완전히 엉망인 영어로 쓰는 일기로 시작한다. 영국에서의 체류기간이 길어지고 영국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며 영어를 배우는 모습, 타 문화와 타인에 대한 이해를 쌓아가는 모습, 그 과정의 갈등과 혼란이 점점 늘어나는 영어실력과 함께 묘사된다. 일기의 각 장을 영어사전에서 따온 단어의 정의로 붙이고 있단 점도 이런 구성과 형식에 걸맞는 예쁜 디테일이다. 이 정도면 언어와 문화 그리고 자아를 소재로 한 현대미술이라고 봐야하지 않을지? 책이 출간된 이후 호평과 함께 '브로큰 잉글리쉬를 읽어내는 고통만 견디면 이 작품의 진가를 알 수 있을 것',이란 평이 붙었다는데 이 작품이 더 널리 알려지지 않은건 브로큰 잉글리쉬를 견디지 못한 영어권 독자들의 게으름 때문이지 않을까 혼자 생각도 해본다. 번역이 꽤 잘 된 편이라 생각하는데 번역판을 읽고 원서를 보니 영어 수준이 번역판으로 느껴지는 것보다 더 형편없어서 다소 놀랍긴 하였다. 


내용의 측면에서는 이 책이 중국인의 정체성을 꽤나 짙게 담고 있다는 것을 재독을 하며 알게 되었다. 평생 중국에서 살다 처음으로 외국에 나온 주인공이니 중국은 이렇니 저렇니 하는 서술이 있다는 것이야 알았지만 중국에 대한 이해가 늘고 나서 다시 보니 책의 서술 그 자체가 중국인의 마인드와 멘탈리티를 기초로 한 것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 담긴 것인데 보통 이런걸 구현하기가 쉽지는 않으니까. 같은 동양인 여성이라도 한국인이나 일본인을 주인공으로 쓴다면 절대로 이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책 속에 등장하는 한국인 여성은 너무 예의를 차리는 모습으로 나오고 나는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서 공감하였다. 그리고 사랑의 서사와 엔딩에서는 예전에는 아이고 구질구질해 다시 보고 싶진 않소. 싶었는데 이젠 이 구질구질함이 현실의 사랑임을 알기에 오히려 가슴이 아팠다. 오히려 마지막 엔딩은 현실보다 더 로맨틱하다고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최근 조명받는 전하영 작가도 그렇고 영화를 전공한 사람이 쓰는 글엔 확실히 무언가, 글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을 초월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연출이란 것을 글로 구현하는 것의 파워가 분명 있는 것은 아닐지? 소설이란 하나의 평면을 달리는 글보다 소설과 영상의 두 축으로 입체적으로 달리는 글이 쓰기야 물론 어렵겠지만 그만큼 더 풍부한 무언가를 담아낼 그릇이 되는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작가에 대해서는 이 작품 이후가 궁금했고, 잘 살고 있기를 바랬는데 검색을 해보니 중국 시민권을 버리고 영국 시민권을 땄고 지금도 작품 활동을 하며 잘 지내고 있는 듯 하다. 다행이다. 모두가 아카데미 상을 탈 수는 없고 모든 예술가의 작품이 공정한 세속적 보상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정말 좋은 작품을 만든 예술가가 다음 삶을 도모할 수 있는 정도의 숨통은 트여있길 바라는 그런 먼 나라 한 독자의 간절함에 부합하는 현실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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