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 말해주지 않는 그들만의 진실
데버러 L. 로드 지음, 윤재원 옮김 / 알마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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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학 교육의 근본적 목표는 지식의 발전에 있다. 그러나 대학 교육의 숨겨진 진정한 목표는 더 높은 지위와 더 높은 수입에 있음을 누구나가 다 알고있다. 그러므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다는 것은 미래의 빛나는 영광 따위는 기대할 수 없는 인생의 패배자가 된다라고 생각한다.

대학은 교육의 질을 높이기보다 명성을 드높이기에 급급하다. 때문에 대학은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교육 자원에의 투자보다, 화려하고 호화로우며 가시적인 효과가 있는 전시행정을 통한 건물증축과 시설물 확충에 투자한다.

경쟁중심적 문화로 순위에 대한 집착은 학교와 학생 모두에게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학생과 학부모는 교육의 내용보다는 학점에 더 신경을 쓰고, 그에따라 학교와 전공을 선택한다. 또한 그들은 대학 교육을 지위 상승을 위한 타이틀로 여긴다.

분화되고 전문화된 오늘날, 인문학과 같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교육은 점차 사라지고, 돈을 이해하고, 돈을 숭배하는 공부는 주가가 높다.

교수들은 학문을 연구하며, 제자를 교육하고, 후배를 양성하기보다는 대학 및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 확보를 위한 출판에 집중해야 한다. 또한 출판에 있어 연구의 질이나 독창성이 중요시 되기 보다는 다량의 실적에 중점을 둔다.

교수들의 연구 기금과 학교 시설 확충을 위한 자금의 출처는 많은 부분에서 민간 기업 쪽으로 기울고 있며, 그들은 자금을 투자한 만큼 정확한 보상을 대학에 요구한다. 때문에 무엇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투명해야 할 교육은 기업의 요구에 맞춰져 판매와 투자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대학은 기업을 위해 헌신 할 지적이고 전문적인 노동자 생산 기관이 되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의 젊은이가 대학생이지만, 또한 대다수의 대학생은 어마어마한 학비를 부담하기 위해 빚쟁이가 되고있다. 그들은 학교를 졸업한 후, 학비를 갚기 위한 부채 노동자가 되며, 학비 상환 후에도 그들은 결혼하기 위해, 집을 사기 위해,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 노후를 보장받기 위해 여전히 부채노동자로 남는다.

 

지식인을 양성하고 이성에 대한 역량을 확대시키기 위한 고등 교육으로써 대학교육은, 오늘날 그 본질이 훼손되고 왜곡되어 천박한 모습인 위의 몇가지 가치로 대변된다. 저자는 그 대상을 미국의 대학들로 한정했지만, 위의 설명은 정확히 우리사회 대학의 모습이다. 사회 시스템과 교육 등 많은 부분에서 미국을 추종하고 있는 우리사회는 대학의 모습조차 미국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저자가 짚어주는 미국 대학의 문제점들은 바로 우리 대학의 문제점 들이기도 하다.

대학은 고등 교육을 통한 비판적 사고 능력을 개발해 현대 사회에 필요한 지성적이고 윤리적인 인재를 양성하기 보다는 자본에 복종하고, 순응할 실용적 인간상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학의 문제점이 대학 자체만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자본을 쫓고, 지위를 쫓는 세태만을 탓하기에도 부족하다. 대학이 변해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사회가 개혁되어야 하며,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나 소시민인 우리는 자식이 더 나은 지위를 보장 받을수도, 더 높은 수입을 올릴수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학 진학을 포기할 수 없다.

자, 모두가 대학교육을 받은 지금 우리나라는 정부발표 청년실업률 6.3%, 실제 청년 체감 실업률은 정부 발표치의 4.3배에 달하는 청년실업 대국이 되었다. 이에 대해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 힘들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스러운(dangerous) 일을 피하는 청년에게 문제가 있다라고 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대학은 마음만 먹으면 모두가 진학할 수 있을 만큼 선택의 폭은 넓어졌지만, 그로인해 고등 교육의 진짜 목적은 잃었다. 대학은 더이상 지성의 전당이 아닌 지위를 쫓는 격투장이 된 것이다.

대학은 우리에게 진실을 말 하지 않는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도 우리는 알고 있다. 다만, 낙오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조차도 침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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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갈수록 인문/사회 신간평가단이 추천하고, 선정되는 책들이 어려워진다는 것에 있어, 저는 지금 심각한 자기검증 내지는 자아비판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제대로 신간평가단 몫을 해내고 있는 것인지, 때로는 책의 의미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서 책을 받아 읽고 리뷰랍시고 적고 있는 것은 아닌지, 왼쪽 발끝이 찌르르 저려오는 이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으니 도대체 나의 욕심의 끝은 어디인가, 하고 말입니다.

부족하면 어때, 모자라면 어때, 전문가도 아닌데 내 나름의 감상평이면 충분하지.. 하는 생각으로 오늘도 꿋꿋하게 읽고싶은 신간을 고르고 나름의 변을 적습니다.

 

 

경쟁이 따뜻하다? 이건 좀 모순되는 이야기네요. 경쟁이란 것은 어차피 밀어내지 못하면, 내가 밀려나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자 부활의 나라' 라는 부제에 이끌려 책을 살펴봅니다.

지금 우리는 온나라가 '경쟁'으로 몸살을 앓습니다. TV조차 온통 경쟁을 유도하는 프로그램으로 도배를 하고 있는 실정이며, 프로그램에서의 패자는 다시금 부활하기도 하지만, 어설픈 감동을 유도한 설정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얕은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만큼 현실의 경쟁과, 패자는 비참하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비교적 보편적 복지 시스템이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는 북유럽 국가 스위스 이야기라는 것과, 스위스가 농업에 포커스를 맞춘채 공존의 틀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노력하고 있다는 것.

자본과 민주주의는 같이 갈 수 없고, 자본과 공존이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스위스를 통해 한국의 현실을 들여다 보고자 합니다. 허걱... 2월 출간도서네요 ㅠ.ㅠ

 

 

 

 

 

음.. 제목과 목차만으로 선택한 책입니다. 챕터마다의 저자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출판사 서평이라던가 하는 정보조차도 없는 책이지만, 도시의 역사와 함께 도시건설에 따른 지역 사회의 갈등구조를 파헤쳐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라딘 인문 공부방 초대로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님의 강연회를 다녀왔습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닥친일이 아니기에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원자력발전소에 대해 생각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는데요, 일본 후쿠시마의 원전 사고는 우리에게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한 사태라는 것도 알게되었습니다.

선생님의 강연을 들은 어떤 학생은 지난해 여름 예고없이 닥친 정전사태를 두고, 원전을 포기해도 괜찮겠는가 하고 물었다고 해요. 이에 선생님은 세종로의 잠들지 않는 화려한 전광판과 냉난방을 염두해 두고 환기구 없이 들어서는 고층빌딩을 말씀하셨습니다. 전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말그대로 생각없이 마구 낭비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면서 팔뚝에서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경험을 했습니다. 나야 좋은 한시절을 살고 가겠지만, 우리아이는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던 거죠. 선생님의 말씀처럼 원전은 바다건너 남의 나라 일이 아닌 바로 우리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사회주의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러나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대로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은 자주 하죠.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는 것이죠. 자본이 더이상 팽창할 곳을 찾지 못해 조만간 그 끝을 고하고 말 것이라는 불안은 도처에서 시시각각 확인되고 있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우리는 체제에 대해 다시한번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소련의 사회주의와 다른 21세기형 사회주의는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권 더 챙겨봅니다.

프로이트의 제자로 알려진 융. 그러나 그는 성적 본능에 중점을 두었던 프로이트와는 다른 길을 열었다고 하는데요. 바로 인간의 집단 무의식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인드라의 궁전에 드리워진 무수한 구슬 그물, 인드라망을 떠올리게 합니다. 삼라만상이 투영된 구슬들은 서로서로 다른 구슬에 투영된다죠.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가, 우리는 결국 하나가 아닌가. ㅡ.ㅡ;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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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복지국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신 자유주의 시대, 복지정책의 딜레마
아스비에른 발 지음, 남인복 옮김 / 부글북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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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나 혹은 보편적 복지에 반감을 가진 우파들은 복지시스템이 사람들을 게으르고 나태하게 해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결과, 성장과 발전은 더이상 이룰수 없게 된다라고 주장한다. 이는 전통적인 경제학에서 말하는 인간 존재는 끊임없이 자기이익만을 추구하고 보상과 처벌에 따라 행동을 달리한다는 '호모 에코노미쿠스' 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즉 인간은 경제적 인센티브나 경쟁에 대한 압력이 없다면 누구도 최선을 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존엄성을 인정받게 되는 보편적 복지시스템은 도덕적 해이로 인해 결국 국가경제 성장에 방해가 된다라는 뜻이다.

소위 우파라고 자칭하는 우리의 보수적 정치인들은 그리스 및 최근 일련의 유럽의 경제난은 보편적 복지시스템에 의한 국가 부도 사태와 같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러한 주장에 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장 고된 노동에 자신을 투자한 결과, 최종적인 이득은 상위 1%에게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오히려 성장과 효율성 제고를 위해 열정을 쏟을 사람은 없을 것이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사회에서 직업이나 일은 밥벌이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기본적인 행복감 조차도 유보해야 한다.

 

북유럽의 복지국가는 자본가들이 사회주의 세력이 늘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노동운동과의 합의를 통해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고, 확대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책은 설명하고 있다. 그 결과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은 보편적 복지 시스템 하에서 전반적 근로조건을 개선시켰고, 빈곤이 약화되었으며, 질병이나 고령이 된 사람, 한부모 가정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경제적 안전을 보장했다. 또 무상 교육과 건강 서비스는 국민의 삶의 질을 높였고, 누구나 사회속에서 보호받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으며, 이러한 혜택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하는 당당한 권리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사람과 사람의 사이는 경쟁이 아닌 연대가 함께 했다.

국가의 역할은 국민을 통제해 국가 스스로의 권위를 높여 권력층의 권한을 넓히기 보다, 전체 국민들의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한 것에 그 큰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국가의 존속 이유를 그렇게 규정할 때 복지국가는 바로 민주주의의 보루이며, 선진적 사회 시스템임과 동시에 최종족으로 우리가 이루어야 할 고차원적 문명이라고 보여진다.

북유럽의 국가들은 2차세계대전 이후 그러한 선진 시스템을 마련할 수 있었으며, 복지 시스템 속의 북유럽 국민들은 행복감을 맛보았고, 인간으로서의 권위를 존중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공세가 시작되면서, 자본이 국가 경계를 넘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고, 사회적으로 당연한 권리였던 복지기금이 삭감되고, 공공 서비스들이 민영화 되고, 구조조정에 의해 국민의 권력이 체계적으로 약화되었다. 그 결과 북유럽의 국가 경제는 오늘날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복지국가가 약해지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사회적 불평등이 만연하고, 그 격차 또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지고 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경쟁 시스템 속에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노동의 강도는 더더욱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가족들이 필요로 하는 돈을 마련할 수 없는 워킹푸어가 된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빈자는 더더욱 빈자가 되는 사회가 신자유주의가 추종하는 사회의 모습이다.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이 '평등'이라고 볼 때 신자유주의의 이념하에서는 결과적으로 '평등'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주장처럼 빈곤을 퇴치하고 사회적·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며, 모두가 다 살게 되는 복지시스템은 어떻게, 왜 붕괴되고 있는가. 그것은 '권력'의 이동과 관계가 있다. 보편적 복지 사회에서 권력은 국민, 노동자, 인민에게 있었다. 그러나 복지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경쟁과 성장만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권력은 '자본'에 있다. 자본은 인간을 무너뜨리며 스스로 팽창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북반구(유럽과 북미 일본 등 선진국)의 복지국가는 남반구의 여러나라들을 착취함으로써 이룰 수 있었다는 점 또한 고백하고 있다. 서반구의 개발도상국들 중 빠른 시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내 OECD에 회원국이 된 우리나라 역시 과거 선진국에 의한 착취 대상국이었다. 때문에 우리의 역사 속에서 '복지국가'는 요원한 일이며, 한번도 도달하지 못한 미래이다. 더구나 신자유주의의 선봉에 선 미국을 추종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 복지란 빨갱이들이나 주장하는 잘못된 이념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의료서비스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4천만 내지 5천만이 의료 해택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교육기관을 갖추고 있음에도 그 교육은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를 위한 의료 서비스이고, 누구를 위한 교육인가. 우리나라가 진정 따라야 할 미래가 미국 사회라고 규정되어도 좋은 것일까.

노르웨이의 노동운동가이며, 복지국가운동가인 저자는 북유럽의 복지 시스템의 붕괴에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며 잘못된 복지국가의 해석을 바로잡고자 이 책을 썼지만, 복지의 기본 이념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그조차도 무척이나 부럽게 생각되었다. 우리나라는 무상급식을 주장하고, 찬성하는 이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수준의 '미복지 국가' 혹은 '비복지 국가'이기 때문이다.

 

무상급식에 반감을 갖었던 사람들, 복지라는 글자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복지를 구걸이나 수혜와 같은 의미로 여기는 사람들, 그리고 자칭 타칭 '우파', '꼴보수' 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싶다. 읽어도 비틀린 마음으로는 무슨말인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말이다.

보편적 복지는 인간의 기본권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뤄내야 할 미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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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탄생
송호근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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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민의 역사를 통해 조선의 근대화 과정을 재구성하는 연구서이다. 조선의 근대화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저자 송호근 교수는 외부의 시선으로 보는 식민주의적 사관의 근대를 벗어나 조선의 자주적 근대로의 전환을 모색하기 위해 이 작업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인민'을 통해서 조선사회의 근대화 과정을 살펴보아야 했을까.

사회는 국가라는 이름의 지배 계급과 인민 대중으로 구성된다. 조선의 역사는 군주와 사대부로 구성된 지배 집단의 역사였으며, 그 속의 인민은 통치 권력에 의해, 통치 권력 위한 피조물일 뿐이었다. 착취와 억압의 대상이었으며, 권력의 정당화를 위한 객체로서 수동적이고 순종적이었던 인민이 스스로를 각성하고, 독자적 주체로 나아가는 과정은 시민사회로의 발돋음이며, 그는 바로 조선의 근대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유교는 조선사회에서 오랫동안 종교였고, 사회의 조직 원리였으며, 교육과 문화의 핵심 가치였다. 뿐만아니라 근대를 통해 개화되고 진화된 한국 사회에서도 유교의 전통은 여전히 곳곳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 생명이 유지되고 있고, 이에 조선의 경제사와 사회사, 정치사, 문화사를 연결해 조선을 총체적으로 조망해 보는 것은 한국의 현 사회를 해석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유방본'을 통치 철학의 명분으로 삼고있음에도 조선의 성리학적 우주관과 조상 숭배를 결부시킨 종교적 의례와, 신분 직역과 부세의무를 강제하는 향촌 지배, 그리고 그러한 지배이념의 도덕과 윤리를 재생산하는 교육을 통해 조선의 인민은 오랫동안 수탈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러한 통치 철학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기에 이르렀다. 훈민정음에 그러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하더라도 언문은 인민으로 하여금 지배계급의 세계관을 습득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주체적으로 자신을 들여다 보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언문은 유교의 세계관을 벗어나, 신 앞에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는 천주교에 수많은 인민들이 순교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기제가 되기도 하였다. 천주교는 명시적으로는 유교의 사상을 거부한 것이 아니었지만 천주교 신자가 되는 자체가 유교적 통치 이념의 기반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조선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천주교도 탄압을 자행했다.

언문은 순종적이고 수동적이기만 하던 인민이 사회적 비판 의식으로 무장하는데 추동력이 된 것이다. 세종대왕이 미련한 백성을 위해 한글을 창제했다는 표면적인 주장은 결과론적으로 증명이 된 것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개인의 인식은 언문을 통해 담론이 되고, 확대되어 공론화 되었으며, 공론장에 모인 주체들은 실천 과정을 통해 점차로 시민사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선 근대화의 핵심이며, 이는 조선뿐만이 아닌 세계 모든 국가들에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근대화의 출발이다. 즉 통치 대상으로서의 인민이 아닌 주체로서의 인민, 근대적 인민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후 사회적 상상의 인민, 저항하는 인민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욕망하는 주체인 개인이 됨으로써 체제와 권력으로 부터 해방이 되었는가. 나는 이 지점에서 그다지 명쾌하게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 없다. 여전히 권력의 통치 철학은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재생산되고 있으며, 생각하는 인민은 생각조차도 권력에 조정당하는 지점에까지 이른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김태권은 십자군 이야기에서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자는 그 역사를 되풀이 해야 한다' 라고 했다. 송호근 교수의 '인민의 탄생'을 통해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주체로서의 인민은 충분히 그 역할을 다 하고 있는가', 혹은 '다 할 수 있는가'가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인민이 시민으로 전화하는 과정을 담을 것이라고 예고한 2권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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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상처를 말하다 -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예술가의 뒷모습
심상용 지음 / 시공아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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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심상용은 책을 시작하며 이 책이 예술 지침서로 또 한권 보태지는 의미에 그치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한다고 썼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지은이의 그런 바램은 몹시도 타당하다 라고 생각된다. 어떤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작가의 의도는 작품을 이해하는데 몹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잘못된 작가의 의도를 해설서로 삶고 있는지 정작 작품을 감상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알지 못 한다. 작품을 완성한 작가의 의도쯤은 때때로 얼마든지 무시되고, 뿐만 아니라 어떤 힘의 논리에 의해 조작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미처 대중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의도를 조작하고, 또 때로는 작가의 삶 전체를 삭제하거나 덧칠하는 작업을 통해 대중을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가는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오는가. 지은이는 이 책에서 그 힘의 원천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긴다.

 

 

지은이는 카미유 끌로델과 고흐, 케테 콜비츠, 프리다 칼로의 불후했던 생을 고통의 시대, 상처의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묶고, 권진규와 백남준, 이성자를 이방인으로 규정했으며, 마크 로스코와 앤디 워홀, 바스키야를 시대의 희생물로 분류했지만, 나는 약간 다르게 해석하며 읽었다. 고흐와 백남준, 로스코, 워홀을 자본에 의해 상업적으로 유린된 작가들로 해석했으며 끌로델과 프리다, 권진규, 바스키아를 기득권에 의한 희생물로, 그리고 이성자를 조국을 잃은 디아스포라로 이해했다.

시대의 불의와 기득권에 맞서 자신의 신념을 앞세웠던 고흐는 불행한 삶을 권총 자살로 마감했지만, 사후 그의 작품은 미디어를 통해 신화화 되고, 상업적 소비에 적절한 브랜드로 재구성되어 제공되어 진다. 우리는 '고흐'라는 브랜드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상품을 아는 것이다. 육체노동으로 갈라지고 무뎌진 손끝으로 문명화된 사람들의 생활방식과는 너무도 다른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불합리한 문명의 속살을 들추고 싶었던 고흐의 인간적 고뇌는 의도되고 조작된 상품 안에서는 결코 알 수 없다. 예술은 과시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에 의해 축적되는 투자물이 된 것이다. 또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군중위에 군림하는 부르주아 문명을 오물로 간주했으나, 기술의 기적이 초래하는 기계에 의한 인간의 종속화를 예견하지 못하고 작품 활동 자체가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거창한 사업으로 재편되어 후원과 예찬을 적극 활용할 수 밖에 없었던 백남준, 자본사회를 경멸하고 명상적인 작품을 추구했으나 그 자신은 결코 명상적이지 못했고, 끝없이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했으며 갤러리와 은밀한 뒷거래까지 진행하는 자신의 이중성으로 결국 자신의 동맥을 끓을 수 밖에 없었던 로스코, 마릴린 몬노와 코카 콜라로 자본주의의 선봉에 섰지만, 결코 진정한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던 워홀은 모두 상업적으로 유린되고 조작된 신화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까미유 끌로델과 프리다 칼로, 권진규, 장미셜 바스키아는 시스템에 의한 기득권자들에게 억압받고 짓눌리며, 때로는 작가적 기량마저도 착취당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존중받지 못하는 생을 살았다. 따라서 그들의 작품은 그들의 상처이며, 그에따른 고통의 결과물이다. 과연 우리들의 그들의 고통을 가감없이 올바로 전달 받고 있는가 하는 점을 지은이 심상용은 묻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의도했던 기존의 예술 지침서와는 다른 시각의 해설은 충분히 공감되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텔레비전의 유해성을 알리기 위해 전위적인 작품활동을 기획했던 백남준의 전위적 시각이, 텔레비전만큼이나 세상 읽기를 왜곡하는 틀이 되었다는 지은이의 해설처럼, 이러한 해석 또한 작가의 의도를 곡해할 수 있다는 의심의 끈을 놓지않으며 이 책에 대한 감상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어쩌면 올바른 작가의 의도란 우리로서는 영원히 알 수 없으며, 따라서 작품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또는 기타 다른 필요에 의한 해석과도 관계없이 오로지 나만의 감각에 의한 작품의 이해만이 '올바름'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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