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자의 하인
강지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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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자의 하인/ 강지영/ 자음과모음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엘자처럼 강지영 작가의 [엘자의 하인]이 다시 돌아왔다. 감각적인 표지는 왕국의 여왕 엘자와 그를 사랑하든 추종하든 미워하든 시기하든 시선을 주는 인물들의 관계가 잘 드러나있다. 


[엘자의 하인]에서 이제 막 몸의 변화를 시작하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있는 소년의 세계에 아주 잠깐 머물렀지만 모든 것을 점령했던 존재에 관한 이야기가 고혹스럽게 펼쳐진다. 


[엘자의 하인], 독특한 제목이라 생각이 들었다. '엘자'와 '하인'이 인물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절묘했다. '엘자의 하인' 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제목이면서 엘자와 하인의 관계에 대해 잘 드러내주는 표현 같았다. 하인은 엘자를 사랑하고 엘자를 경외하고 엘자에게 종속되었다. 

소년과 소녀, 마을의 순진한 소년과 도시의 아픈 소녀의 첫사랑, 이런 구조와 감정 흐름 때문인지 <소나기>처럼 풋풋하고 싱그러운 기분을 느끼게도 해주었다. 






[엘자의 하인]은 이성에 눈을 떠가는 아이들의 시선뿐 아니라, 다채로운 마을 구성원들의 이야기가 함께 하여 옅어져가는 시골 정취와 가족애를 느낄 수 있는 정겨운 소설이다.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와 집안일을 하는 아빠와 바깥일을 하는 엄마를 둔 '양하인'의 시점으로 펼쳐지는 어린 시절의 짧은 만남은 다양한 사랑을 품은 우리네 삶을 진진하게 다루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한 살씩 젊어지는 약은 없냐?

그런 약이 있으면 다음 달엔 내가

니 애비 대신 살림도 하고,

또 다음 달엔 우리 하인이 동무도 해줄 수 있고,

봄이 오면 아장아장 걷다,

여름쯤엔 싹도 없이 사라져버릴 텐데."




파주의 작은 마을,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이웃들이 모여사는 곳에 나타난 백인 혼혈 모녀는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평범하지 않은 엘자의 외모와 차림은 하인과 종선 등 마을 소년들의 관심을 끌었고, 엘자의 어머니 스텔라를 향해 마을 남정네들의 연정이 잇달았다. 


엘자와 스텔라 모녀를 둘러싼 마을 남자들의 관심 외에도 엘자와 마을 천재 수동이 형, 외할머니와 아빠, 컴온의 무덤 등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이 이야기 전체의 분위기를 단조롭지 않게 한다. 의뭉스러운 존재인 수동이 형이 들려준 '피의 마녀, 바토리 스토리'는 엘자를 한층 더 복잡하고 독특한 존재로 이미지화한다. 그리고 아빠와 외할머니가 묵은 애증을 풀고 화해하기까지 하인이네 가족이 겪은 그 모든 것들이 평온하게 떠난 할머니의 표정으로 풀어진다. 







어찌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부터 사소한 실수까지 입체적인 인물들이 들려주는 삶의 상처, 고통, 기쁨, 행복들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분단국가로서 겪은 전쟁의 아픔, 아빠와 엄마의 결혼에 얽힌 진실, 마을 천년회의 만행, 엮인 이들의 사고로 마녀로 오해받는 엘자, 사기, 화재, 의식, 컴온의 죽음 등등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은 엘자와 하인과 그 친구들을 한층 더 성장시킨다. 



"행복한 건 엄마지, 내가 아니잖아.

니들은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구나?"




하인이 엘자와 비록 어린 시절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을 보내고서도 다시금 그의 명령에 따라 만나러 갈 만큼 그 추억은 강렬하고도 선명했다. [엘자의 하인]을 읽은 나에게도 각인되었다. 그러기에 엘자를 만나러 가는 하인을 지켜보고 있다.






<살인자의 쇼핑목록> <살인자의 쇼핑몰> <심여사는 킬러>로 먼저 만난 강지영 작가의 초기작 [엘자의 하인]은 또 다른 감성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구수한 사투리와 정감 어린 마을 이웃들 속에서 외지인으로 받는 과한 관심과 오해가 아직은 어리고 유전병 '포피리아'로 힘겨운 엘자에게 얼마나 큰 상처였을지 새삼 가슴이 아리다. 하지만 여왕의 귀환으로 술렁이는 하인과 그 친구들을 보니 엘자와 하인의 만남이 기대된다. 강지영 소설의 세계는 형형색색으로, 매번 우리를 놀라게 한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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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델리고 마을에서 온 초대장
이선희 지음 / 서랍의날씨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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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델리고 마을에서 온 초대장/ 이선희 장편소설/ 서랍의날씨





<수상한 델리고 마을에서 온 초대장>은 가슴이 아린 소설이다. 그리고 화신과 유하가 서로를 향하는 진정한 마음이 한순간도 떠나지 않는 예쁜 소설이다. 

타인의 고통에 냉담하고 비정한 현실과는 다르게 '가상 '일지라도 함께 분노하고 아파하고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해 주고픈 델리고 마을의 존재가 고마우면서도 아팠다. '죽음' 이후에도 털어버리지 못하는 그 마음을 위로해 주고자 하는 손길이 가지는 한계에 마음이 수차례 무너지면서도 델리고 마을 안에서 나름의 안정과 위로를 찾고 떠나는 영혼들의 빛나는 뒷모습에 안도하며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





서로를 구원하고자 하는

미스터리 영혼 로맨스가 시작된다!





프랑스의 아를이 떠오르는 해바라기가 핀 델리고 마을에서 온 초대장을 들고 마주한 '진실의 세계'는 참담했다. 이선희 작가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조각으로 나누어 꼭꼭 숨겨두고 화신과 함께 우리가 찾아 나서길 격려한다. 겁 많고 소심한 화신이 유하를 둘러싼 과거를 마주하려고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걸음마다 동참하여 '델리고 마을'에 대해, '솔라키움'에 대해, '사자'에 대해 조금씩 알아갈 수 있었다. 










화신은 고통스럽고 무섭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간다. 마침내 유하가 끝까지 감추고자 한 진실 앞에 화신 - 유하 - 강준 모두가 서게 된다. 드러난 진실과 그 진실이 이끄는 결말은 우리가 현실에서 접하는 '학교폭력'의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는듯하였다. 하지만 숨겨진 반전이 있었다. 유하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알고 난 이후에 또다시 걷히는 장막은 이 소설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솔라키움에 머무는 시간에 비례하여 축적되는 정보들로 화신도, 우리 독자도 이야기를 짜 맞춰 갈 수 있었다. 유하의 과거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다른 영혼들의 사연을 통해 델리고 마을이 왜 존재하는지? 왜 화신이 솔라키움에 초대받았는지? 깨달아가는 구조는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했다. 친절하지 않은 작가와 두뇌 싸움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솔라키움에 초대된 파트너처럼 게임을 하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이 시스템에 대해 차츰 이해해나가는 것이다. 화신과 강준처럼. 




<수상한 델리고 마을에서 온 초대장>은 독특한 흐름으로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즐거움이 있는가 하면, '델리고 마을이 왜 존재하는가'와 '유하의 죽음과 화신의 현재'를 둘러싼 잔혹한 진실을 마주하는 고통과 안타까움이 있다. 

'상처받고 고통받은 영혼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기를, 그래서 이승에서 얻은 나쁜 감정들을 전부 내려놓을 계기가 되기를 바랐을 뿐'인 델리고 마을의 존재 이유가 너무 크게 다가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겨우 그 정도인데… 겨우…… 그것조차 이뤄지지 않는 상황을 읽으면서 가상에 끈적한 현실이 덧입혀지는 걸 생생하게 지켜보았다. 











여러 에피소드 중 피해자가 피고인이 되어 재판을 받는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솔라키움 안에서 구현되는 정의는 상처받은 이들의 통쾌한 복수였다. 온갖 거짓과 핑계 그리고 권력과 자본으로 자신의 죄를 지우려는 추악한 이들에게 가해지는 페널티들은 마땅해 보였다. 비록 상상일지라도, 꿈일지라도. 


그리고 이 소설의 큰 줄기인 화신과 연결되어 있는 2건의 학교 폭력에 대한 전말과 결말 또한 여운이 깊게 남는다.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과거로 인해 현재까지 끔찍하게 꼬여버린 화신과 그 주변 인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절로 귀를 기울이게 된다. 









등장인물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작가의 진심이 마음의 문 앞까지 찾아와 쿵! 부딪쳤다. 

피해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당부하고, 영혼이 되어서도 서로를 구원하고자 애쓰고, 상처받은 영혼의 치유를 위해 그들의 아픔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방패막과 목소리가 되어 나서는 사자들을 만들어낸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빛이 되어주었다. 그 빛은 상처받고 고통받은 이들을 소중히 감싸 후련히 떠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관심'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기억하는 우리가 되어야겠다. 




"사기를 친 사람을 탓해야지, 왜 피해를 본 사람한테 책임을 전가하세요? … 오히려 해결을 요구하는 목소리조차 피로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고요."


"타인에 대해 궁금해하면 안 되나요? 때론 누군가의 관심이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요."


"넌 아무것도 안 하지 않았어. 계속 유하를 기억해 줬고, 두려워하면서도 상자를 버리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용기를 내서 게임에 참가도 했잖아."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상처를 치료해 주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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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의 시선 창비청소년문학 125
김민서 지음 / 창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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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의 시선/ 김민서/ 창비출판사





"난생처음 타인의 시선이 궁금해졌다."




<율의 시선>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청소년문학으로 손꼽는 '완득이' '위저드 베이커리' '싱커' '아몬드' '페인트' 등 수려한 작품들을 다수 배출한 창비청소년문학상 17회 수상작이다. 그 위상에 어울리는 청소년의 고통과 상처 그리고 소통과 치유, 연대를 보여주고 있는 먹먹한 작품이다.








율의 시선으로 촘촘하게 써 내려간 이 소설은 '시선그리고 '진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안율은 어린 시절 자신을 지키려다 사고가 난 아빠를 무심히 구경만 하는 타인의 시선에 큰 상처를 입었다. 아빠의 부재와 함께 세상을 향한 시선을 거두었다. 율이는 진심을 드러내지 않은 채 적절한 거짓말로 친구들과 관계를 이어가며 세상에, 타인에, 자신에게 무감각해져 갔다. 그러던 중 자신을 '북극성'이라 불러달라는 하늘 보는 걸 좋아하는 아이 '이도해'를 만난다. 



"내가 죽였어."




율은 타인의 불행을 대하는 이들의 무정하고 무감각한 태도를 접하면서 원래 '인간은 그렇다' 생각한다. 그래서 본인도 무감각해지려 하나 눈을 마주치는 일이 버거워 발에 시선을 두게 된다. 

'인간답다' 율이 믿는 '인간다움'이 '도해'를 만나 조금씩 부서지고 희석되어가는 과정은 담담하게 그려졌다. 별, 고양이, 장례식, 소설 등 자신의 고통을 감춘 채 율과 주변을 살피는 도해의 손길은 자애로웠다. 그래서 더 슬프고 아팠다. '세상일에 관심 없는 괴짜' 율이만 모르는 도해의 상처는 곪고 곪아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 




난생처음 타인의 시선이 궁금해진 율이다. 도해의 눈에는 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익숙한 게 더 아픈 거야. "




아프지 않으려고 무감각해지고자 했던 율은 도해의 이 한마디에 무너졌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너만큼은 너 자신을 떠나지 마.

너는 의미 있는 사람이야."





인간은 원래 무정하고 무감각하다. 이득이 되지 않은 일에는 굳이 나서지 않는다. 거짓이 무성한 세상에서 타인의 시선에 상처받기 싫어 시선을 발에 묶어버린 율을 더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도해가 구원하는 이 장면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솟구쳤다. 



율이가 진심으로 사귄 친구 '도해' 덕분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조금씩 변화가 일어난다. 세상은, 사람은 변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율이가 진심으로 타인을 마주하면서 발이 아닌 눈을 맞추게 된 것이다. 예전처럼 움츠린 방관자가 아니라 마음 통하는 반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율의 모습은 '도해'가 말한 대로 율 스스로가 써내려가는 소설이었다. 



율이 두려워했던 녹색, 저녁이 밤으로 바뀌는 순간의 하늘색, 변화를 상징하는 색이 전하는 따스한 생명의 온기가 책에서 서서히 전해져왔다. 기분 좋을 만큼 적당함이 율이와 율이 엄마가 도해의 집을 청소하고 실종 전단지를 붙이러 다니는 내내 그림자처럼 뒤따랐다. 




"그건 너라는 의미를 만나기 위해서였던 거야.

그럼에도 새는 또다시 날아 보기로 했다."





외면하고 방관했던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살피고 타인과 진심으로 마주하려는 변화, 율이와 도해는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나아갔고, 부서지고 무너지면서 강인해졌다. 이렇게 변화하고 성장한 그들은 이제 열다섯 시린 겨울을 뒤로하고 열여섯 찬란한 봄을 마주하려 한다. 






"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누군가 해결한다니까."

바닥없는 곳으로 떨어지는 듯한 이 아득함 대신 

"떠나는 길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지도록 안아 줄 거아."

진심을 담은 온기를 전하고자 하는 <율의 시선>이 세상 속으로 잘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청소년문학은 부모로서, 어른으로서 나를 바로 세우는 기둥이다. 청소년의 목소리를 담은 소설을 읽으면서 반성하고 깨우치고 성숙해지고자 노력한다. 율의 엄마처럼 포기하지 않고 더 나은 내가 되고자 한 발짝 나아가 보련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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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프팅 다산책방 청소년문학 21
범유진 지음 / 다산책방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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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프팅/ 범유진/ 다산책방/ 다산북스





'오늘날의 학교'에 대한 의미를 묻기 위해 범유진 작가는 '학교가 사라진 세계'를 탄생시켰다. '교육'이 붕괴된 그 지점에서 '학교의 가치와 의미'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로아와 태이 그리고 플레이 그라운드의 아이들이 진정한 행복을 위해 서로 연대하며 변화하고 변화시켜나가는 여정을 함께 하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질문이었다. 




범유진 작가의 신작 <쉬프팅>은 평행세계를 소재로 한다. 많은 콘텐츠들의 소재로 쓰여 이제는 친숙해진 이 가설을 그는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나로아와 박도율은 '끔찍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학교'의 의미는 매우 달랐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로아는 학교가 유일하게 숨 쉴 수 있었던 공간이었으나 반대로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도율에게는 벗어나고픈 끔찍한 공간이었을 뿐이다. 그런 그들은 '엘리베이터 쉬프팅'하여 평행세계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세계에는 '학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마주한 세계는 '학교가 사라진 세계'로,

부모의 재력에 의해 아이들은 디마와 논디마로 나뉘어 디마이에 다니거나 직업훈련 시스템 대상자가 된다.







'쉬프팅' 해온 로아와 도율은 각자 다른 상황에 처한다. 이번에도 로아는 가정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유일한 피난처인 '학교'마저 잃어버렸다. 고된 노동에 좌절하지만, 평행세계의 나로아가 꿈꿨던 내일과 그를 향한 노력을 알게 되면서 달라지게 된다.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곳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는 로아를 보면서 코끝이 시큰해졌다. 선택할 자유조차 앗아가버렸던 공포를 벗어난 그 아이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집'이 로아를 보듬아주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니 못했다는 사실에 미안하고 화가 났다. 한없이 부끄러운 어른의 모습에 래빗의 가면 수십 장이 얼굴에 강제로 씌워졌다.



나왔어. 이게 되는 거였어.




박도율은 원래 세계와는 다르게 디마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평행세계에서도 원래 세계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또다시 '쉬프팅'을 시도한다. 분명 도율이가 처한 환경이 밝지 않다. 하지만 상처가 있다고 누구나 도율이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고 책임을 남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도율이 쉬프팅을 했어도 변하지 않고 꼬이고 마는 현실을 똑바로 마주하고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한 선택을 내릴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란다. 로아가 더 이상 옷장 문을 열지 못하고 모래로 변해버리는 꿈을 꾸지 않고 다른 물고기들이랑 유유히 헤엄치는 것처럼, 거짓말하지 않고 편안히 숨 쉬는 것처럼, 1미터의 저주를 벗어난 것처럼 말이다. 



누구든 나 좀 도와줘.





범유진 작가는 단순히 학교를 '공교육'의 위치에 두고 이야기를 구상하지 않았다. '입시'에 매몰된 진정한 학교의 가치와 의미를 되짚어가는 그의 힘찬 도전에 절로 박수가 우러나왔다. 


원래 세계에서 학원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던 곳이 평행세계에서는 교육 시스템 전반을 좌지우지한다는 설정은 현실 속 '사교육'의 위치와 영향력을 풍자한 블랙코미디로 다가왔지만 충분히 이해되었다. 


자본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협박과 폭력으로 타인을 억누르고 조종하면서 자신들의 이권만을 탐하는 어두운 사회에서도 부당함을 느끼는 이들이 나타나 의문을 나누는 작은 저항의 불씨는 소설이든 현실이든 언제나 평범한 소시민의 마음을 고양한다.



아이들은 말하고 또 말했어.

의문을 나누는 것에서 변화가 시작되었지. 

그렇게 시작된 변화는 멈추지 않았어.

느리지만 계속되었어.

- 쉬프팅 4Day 하이에나 굴에 들어가도 p.110






<쉬프팅>은 자본과 권력이 대물림되어 계급사회가 도래한 세상에서 스스로의 행복과 인권을 찾아 목소리를 내는 아이들의 용기 있는 투쟁이 설득력 있게 그려진 작품이다. 




"모두가 디마이에 갈 수 있는 세계라니. 

그런 게 어디 있어? 나라에서 그 비싼 교육비를 왜 내줘? …

태이 너는 상상이 돼?"


"나도 상상은 잘 안 돼.

하지만 상상하고 싶어."





배움이 허용되지 않은, 기회가 사라진 암흑의 세상에서 아름다운 폭죽을 쏟아올리고 작은 촛불 하나를 나눠 손에 들고 마음에 품은 꿈을 당당히 세상에 밝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진정한 행복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상이다. 

그들과 머무르는 공간 그리고 시간 안에서 우리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 행복을 찾은 로아의 용기 있는 선택과 아직 찾지 못한 도율의 어긋난 행동이 마지막까지 선명하게 대비되며 마음을 격렬히 뒤흔들었다. 부디 모두가 마음껏 행복할 그날을 그리며 이 책 <쉬프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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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점심
장은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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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점심/ 장은진 소설집/ 한겨레출판




손가락으로 훑으면 결이 느껴질 듯한 표지가 안온한 일상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머무는 이가 떠났는지, 아직 오지 안 왔는지 모르지만 살며시 빛이 머무는 곳의 반짝임과 나무 그늘 아래 자리 잡은 두 사람의 편안한 흔적이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고즈넉하게 만든다. 너와 나, 우리의 사랑이 담긴 적요한 소설 『가벼운 점심』이다. 




장은진 작가의 소설집 『가벼운 점심』은 여섯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랑과 고독 그리고 계절을 담은 문장들이 폐부를 찌르며 들어온다. '가볍게' 시작했는데 '무겁게' 삶을 훑는다. 하지만 그 시선이 결코 부담스럽거나 껄끄럽지 않고, '아~ 그렇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며 인물의 시선과 감정을 따라가게 된다. '다행이다' 숨을 내쉬고 힘껏 기지개를 켜며 자연스럽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게 하는 결말까지 감정을 흐트러지지 않게 잘 인도하는, 친절한 이야기들이다. 




"계절이 정해지면 인물들의 말과 생각과 행동에 계절이 입혀지고, 가끔은 계절이 이야기의 전부가 되기도" 한다 말하는 장은진 작가의 말처럼 계절의 냄새와 기운이 이야기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 '맞춤'처럼 대체불가의 영향력으로 이야기를 내 안 깊숙한 곳에 닿게 하였다. 




계절감이 진하게 배어있는 소설은 <가벼운 점심>, <하품>, <나의 루마니아어 수업>, <파수꾼>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품은 이 소설들은 이제 봄기운이 만연해진 5월의 푸르른 하늘을 망각한채 계절의 한복판으로 끌어당겼다. 타인의 감성으로 1년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나는 다가올 계절들에게 설렘을 느꼈다. 어떤 이야기들을 가져다줄 건가.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시간'과 '공간'에 묶여있다는 생각을 했다. <가벼운 점심>의 나는 '아버지가 가출한 10년의 시간'에, <피아노, 피아노>의 남자는 익숙해지지 않는 남성의 모습인 '서울'에, <하품>의 그는 지난날 추억 속 '아내'에, <고전적인 시간>의 그녀는 '권태와 고독'에, <나의 루마니아어 수업>의 나는 '가을을 닮은 눈동자'를 사랑해 '가을'에, <파수꾼>의 강 씨는 '철도 건널목'에 묶여 있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그들이 어떻게 그 매듭을 풀고 시간이 다시 흐르게 하고, 고독과 고요 대신 사랑과 내일을 그리게 되는지 우리들에게 들려주느라 소란스럽다.








가슴을 툭 치고 간 이야기는 <가벼운 점심>이었다. 소설집 제목과도 같은 이 이야기는 자칫 무거운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봄의 기운이 듬뿍 담긴, 벚꽃처럼 미소를 띠고 인정하게 되는 문장력을 보여주고 있다. 갑자기 사라져서 10년 후 조부의 장례에 나타난 아버지의 이야기를 군더더기 없이 불쾌감 없이 적당하게 그려내서 하나의 사건을 부부, 부모 자식, 개인 등 다채로운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구도를 잡은, 인상 깊은 소설이다.  




"이젠 좋아해서 좋아졌어요?

더 좋아졌지. 

봄이 왔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진짜 불행한 사람인 거야."





아버지의 불행을 감지했던 나는 죽지 않고 가출한 아버지를 이해하고 다시 돌아온 아버지를 자신의 결혼식에 초대할 정도로 친근함을 느낀다. 30대가 되고 결혼식을 앞둔 아들이 10년의 시간이 가져온 아버지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사랑'의 감정과 '봄'의 기운으로 충만하게 세심하게 담아내서 좋았다. '포기한 아버지'는 떠나보내고 '봄을 맞이한 아버지'와의 첫 헤어짐이 담담히 펼쳐진다. 




'한점' 사람의 외로움.

사람은 시작부터가 외롭구나. 그래야 만날 수 있어.




고양이가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많다. 고양이는 인물들의 감정선과 행동에 영향을 주거나 드러낸다. 

<하품>의 그는 이름 '루미' 대신 '먼지'로 부르면서 아내가 선택한 공간인 헌책방에 대한 불쾌감을 투영한다. 아내의 사랑을 받는 고양이를 미워하며 서로 대치한다. 하지만 자신이 아닌 타인에 의해 웃음 짓는 아내를 보며 고양이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변화가 흥미롭다. 

그가 사랑한 것은 진정 무엇일까? 

자신이 아내를 살리기 위해 자작곡에 가사를 쓰려 한 것처럼 아내를 위해 자작곡에 가사를 쓰려는 후배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인다. 여전히 아내를 위해 피아노를 치는 그 그리고 그의 연주를 듣는 고양이 먼지를 뒤로 한 채 끈적끈적한 여름은 지나가고 있다. 








<고전적인 시간>에서는 버려진 7년을 책임지고 집을 지킨 주인으로서 고양이 가족이 등장한다. 그녀는 기꺼이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과 가까워지고자 노력한다. 

여름은 고양이의 졸음을 닮았다_213




<나의 루마니아어 수업>에서는 대학 시절 사랑했던 덩어리가 되지 못하고 남은 사람처럼 등에 하트 문양이 있는 고양이를 챙긴다. 가을을 닮은 눈동자, 쓸쓸함을 감당하다 못해 동공이 녹아버린 눈동자를 지닌 그녀를 닮았다 생각한 고양이가 봄의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는 마지막 문장에 가슴이 아릿했다. 그리고 기뻤다. 살아있어서.



<파수꾼> 강 씨에게도 고양이가 달라붙는다. 소리가 사라졌다 들렸다 하는 그에게 고양이는 큰 도움이 된다. 철도 건널목 관리원인 그는 초소가 문을 닫게 되자 고양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친구가 없는 듯한 여자아이에게 고양이를 보낸다.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기뻐하는 강 씨를 보며 고양이가 다시 찾아오겠구나 생각했다. 




끝나는 곳에는 문이 활짝 열려 있고,

우리는 그 문으로 한 발짝만 내밀면 되는 거야.




고양이가 말하는 끝과 강 씨가 그리는 끝이 갈라진 후, 그들의 새로운 시작이 기대된다. 강 씨의 귀에 또렷이 들리는 '야옹' 소리가 희망의 불씨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외로운 '한 점'에서 시작되었을 한 사람이 살아오면서 반복되는 것 같은 계절이라도 사랑을 만나기도, 고독과 권태를 느끼기도 하면서 특별한 시간이 된다. 다시 오지 않을 지금의 계절들이 쌓여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한겨레 하니포터8기 자격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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