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인격이다 - 품격을 높이는 우리말 예절
조항범 지음 / 예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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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인격이라는 이야기는 중.고등학교 시절, 주야장천 들었던 이야기 이다. 요즘도 학교에서 그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요즘 아이들은 일상용어가 거의 줄임말이고, 욕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도 기성세대가 되어서인지 요즘 아이들끼리의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도대체.." 하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한다. 그런데 아마도, 내가 중고등 학생이던 시절의 어른들도 그랬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도대체.." 라고.
말은 어차피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하고, 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자랄 때보다 요즘 아이들이 쓰는 말은 더 거칠고 투박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이 시대에 맞게 변화되어온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한다. 그렇지만 어쨌든 욕이 일상어의 반을 넘게 차지하는 것은 시대적 상황과는 다른, 품격의 문제로 생각해 볼 일이다. 그만큼 요즘 아이들에게는 품격이나 인간적인 교육이 부족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인격을 쌓는 소양 교육보다는 경쟁에서 지지않는 실용적인 교육에 바쁘니까 말이다.
 

이 책의 저자 조항범 교수는 국어국문학과의 교수로, 국어 사용에 대한 다양한 지식들을 이 책에서는 비교적 쉽게 풀이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어렵지 않았다. 가령, 임산부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사람이라는 소제목을 보았을 때, 임신한 엄마와 뱃속의 아이까지를 포함해 두사람을 말하는 것인지 알았다. 그러나 임산부라는 말은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뜻의 '임부'와 아이를 낳은 사람이라는 '산부'가 합해져 두사람이라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임산부'라는 흔한 표현은 매우 잘 못된 것이다. 또 '곤욕'과 '곤혹'의 차이도 새로 알았으며, 자주 사용하지만 사용할 때마다 주의하게 되는 '지양'과 '지향'에 대해서도 확실히 알았다. 이처럼 쉽게 흔히 사용하는 잘못된 표현들에 대한 교정은 매우 유익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책의 곳곳에서 저자가 어쩔수 없는 선생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는데, 틀린 한글 사용을 못참고 곧바로 지적하고 고쳐줘야 직성이 풀리는 선생의 직업병이 여기저기서 자주 드러났기 때문이다. 국문학적 지식보다 인문학적 소양이 앞서서 상대의 입장과 상황을 좀더 너그럽게 배려할 수는 없는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국어학자가 알고 있는 지식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현실어는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틀린 사용을 용인하고 틀린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좀더 너그러울 수 있는 상황에도 까칠하게 짚고 넘어가는 그의 직업병이 안타까웠을 따름이다. 국어학자를 친구, 혹은 동료로, 선배로, 스승으로, 지인으로 둔 사람들은 참으로 피곤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말 혹은 저런글을 함부로 사용했다가는 '너 틀렸다'라고 당장 지적할테니까 말이다. 내 눈에 그는 선생이요, 어쩔수 없는 구시대의 아버지 상으로 비쳐졌다. 
 

1부와 2부가 국어 사용에 대한 올바른 지식에 대한 내용이었다면, 3부에서는 성공하는 사회인을 위한 느닷없는 자기계발서로 둔갑하는데, 한마디로 성공하고 싶으면 말조심하라는 내용이다. 물론 옳은 말이고, 들어서 좋을 말이지만 쉽게 수긍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다. 어쨌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나' 개인을 죽이라는 이야기이니까. 
 

말이 거칠어지고 있는것은 비단 청소년 뿐만은 아닐것이다. 나 역시 시대 상황을 탓하며 변하는 것은 변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지만, 근본적으로 변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존재는 인정한다. 그중 하나가 말의 소중함이며, 타인에 대한 배려이고 존중이다. 이 책을 읽고,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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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1-09-29 0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참 좋습니다.^^

비의딸 2011-09-29 09: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사르트르와 까뮈]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
로널드 애런슨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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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은 실천이 따를 때 빛이 나기 마련이다. 말만 앞서는 학자에게서는 진정성을 느낄 수 없다. 그런의미의 진정한 지성인 카뮈와 사르트르의 논쟁사라니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의 저자 애런슨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르트르 전문가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에게 치우치지 않은 보고서를 작성하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서문에 밝히고 있다. 그랬다면, 읽는 나 또한 균형감을 잃지 않고 사르트르와 카뮈의 시대를 생각하는 치열한 고민과 그들 사이의 흥미진진한 논쟁사를 생생하게 읽을 수 있겠다 싶은 생각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카뮈와 사르트르의 우정은 레지스탕스 활동을 통해 싹텄다. 8년이라는 나이 차와 관계없이 동일한 성향의 사유 선상에서 친구 관계를 유지했던 그들은 카뮈가 점점 공산주의를 자신의 정치적인 적으로 간주하게 되면서 부터 카뮈와 사르트르의 단절이 시작되었다. 공산주의는 폭력의 동반을 필연으로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에 염증을 느낀 카뮈는 프랑스 공산당으로부터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서 쫓겨난다. 바로 이 점이 사르트르로서는 용인할 수 없는 점이었는데, 사르트르는 카뮈를 참여하지 않는 지성, 현실적 갈등과 동떨어져 있는 이상주의자 라고 비판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운동을 열렬히 펼쳤던 카뮈는 그 당시에는 정치에 대해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던 사르트르에게 정치적으로 선배 역할을 한 셈인데, 전쟁 후 카뮈가 공산주의와 결별함으로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레지스탕스 운동당시에는 그토록 용감했고, 완전히 자신을 쏟아부었던 카뮈는 전쟁 이후 돌변하여 위험을 무릎쓰는 것을 피하게 되었고, 정치 참여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무엇이 카뮈를 변화하게 했을까. 단순히 폭력에 반대했기 때문이었을까. 카뮈는 사르트르와의 단절에 결정타가 된 <반항적 인간>에서 살인을 정당화시킨 자들, 곧 공산주의에 공조한 지식인들에 관해 집필했다. 사르트르는 이를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고, 이에 답하는 공개 서한을 보내 카뮈와의 단절을 공고히 한다. 사르트르는 카뮈가 대안적 해결책을 찾지 않으면서 공산주의를 거부한다고 몰아부쳤다. 결국 사르트르는 카뮈에게 '반혁명적이고 부르주아적'이며 '실천이 없는 지성'이라는 낙인을 찍은 것이다.


카뮈와 사르트르의 단절은 사르트르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은 반면, 카뮈에게는 눈에 띄는 절망을 안겨주었다. 예술가로 혹은 철학가로, 정치적 명망이 있는 지성인으로 상당한 자신이 있었던 카뮈에게 사르트르의 독설은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이에 카뮈는 깊은 침묵으로 일관했는데, 사르트르와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 사르트르의 공개서한에 반박하는 편지를 쓰고 이를 공개하지 않고 서랍 속에 묻는다. 나는 이 대목에서 카뮈에게 강한 연민을 느꼈다. 그는 몹시 감성적이고, 상처받기 쉬운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사르트르는 인간관계에 그다지 종속되지 않는 인물로 비쳐졌는데, 그의 우정은 카뮈 외의 친구들과도 그다지 깊게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책을 읽겠다는 처음의 생각은 무뎌진 채로 카뮈에게로 기운 독서를 하게 되었다. 좌파는 무조건 공산주의자여야 하는가 하는 의문까지 안고서.


카뮈가 반공산주의자 였다면, 사르트르는 반식민주의자 였다. 사르트르는 사람들이 타인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것과 그의 권리를 가로채는 것을 못견뎌했는데, 이는 바로 식민주의에 대한 혐오였다. 그렇기때문에 사르트르는 억압받는 자의 정당한 폭력을 용인했고, 폭력없는 정의는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까지 오자 나는 또한번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읽으며 나는 때때로 카뮈에게로, 혹은 사르트르에게로 기우는 독서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흔들리면서 더더욱 근본적인 것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들의 논쟁사, 우정과 결별을 파헤쳐 우위를 확인하는 이 작업이 왜 필요한가 하는 것이었다. 카뮈나 사르트르 두 지식인 모두 각자의 길을 선택했으며, 그리고 그것은 옳고 그름으로도, 또는 어떤 우위로도 구분할 수 없는 각자의 신념이었을텐데 말이다. 저자는 끊임없이 그들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옳았는가를 묻고 있는데, 카뮈가 옳았다면 사르트르는 틀린 것이 되는가. 혹은 그 반대인가. 왜 그래야 하는가. 결국 나는 저자가 원한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닌 사유 방향의 다양성과, 실험의 가능성을 존중하는 의도에서 이 책을 썼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분법적 논리로는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나자 한가지 의문이 든 것은 알제리 출신의 카뮈는 프랑스령 알제리를 진정 원했던 것일까 하는 것이였다. 그의 사후에 알제리는 결국 독립했지만, 카뮈가 알제리의 독립을 반겼을지에는 영 자신이 없다.
어쨌든 이 책은 만만찮은 분량인데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재미있다. 사르트르나 카뮈의 작품을 읽는 것과는 또다른 재미로, 이 책을 읽고나자 그 어렵다는 <말>이나 <전락>에 도전해 보고싶은 강한 욕망을 느낀다. 일단 카뮈의 <반항적 인간>을 읽고싶은 책 목록에 올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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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 남도답사 일번지, 개정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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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첫 책이 출판된 것은 1993년, 지금으로부터 무려 18년 전이다. 그런데, 책 좀 읽었다는 나는 이 책을 이제서야 겨우 완독했다. 책이 재미없었거나, 지루했던 것도 아닌데 유독 이 책과는 인연이 쉽게 닿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대출하기를 서너번. 옆구리에 끼고만 다니거나, 책상에 올려놓기만 하다 반납하곤 했다. 역사를 무척이나 지루하게 공부했던 세대이기 때문인지, 꼭 읽어야겠다라는 욕심보다는 게으름이 앞섰다. 그런데 이번 개정판을 받고서는 게으름보다는 욕심을 앞세워 보았다. 그동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인지, 여러 책을 읽으며 역사가 지루하고 한물간 옛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인지 아는만큼 느끼고, 느낀만큼 보인다는 서문부터 가슴이 설랬다. 느끼고, 보리라. 보고, 느끼리라 다짐하면서 책을 읽어나갔다.
그러나 느끼고 보리라던 나의 전투적인 책읽기는 인간의 손때보다 더 더러운 것이 없다라고 강변하는 첫번째 남도답사기, '강진과 해남' 에서 부터 풀리기 시작했다. 시작은 지루하더라도 힘을 내보자라는 다짐이나, 지난 역사와 그 흔적들을 꼭꼭 기억속에 눌러담아 어디가서 아는체 좀 해보자는 얄팍한 술수가 전혀 필요없는 책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토록 이 책을 읽기 시작하기가 어려웠던 것은, 이 책이 역사서라거나 문화재 이야기이기 때문에 읽고나서 줄줄이 꿰는 문화재쯤은 있어야 한다라는 강박이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만큼만 느끼는 법이라는 저자 유홍준의 주장대로, 내가 경험하고 느꼈던 역사 속의 문화재들은 수학여행 시절 겉으로만 훑었던 부여나 경주, 혹은 관광지로 전락하고 만 유적지 뿐이었다. 그렇기에 내게 답사란 가서 인증사진 찍고 돌아오는 정도일 뿐이었다. 나는 딱 그만큼 경험했기에 딱 그만큼 느꼈을 뿐이고, 느낀만큼 보았을 뿐이었다. 
 

3년전 안동 하회마을에서 민박을 하였다. 기와지붕이 ㅁ자 모양으로 모여있고, 마당 한가운데에는 장독들이 있었으며, 뒷마당으로는 대청마루까지 있었던 집이었다. 때마침 처마 밑으로 떨어지던 빗방울과 마루에 모여앉아 먹던 삼계탕, 그리고 병산서원 입교당 마루에서의 시원한 바람에 맞춰 흔들리던 나무들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관광지와 유흥지, 여행지를 다녀오고서는 기억할 수 없는 그런 포근한 느낌을 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는 동안 곳곳에서 느꼈다.
가람배치니, 상하구도 원형구도 그런것들은 나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역사적 지식이나 미를 보는 감각이 후져서 이론적으로나 지적으로는 많이 달리지만, 문화재를 답사하고 유적지를 느끼는데 지식은 필요하지 않다라는 생각을 오히려 이 책을 읽으면서 하게 된 것이다. 어디가서 아는 척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느낄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고 할까. 문화재를 볼 때에도 그런 관점이어야 한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남에게 으스대기 위하여 치장한 것이 아닌, 사용자의 편의에 입각하여 배치된 것이라는 당연한 슬기를 문화재를 통해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는 꼭 필요한 관점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이 오랜세월 그토록 유명했고,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필독서인 이유도 이제야 알 것 같다. 답사를 통해 지식을 얻을 것이 아니라, 답사를 통해 지적인 눈을 키워야 할 것이었다. 답사를 통해 사랑을 배워야 할 것이었다. 인간과 자연을 조화롭게 사랑할 줄 알았던 선조들의 지혜를 배워야 할 것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치장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낄 줄 아는 고고함을 배워야 하는 것이 답사인 것이다. 그렇기에 다시한번 우리의 답사문화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또 한편으로는 이 책에 소개된 여러 유적지의 관리인들이 책이 출판된 후 끊이지 않는 관광객들로 유적지가 몸살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는 대목에서는 당장이라도 책을 따라 답사를 떠나고 싶었던 마음을 자제해야겠다 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유적지가 몸살을 앓는 이유는 그곳을 찾았던 많은 이들이 답사객이 아니라 관광객이었기 때문에 남긴 불찰이 아니었을까 한다. 답사객이라면 마땅히 산들바람처럼 그곳을 스쳐가야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다녀온 흔적은 내 마음에만 남기고 말이다.
 

1993년에 첫 간행된 책이므로 지금 읽기에는 답사처의 환경과 가는 길 등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에 내가 읽은 이 책은 새로 개정되어 출판되었다. 그렇기에 읽기에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지만, 다만 비전문가로서 혹은 책이 쓰인 시기의 여러가지 상황에 어두워 고개를 꺄우뚱하게 되는 장면이 없지 않았으나, 위에 말한 것처럼 지식을 얻기 보다는 지혜를 얻는데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무엇인가 표나는 결과를 얻겠다는 생각부터 부끄러워지는 책이다.
저자는 자연과 인간의 행복한 조화를 거스르고 있는 현대의 건축물들을 '생각이 퍽이나 가난한 사람들의 건축물'이라고 표현했다. 생각이 가난한 사람들은 배려나 사랑보다는 남의 눈을 의식해 겉치장에 치중할 수 밖에 없다. 자연을 훼손하고 당장의 편리함만을 생각한 현대의 건축물들은 자연을 훼손한 자리에 인공의 자연을 만들어놓고, 그것이 세련됨이며 디자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격이란 그런것이 아니란 생각을 했다. 읽기 시작하기까지 오래 걸렸지만, 이어서 2권 3권을 욕심내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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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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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는 명문대를 나와 강남의 생활수준과 기득권을 유지하는 상류층이면서 민주, 정의, 평등 따위의 가치를 주장하며 자신의 정치색을 드러내는 지식인 혹은 지도층을 일컫는다. 처음 강남 좌파라는 용어는 한나라당이 권력과 금력을 누리면서도 양심과 정의의 수호자로 평가받기를 원하는 노무현 정권의 실세들을 비꼬는 말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점점 상류층이면서도 진보적 가치를 역설해 하층계급에 큰 힘이 되는, 이른바 생각과 노선이 좌파적인 상류층을 지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실생활은 여전히 전혀 좌파적이지 못하다는 것에 강남 좌파의 비애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든 생각은 좌파적이라는 것은 꼭 물질적인 가난을 뜻하는 것인가 였다. 좌파는 늘 경제적으로 궁핍해야 한다는 것인지, 지도층이라면 어느정도의 물질적 혜택이 돌아가는 것은 용인해야 하지 않을지,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좌파는 사적인 재산을 불려서는 안되는 것인지. 그러나 문제는 재산을 불리는 방법에 있을 것이며, 투기나 투자가 좌파의 도덕성에 흠집을 낼 수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강준만 교수는 구체적으로 강남좌파로서 거론되는 인물들을 차례로 언급했는데,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한 강남 좌파 인물론은 조국, 박근혜, 유시민, 문재인을 지나 강남 우파 오세훈으로 막을 내린다. 그런데 나는 강준만 교수의 이런 강남 좌파 인물론을 읽으며 거북함을 느꼈다. 강준만 교수는 작정하고 노대통령 부터 참여정부의 인사들을 위선적인 강남 좌파로 규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참여정부의 실책과 실정이 노 대통령 서거로 얼렁뚱땅 묻히려는듯 보이는 부분이 없진 않지만, 강남 좌파를 논하겠다는 책에서 대놓고 참여정부 인사들을 한나라당의 관점에서 강남 좌파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 다소 불편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보는 강남 좌파란 같은 편이 아니면 다 빨갱이란 식의 이분법적 사고를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김기현 대변인은 국회 브리핑에서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서울 시장 후보 단일화에 대해 "강남좌파 안철수 파동은 결국 좌파 단일화 정치쇼로 막을 내렸다"며 "나름대로 신선한 충격을 주는 듯하던 안철수 씨의 본색도 알고보니 자신이 그토록 비난하던 구태 야합 정치인에 다름없음이 확인된 것"이라며 "안철수와 박원순 역시 좌파 야합 정치 쇼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한때 당에서 러브콜을 보냈던 안 원장이 '반한나라당' 입장을 밝히자 좌파로 몰아붙인 셈이다.(경향신문/ 9월 7일자)


한나라당이 강남 좌파를 보는 시각이 이럴진데, 참여 정부 인사가 전부 겉과 속이 다른, 자기 밥그릇 챙기기만 바빴던, 한나라당 시각에서의 강남 좌파였다는 식의 강준만 교수의 비판은 거북스러울 수 밖에 없다. 어쩌면 이는 내가 이미, 친노세력의 프레임에 갇혀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한편으로는 해보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외, 좌파 담론은 결국 엘리트들의 밥그릇 싸움 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강준만 교수의 주장이나 원천적으로 엘리트들의 밥그릇 싸움을 엎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에서 이미 습속이 되어버린 학력 학벌 주의, 이른바 명문 대학 출신에 대한 인맥 차원의 예우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무척이나 설득력있게 생각 되었다. 결국 저자의 주장은 강남 좌파란 학벌 좌파이며, 인맥 좌파이라는 이야기다. 압축 성장으로 제대로 된 상류층을 갖어본 적이 없는 우리나라는 태생적으로 불평등한 경쟁을 조장하고, 되는 놈만 되는 천민 엘리트층을 양산하는 것에서부터 강남 좌파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또, 정당이 정책과 담론으로 모인 집단이 아니라, 인물중심으로 모이다 보니 결국 자신들의 당위성을 증명하기 위해 상대편을 폄하하고 끌어내리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집착한다는 것도 크게 공감이 된다. 그렇기에 기존 정치에 신물이 난 국민들은 새로운 인물에 그토록 집착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또한 인물 중심주의의 산물로 새로운 인물은 해법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근본 원인인 승자 독식 체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이 저자 강준만 교수의 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저자의 주장에 공감함에도 불구하고, "강남 좌파와 막걸리 우파들이 더 많이 늘어나게 해 당면한 자신의 처지와 입장에도 불구하고, 옳은 길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아짐으로써 분열의 시대를 화해와 소통으로 이끌게 될 것"(399쪽)이라고 본 의사이자 사회평론가인 박경철의 주장에서 영 고개를 돌리지는 못하겠는 것은 강준만 교수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했다기 보다는 강준만 교수가 제시하는 근본적인 해법이 요원하다는 생각에서다. 체제를 돌리지 못할 바에야 자기 밥그릇 챙기겠다는 타당한 탐욕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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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초딩 5년인 아들아이의 대안 교육을 심각하게 고려 중입니다. 마음에 드는 대안학교를 정하고, 대기자 목록에 올려 놓으며 왜 진작 용기를 내지 못했나 후회아닌 후회를 해보기도 하지만, 지나온 그 때는 때가 아니었다고. 이제라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준비가 필요했던 것 아니냐고 혼자 위로해 봅니다. 아직 정해진 것은 없지만, 올해가 지나기 전에 좋은 소식 하나 기대해 봅니다. 그래서인지 9월 읽고싶어지는 신간은 교육에 관한 책들로 시선이 많이 가네요. 

 

 

이기심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제 경험상 그렇더라구요. 그런데 본성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결국엔 주입된 생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 나왔군요. 저자는 아이들이 생애 초기에 누려야 할 무조건적인 사랑이 부족할 때, 그 후에 모든 인간관계에서 이기적이 된다는 그럴듯한 주장을 하네요. 자본주의 속에서 내 몫을 찾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낳은 아기들은 부족한 애정을 내 몫에서 차지하려고 하고, 이기적인 아이들은 성인이 되고, 그 성인은 또 아기들의 부모가 되네요. 그렇다면 이 악순환은 도대체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요. 옵저버는 이 책을 추천하면서 세상을 구원할 방법을 발견할 수 있어 감동적인 책이라고 했네요. 몹시 구미가 당깁니다. 아이고? 고르고 보니 9월 1일 출간했군요... 하루차인데, 뭐 괜찮겠죠. ^^; 

 

 

 

대안학교를 고민하는 이유는, 학교의 주인은 아이들이 아니라는 것 때문입니다. 공교육은 똑같지 않은 아이들을 똑같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공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내 아이는 공교육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나름의 이기심이 작동합니다. 교사로 산다는 것, 더구나 대한민국에서 교사로 산다는 것은 월급쟁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스승님들께 너무 폐가 되는 말씀이려나요.. 제가 삐딱한 시선으로 바로 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아이에게 숨을 쉬게 해주고 싶어요. 그것이 부모된 자의 마땅한 소망 아닐까요. 미국 교육계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성, 진보 교육자 조너선 코졸,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교사로 산다는 것, 정말 월급쟁이 이상이 될 수 없는 것인지. 

 

 

 

헥, 내가 아직도 이 책을 읽지 않았었다니. 사실 그다지 놀랄 만한 일도 아닙니다. 제목만 봐도 딱 불량스러운 이 책을, 정해준 선 외에는 넘을줄 모르던 내가 읽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번역된 책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이제, 딱, 지금, 꼭 읽어야 할 명저라고 생각됩니다. 간디가 되려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무엇에 저항하고, 무엇에 불복종할 것인지는 알아야 할테니까요.  

누구의 소유물이나 도구가 되기에는 너는 너무도 소중한 존재라고.... 

  

 

어. 이계삼 선생님이 해제한 조너선 코졸의 <교사로 산다는 것>도 이달에 출판되었는데 에세이까지 내셨군요. 이미 <영혼없는 사회의 교육>으로 유명하신 분이죠. 조너선 코졸의 책을 보려한 것도 사실은 이계삼 선생님 때문이기도 한데요.. 영혼없는 사회의 교육에서와는 달리 학교밖에서의 활동가 모습이 책에 많이 담겨있다고 하네요. 그러나, 학교 안과 밖이 서로 금을 긋듯 나누어 질 수 있는 영역은 아닙니다. 몇일 전, '곽노현 교육감 님을 믿는다'는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던 교복입은 여중생의 사진을 트위터를 통해 보았습니다. 눈물이 핑 돌았죠.. 학교와 사회는 분리될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지킵니다. 스스로 자신을 지킬수 있는 힘을 실어줄 책임이 우리 어른들에게는 있는 것이구요. 이계삼 선생님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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