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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데니스 존슨 외 지음, 파리 리뷰 엮음, 이주혜 옮김 / 다른 / 2021년 11월
평점 :
색다른 단편집이다.
장르의 대가 열다섯 명에게 <파리 리뷰>에서 발표한 단편소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 하나를 고르고 그 이유를 서술해달라고 부탁하여 만들어진 책이다.
그동안 접해본 단편집은 한 작가가 일정 기간 동안 쓴 단편소설들로 엮은 책이나 동일한 주제에 대한 앤솔로지 책이었다. 그래서 결이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무언가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덩어리였다. 그런데 이 책은 색다른 시도처럼 각자의 빛깔을 발산하고 있다.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파리 리뷰 엮음/이주혜 옮김/다른 출판
1950년대 작품부터 2010년대 작품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채워진 이 단편집은 나를 작은 문 앞에 서있는 앨리스처럼 느껴지게 했다. 저 문 너머 무언가 색다르고 재밌는 일들이 펼쳐질 것만 같아 꼭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두리번거리던 그 호기심 가득한 작은 소녀로 말이다.
열다섯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단편소설만의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짧은 분량 안에 말하고자 하는 바를 녹여내는 작업이 얼마나 힘겨웠을지 가늠할 만한 작품들을 편안히 읽다 보니 괜스레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리고 어떤 작품은 생경한 흐름에 추상화를 앞에 둔 미술 초보자처럼 작가의 의도를 읽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한자 한자 눈에 힘을 주며 읽어나갔다. 어떤 작품은 이해가 되지만 공감까지 이끌지 못했고, 어떤 작품은 물웅덩이에 던져진 단어들을 건져내다 끝나버렸다. 하지만 서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존재조차 몰랐던 세계를 발견하는 일'에 대한 순수한 기쁨이 넘치는 시간이었다. 좋아하는 작가인 F. 스콧 피츠제럴드 같은 느낌을 받은 『궁전 도둑』나 『춤추지 않을래』, 『방콕』, 『늙은 새들』, 『라이클리 호수』, 『플로베르가 보낸 열 가지 이야기』, 『브리지 부인의 상류사회』 등 대부분의 단편들이 각기 다른 맛으로 인생을 묘사하고 다양한 삶의 단면들을 나열하고 있다. 때로는 비겁하게 침묵하다가도 마지막에 비틀고, 성실하면서도 은밀한 유혹을 즐기고, 불안정한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애써 모른체하다가 위기를 맞게 되는 모습들이 펼쳐진다.
『플로베르가 보낸 열 가지 이야기』 중 '치과 방문' 중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생각이 움직일 수 있는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아래로 흐르는지 궁금해.'(353)
이야기의 힘이 느껴지는 구절이다. 이렇게 자연스레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건 좋은 글의 힘이자 역할일 것이다.
중장편에 비해 짧은 분량 안에 서사를 담기 위해서는 '생략'의 미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제프리 유제니디스'가 『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데니스 존슨 작)』를 고른 이유를 설명하는 글에서 1,000개의 단어가 조금 넘는 이야기에서 어느 비 오는 밤에 일어난 사고를 통해 개인이 영원에 맞서는 서사를 전달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히고 있다. 아마도 데니스 존슨이 발표한 『예수의 아들』에 수록된 작품 같아 찾아봤지만 아쉽게도 국내 번역본은 없는 듯하다. 단편소설이니 한편 그 자체로 완성도가 훌륭하겠지만, 단편집으로 나왔으니 같은 결을 지닌 단편들과 같이 감상하면 좋았을 텐데 서운함이 크다.
말에서 떨어지면서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이후로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롭고 날카로웠다. ...... 그는 마비 상태가 최소한의 대가라고 합리화했다. 이제 그의 지각과 기억은 절대적으로 정확해졌다. (모든 걸 기억하는 푸네스_288)
신이 나면서도 슬픔을 닮은 피로함을 느끼며 천천히 내 방 창문을 향해 올라갔다. 몸을 숙이고 창틀을 통과해 침대에 뛰어들어 잠들었다. (하늘을 나는 양탄자_202)
우리 작가들은 어쩌면 너무 많은 이야기를 지어내는 지도 모르지. 그런데 언제나 현실이 훨씬 더 나빠! (플로베르가 보낸 열 가지 이야기_354)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삶에 무지한 채로 생이 담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들을 전혀 보지 못하고 오랜 세월을 스치듯이 지나 서서히 잔잔한 무덤으로 가라앉는다. (브리지 부인의 상류사회_423) 그녀는 세상이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아 투표기의 손잡이를 당겼다. (428)
이 책을 통해 우리는 30명의 작가를 소개받았다. 와우~ 놀랍지 않은가.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세계가 이렇게나 넓고 무한하다는 사실에 새삼 감복한다.
『브리지 부인의 상류사회』처럼 부드러운 연민을 자아내는 작품에서부터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있고,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잊지 않지만, 위선은 아니지만 깨치지 못한 우물 안 개구리처럼 무지한 채로 살아가는 브리지 부인의 모습은 서글프기 그지없다.
『스톡홀름행 야간비행』처럼 기괴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깔이 존재하는
▶▶위트 넘치게 <파리 리뷰>에 작품을 간절히 올리고 싶어 하는 초로의 소설가가 에이전트와의 거래를 통해 자신의 신체 부위를 조건으로 소설가로서의 명성을 쌓아간다는 내용이다. 훼손되는 신체 부위와 함께 편집상의 조언들이 계약 조건으로 거론되는 데 기괴하기 그지없다.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파리 리뷰가 전하는 매력적인 단편집을 추천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