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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타일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평점 :
어느새 2022년도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다. 12월이 시작되고 예년보다 포근했던 날씨가 변덕을 부르듯 아니 겨울을 제자리로 불러들이듯 쌀쌀해졌다. 쌀쌀해진 날씨로 한껏 움츠린 어깨와 등 위로 겨울에만 허락되는 감성에 대한 기대가 피어올랐다. 하얀 입김으로 전하는 서로의 안녕, 형용색색으로 반짝이는 전구로 장식되는 건물과 조형물과 새하얀 눈을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사랑이 샘솟아 넘쳐흐르게 되는 크리스마스도 있다. 겨울이 되면 종교적인 이유를 떠나서라도 사랑과 용서를 소중한 이들과 나누고픈 그 밤을 절로 떠올리게 된다.
크리스마스 타일/김금희 연작소설/창비
[크리스마스 타일]은 겨울 감성과 크리스마스에 대한 인상이 녹아있는 일곱 편의 이야기들이 벽난로같이 뭉근하게 타오르는 김금희 작가의 첫 번째 연작소설이다. 상실과 이별을 경험한 이들이 상처를 인식하고 치유하는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올 한 해 나의 인연과 이별과 감각들을 톺아보았다. 내 안에서 감정의 물결들이 거세졌다가 잦아들었다 몰아쳤다가 잔잔해지기를 오롯이 느끼면서 충만감에 젖어들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너의 이야기가, 너의 이야기가 다시 그들의 이야기가 되는, 공감 어린 연대였다.
연작소설이라 한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 다른 이야기에 관련 인물로 등장하면서 관계가 엮어지는 구조가 이 책의 또 다른 묘미다. 이야기 한 편 한 편 완성도와 감정이 훌륭해서 단편 자체로 만족감이 높다. 더 나아가 '연작' 형식으로 묶어낸 [크리스마스 타일]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확실하고 탁월하게 그려내는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
연결되지 않는 이야기인데도 동일한 인물이 다른 비중과 시선으로 그려지면서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틈 안에서 일어났을, 일어날만한 사실을 상상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연작의 시작인 「크리스마스에는」 단편이 [[크리스마스 타일]의 마지막에 위치한다. 하나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큰지를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지민 - 현우' 이 두 사람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에서 뻗어나간 일곱 편의 이야기들이 숨을 내쉬고 있다.
밤
⊙ 방송국 교양예능국 피디인 '지민'의 동료인 방송작가 '은하'의 각성을 그린 「은하의 밤」
참여자 없는 연극이자 듣는 이 없는 아리아,
만남이 불발된 채 혼자서 나누는 열렬한 악수 같은 것. (11)
"아프지 마라. 죽어서도 아프덜 말고
살아서도 아프덜 말고 그 말벢에 더 있겄어." (54)
⊙ 지민의 또 다른 동료인 방송작가 소봄의 남동생인 '한가을'의 짝사랑을 담은
「데이, 이브닝, 나이트」
"너무 가까우면 …… 차라리 눈을 감게 되니까." (69)
"실내에만 있으니까 그 사람들한테는
우리가 그날의 계절이나 날씨 같은 풍경이겠지.
병원 밖 사람들도 다 그렇잖아.
날씨나 풍경 때문에 기분이 나쁘고 좋고.
난 심각해질 필요 없다고 생각해." (73)
⊙ 지민과 현우가 이별한 이유인 문학동아리 선배 '옥주'의 도피 이야기 「월계동 옥주」
세상 어디에서는 호숫물로 등잔을 밝힐 수도 있다는 얘기를
기꺼이 믿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상심이 아물면서
옥주는 옥주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36)
눈파티
⊙ 맛집 알파고로 유명해진 데이터 분석가인 '현우'의 소개로 어린 시절 사랑하는 이를 다시 만나게 된 '진희' 「하바나 눈사람 클럽」
그렇게 한 단어씩 더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과거의 어느 날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처음 만났던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이었다.
그때는 해명할 수 없었지만 늘 녹진하게 달라붙어 있던 어떤 감정들을
처음으로 공유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의 서글픔, 애석함, 손 내밀어보고 싶던 충동들을. (155)
창을 열어 손을 내밀자 밤바람이 불었고 순간순간 세기가 다른
그 바람들은 나를 자꾸 붙드는 찬 손들처럼 느껴졌다. (164)
내가 지녔던 슬픔을 세상에 흔하고 평균적인 기성의 슬픔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반응이었다. (172)
⊙ '소봄'이 상실을 극복하고자 혼자만의 힘으로 첫눈 사이로 걸어들어가는 성장기
「첫눈으로」
"소봄씨가 했던 말들은 차갑거나 못됐거나 그런 말이 아니야, 그냥, 뭐어랄까, 그냥."
"그건 그냥 너어무 두려워서 움츠러든 사람이 하는 아주 작은 말일 뿐이었을 거야." (181)
하늘 높은 데서는
⊙ 이십 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떠난 반려견 설기의 빈자리를 받아들이고자 최선을 다하는 '세미'의 고군분투기 「당신 개 좀 안아봐도 될까요?」
"이상하지. 당신 개 좀 보자고 해서 사람들을 만나면
자꾸 내 얘기를 듣게 돼. 나라는 인간이 분명해져."
"그 말 너무 좋고 다행으로 들리네." (249)
⊙ 헤어진 옛 연인 현우를 취재해야 하는 수렁에 빠진 '지민'이 그에게 전하는 마지막 인사 「크리스마스에는」
"잘 지내."
복수도, 화해도, 용서도, 기적적인 능력에 대한 찬탄이나 입증,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던 부산행이지만
적어도 생일 축하는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니 홀리 하긴 홀리 했다고 여기면서. (302)
극적인 변화가 아니라 자연스럽고 담담한 깨달음을 그리고 있어서 더 공감되고 이해되는 따뜻한 크리스마스 이야기들이었다. 그 사람과의 시간과 공간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아 죽음과도 같은 이별 그리고 실제 죽음은 이 순간 살아가는 누구나 겪고 겪을 수 있는 상실과 피폐다. 그 허전함과 공허함, 죄책감 그리고 분노를 짊어지고 살아가기에는 버겁다. 등장인물들이 상실에 대한 실질적 두려움과 고독을 어떻게 잠재워가는지를 작가는 애정을 담아 성실히 적어내려간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글 안에서 인물들과 같이 치유받고 위로받으며 흰 눈 속으로, 똑같은 결정이 하나도 없다는 신비로운 눈 속으로 당당히 발을 내디딜 수 있다.
나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감사하게도 다시 일상으로 고개를 들고 나를 마주할 수 있는 힘이 차오르고 있으니 말이다.
평온한 하루를 보내세요. 한 손에는 [크리스마스 타일]책이 들려있기를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김금희 작가 친필 ♥ 크리스마스 카드엽서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