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구판절판


엄마는 진분홍 실크 블라우스 위로 같은 감의 실크 스카프를 길게 늘어뜨리고 어깨를 가만히 흔들고 있었다. 그런 감상적인 기분 탓이었는지 엄마의 연주는 내가 그전에 그렇게 귀를 막고 싶어했을 정도로 형편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연주가 끝났을 때 나는 박수를 쳤다. 부엌에서 일하던 파출부 아주머니가 치는 박수소리도 들렸다. 엄마는 정말 무대 위의 피아니스트처럼 우아하게 보인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다른 곡을 시작했다.
내가 엄마와 우리식구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이 돈이 많고 그들이 자신이 속물들임을 위장하기 위해 흔히 쓰는, 내게 돈만 있는 것은 아니란다, 하는 표정으로 문화예슐가를 자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실은 뼛속까지 외롭고 스스로 홀로 앉은 밤이면 가여운 것이 사실인데도, 그것을 위장할 기회와 도구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실은 스스로가 외롭고 가엾고 고립된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기회를 늘 박탈당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생과 정면으로 마주칠 기회를 늘 잃고 있는 셈이었다.-118쪽

누구에게나 슬픔은 있다. 이것은 자신이 남에게 줄 수 없는 재산이다. 모든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있지만 자신만은 남에게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이 소유한 비극은 있다. 그 비극은 영원히 자신이 소유해야 할 상흔이다. 눈물의 강, 슬픔의 강, 통곡의 강, 슬픔은 재산과는 달리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 분배되어 있다.
-김상중 스님-126쪽

"그 자식은 말을 되게 그럴듯하게 해. 그게 위선인지 어떻게 알아? 혹시라도 구명운동해서 살아날 방법이 있을까 하고...난 안 믿어. 너무 빨라. 그 할머니도 그렇고, 참 다들 단순도 하지. 용서하고 뉘우치고 용서하고 뉘우치고....난 그리스도교에서 그게 젤 싫어. 실컷 잘못해놓고 교회에 가서 잘못했습니다. 하면 그만인 거! 위선자들!"
고모는 눈을 감은 채로 잠시 말이 없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정아...고모는 위선자들 싫어하지 않아"
뜻밖의 말이었다.
"목사나 신부나 수녀나 스님이나 선생이나 아무튼 우리가 훌류?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위선자들 참 ㅁ낳아 어쩌면 내가 그 대표적 인물일지도 모르지...위선을 행한다는 것은 적어도 선한 게 뭔지 감은 잡고 있는 거야. 깊은 내면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보여지는 것만크 훌륭하지 못하다는 걸 알아. 의식하든 안 하든 말이야. 그래서 고모는 그런 사람들 안 싫어해. 죽는 날 까지 자기 자신 이외에 아무에게도 자기가 위선자라는 걸 들키지 않으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라고도 생각해. 고모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위악을 떠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남에게 악한 짓을 하면서 실은 자기네들이 실은 어느 정도는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위악을 떠는 그 순간에도 남들이 실은 자기들의 속마음이 착하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래. 그 사람들은 실은 위선자들 보다 더 교만하고 더 가엾어..."
-158쪽

바보 같이, 지금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야? 하고 나는 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가슴 한구석, 내가 보여주기 싫어하는 내 속옷 깊은 곳의 흉터를 보여주는 것처럼 수치심이 몰려왔다. 나는 앞에 가는 승합차를 한 대 추월해버렸다. 차가 휘청하자 고모가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고모가 그것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아무 기준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남들은 남들이고 나는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물론 그럴 때도 많지만 한 가지만은 안 돼. 사람의 생명은 소중한 거라는 걸, 그걸 놓치면 우리모두 함께 죽어. 그리고 그게 뭐라도 죽음은 좋지 않은 거야....살고자 하는 건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에 새겨진 어쩔 수 없는 본능과 같은 건데, 죽고 싶다는 말은, 거꾸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거고,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다시 거꾸로 뒤집으면 잘 살고 싶다는 거고....그러니까 우리는 죽고 싶다는 말 대신 잘 살고 싶다고 말해야 돼. 죽음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 하는 건, 생명이라는 말의 뜻이 살아 있으라는 명령이기 때문이야"-159쪽

"착한 거, 그거 바보 같은 거 아니야. 가엾게 여기는 마음, 그거 무른 거 아니야. 남 때문에 우는 거, 자기가 잘못한 거 생각하면서 가슴 아픈 거, 그게 설사 감상이든 뭐든 그거 예쁘고 좋은 거야. 열심히 마음 주다가 상처 받는 거, 그거 창피한 거 아니야..정말로 진심을 다하는 사람은 상처도 많이 받지만 극복도 잘하는 법이야. 고모가 너보다 많이 살면서 정말 깨달은 거는 그거야."
나도 그정도는 알아, 안다구, 하고 나는 말할 뻔했다. 그건, 나를 치료하고자 했던 신경정신과 의사들 앞에서 언제나 하던 말이었다. 그래 유정아 너 아는 거 많지. 네가 나름대로 정신과에 관련된 서적 많이 읽은 것도 안다. 그런데 유정아, 아는 건 아무것도 아닌 거야. 아는 거는 그런 의미에서 모르는 것보다 더 나빠. 중요한 건 깨닫는 거야. 아는 것과 깨닫는 거에 차이가 있다면 깨다딕 위해서는 아픔이 필요하다는 거야, 라고 삼촌은 말했었다.-160쪽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다. 감옥에서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중심으로 천천히 회전할 뿐이라고.-194쪽

"강, 간을 당한 적이 있었어요. 큰집에 심부름을 갔다가였죠. 그때 그 사촌오빠는 이미 부인이 있었고 아이까지 둔 가장이었죠"
내 입으로 그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강간이라는 객관적인 용어를 쓴 것도 처음이었다. 그런데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이야기해야 한다면 살아서 보는 마지막 봄을 맞고 있을 그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모르겠다, 내가 그에게 느꼈던 동질감은 무수히 많았다. 실은 처음부터 그랬다. 그리고 그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우리가 인생의 어떤 시기부터 내내 죽음의 열차를, 쫓겨서 그랬던 자발적으로 그랬든, 타고 싶어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열차라는 것을 타고 싶다고 생각하고 나면, 세상의 가치들이 모두 헤쳐 모여, 했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중요해지지 않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 중요해졌다. 죽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왜곡된 것도 많았지만 제대로 보이는 것 또한 많았다. 죽음은 이 세상의 가치 중에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고 있는 모든 소유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돈,돈,돈,돈 하면서 돌아버린 이 세상에서 그것을 비웃을 수 있는 어쩌면 가장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고, 누구나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나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201쪽

나는 그들을 스케치하다 말고, 문득, 그들은 행복할까 생각했다. 예전 같으면 나는 어두운 뒷골목에서 불 켜진 창문을 바라보는 방랑자처럼 그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저 창 안으로만 들어가면 행복은 식탁 위에 놓여진 은빛 수저처럼 얌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나 혼자만 벌판으로 쫓겨나 끝이 보이지 않는 밤길을 맨발로 걷는 것 같은 서러움으로 밤마다 뒤척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즈음 나는 어떤 사람도 행복의 나라나 불행의 나라 국경선 안 쪽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모두들 얼마간 행복하고 모두들 얼마간 불행했다. 아니, 이 말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면 얼마간 불행한 사람과 전적으로 불행산 사람 이렇게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종족들을 객관적으로는 도저히 구별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카뮈 식으로 말하자면 행복한 사람들이란 없고 다만, 행복에 관하여 마음이 더, 혹은 덜 가난한 사람들이 있을 뿐인 것이다.-217쪽

결국 그들이 사형수이든 작가이든 어린아이이든 판사이든, 인간에게는 누구나 공통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며 실은, 다정한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한다는 것, 그 이외의 것은 모두가 분노로 뒤틀린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그게 진짜라는 것을.............
-작가의 말-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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