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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집 - 불을 켜면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리는 말들
안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1월
평점 :
안희연 시인의 산문집 <단어의 집>
시. 시를 대하는 게 버거워 잠시 내려놓은 게 벌써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근래 시를 접한 건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적혀있는 시,
활동하는 동아리의 슬로건을 정하기 위해 검색해 본 시,
리뷰어 클럽 활동으로 아이와 함께 읽은 시
...... 뿐인 것 같네요.
빈약함에 볼이 붉게 달아오르네요.
단어. 자꾸 머물지 않고 흩어지고 달아나는 단어들을 정리하고 있어요.
분명히 제안에 존재하는 느낌, 감정, 생각들을 끄집어내는 건데도 형체가 잡히지 않아 답답해서 생각나는 대로, 발견하는 대로 적어놓고 있어요.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사전적인 의미만을 나열한 저의 <단어의 집>을 허물고 다시 시작해야겠어요. '아, 내 글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던 게 이런 이유였구나.' 조금은 깨닫는 시간이었어요.
안희연 시인.
시인이신데 산문집으로 처음 만나게 되었네요.
하지만 산문집을 통해 시가 드러나 시 또한 반짝이는 마음으로 읽어보려고 합니다.
시가 너무 아프고 무겁다. 다른 목소리에 대한 갈망을 토로하는 작가님께 "그건 잘하는 사람이 따로 있겠지요. 하던 걸 하세요." 직언하신 K 선생님처럼 저도 안희연 시인님의 글이 좋아하던 걸 하자고 적혀진 페이지에 응원의 마음을 담습니다.
"살아있다는 이유로 필연이 되는, 그 흔하디흔한 슬픔으로부터." (단어의 집 '기저선' 212)
'단어 생활자' 안희연의 따뜻한 허밍이라는 문구처럼 <단어의 집>은 생경한 단어 속으로 파고들어가 그녀의 삶과 연관된 고리 하나를 발견하면 수많이 가지를 쳐 뻗어나가는 마인드맵처럼 자유롭게 유영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단어 하나가 삶에 던지는 파동이 이렇게 클 수 있다는 사실을 목도하였습니다. 부드럽게 감싸 안아주다가도 눈이 번쩍 뜨이게 할 만큼 날카롭게 찌르기도 하고 실수해도 다 받아줄 만큼 녹아드는 애정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단어 하나로 시작된 사유의 세계가 '안희연' 자체를 오롯이 드러내는 글이 쌓이고 쌓여 단어의 집에 '안희연'이 투영되어 아는 사람처럼 친근해집니다.(저만 이렇게 마음이 깊어지네요.)
오늘 아침에 등교 준비를 하는 딸이 우당탕탕 소리를 냅니다. 분명히 세수를 한다고 들어갔는데 화장실 문 앞에 여러 가지 물건들이 떨어져 있습니다.
"너 정말 가시손이구나." 했더니 "가시손?"
"만지면 고장 내거나 아프게 하는 손"했더니 "인정" 쿨한 딸입니다.
어찌 보면 가시손 또한 저한테서 딸에게 전해진 유전정보이니 결국 저한테 돌아오는 부메랑입니다.
멀쩡한 물건이 제 손에 들어오면 삐삐거리고 어긋나게 되었던 일상을 딸 주연으로 보게 되니 저를 바라보던 남편의 시선에 담긴 한줄기 빛이 이제서야 와닿네요. 그래도 저와 딸이 품고 있는 다른 손들이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도록 가시손을 감싸줄 것이라 믿습니다.
가시손 - 다른 사람의 몸을 만지거나 때리는 느낌이 찌르는 듯한 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단어의 집 '가시손' 117)
저도 안희연 시인처럼 사물, 식물에 말을 잘 겁니다. 물을 주면서도 "시원하지?" "아, 목말랐구나. 말을 하지. 미안해." "조금만 힘내자." "오늘은 이만큼 더 자랐네." 하곤 합니다. 저도 그들이 제가 하는 말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요. 식물들이 우리 삶의 목격자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 우리의 영혼이 탁해지지 않게 우리를 지켜주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알게 모르게 헤아리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네요. 따져 묻고 판단하지만 말고 의지를 가지고 애쓰며 헤아려 가며 살아가고 싶어집니다. (단어의 집 '삽수' 40)
45편의 글. 45편의 단어.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단어들을 집어내 사유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읽고 쓰는 자의 고단함을 경외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깨어있는 자를 선망합니다. 특히나 코로나19로 관성적으로 늘어져 하루를 채우고 있는 저를 보면서 '버력'이라는 단어가 크게 다가옵니다. 저 스스로가 저를 버리는 행위를 계속하지 않도록 깨우쳐주네요. 저를 바로 세우고 세상을 향한 시선을 확장해나가는 작업을 시도해갈 수 있도록 달금질해 줍니다.
"애야, 삶이란 흘러가버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손에 잡히기도 한단다. 지금 여기 네 손안에 분명하게 들려 있잖니." (단어의 집 '블라이기센' 83)
고대하던 2021년 서울국제작가축제 녹화 날, 세 단어가 적힌 종이를 뽑아 한 문장을 완성하는 퀘스트 일화는 역시 시인도 사람이구나.라는 위안으로 다가옵니다. 지우고 싶은 흑역사이지만 차로 이어져 찻잎이 거치는 '덖음'을 끄집어 냅니다. 본디 시작이었던 친구의 양자역학 이야기에서 중학교 1학년 생물 시간까지 이어지는 필! 연! 적! 인 흐름을 강조하는 시인의 대범함은 시는 비약과 도약의 장르로 마무리됩니다.
단어 하나로 수천수만의 분수대를 만들어 우리를 향해 시원한 물줄기를 형용색색 무지개를 보여주고 있는 읽고 쓰는 자, 문학하는 자의 소망이 고스란히 전해져 그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단어를 만나고 싶어집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단어의 문을 열어보는 쪽으로 나의 시가 움직였으면 좋겠다."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곳에는 _ 빚진 마음의 문장)
<단어의 집>을 세워 단어들에게 공간을 만들어 주고 다양한 의미를 부여해 주는 작업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현상 너머의 무언가를 갈망하게 만들어주는 귀한 여정을 관람했네요. 하나의 주제로 다듬어진 글이 아니라 글을 쓸 소재나 글을 채울 단어를 수집하는 전단계를 살짝 엿본 것 같습니다.
단어에서 시작되는 사색, 사유를 권하는 멋들어진 책, <단어의 집> 여러분도 놀러 오세요.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1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