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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무죄 세계의 사랑법 - 범죄 너머에서 발견한 인간에 대한 낙관
정명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7월
평점 :
'한겨레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유무죄 세계의 사랑법/ 정명원 지음/ 한겨레출판사
스스로를 외곽주의자, 비주류, 이끼 같은 검사라 부르는 정명원 검사 아니 작가의 신작 [유무죄 세계의 사랑법]이 출간되었다.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의 결이 좀 더 풍성해지고 농후해졌다.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머문 전문가 다운 굳은살을 지녔으면서도 인간에 대한 낙관을 품고자 애쓰는 그 다정함이 오롯이 전해졌다. 봄날의 햇살처럼 읽는 내내 평온하고 따사로운 시간이었다.
정명원 검사는 '검사'하면 떠오르는 스테레오타입을 허물고 '검사'를 재정의해 준 인물이다. 유무죄의 결과만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범죄 안팎의 서사와 맥락을 이해하려 애쓰는 정 검사와 다른 검사들의 분투기는 '검찰 국가'의 배신으로 무너진 검찰의 위상을 다시 다지게 해준다.

[유무죄 세계의 사랑법]은 이야기꾼이 되고 싶은 한 검사가 전하는 진심이다.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법에 입각하여 유무죄를 판단하는 냉철한 세계에서 '사람'을, '선의'를 확신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믿으려 애쓰는 마음이 숭고하다. 이렇게 제각각 제자리에서 사람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는 유지되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정명원 검사도 '심쿵 요정'이다.
[유무죄 세계의 사랑법]은 세 개의 꼭지로 구성되었다. 사건 외곽의 풍경들, 유무죄 세계의 사랑법, 시골지청 안단테이다.
사건 외곽에서 피의자를 비롯한 풍경들을 바라본다.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은 아닐지라도 사건 하나하나 품고 있는 맥락을 들여다보는 정성이 보였다. 범죄를 들여다보니 개인이 보이고, 개인을 들여다보니 기업, 가게, 사회 등 시스템이 보였다. 범죄의 이유와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수고를 넘어 기억에 남는 사건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많이 들어본 이웃 같으면서도 낯선 타인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유무죄 여부를 떠나 해피엔딩을 바라는, 검사들의 염원을 내비친다.

세상 어딘가에 존재해야 마땅한 곳이 구치감인 외국인 여성의 이야기는 시작부터 끝까지 먹먹하게 하였다. 이 서러운 이야기의 결말이 부디 정 검사의 바람처럼 희망적이길 간절히 빌어본다.
장 검사는 의사에서 검사로 전향했다.
"의사로 일할 때랑 검사로 일할 때 가장 다른 점이 뭐야?"라는 질문에 "의사로 일할 때는 환자가 하는 말을 의심하지 않아요. 의심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검사는 진술이 거짓말일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하잖아요. 습관이 안 되어 그런지 그게 참 어렵더라고요."고 답했다. 매일 속는다면서도 끝끝내 진실을 믿고자 하는 일에 대하여, 끝내 믿어야 할 지점에 대한 그들의 고뇌가 읽힌다.
'유무죄의 세계의 사랑법'에서는 다양한 시간과 공간의 정명원 검사를 만날 수 있었다. 초임검사로서, 부장검사로서, 직장인으로서, 엄마로서, 개인으로서 인간 정명원을 채워나가는 시간이었다. 검사로서 18여 년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원동력 혹은 투지를 엿보았다. 사표를 품고 사는 여타 직장인처럼 꿋꿋이 하루를 채워나가는 그 옆에는 항상 '사람'이 있었다. 들어주고, 격려해 주고, 사랑해 주는 동료들, 가족들이 있었기에 회의주의적 친애주의자 정명원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나의 사건이 생겨나 마침내 종결되었다고 하기까지 사건의 길은 멀고 다양하다. 사건의 전체 여정에서 한 사람의 검사가 관여하는 부분은 극히 일부라는 것을 이 책에서 새삼 깨닫는다. 그래서 두려워도 기어이 따라가 그 끝을 보고야 만 선배 이야기는 묵직했다. 밀려오는 사건의 파도 속에 적당히 잊어가는 게 보편적인 세계에서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지점을 기꺼이 두려워한 사람' 그리고 '그가 마주할 수 있는 한 단계 다른 도약의 지점'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시골지청 안단테'에서는 상주지청장으로 근무한 시간을 담았다. 상주지청 검사 BTS, 심쿵 요정들, 곶감 시티 상주와 지청의 공생, 징검다리와 스타벅스 등등 7개월 정도의 짧고도 긴 여정 보따리를 소담하게 풀어놓는다. 잘 울지 않는다는 그가 떠나는 마지막 발걸음에 길고 깊은 울음을 토해냈는지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는 동행이었다. 검찰청이 이런 곳인가? 검찰청 사람들이 이런가? 싶을 정도로 정감 어리고 열정적이고 포근한 공간과 사람들이었다.

[유무죄 세계의 사랑법]을 읽다 보니 검찰청이 마냥 차갑게 다가오지 않는다. 검사도 사람이구나. 마냥 고개 뻣뻣이 들고 유죄를 선고하는, 냉혈한은 아니구나. 수많은 사건들이 쏟아지는 매일을 보내면서도 진실을 찾기 위해 기꺼이 배우고 실험하고 파헤쳐 간략하고 명확한 사실관계로 정리하는, 뜨거운 사람이구나.
무너진 곳을 향한 비난의 시선을 거두고, '진창에 처박힌 존재의 안간힘과 함께 기꺼이 일렁이는' 검사가 되려는 그들을 향해 응원과 신뢰를 보내야겠다. 단순히 벌하는 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하늘이 무너지는 일을 막으려 애쓰고, 무너지는 하늘 아래 속수무책 서 있는 누군가의 곁에 같이 서 있으려는 검사를 어찌 외면할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