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량이 문제다. 서둘러 메모해 두지 않으면 금세 깡그리 지워지고 만다. 반짝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 순간 낚아채지 않으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잠시 후에는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안개속이다. 사라지는 건 항상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다. 하등 쓸모없는 허접한 것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까짓 자존심 구길 것 없이 떠나버리는 게 낫다 싶었을까. 내 머리의 한계를 진즉에 인정했기에 딴에는 이런저런 방법을 써보기는 한다. 하지만 그때  뿐이다. 필요할 땐 어디에 둔지 절대 찾을 수 없으니까.

오늘도 그랬다.

볼만 하겠다 싶은 책의 정보를 입수하면(어떤 경로로든) 그때그때 모아 한꺼번에 주문하려고 장바구니에 담아 두는데 이제는 그것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이거 원, 쓰레기통도 아닌데… 다 비워지고 말았다. 며칠 등한시 한 사이에 그런 사단이 났다. 다시 담으면 될 게 아닌가, 하겠지만 저자도 제목도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무엇을 탓하랴! 내 머리 용량이 문제인 것을.

이래저래 울적해져 하던 일 팽개치고 밖으로 나갔다. 휑하니 교외로 차를 몰아 언덕길에 올랐다. 사월의 세상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변해있었다. 내 집엔 아직 겨울이 웅크리고 있는데도… 뭔지 모르게 조롱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바람은 상쾌했고 다소 따가운 햇살이 쏟아졌다. 머리를 제쳐들고 눈을 감았다. 쏟아지는 빛의 알갱이들이 그대로 얼굴에 주근깨로 박힘을 느꼈으나 아랑곳 않고, 사방에서 환하게 깔깔대는 꽃들의 웃음소리 들었다.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그래, 인생 뭐 별건가. 이렇게 하루를 살면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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