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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4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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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10년 부산에서 일어났던 예비 여중생 납치, 강간, 살해, 유기 사건을 기억한다. 범인의 이름을 따 김길태 사건으로 명명된 사건은, 사건발생 20일만에 범인 김길태를 검거하였는데 각종 신문과 뉴스, 인터넷 등에서 범인의 얼굴과 신상이 모두가 공개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는 흉악범의 인권보다는 국민의 알 권리가 우선된 것인데, 당시 나는 푹숙인 머리칼 아래 날렵해 뵈던 인상의 김길태와 그에게 욕을 퍼부으면 곧 달려들 것 같던 사람들의 무리를 보면서 김길태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채로 입양되어 성장했다고 하니, 친모는 그를 알아볼 수 없겠지만 양부모와 그의 주변인들에게는 몹시 당혹스러운 일이 었을 것이다.

나는 어떤 범죄인이건, 설령 그가 김길태와 같은 흉악범 일지라도 얼굴이 공개되거나 신상이 모두 공개되는 일은 목격하고 싶지 않은 사람인데, 인권 차원에서 범인을 보호하겠다는 것이 아닌, 범인의 부모나 주변인에게 못할 짓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당시 김길태 사건을 보면서 내가 느꼈던 것은 그 정도였다. 불행한 성장과정을 거친 범인에게 동정까지는 아니였지만, 가정환경의 중요성이라거나 한 아이의 부모된 자로서의 책임감 정도가 전부였다. 언론이 집중한 것도 범인에 관한 것이었고, 내가 언론을 통해 읽은 것도 그것뿐이였다.
경찰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범인의 얼굴을 공개하는 선정적인 폭로전을 감행했다는 것도, 언론이 경찰의 선동에 무작정 끌려가기만 했다는 것도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범인을 벗어나 피해자인 어린 예비 여중생이 왜 집에 혼자 있었는지, 동네엔 왜 빈집들이 많았는지 하는 것들은 전혀 의심해보지도 않은채 사건을 잊어갔다. 그런데 이택광은 묻고 있다. 집 안에 있던 어린 소녀가 어떻게 납치될 수 있었는가. 소녀는 왜 혼자 집에 있지않으면 안되었는가. 동네에는 어째서 이웃이 그렇게 뜸했는가. 흉악범 김길태가 정신병자와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에 대해 관찰자 당신은 정말 무관한가. 거주민들을 몰아내고 동네를 재개발하는 것은 누구의 욕망인가. 누구를 위한 재개발인가.
이 사건은 불행한 과거사를 지닌 한 미치광이의 흉악한 범죄로만 해석되고 지나쳐져서는 안된다, 김길태 사건은 마구잡이로 달려온 한국의 자본주의 실상을 일깨워주고 있다고 이택광은 말한다. 재개발의 이권에 끊임없이 무릎을 꿇게 되는 한 김길태 사건과 같은 흉악범죄 또한 끊임없이 우리 주위를 맴돌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사회 집단이 지닌 사유, 행동, 양식, 생활 습관과 방법, 욕망, 그리고 그로 인한 사건 등을 문화라고 할 때, 문화를 읽는다는 것은 그 사회 전체를 읽는 것이다. 단순하게 문화적 현상을 기술하고 나열하는 것이 문화비평은 아니라고 이택광은 서문에 밝히고 있는데, 내가 생각하는 문화비평은 눈 앞에 펼쳐진 보여지는 부분 외에 사건이나 현상 뒤에 감춰진 원인과 그에 따른 해답까지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 문화비평가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 비평가의 눈을 통해 보여진 현상들에 관한 해석은 읽는자 각자의 몫일 수 있겠으나, 사회 전체에 스며있는 풍토, 정서, 사유 등은 비평가의 해석 그대로 읽는 자에게 투영되기 쉽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비평을 읽는 것은 제대로 사회를 읽는 일이며, 또한 제대로 사회를 구성하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인식에 관한 것으로 인식은 사회적 담론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고, 주도된 사회 담론은 또다시 사회의 문화를 구성하는 사유, 행동, 양식, 생활 습관과 방법, 욕망, 그리고 그로 인한 사건 등으로 되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몇년간의 사회적, 대중적, 때로는 정치적인 이슈들에 대해 다룬 길지 않은 짤막짤막한 이택광의 비평들은 이책을 읽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고, 그러한 이슈들을 보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을 생각하게 했다. 이택광이 제대로 된 눈을 갖은 문화비평가인지 알아볼 만한 혜안이 내게는 아직 없다. 그러나 위의 김길태 사건을 읽으며, 적어도 이택광이 가벼운 말발이나 독설, 혹은 냉소로 사회를 폄하하는 시선을 갖은 비평가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파트 2인 사회와 정치 사이를 무척이나 관심있게 읽었다. 사회와 정치, 그리고 문화를 관통하는 것은 역시나 '자본'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기억하면서, 책을 덮는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촛불에서 김대중 대통령 서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에 관한 평이 없었다는 것이다. 무척이나 궁금하다. 문화비평이라는 장르 자체가 곧 정치적인 것이라고 한 이택광은 어떤 시선으로 자살한 노 대통령을 읽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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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역습 - 오만한 지식 사용이 초래하는 재앙에 대한 경고
웬델 베리 지음, 안진이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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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델 베리를 처음 안 것은 격월간지 <녹색평론>을 통해서였다. 그는 생태주의자, 환경주의자이며, 문명비평가, 사회평론가, 실천주의자이기도하며 또한 작가이다. 위의 모든 직함을 다 수용하고도 무엇보다도 그는 늘 농부였으며, 지금도 변함없는 농부이다. 따라서 농업과 환경과 인간에 대한 고민을 담은 그의 글은 탁상공론일 수가 없다. 그의 피부로 만나고 겪은 실제상황이면서 실제 고뇌이고, 더 나은 인간의 삶을 위한 담론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그가 쏟아놓은 인간의 무지의 대한 토로는 구구절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오늘날의 자연환경은 곳곳에서 인간을 향한 공격을 하고 있다. 이는 본래 자연의 본성이 아니며, 다만 인간의 무지로 인해 자연에게 건 전쟁의 결과일 뿐이라고 웬델 베리는 주장한다. 인간의 오만은 우리가 가진 한계와 효능을 제대로 알지못하고, 인간이 모든 것을알고 있거나,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는 가설 아래, 자연환경을 포함한 생태계와 세계를 좌지우지 할 날이 오리라는 믿음으로 방종하는데서 부터 시작한다. 인간은 더 나은 경제적 부와 발전, 진보라는 미명하에 다른 인간과 자연을 상대로 무한한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실제적 권력을 휘두르는 자는 소수의 인간일뿐이지만, 그외의 다수는 소수의 폭력을 묵인하거나 방관하는 것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 전체의 폭력으로 확대한다.
자연에는 인간 또한 포함된다. 그렇기에 소수의 인간에 의한 자연의 파괴에는, 인간 본성의 파괴 역시 뒤따른다. 따뜻한 마음과 겸손, 배려, 돌봄 등 인간의 본성은 무지와 오만, 편협함, 불완전하고 위조된 지식 아래에서 철저히 파괴되고 서로가 서로를 짓밟고 이용하기 위해서만 타자를 인정하고 있다. 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만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그 어떤 종류의 인간이 그외의 다른 인간들을 향한 폭력을 허 하셨을리 없듯이, 또한 인간만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인간에게 모든 자연환경을 인간 좋을대로 이용하라고 하셨을리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인간은 무지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갖은 것으로 부터 더 갖고자 하는 마음이 폭력을 부른다. '더'라는 욕망은 지금 현재의 상태를 부정하게 하고, 불안하게 한다. '더'는 '완전'으로 오역되어 끊임없이 타자를 공격하게 하고, 결국 타자를 향한 폭력은 부메랑처럼 나 자신에게 되돌아 오게 된다. 이는 자연환경의 파괴로 멈추지않고, 곧 전인류의 공멸로 이어진다. 부와 권력을 쥔 자들은 과학을 통해 지구가 아닌 다른 대안을 상상할 수 있겠으나, 나로서는 실현가능성을 얼마만큼이나 내포한 상상인지 알 수 없고, 이 상태로 거칠어진 인류가 비교만족을 얻기 위한 타자없이 인간 스스로 만족할 만한 완벽한 환경을 구축할 수 있을지도 믿을 수 없다.
이에 웬델 베리는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탐욕의 경제학을 지금처럼 계속 굴려갈 때, 결국 우리모두가 살상되지 않겠느냐고 묻고 있다. 개개인이 탐욕의 경제학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을 때 정부의 역할이 무엇이겠느냐고 묻고 있다. 소수의 인간을 위한, 소수의 경제를 위한, 소수의 권력을 위한 탐욕을 이제라도 멈출수 있어야 우리 모두가 같이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인간은 지금보다 더 나은 행동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아직은 있다고 믿기에 저자는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인간의 탐욕에 의한 전쟁이 발발하면 대통령을 비롯해 전쟁에 찬성하는 행정부의 모든 각료와 국회의원이 연령과 신분을 막론하고 즉각 민간인 신분으로 전투 부대에 합류해야 하며, 어떤 전쟁이든 종결되는 시점까지 전쟁에 개입하는 군수산업체의 모든 임원과 주주의 연소득 상한성은 해당 기업의 공장 노동자의 연소득을 넘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조항을 헌법에 넣어야 한다'(212쪽)는 웬델 베리의 주장은 거칠고 과격하다. 현실성이 없으며 도저히 실현될 것 같지않지만, 그러나 통쾌하다. 마땅히 옳은 이야기이고 그럴 수만 있다면 인류 스스로 공멸하게 될 결과는 초래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주장이다.
통쾌하지만, 왠지 실현성이 없는 위의 주장과 달리, 베리는 좀더 구체적인 희망으로 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는 장소를 존중하며, 산업을 유치해서 경제문제를 해결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고, 좀 더 현명하게 큰 규모에 대해 생각하고 대처하며, 자연과 인간의 모태인 땅에 대한 파괴에 절대로 타협하지 않을때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가 보장될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웬델 베리는 이 책의 배경을 미국 사회와 정치, 농업경제에 촛점을 맞추고 썼지만, 이 책의 배경은 꼭 우리 사회의 모습과 같다. 그렇기에 더더욱 절절하게 책의 내용이 가슴에 와 닿는다. 무엇보다, 먼 미래를 내다 보지 않는 편협한 권력자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개발과 발전에만 목을 매고 있는 우리의 정치인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더나은 발전된 조국을 위해 날이면 날마다 땅을 갈아엎는 토건업자들이 이 책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 나만 살고 말 미래가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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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 읽기 - 전체주의의 탐험가, 삶의 정치학을 말하다 산책자 에쎄 시리즈 8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 산책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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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아렌트는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전범 재판에서, 나치 시대의 관료였던 아이히만이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아무런 책임의식 없이 재판에 임해, 자신은 정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아이히만의 진술을 본 후, '아이히만은 계급 구조 내에서 진급만을 꿈꾸었던 평범한, 아무 생각이 없는 자'라고 결론한다. 따라서 아무 생각없이, 아무런 고통도 아무런 고민도 없이 체제 내에 순응하며, 일신의 안위만을 위해 행동하는 자라면 아히히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주장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전의 두 작품, <전체주의의 기원>,<인간의 조건>과 아렌트의 말년까지 계속된 <정신의 삶>을 해체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엘리자베스 영 브루엘은 한나 아렌트의 수제자 중 한 사람으로 그녀는 이미 아렌트 평전을 기술한 바 있다. 따라서 영 브루엘이 쓴 아렌트에 관한 두번째 책인 이 책은 아렌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출판되었는데, 아렌트의 개인사나 그녀의 사상, 사유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는 평전은 아니지만 아렌트의 대표적 세 작품을 따라가는 아렌트 되짚기, 혹은 되살리기로 볼 수 있겠다.

무명이었던 유대계 망명 지식인 아렌트가 미국 학계에서 처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전체주의의 기원>을 쓴 직후였는데, 아렌트는 이 책에서 전체주의 아래 시민 개개인은 무시되고,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로 뭉뚱그려져 집체적 정체성을 이룬다고 했다. 결국 이러한 체제 아래 시민들은 원자화되고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체제 순응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상징된다. 나는 이 장면에서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다른 주장 다른 의견은 몽땅 빨갱이로 치부되는 지금의 우리 사회 역시 전체주의 사회일 수 밖에 없다라고 생각한다. 다원화의 거부, 정치로부터 소외된 대다수의 대중인 개인은 소비와 향락을 통해서만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 사회는 다소의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다.

영 브루엘은 <전체주의의 기원>을 해설하면서 현대의 미국 상황을 오버랩하고 있는데, 9.11사태 이후 미국은 안보를 위한다는 명분아래 개인의 자유를 과도하게 관리하며 황폐화 시키고 있고 이는 '대량 살상 무기'라는 이미지 조작을 통해 가능했다. '보다 안전한 삶'이라는 목적은 이라크 침략과 민간인 사망이라는 수단을 '부수적 피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시킨다. 아렌트의 눈으로 되짚어 볼 때 오늘날의 미국은 다분히 전체주의적 이다.

영 브루엘에 의해 '공적인 것들에 대해 사유하고 평가하는 방법에 관한 입문서'로 정의되는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인간은 정치 행위를 통해서만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또 아렌트는 '정치 행위는 유일하게 사물 또는 물질의 직접적인 개입없이, 언어를 매개로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자유로운 인간의 활동'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나는 이 주장을 이해하기가 버겁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우리 정치계를 볼 때 정치는 몹시 사사롭고, 몹시 물질적인 산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의 조건>은 아렌트를 알기 이전에 그 제목에 매료되어 구입했지만 벌써 몇년째 책장을 장식하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영 브루엘의 '아렌트 해체'는 내게 무척이나 반갑다.

다음으로 살펴볼 책은 아렌트의 말년까지 계속된 작품인 <정신의 삶>인데, 이 책은 위의 두 책에 비해 더더욱 난해한 책이다(내생각에). 아렌트는 이 책을 통해 철학과 정치의 결합을 위한 비전을 제시했다고 브루엘은 정리하고 있는데, 제목 조차도 처음 본 <정신의 삶>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브루엘의 설명으로 더더욱 생소했다. 다만 한가지 인간의 사유와 행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고, 사유를 철학으로, 행위를 정치로 규정할 때 철학과 정치 또한 불가분의 관계이다. 따라서 이는 생각없는 행위는 악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아렌트의 사유인 '악의 평범성'으로 대변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브루엘은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무엇인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가도 함께 이해해야만 한다.(59쪽)라고 했는데, 아렌트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아렌트의 정신의 삶을 이해해야만 한다. 나는 대체로 아렌트의 사유를 '악의 평범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데, 결국 사유의 결과물인 저작은 어떤 큰 획기적인 변화를 겪지 않은 다음에야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주장한 이래로 '유대민족에 대한 애정을 결핍한 자'로 규정되어 파문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아렌트의 주장에 동의한다. 생각없이 행한 어떤 행위는 행위의 주체가 누가 되었던지, 언제든지 '악'의 모습으로 남겨질 수 있다. 그런 이미에서 아렌트는 우리에게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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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오랫만에 아침 운동을 다녀왔습니다. 얼마나 몸을 아껴왔던지 그 조금 걷는 운동이 운동이 아닌 노동으로 느껴졌습니다. 날마다 편한 잠자리, 맛있는 음식으로 하루를 소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 것은, 아직도 35m 크레인 상공에서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부르짓고 계신 김진숙님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나의 편한 잠자리가, 푸짐한 식탐이 무던히도 부끄러워지는 요즘 입니다. 오늘도 한바탕 비가 쏟아질 기세입니다. 부디 김진숙 님이 건강하게 이 땅을 밟을 날을 소망합니다.   

 

 

 

 

강준만 교수의 책으로,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두루두루 소개 되고 있는 책입니다. 갖을 것을 다 갖은 사람이 없는 사람 편에 서는 경우를 강남좌파스럽다 하나요? 이걸 무엇이라 표해야 할까요. 갖을 것 중에 도덕적 우위까지도 포함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색안경을 쓰게 되기도 합니다.  강남좌파로 명명되는 그들에게 그래서 이념을 위해 도덕적 우위를 위해 당신은 당신의 무엇을 내놓을 것이냐고 묻고 싶어집니다.  

 

 

 

여름입니다. 한해 한해 달라져 가는 나의 뱃살을 보면서, 누구는 지방흡입을 했다더라, 누구는 보톡스를 맞았다더라 부러움과 조소를 반반씩 섞어 수다거리로 삼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건데, 늘어가는 몸무게를 죄의식없이 지나쳐 본 적이 없습니다. 사회적 정체성이 몸으로 말해지는 시대라고 한다면, 너무 극단적인 생각일까요. 안티 다이어트 운동을 펼 칠 생각은 없지만, 너도 나도 점점 똑같아져 가는 외모를 추구하고 있는 이 때에 다름과 차이에 대해 표나게 고민해볼 기회가 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 신문에 '트위터 영향력이 박근혜보다 김여진이 세다'라는 기사가 나왔더군요. 김여진 씨처럼 당면 사회문제에 관한 소신을 밝히는 이들을 소셜테이너라고 하는데 불통의 시대에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스마트폰의 위력이라고 할까요. 지금까지 트위터에 관한 책이 사용법 위주였다면, 이 책은 트위터를 통해 보는 사회상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 사용 과거 2년간의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스마트폰 사용자들은 평균 하루 34번 가량 메일이나 트윗을 확인한다고 하네요.  

 

 

 

공정무역이 말그대로 무척이나 공정해서, 대기업의 횡포없이 커피를 재배한 농가에 그 이익을 돌려주는 거래라고만 믿었던 나로서는 이책 소개를 보고 무척이나 당황했습니다. 공정무역이 그 정당한 이익을 돌려주는 것은 커피밭 주인에게까지일 뿐, 정작 커피를 키우고 생산하는 노동자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하루살이를 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에 지역연구를 전공한 저자가 커피밭에 취직해 노동자로 일하며 목격하고 겪은 현실을 여행기처럼 적었다고 합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커피가 소비되는 곳에서는 부가 쌓여가지만 커피가 생산되는 곳에서는 빈곤이 쌓여가는 현실을 다시한번 목도하게 됩니다.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불온하게 들리니까요. 다만, 노동자가 정당한 대접을 받는 세상을 꿈꿀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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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평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데리다 평전 - 순수함을 열망한 한 유령의 이야기
제이슨 포웰 지음, 박현정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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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데리다의 명성, 삶, 그리고 죽음에 대해 사유해보는 책으로, 해체의 철학자 데리다의 삶과 철학을 그야말로 '해체'하는 작업이다. 연대기적 서술의 자크 데리다 평전은 데리다의 삶 뿐만이 아니라, 근대의 철학사를 두루 훑을 수 있는 한 권의 철학사서로 분류해도 무리가 없을 듯한 책이다. 데리다라는 한 인간의 삶을 들여다 보고자 했던 이에게는 당연히 쉽지 않은 책이다. 특히나, 데리다의 저작 한 편 제대로 읽어 본 일이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겐 더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한 인간으로서의 데리다도, 철학자로서의 데리다도 이 책을 통해서 온전히 만나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데리다 평전을 읽기로 작심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산이라고 생각된다. 

 

데리다는 프랑스의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데리다에게는 항상 프랑스는 유령과 같이 없으면서 있는 존재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한 때 고통스럽게 거부했던 데리다에게는 오히려 알제리가 유령과 같은 존재였던 것은 아니었을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유년기의 데리다는 섬세하고 호기심이 많으면서 뭔가 감추는 게 있는 아이로 비쳐졌는데, 그는 작은 철학자인 동시에 제약을 경멸하는 불량소년 이었다. 또, 청소년기의 그는 반유대주의라는 비극을 몸소 겪었고, 그 결과 그는 인종주의에 과도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어쩌면 이런 종류의 민감함은 몸소 비극을 겪은 이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랬기에 이 시기의 데리다는 책을 쓰겠다는 꿈을 갖는 한편으로 한때 갱단의 일원이 되기도 하는 방황을 겪었다. 데리다는 일생토록 계속해서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그 목적에 공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다만 그는 고통받는 사람 편에 서고자 했다.  

또한 데리다는 헤겔, 하이데거, 니체, 프로이드를 배타적으로 읽었다고 하는데, 데리다의 시선으로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위의 철학자들을 선행해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데리다 평전을 저술한 제이슨 포웰은 기본적으로 오늘날의 철학은 자본의 투자 가치 앞에 망각될 위험에 처해있다고 통탄한다. 순수한 궁금증으로부터 출발한 물음이 자본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에 데리다는 세상의 흐름과 동떨어져 오랜 유럽의 사유 속에 숨겨진 정의와 더 좋은 것들을 가려내어 드러내는 데 그의 삶을 바쳤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데리다는 자기만의 방식을 고수했기에 수많은 오해와 함께 학계로부터 여러가지 부당한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앞에서도 고백했듯이 , 데리다의 저작 한 편 제대로 읽은 일이 없는 나로서는 데리다라는 인간의 뒷이야기 외에, 그의 저작들을 이해하는 개론서와 같은 이 책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사유 방식,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진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따라서 사라짐 또한 진짜 '없는 것'도 아니라는 낯설지 않은 유령의 존재론에 깊이 매료되었다. 뿐만 아니라 주류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해체'(기존의 주류 학문이 동일성을 위해 '차이'를 버렸듯이, 데리다는 차이를 인정하기 위한 동일성과 타자를 해체하는)를 감행해 이 세계에 좀 더 적합한 사유를 완성하고자 했던 데리다의 순수한 열망에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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