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곧 고민해 오던 문제, 어떻게 쓸 것인가?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가 문제라는 프랜신 프로즈의 <소설, 어떻게 쓸 것인가>가 내 눈길을 잡는다. 그래서 우선 스크랩부터 하기로 한다.
한겨레(09. 09. 26) 명작이 가르치는 '창작의 비법'
펜클럽 미국 지부장을 맡고 있는 소설가 프랜신 프로즈의 책 <소설, 어떻게 쓸 것인가>는 이런 질문으로 시작한다. 대학에서 오랫동안 소설 창작을 가르쳐 온 그는 “창작 수업은 도움이 된다”면서도 “그러나 비록 그 수업이 큰 도움이 되었기는 해도 내가 글쓰기를 배운 것은 그곳이 아니었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그곳은 어디?
소설 창작 수업이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 아니 창작 수업을 이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그 수업이 학생들의 글쓰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그에게는 큰 딜레마에 해당한다. ‘가르칠 수 없는 것을 소설가들이 어떻게 배우는가’ 하는 것은 작가이자 소설 창작 지도자로서 그가 답해야 할 절체절명의 질문이다. 그 질문의 답은 무엇?
“작가들은 오비디우스에게서 운율을, 호메로스에게서 플롯 구성을, 아리스토파네스에게서 희극을 배웠고, 몽테뉴와 새뮤얼 존슨의 명료한 문장을 흡수하며 문체를 가다듬었다.”
‘창작 수업이 아니라 거장들의 작품에서 배우라’는 것이 그의 답이다. <소설, 어떻게 쓸 것인가>는 소설 쓰기의 기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이미 나와 있는 뛰어난 소설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를 안내하는 길라잡이다. 말하자면 ‘어떻게 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문제라는 것이다. 너무 싱거운 조언이 아니냐고?
아니, 사실 우리는 좋은 소설을 충분히, 그리고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지은이의 판단이다. 그는 플로베르와 카프카, 제인 오스틴과 버지니아 울프, 체호프와 헤밍웨이 같은 서양의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예로 들어가며 잘 씌어진 소설이란 어떤 것인지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문학 창작 수업의 합평회에서처럼 습작 원고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부정적인 방식이 아니라, 잘된 작품의 좋은 점으로부터 배우자는 긍정적인 방식인 셈이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밤은 부드러워>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공손한 야자수”라는 표현은 형용사와 그 대상이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창조적인 효과를 낳는다. 존 르 카레의 소설 <완벽한 스파이>의 도입부에서 주인공 매그너스 핌은 택시에서 내린 뒤 길에서 시간을 보낸 다음 어느 하숙집의 초인종을 누르는데, 그 소리를 듣고 나온 노파가 이렇게 말한다. “오, 캔터베리 씨, 오셨군요.” 이 대사 한 줄은 매그너스 핌이 그곳에 온 적이 있는데다가 가명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곤충으로 바뀌는 상황이 비현실적이라고 의심하던 독자들은 잠자의 방에 걸린, 잡지에서 오려낸 여자의 그림이라는 개연성 있는 세목 덕분에 그것이 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변신>의 사례가 말해주는 것은 세부 묘사의 중요성이다. “위대한 소설가들은 작지만 의미 있는 세부 묘사로 작품을 구축한다.” 이 책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작가 체호프는 “예를 들어 환한 달밤을 효과적으로 묘사하려면 물레방아가 있는 강둑에서 깨진 병에 반사되어 작은 별 모양으로 반짝이는 빛(…)을 묘사하면 될 것”이라고 한 편지에서 쓴 바 있다.
설명보다는 세부 묘사가 중요하다는 지침은 소설 쓰기 강좌나 작법 책에 단골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책의 지은이 프로즈는 ‘상식’으로 굳어져 있는 지침들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서술이 묘사보다 훨씬 효과적인 경우가 많”으며 △하나의 시점을 정하고 그것을 끝까지 유지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등장인물의 모든 행동에 분명한 동기와 개연성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문학이란 규칙을 깨뜨릴 뿐만 아니라 규칙이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살아 있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죽은 규칙에 매달리지 말고 살아 있는 소설을 읽으라는 것이 지은이의 조언이다. “글을 쓰고 싶다면 책을 읽는 것이, 특히 작가처럼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이 마지막 문장에서 ‘작가처럼 읽기’(Reading Like a Writer)라는 원제가 나왔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