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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스토브 - 오시로 고가니 단편집
오시로 고가니 지음, 김진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평점 :

해변의 스토브 오시로 고가니 단편집/ 오시로 고가니/ 문학동네
페이지 한 장, 만화 한 편, 인물 한 명도 빈틈 없이 마음에 딱 들어찬 만화책을 만났다. 이 감각적인 만화는 표면으로 뚫고 나오지 않은, 미묘해서 표현하기 힘든 감정, 생각들을 캐치하여 그려내고 있다.
고속도로를 질주하고자 마음이 급한 현대인이 아니라 고즈넉한 시골길을 천천히 풍경을 음미하며 걸어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 여유롭다. 바쁘게 흘러가는 사회에서 부속품으로 소모되는 게 아니라 자신에 천착하여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며 제자리를 찾아가고자 집중하는 이야기다. 살아있다! 사랑한다! 좋아한다! 살갗에 작은 소름이 돋는, 간지러운 느낌처럼 마음을 흩뜨리는 기분을 만끽하게 한다. 어느새 입꼬리가 올라가고 미간이 찌푸리며 노려보듯 [해변의 스토브]에 몰입하였다.
오시로 고가니 만화가의 첫 단편만화집이다. 첫 단편집으로 2023년 <만화대상>에 노미네이트, 2024년 <이 만화가 대단하다!> 여자편 1위에 올랐다. 만화 강국인 일본에서 신인으로 이렇게 인정받다니 놀랍다. 하지만 읽어보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화' 장르를 향한 고정관념을 과감히 무너뜨리는 작품이다. 간결하고 명확하게 주제를 표현하기에 '만화'가 얼마나 탁월한지 증명하고 있다.
만화집에 담긴 7편의 작품 모두 아름답다.
표제작인 <해변의 스토브>는 판타지 형식으로 연애의 현실적인 고민을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다. '사랑은 표현'해야 하는 교류다. 직류가 되면 언젠가는 소멸하게 된다. 스미오는 미움받을까 두려워 움츠려들었다. 그래서 헤어지게 되었으니 떠나간 후 흘리는 눈물과 후회처럼 그 순간 제대로 표현했더라면…… 아쉽다. 스토브는 추위를 잘 타는 스미오와 찰떡궁합이다.
해변의 스토브 中
<설녀의 여름>, <바다 밑에서>, <소중한 일> 3편은 삶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일과 요구되는 역할에 대한 질문과 고민을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이다.
<설녀의 여름>은 산을 떠날 수 없고, 기억되기 위해 사람을 얼려 죽어야 한다는 설녀 세계의 규칙을 강요받으며 자라온 설녀 유키코가 인간 지나쓰를 만나 일탈을 벌이는 이야기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
세계가 정한 한계에 갇혀 자기를 억누르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손 내밀어 주는, 다정한 말이었다. 설녀 유키코가 보낸 뜨겁고 차가운 여름을 결코 잊지 못할 것 같다.
설녀의 여름 中
<바다 밑에서>, <소중한 일>은 진정 하고픈 일이 아닌 생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일을 하고 살아가는 모모와 시미즈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살아 숨 쉬게 해주는, 자신을 인정하게 해주는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이야기다. 부러울 정도로 둘 다 너무 행복해 보여서 눈물이 났다. 잔잔한 행복이 나에게도 스며들었다.
<당신이 투명해지기 전에>, <눈을 껴안다> 2편은 '몸'을 소재로 '존재'에 관한 질문을 환기시키는 작품들이다. 불의의 사고로 투명 인간이 된 남편 모리조와 아내 이즈미 그리고 임신을 한 여성 와카바가 주인공이다.
투명 인간이 되었지만 일상에서 큰 변화가 없던 부부가 '투명'해진 몸으로 인한 부재를 현실적으로 깨닫게 되면서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과정을 천천히 따라간다. 남편의 몸을 좋아하던 아내는 이제 그 몸을 보지 못함을, 남편은 몸이 투명해져 점차 무엇을 느끼는지 마음이 어떤지 모르고 신경 쓰지 않게 될 것임을 두려워한다. 그 막막한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서로의 몸을 힘껏 껴안는 그들을 뒤에서 힘껏 안아주고 싶어졌다.
당신이 투명해지기 전에 中
오시로 고가니 만화가는 모든 작품에서 여자의 심정을 잘 그려냈지만, 특히 <눈을 껴안다>에서 그 감각이 돋보인다. 내재된 여자의 불안과 공포를 간곡하게 표현하여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내 몸을 독점하고 싶어요.
다른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아. "
투박한 그림체가 초기작이 아닌가 싶은 <눈 내리는 마을>은 약간 결이 다르다. 하지만, 그 담백하고 담담한 어조가 '오시로 고가니 답구나' 생각이 들었다. 과하지 않게 적당한 선에서 주제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 같다. 독자를 이끌어주면서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남겨주는, 다정하고 영리한 작가. 그래서 감동의 깊이가 배가되었다.
눈을 껴안다 中
그냥 살아가지 말고,
느끼면서 살아가기를,
자신의 마음과 생각, 몸 그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생각하고 표현하고 서로 공감해 주는 우리를 오시로 고가니는 그려내고 있다. 열심히 그려준 만큼 열심히 보고 느끼는 것은 우리 독자의 몫이다. 온몸이 시원해지고 또 뜨거워지는, 담백하고 또 진한, 조용하고 또 들뜨는 이야기가 끌리는 당신에게 [해변의 스토브]를 전한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