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는 영화마다 꼭 되돌아오는 빠져나갈 수 없는 ‘사랑의 갈망‘, 더 심오하게는 ‘사랑의 상실‘이란 주제를 이때부터 추구하고 있었다. 왕가위 버전의 사랑의 갈망과 상실의 세상은 높친 기회, 부재중 연락, 지나치는 야간 지하철로 이루어진 우주다. 젊든 늙었든, 결혼했든 미혼이든,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그의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레너드 코헨의 노래 가사 ‘사랑에는 치료제가 없다‘는 게 사실임을 깨닫는다. ...이 주제에 집착하는 왕가위를 보고, 그가 몸소 사랑의 고통을 겪었기에 그런 작품이 나오는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허나 현실의 왕가위는 그의 아내 에스터와 행복한 결혼생활 중이고 최근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과학도로 진학한 아들 칭도 두었다. 부부는 카오룽의 한 가게에서 청바지 판매원으로 만난 이후 쭉 함께였다. 당시 그는 19세 그녀는 17세. 거의 40년의 세월을 함께한 셈이다. 언젠가 내가 물었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어째서 불행한 사랑 이야기만 만드는 겁니까? 당신 사랑은 안 그러면서."
그가 잠시 생각한다. 그러다 마침내 대답한다.
"내 사랑이 안 그래서일지도 모르죠. 살아보지 못한 인생을 생각하는 게 훨씬 재밌잖아요. 실컷 상상할 수 있으니까."
왕가위처럼 장숙평도 상서로운 우연과 마술적 사고에 엄청난 믿음을 갖고 있다. ‘간절히 생각하면 바라던 게 결국은 찾아온다‘고 그는 주장한다.
"정말 옵니다. 아비정전때 옛날식 냉장고를 찾아다녔는데 정말 찾기 어려운 모델이었거든요. 그런데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더니 우리 비서가 하나를 찾아냈어요 뭐든 마음속에 있다면 언젠가는 찾아오게 돼 있습니다. 해피 투게더 때는 아르헨티나에서 크리스와 함께 폭포를 촬영하러 갔는데 그 당시 폭포수가 정말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찍은 걸 보여줬더니 환상적이라며 다들 만족해했죠. 나중에 왕가위가 폭포를 한 번 더 찍어왔으면 좋겠다고 해서 다시 갔더니 그때는 물이 거의 없었어요. 알고 보니 우리가 처음 폭포를 찍었을 때 그전 일주일 동안 계속 비가 왔다더군요. 그런 환상적인 장면을 얻은 건 순전히 운이 좋았던 거죠. 왕가위와 나는 항상 이 말을 믿어요. "받아들여라, 그럼 올 것이다."
중경삼림이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라는 말로 시작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근데 저 말만 하면 감독님은 어쩐지 불쾌해하는 것 같더라고요.
아뇨, 안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서 혹시 후다닥 만든 작품이라 그러시나 하고.
글쎄요 전 그런 느낌 없는데. 사람들이 보통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말할 때 저는 그게 영화보다 말하는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걸 말해준다고 봐서(웃음)
우리가 알고 있는 화양연화의 아이디어 전체가(양조위의 캐릭터가 특히) 칸 영화제에 늦을 거 같단 이유로 180도 바뀌었다는 게 저는 살짝 불편한데요.
하지만 그런 일은 늘상 일어나는 걸요. 누구든 영화를 만들면 스토리가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일이 진행되는 내내 선택지가 나타납니다. 이 인물은 이걸 할 건가 아님 저걸 할 건가? 그리고 그런 선택 하나하나가 나중에 더 많은 다른 선택으로 이어지고요. 가능성은 끝도 없이 불어납니다. 그중 몇 가지를 시도해보죠. 하지만 가능성 하나한마다 가격표가 붙어 있고, "한번 해보자"는 말만큼 이 업계에서 비싼 말도 없습니다. 최종적으로 손에 남는 건 지금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그러나 원했던 게 아닐 수도 있는 한 편의 영화인 거죠. 영화를 만든다는 게 사람들에게 당신이 가진 담배를 깊이 들이마셔보라며 내미는 행위와 비슷합니다. 그렇게 들이마신 부분이 화면에 담긴 것들이죠. 나머진 그냥 재일 뿐입니다.
평범한 일반인을 찍을 때조차도, 감독님은 그들에게 빛을 부여해서 그들이 실제보다 훨씬 잘나 보입니다.
저는 제 영화 속 인물들을 좋아합니다. 자기 영화 속인물들을 좋아하면 그들을 보는 시각도 다정해지죠. 저는 영화를 보면 감독이 그 영화 속 배우를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보입니다. 다 드러나요. 턱이 두 겹으로 찍히고 조명을 못 받고 그런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포괄적인 어떤 것입니다. 즉, 다정함이 없다는 것. 저는 캐릭터들과 함께 있고 싶지 그들 위에 군림하고 싶진 않아요.
그 말씀인즉, 아름다움을 잘 포착하는 실력은 애정에서 우러나온다?
영화 속 아름다움은 시각적으로 어떻게 보이느냐 이상의 문젭니다. 좋은 영화는 보고 난 뒤에 남는 맛이 있어야 해요. 어떤 한 장면일 수도 있고 한 줄의 대사일 수도 있고 그냥 어떤 한 순간도 좋고요. 뭐가 됐든 관객에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남는 게 있어야 합니다.
이 시나리오를 쓰시는 데 그렇게 오래 걸렸다는 게 웃겼어요. 왜냐하면 해피 투게더를 생각할 때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아파트, 폭포, 가죽재킷을 입은 장국영, 불행해 보이는 양조위 표정, 그런 것들이거든요. 행동이 기억에 남는다는 거죠. 대사라고 해봤자 기억에 남는 건 양조위가 장첸의 녹음기에 한 말입니다. 우리 귀에는 사실상 들리지도 않았지만.
그 말은 칭찬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사실 최고의 대사는 두드러지지 않는 대삽니다. 개인적인 선언 같은 게 아니라 그 배역한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하는 그런 말들이죠. 그게 다 제가 티비 방송 출신이라 그렇습니다. 티비는 대사와 플롯이 전부 다라서. 하지만 영화는 대사와 플롯에 대한 게 아니죠. 영화는 행동에 대한 겁니다. 우리는 사람의 말보다 행동을 통해 그 사람을 많이 알게 됩니다. 말에는 거짓에 포함될 수 있으니까요. 양조위가 연기하는 인물은 자기가 좋은 사람인듯 말하지만 실상은 장국영의 여권을 숨겨놓고 안 주잖아요.
저는 이 책이 쉽게 굴러갈 거라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만.
빔 벤더스가 자기 책을 두고 한 말 같은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하려 했던 도전은 ‘묘사가 불가능한 경력을 묘사하려는 시도‘였다고. 저는 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거든. 사람들이 재즈를 두고 ‘꼭 물어봐야겠다면 결국 영영 모를 것이다‘라고 하는 것처럼요. 개인적인 이야기도 역시 좋아하지 않아요. 이건 영화 이야기 하자는 것보다 명분이 더 없어. 영화를 만든 30년 가까운 세월을 300페이지 책 한권과 맞바꾼다는 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발상인지. 이 책을 수락한 건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어요. 제 아들이 올해 스물한 살이 됩니다. 소년 시절을 뒤로 하고 성인이 되는 거죠. 아들과 아들이 보낸 유년기에, 왕가위의 의미는 부재나 다름없었습니다. 처음엔 제 직업적 경력이 만들어낸 스펙터클에 그 애를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보호하려 했던 거였지만, 나중엔 그 애 자신이 사람들의 시선을 원하지 않더라구요. 제 영화 중에서 그 애는 일대종사와 화양연화 밖에 안 봤습니다.
혹시 그 애가 나머지를 볼 날이 오면 저는 그 영화들을 자기 형제와 누이로 맞아주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어떤 면에선 아들도. 그 영화들도 함께 자란 셈이니까. 그리고 어떤 형제와 누이들이 그런 것처럼 어떤 아이는 잘되고 또 어떤 아이는 잘 안되고, 일부는 뒤늦게 좋은 결실을 보기도 하고 그런 거죠. 이 모든 형제 누이들의 공통점을 혹시 이 책이 그 애에게 알려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인생을 살면서-뭐든 대담한 시도를 하려면- 한 번쯤 해야 하는 이 말 한마디에서 태어났다고. 그래, 한번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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