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들의 모국어
권여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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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꾼들의 모국어/ 권여선 산문/ 한겨레출판





웃다가, 입맛 다시다가, 어느새 술상을 차리게 만드는 책, 바로 권여선 작가의 <술꾼들의 모국어>다. 2018년 출간되었던 <오늘 뭐 먹지?> 작품을 2024년 개정하여 출간한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권여선 작가가 이토록 '술과 안주'에 심취한 분이었던가? 고개를 갸웃하며 읽기 시작했다. 역시 먹는 것을 좋아하는 1인으로 순식간에 빠져들어서 "해 먹어봐야겠다. 맛있겠는걸. 저런 수고 끝에 맛있는 음식이 아니 안주가 탄생하는 거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피식거리다가 박장대소를 하게 되는, 묘한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이 책, 예사롭지 않다. 




목젖이 바르르 떨려온다.(67쪽)

단식이 짧은 죽음이라면,

단식 후에 먹는 죽과 젓갈은 단연코 부활의 음식이다.(69쪽)

공부와 음주의 공통점이 있다면 미리미리 준비해야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것이다. 아니, 생각해 보면 세상 모든 일이 그렇다.(118쪽)







간지에 권여선 작가가 손글씨로 가득 남긴 편지는 일종의 초대장이다. 본인이 엄선한 안주 메뉴판을 건네고, 안주를 성심껏 고르고 한 잔 같이 기울이기를 청한다. 마음이 혹해 얼른 자리에 앉고 싶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계절에 걸맞은 안주들을 면밀히 살펴본다. 



익숙한 음식 아니 안주들도 그의 표현으로 만나니 특별식처럼 느껴진다. 안주와 얽힌 이야기 덕분에 더 풍성해진다. 김밥, 만두, 순대 같은 친근한 음식들이 추억 속 인물들을 소환하여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삼시 세끼 다른 김밥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글을 쓰는 작가를 상상하게도 한다. 



매운맛을 좋아하는 저자가 추천해 주는 여름 안주들은 특색 있다. 매운맛을 좋아하여 청양고추만 엄청 썰어 넣은 고추전을 부쳐 먹는지라 매운 음식들 레시피들이 더 눈에 띄었다. '깜장'과 '고추장물'이다. '가슴속 깊숙이 구수하고 복잡하고 그리운 불이 난다'라는 감각적인 표현에 지나간 여름을 다시 뒷걸음질 치게 만들까? 싶었다. 








'목에서 손이 나온다'라는 표현이 재밌었다. 음식에 진심인 마음과 그만큼 맛에 민감하여 정성을 쏟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술과 안주 그리고 사람이 함께 하는 그 공간과 시간에 이야기가 쌓여갔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우리 독자들에게 들려준 또 다른 이야기의 재료가 되어주었다. 


음식에 정성을 다하시는 저자의 어머니 덕분에 새로운 음식들을 접했다. 사투리인지 구수한 어감으로 불리는 음식들은 괜스레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까죽', '까막고기' 음식에 담긴 저자의 어머니의 자식을 향한 사랑과 정성이 친정 엄마의 손맛 담긴 음식들을, 추억들을 떠오르게 했다. 







음식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니 배는 허기지고 혀는 친구 식도와 인사할 순간만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머리는 새로 입력된 음식들과 잊혔던 과거의 음식들을 재배치하느라 분주하다. 

"술을 좀 줄이자. 죽을 때까지 먹게."가 '인생의 한 마디'라 밝힌 진정한 술꾼 권여선 작가의 사계절 안주 여행은 더할 나위 없이 넉넉하고 만족스러웠다. 



권여선 작가님, 술 한잔하실래요?

안주는 냄비국수 어떠세요? 이제 가을이잖아요.



첫 맛을 잊지 못하는 이들이여, 그 혀를 소중히 여기소서.

언제나 한결같은 '맛'을 행복으로 아는, 그 맛을 지키는데 목숨을 거는 권여선 작가의 다음 주류문학 작품을 기다린다. 일단 아쉬움은 단편소설 《자전거, 캔맥주 그리고 곰》으로 풀어본다. 캬~ 목은 시원한 맥주를 넘기고, 손가락은 책장을 넘긴다. 



한겨레 하니포터9기 자격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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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퍼
고정욱 지음 / 생각학교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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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요동치게 하는 소설

마지막 반전에 생각이 깊어지는 소설

바로 [가방 들어주는 아이]부터 청소년·어린이 문학에서 큰 획을 그어온 고정욱 작가님의 신작 [점퍼]이다. 




점퍼/ 고정욱 지음/ 생각정원




2024년 폭력을 휘두르는 알코올중독 아버지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중학생 박창식. 돈도 꿈도 의욕도 없는 창식이는 아버지와 마찰 후 1928년 일제강점기로 타임 슬립하게 된다. 

"창식아…" 부르는 소리에 일어나 보니 난데없이 빡빡 머리 남학생이 학교 늦는다고 채근을 한다. 평안북도 정주에 떨어진 그는 자신과 같은 이름인 그 시대의 박창식으로 오산중학교 학생으로 생활하게 된다. 

자신의 환경에 좌절하여 무기력하게 살아오던 창식이는 나라 잃은 설움의 시대에서 김소월, 백석, 이중섭과 함께하면서 시나브로 변하기 시작하는데……











고정욱 작가는 힘 있고 흡입력 강한 스토리텔링으로 억압당해 서러운 하지만 독립을 향한 강한 불씨를 품은 1928년 평안북도 정주로 독자들을 소환한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처럼 예술로 한민족의 마음을 응집하여 강인하고 뜨거운 열망을 생생하게 분출하고 있다. 두렵더라도 옳고 바른길을 가고자 하는,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눈에 띄는 방법이 아니더라도 목표를 향해 유연하게 다부지게 그들의 방식대로 헤쳐나가는 학생들의 결의는 읽는 이조차 그 안에 뛰어들어 함께 걸어갈 만큼 단단했다.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겠지만 

시기와 시간, 장소에 따라 해결법이 다를 거야. 

그 방법도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야. "






창식이는 가난한 현실과 회사 비리를 고발하였다가 도리어 배척당해 술에 의지하게 된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꿈꾸지 않는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그 어두컴컴한 시간에도 문학과 그림에 매진하는 친구들 덕분에 몸과 정신이 깨어나고 성장하는 여정이 펼쳐진다. 





"고문이든 미움이든 그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르고, 

언젠가는 끝날 거란 희망도 없어서 더 힘든 게 아닐까. 

그 두려움에 우리 아버지들이 무너진 거라고 생각해."





<진달래꽃>, <산유화> 한민족의 정서와 한을 담은 민족저항 시인 김소월, <사슴> 한국 모더니즘과 향수를 그린 시인 백석, <황소> 향토적이고 자전적인 요소로 역동적이고 동화 같은 세계를 그린 화가 이중섭. 

한국사의 굵직한 예술가들을 한자리에 모아 예술이 지닌 힘과 가치를 현실적으로 생생하게 담아내어 그림 그리는 취미를 가졌음에도 예술을 무시하던 창식이의 눈을 뜨게 만든다. 





"사람들이 모이면 정보를 나누고, 

거기에다가 누군가가 저항하자는 정신을 집어넣으면 

바로 그런 정신이 쌓여서 힘을 가지게 되는 거야. 

뿔뿔이 흩어져서 문화 활동도 없고, 예술 활동도 없다고 생각해 봐. 

영원히 우리는 일본의 종노릇을 하는 것 아니겠니?"


 


그저 입으로, 머리로만 투지를 적극적으로 내비치던 중학생 창식이는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기에 우리 민족의 독립을 향한 염원과 투쟁을 함께 하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더욱이 자신이 과거로 오게 되면서 현재로 오게 된 과거의 창식이가 불러온 변화는 큰 깨달음을 주었다. 비참한 현실을 그저 비관한 채 꿈꾸지 않았던 자신과는 달리 바꾸고자 행동한 창식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일어설 수 있게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사람들을 한데 불러 모았다. 



"소는 순하지만 힘을 쓸 때는 무서운 능력을 발휘해.

느리게 걷는 거 같지만 달릴 때는 사람이 따라갈 수가 없지.

나는 그게 멋있어.

우리 민족이 지금은 억눌려 있고 고삐에 매여

농부에게 끌려가는 것 같지만,

한번 마음먹으면 큰 힘을 발휘할 거라고 나는 생각해.

언젠가 화가 나서 돌진하면 주인을 떠받아저릴 거야."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더해 생생한 현장을 그려낸 작품 [점퍼]

창식이가 왜 1928년 평안북도 정주로 타임 슬립해야만 했을까? 김소월, 백석, 이중섭, 박창식, 이말순같이 나라와 민족의 아픔을 끌어안은 이들이 있는가 하면 친구를 밀고하는 마영일 같은 친일파도 있었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일제의 총칼에 쓰러진 민초들이 잠든 대지 위에 마영일의 후손들이 공직자로 풍족한 삶을 영위하는 장면에서 소설은 끝맺는다. 










물질적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자신과 오늘을 되돌아보는 울림을 주는 소설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내 창식이가 떠올리는 우투리 설화가 기억에 남는다. 재밌으면서도 몸과 마음을 요동치게 만드는 [점퍼], 아이들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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겅클
스티븐 롤리 지음, 최정수 옮김 / 이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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겅클/ 스티븐 롤리 소설/ 이봄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참았던 긴 숨을 내뱉었다. 상실의 사막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와 바스락거리는 몸을 물에 담그는, 용감한 생존자 겅클 패트릭을 보면서 울컥했다. 장장 550여 페이지 내내 끊임없이 매력을 뽐내던, 상처 입은 영혼이 그저 존재하는 데 멈추지 않고, 진정으로 살아가는 오늘에 뜨거운 무언가가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흘렀다. "바로 그렇게 하는 거야."



신랄하면서도 유쾌하고, 슬프면서도 즐거운 겅클과 조카아이들의 상실 극복기는 긴 여운을 남겼다. 극중 인물의 말처럼 아이들을 작은 어른처럼 대하는 패트릭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그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조카아이들 메이지와 그랜트가 패트릭을 거리낌 없이 겅클, 거프로 부르거나 에머리를 삼촌의 남자친구로 여기는 모습을 보면서 문화적 차이를 느꼈다. 

"바이러스로 전멸한 세대지만, 우리의 삶은 여전히 축하연이에요. … 차별을 당했지만 이제 정치적 힘을 지닌 집단이 되었다고요." 에머리가 패트릭에게 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사회에서 그들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이는 녹록지 않은 역사를 품고 있으며, 패트릭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인 JED, 에머리는 살아가는 방식을 체득한 듯 보였다. 패트릭이 지나온 시간이 '겅클 패트릭'이라는 특별한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그의 성 정체성, 세라와의 우정, 조와의 사랑, 배우 인생 그리고 조와의 이별 등 그 모든 것들이 그를 빚어냈다. 너무나도 뚜렷하게, 아름답게. 







조와의 이별 후 은둔 생활을 하는 패트릭에게 세라와 그레그는 자신의 아이들을 기꺼이 맡겼다. 아이들이 마주한 상실과 그가 겪었던 또 겪은 상실이 서로를 유대하고 공감하고 치유할 에너지를 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리고 그만큼 패트릭을 신뢰하고 사랑하고 아꼈다. 사랑하는 조를 황망히 잃고 TV 스타로서의 영광과 인기를 묻고 슬픔을 고요로 포장하여 뜨거운 사막에서 은둔한 채 살아가는 가여운 겅클 패트릭을 생생한 공간 속으로 소환하고자 하였다. 



자신이 아이들을 책임지고 돌봐야 한다는 사실에 막중한 부담을 느낀 패트릭과 엄마 세라의 부재를 받아들여야 하는 아이들 메이지와 그랜트는 '겅클 규칙'을 만들며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서툴지만 그만의 어조로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패트릭과 갑자기 부모 모두 옆에서 사라진 현실에 적응해야 하는 아홉 살 메이지와 일곱 살 그랜트 남매는 90일의 동거를 시작한다. 엄마의 죽음과 아빠의 중독 갱생 치료로 한꺼번에 빈 부모 자리를 유쾌하고 독특한 겅클 패트릭이 차지한 것이다. 






패트릭은 혼성어를 즐겨 사용하고 평범을 거부한다. 아마 조의 죽음 이후 그와 함께 나누고 싶었던 평범하고 안온한 일상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가족을 비롯한 옛날의 영광과 교류하지 않고 숨어 있던 그는 조카들과 유대감을 쌓아가며 관계로 충만한 행복감을 만끽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찍은 유튜브 영상에 반응하는 대중들을 인지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도모하게 된다.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이 펼치는 현재의 일상과 관련 있는 과거의 추억이 교차되면서 패트릭의 내면과 상처를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 조를 잃고 또다시 십 대 시절 전부였던 자신의 사람 세라를 떠나보내야만 했던 패트릭. 그의 인생에서 소중한 두 사람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채 떠나보내야만 했던 그가 감내했을 아픔에 오열하고 말았다. 글 속에 갇힌 아픔이 절절하도록 느껴졌다. 그런 그에게 메이지와 그랜트는 선물이었다. 그의 사람이었다 그레그와 아이들의 전부가 된 세라가 남긴 선물. 





너희 엄마가 결코 너희를 떠날 수 없듯이

너희도 엄마를 떠날 수 없어.




캐릭터들의 넘치는 매력과, 진정 어린 관계에서 배어 나오는 친밀감과 아늑함과, 상실을 외면하지 않고 일상에서 담담하게 받아들여나가는 성숙한 자세가 어우러져 만찬 같은 책 읽기였다. 패트릭처럼 오스카 와일드에 푹 빠져버렸다. 
겅클 패트릭, 이제 괜찮죠? 
이렇게 또 하나의 징표가 생겼다. 영원히 사라질 어린 시절의 징표. 


네가 앞으로 인생이 수월해질 거라고 했잖아.

그럴 거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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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의 머리가 있는 방 트리플 26
단요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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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의 머리가 있는 방/ 단요/ 트리플시리즈26/ 자음과모음




단요 작가와의 세 번째 만남, '한 개의 머리가 있는 방'
'다이브'와 '수능 해킹'에 이어 접한 단요 작가의 또 다른 세계는 기묘하고도 경탄스러웠다. 현실을 마주하고 그 책임을 통감하고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한 길을 만들고 다지는 여정들이 이토록 다채로운 빛깔을 띨 수 있을까!

단요 작가가 이번 이야기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트리플 시리즈답게 파격적이고 난해하다. 활자와 문맥 사이에 깃든 작가의 진심 어린 뜻을 짚어나가는 길 위에 재미와 사유가 함께 한다.


트리플 시리즈는 3가지 이야기와 작가 에세이로 구성된다. 소설 1 [한 개의 머리가 있는 방], 소설 2 [제발!], 소설 3 [Called or Uncalled], 에세이 [토끼-오리가 있는 테마파크]로, 소설 세 작품 모두 SF와 판타지 그리고 제도권 문학의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며 기묘함을 자아내는 장르인 '슬립스트림'로 구분된다.








표제작인 [한 개의 머리가 있는 방]은 뇌 상태로 존재하는 제약회사 건록 그리고 그와 몸을 공유하는 목향, 건록의 대리인 서장경이 등장한다.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미워서도 아니고, 그냥, 그냥 해도 되는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을 판단할 능력이 부족해서, 재미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인 건록이 벌이는 일련의 사건들이 흥미롭다. 정신을, 뇌 데이터를 업데이트한다는 설정은 익숙하지만, 머리만 존재하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접속하여 삶을 영위한다는 발상은 독특하다. 재미로 자신을 '하느님'으로 속이고 목향에게 말을 거는 건록과 그의 존재를 어느 정도 눈치챘으나 괘념치 않는 아이 목향, 건록에 의해 죽을 뻔했으나 그의 곁에 남은 서장경의 관계가 복잡 미묘하다.


"슬슬 재밌어지려는데 벌써 포기하는 거야?"


소설 [제발!]은 구원과 죄 그리고 종교와 과학을 소재로 현실의 인류를 미래의 어디 시대에서 그려내고 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죄가 필요했다.
그러니까 제발……"



가족을 떠나 '별의 안내자'라는 종교에 심취한 누나가 보내온 수표와 편지를 태워버리던 '나'는 어느 날 편지를 뜯어보게 된다. 누나의 죽음 그리고 남겨진 유산은 그를 연방을 떠나 별의 안내자 본부가 있는 브루클린으로 향하게 한다. '나'가 누나를, 아버지를, 어머니를 이해하고자 떠나간 여정의 끝에서 현실이 마술과 같다는 걸 깨닫는다. 속임수를 알아내려고 애쓰지 않으리라.


소설 [Called or Uncalled], 이 작품이 제일 난해했다. '나'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진실인지 환상인지 경계가 모호했다. 검은 머리 소녀, 누나, 검은 꽃들의 이미지가 교차하면서 도시를 바라보는 '나'가 떠오른다.
'재건을 위해서는 파괴가 필요하지만 최소한의 형체는 남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나는 기꺼이 끝까지 밀어붙이고자 마음먹었다. 망가진 세계를 어디까지 재건할 수 있을지는 어려움을 부단히 마주하려는 이들에게 달렸으리라.


단요적 슬립스트림이 보여주는 세계는 파괴적이면서도 내일을 바라보고, 거짓말 같으면서도 고통을 수반한다. 모두 떠나고 어둠에 잠긴 방에서 한 개의 머리는 그늘을 연습한다. 세상의 위기를 바라보는, 마주하는 더 나아가 오늘을 넘은 내일을 희망하는 단요의 문제적 이야기는 힘차게 퍼져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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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 역사에 연루된 나와 당신의 이야기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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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조형근 지음/ 한겨레출판




19세기 말 ~ 20세기 중반 근대사를 관통하는 통찰력 넘치는 시선으로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이야기, 바로 조형근 저자의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다. 



'역사에 연루된 나와 당신의 이야기'라는 부제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를 역사 속으로 이끈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이, 우리의 선조가 지나온 시간처럼 역사임을 그 지속성을, 연결성을, 책임을 일깨워 준다. 







시사주간지 <시사IN>에서 연재되었던 <조형근의 역사의 뒤페이지>를 책으로 엮었다. 총 18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동양의 작은 나라 한반도가 연루된, 아시아와 유럽, 미국 등 여러 나라들의 인물을, 사건을, 역사를 풀어놓는다.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시작된 독서는 조형근 저자의 예리하고 명징한 서술로 역사를 더 깊숙이 들여다보고 사고할 수 있었다. 에피소드 마무리에 그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이 남겨진 과제이자 살아가는 자세가 되어줄 묵직한 울림을 건네는 책이다. 


조형근 저자는 "거칠고 자의적인 표현은 가급적 삼가려 한다"면서도 1장에서 "역사가 후퇴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밝히고 있다. 공명하며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좀 더 눈과 귀를 기울이게 된다. 자리에 걸맞은 언행과 책임의식 그리고 사명감을 절절히 바라게 되는 요즘, 숨이 트이는 문장이 이토록 반가울 수가 없다. 




희생자들과 연결되는 방식은 비극이 남긴 과제를 직시하고 해결하는 데 있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분리되지 않고 서로 얽히고설켜 되새김질하듯 인물이나 사건들이 등장하여 환기시킨다. 이는 알게 모르게 연결되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역사의 뒤페이지답게 소설, 영화, 노래, 스포츠 등 친숙한 소재로 이끌어내는 역사적 사실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참담한 비극 앞에 이토록 작은 호의가 도무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묻게도 된다. 다만 어쿼트는 이를 기억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그래서 우리가 알게 됐다. 희망은 어쩌면 여기서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당대에 미국 작가 중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작가인 잭 런던은 한국인을 혐오했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은 끔찍했다. 겁 많고 나약하며 게으르고 도둑질 잘 하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이가 바로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죽이고 싶은 욕구를 느낄 정도로 한국인에 대한 강한 혐오를 피력한 잭 런던은 서구 문명의 우월성과 서구에 의한 세계 지배를 당위로 받아들이는 사회진화론자였다. 약육강식이 세상의 진리라 믿는 사회진화론자들이 조선에도 있었다. 유길준, 윤치호. 조형근 저자는 이런 사상이 얼마나 무서우면서도 무지한지 잘 짚어준다. 약소민족, 피지배자인 조선인이 이런 자학적인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는 빤한 일이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폄하한 3.1운동의 의의가 잘 말해주고 있다. 




<상하이 릴>, <상하이에서 돌아온 리루>, <에레나>, <나비 부인>, <미스 사이공>. 동양 여성을 향한 서구의 환상을 다루면서 한국 현대사에서 망각되는 이야기를 들추어낸다. 일본 제국주의가 만든 위안부에서 비롯된 양공주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이다. 조형근 저자의 균형 잡힌 시선이 인상적이다. 아물지 않는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의 고통을 어떻게 마주하고 보듬아야 할 것인가. 




타자에게 입힌 상처를 기억할 때만, 우리가 입은 상처도 보듬을 수 있다. 그 균형을 잡기 전까지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너의 이름은>, <콰이강의 다리>, <바베트의 만찬>, <사운드 오브 뮤직> 등 유명한 영화들이 역사적 사건과 비극과 연결되어 확장되어간다. 단순히 향유하고 감동받는 데 그쳤던 감상이 비평을 넘어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고 사유하는, 의식적인 활동으로 이어졌다. 


신일선, 나혜석, 박인덕, 이덕요, 이애리수, 이순탁, 이미륵 등 시대를 넘어 자신이 믿는 신념대로 열정적으로 살아간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양철북>, <만세전>, <무정> 등 문학작품으로 세상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동정을 넘어 해결로, 연민을 넘어 연대로 가는 길이 아직 먼 이유다. 그래도 그 길을 포기할 수 없어서 다짐하는 말이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같은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동지들을 믿지 못하고 의심해야 하는 고통, 참으로 무섭다. 일제가 심은 의혹의 씨앗, 밀정. 혁명가들은 사방이 캄캄한데 별 없이 걷는 법을 배워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별 없이 걷는 법을 배워야 했다. 상처 입은 채 서로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그 걸음을 생각하다 보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이토록 연결되어 있었던가. 새삼 무심히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무지가 결코 면죄부가 아님을 무겁게 느끼는 시간이었다. 연결된 이 세계를 외면하지 말고 들여다보며 연대하는 걸음을 익히도록 이끌어주는 책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다. 




한겨레 하니포터9기 자격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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