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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미술관 - 다정한 철학자가 들려주는 그림과 인생 이야기
이진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평점 :
"내 앞에 거대한 곰이 버티고 있을 때,
그걸 뒤집어 문이 되면 열고 나가보자."
언니네 미술관/ 이진민 지음/ 한겨레출판사
이진민 작가의 [언니네 미술관]을 덮고는 긴 숨을 내쉬었다. 이 언니, 참 멋있다.(얼굴도 모르는이지만, 언니라 친근하게 부르고 싶어졌다).
'다정한 철학자가 들려주는 그림과 인생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이 책 덕분에 숨통이 트였다. 이분법과 강한 확신과 관념들로 딱딱해진 세상을 조몰락조몰락 매만져 유연하고 다정하게 변화시키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달라지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세상을, 타인을 들여다보는 글인가 보고 있노라면 결국 나를 마주하는 글이었다. 나 안에 굳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들을 탈탈 털어내고 다시금 채울 수 있었다.
대단한 누군가가 아니라더라도 과거의 나를 인정하고,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고, 내일의 나를 기대하게 만들어주었다. 지금 내가 딛고 서있는 배경 속에서 그저 무심히 스쳐 지나온 수많은 감정들, 존재들, 생각들을 살펴보는 시간이었다. 찬란한 순간 대신 평온한 일상이 우리 삶을 쌓아 올린 토양이자 자양분이었음을 깨달았다.
'말씀'이 아니라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그저 보드라운 '숨소리'만으로도
좋다고 믿는다.
나의 하찮음을 깨닫고 편안해진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수한 작은 목소리와 숨소리들도
세상에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p.218 (part02. 크게 바라볼 것들 3장. 사소함, 익숙함, 하찮음 * 결코 사소하고 하찮지 않은 것)
이진민 작가는 다시 바라볼 것들 - 근육, 마녀, 거울, 크게 바라볼 것들 - 슬픔, 서투름, 사소함 ㆍ 익숙함 ㆍ 하찮음, 함께 바라볼 것들 - 직선과 곡선, 앞과 뒤, 너와 나, 이렇게 3가지 큰 영역으로 나눈 9가지의 단어 목록으로 세상의 존재들에게 말을 건다.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고 그 이야기가 스며들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꿈꾼다. 그렇게 우리들의 공간에 의자가 많아지기를 바라는 듯하다.
저자는 구분 짓고 나누는 세상의 관념과 잣대들을 자신의 다정한 무기로 허물고 부수어 이어가고자 애쓰고 있다. 철학 이야기지만 미술과 문학을 매개로 한 [언니네 미술관]은 섬세하고 다정하다. 언어의 한계를 염려하는 세심한 배려 또한 인상적이었다.
첫 번째 테마인 <다시 바라볼 것들>은 외부의 시선들과 연관이 있다. 세상의 억압과 통제에 휘둘리지 않게 플라톤의 동굴에서 걸어 나와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아름답게 보이는 몸, 명사가 아니라 기능하는 몸, 동사로 살아가는, 마녀 안에 담긴 의미를 꿰뚫어 보는, 크로노스적 시간 위에서 꽃 피는 카이로스적 시간을 감사히 여길 줄 아는 나를 만들고 싶어졌다. 아장스망을 간직한 이가 되고 싶어졌다.
두 번째 테마인 <크게 바라볼 것들>은 이진민 작가가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책의 중앙에 넣었다고 한다. 슬픔, 서투름, 사소함 ㆍ 익숙함 ㆍ 하찮음. 이들의 힘을 세상 모든 이들이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담았다고 한다. 일상에서 누구나 느끼는 부정적이고 소소한 영역을 다룬 문학 작품과 미술 작품을 이진민 작가의 목소리로 들으니 그가 간절히 전하고자 하는 힘에 가슴 한편이 저릿하였다.
감명 깊게 읽은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 '어떻게 지내요'가 소개되어 반갑기도 하면서 읽었을 당시의 먹먹했던 감응이 되살아났다. '이 세상을 보다 살만한 곳으로, 보다 아름다운 곳으로 바꾸는 건 기본적으로 슬픔'이라는 문장에 깊은 공감을 표한다.
결국 불사는 죽음이고 전능은 무력이다.
반면 아무리 힘들고 불편하더라도
서투름은 변화의 친구이고 성장의 어머니가 된다.
이를 깨닫는 자들에게 이 아이러니는
서투르고 짧은 생의 위안이 될 것이다.
서투름은 결국 인간을 빛나게 한다.
p.175 (part02. 크게 바라볼 것들 2장. 서투름 *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
세 번째 테마인 <함께 바라볼 것들>은 '함께'라는 의미에 포커스를 두었다. '직선과 곡선'을 이야기하지만 이내 곡선 안의 직선 구간을 살피고 있다. 앞이 아닌 뒤를 돌아보게 하고 이는 새로운 앞으로 이어지고 있다.
'너와 나'를 설명하고자 콩스탕탱 브랑쿠시의 <키스>와 르네 마그리트의 <키스>를 소환하였다. 하나의 돌을 최소한으로 조각하여 떨어질 수 없는 연인의 친밀감을 충만하게 표현한 작품과 천을 뒤집어쓴 채 키스를 나누는, 가까우면서도 먼 연인이지만 타인과의 관계가 지닌 한계를 표현한 작품이다. 선명한 대비를 이루지만 왠지 두 작품 모두 와닿았다. 현실과 환상 혹은 상상처럼.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곁에 있어주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너와 나', 바로 우리를 정성 들여 그려내고 있다. 서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머무르기를 권하는 다정한 속삭임에 고개가 절로 끄떡여 졌다.
보통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소소하게 느끼고 나누는 찰나를 소중히 여길 수 있기를, 큰일이 아니더라도 서투르더라도 달라지고 변할 수 있다는 성장의 기회를 감사히 여길 수 있기를,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빛나는 존재들이 곁에 머무를 수 있기를 바라며 나의 삶에 카이로스적 순간을 하나 더 쌓았다.
한겨레출판사 하니포터 9기 자격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