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무시하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 가는 대로 거침없이 살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좋을까. 만사가 마뜩치 않아서 어깃장을 놓거나 반박하면서도, 정작 겉으로는 아무런 제스처도 취하지 않은(못한) 채 속을 끓이며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도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창조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삶이 부럽고 존경스럽다.
한 사진작가를 만났다. 입담이 유쾌한 사람이었다. 쉬지 않고 쏟아내는 그의 수다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우리는(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둘은 오랜 지기로 나이 차가 십년이라 했다. 물론 하는 일도 달랐다. 동일의 사고방식과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보였다) 식당에서 술집으로, 술집에서 식당으로 밤새도록 희희낙락 전전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그렇게 허물없이 시간을 보내 본 적도 없었을 뿐만아니라 예상치도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나도 모르게 그 분위기에 휩쓸렸다. 그는 정말 보기 드문 괴짜였다. 첫 대면부터 그는 세상이 요구하는 예의는 물론이거니와 약간의 허세 따위도 아예 관심 밖이란 태도였다. 그렇다고 뻔뻔해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리만치 솔직하고 진솔하고 담백했다. 그건 아무도 두려울 게 없는 사람만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다. 그가 어떤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을 보여도 불구하고 그의 삶 속 깊이 녹아있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건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진 게 아님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다니기에 어디 가시냐고 물었다. 그는 집을 나왔다고 대답했다. 아내에게 쫓겨났으니 '갱생'과 '요양'의 길을 가야한다며 낄낄낄 웃었다…(물론, 농담이다). 배낭 안에는 집에서 로스팅했다는 커피를, 볶은 정도에 따라, 따로 분리해 비닐봉지에 담은 알갱이 커피와 커피분쇄기, 거름종이, 커피 잔들 등이 잔뜩 들어있었다. 그는 누군가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할 때마다 아무데서나 분쇄기를 꺼내 커피를 갈았다.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이 하던 대화 속에서 그가 남도 쪽으로 며칠 동안 취재 겸 작품여행을 떠나던 중이었음을 짐작으로 알게 되었다. 또한 그가 꽤나 실력 있는 유명한 사진작가라는 사실도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후에야 알았다
그럼에도 그의 행장 어디에서도 카메라 장비나 사진작가 연하는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것 또한 내 눈에는 기이하게 비쳤다. 흔히들 자신이 종사하는 일의 특징을 은연중에라도 드러내게 되는 법이 아니던가. 그래서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진작가에게 카메라는 군인에게 있어 무기와 다름 아닐 텐데. 그래도 물어볼 수는 없었다. 왠지 멍청한 질문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유쾌한 경험이었다. 두고두고 되새겨 봐도 좋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