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비세계문학 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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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전, 학교를 통해서는 보편적 교육을 실현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며 <학교없는 사회>를 쓴 이반 일리치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한때 사제였던 철학자 이반 일리치와 톨스토의 이반 일리치가 동일인물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동일인물은 아니다. 톨스토이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쓰기 시작한 것이 1882년이고,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20세기 최고의 지성이라고 불리었으니 시기적으로도 당연히 동일 인물일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동명이인이라는 것 만으로 톨스토이가 쓴 이반 일리치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제목이 말하듯 이 책은 이반 일리치라는 인물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동료들이 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 가족이 바라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 그리고 이반 일리치가 느끼는 그 자신의 죽음과 죽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인에 관한 이야기다.

동료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편으로 죽은자가 자신이 아님에 안도하며, 재판관이었던 그의 뒷자리를 누가 잇는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나름 기대를 걸기도 하고, 그날밤 카드놀이 참석여부 따위에 신경을 집중한다. 그런가 하면 이반 일리치의 아내는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얼마나 더 지급받을 수 있는지에 촉각을 세웠다. 이반 일리치는 동료나 가족의 이러한 모습을 미리 예견하고, 지레짐작하면서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집착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반 일리치 역시 누군가의 죽음을 대할 때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맞는 주변인의 죽음 앞에 나는 어떤 모습이었던가. 애통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장 나에게는 직접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불행인양 안도한 적은 없었던가. 오롯이 그의 죽음이 슬프기만 했던 그런 기억은 너무도 멀다. 아마도 어린시절 맞았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는 나에게 미칠 영향따위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아프기만 했던 죽음이었다면 그에비해 그후의 몇번 맞이한 지인들의 죽음은 무작정 슬프기만 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주검앞에서 내 개인적인 안녕을 먼저 생각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면서 매번 내 자신을 추스리기에 바빴다.

톨스토이가 인간과 어떻게 사는가에 집중했던 것은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인것이 아닐까. <안나 카레니나>에서 그 자신을 모델로 했던 레빈은 형의 죽음 앞에 고독과 함께 두려움을 느낀다. 레빈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오히려 몇번의 자살 시도를 통해 벗어나고자 했다.

 

이 책의 번역을 맡은 이강은 교수는 이반 일리치가 죽음의 고통으로 소리내어 울고 싶고, 누군가가 그런 그를 어린아이처럼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같이 울어주는 것만을 바라는 대목에서 이반 일리치와 함께 울었다고 했다. 나역시 그 대목에서 그럴수밖에 없었는데, 누구나 다 혼자일 수 밖에 없다 것을 삶 속에서 이미 절절히 체험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진심어린 위로가 절실한 것이 아닐까.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그 죽음은 주변인이 아무리 많다해도, 결국 나혼자 가는 길이다. 내 고통을 오롯이 느껴주지 않는다 해서 그다지 슬퍼할 것도, 억울해 할 것도, 분해할 것도 없다. 나역시 타인의 죽음을 온전히 내 고통으로 느끼지 못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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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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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파이 이야기>를 쓴 작가 얀 마텔이 자국인 캐나다의 수상에게 문화와 예술을 사랑해 달라는 의미로 보낸 101통의 구애편지다. 이 편지들은 거의 사년 간, 격주로 추천 도서와 함께 수상 집무실로 보내졌다.

얀 마텔의 편지와 책 선물을, 주기적이며 일방적으로 받아야 했던 캐나다 수상은 마지막 101번째 편지가 도착한 이후로도 이에 대해 어떠한 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드물게 수상 집무실의 문서담당관으로 부터 짤막하고 피상적인 감사의 인삿말을 담은 짧은 편지가 보내지기는 했다. 101통의 편지 중, 총 7통의 대리 답장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한나라의 수반인 수상이 한가하게 책이나 읽고 노닥거릴 여유가 없다는 뜻이였을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제안되는 독서는 하지 않겠다는 뜻이였을까? 아니면 수상은 원래 책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관심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수상이 침묵하지 않았더라면, 얀 마텔과 수상간의 활발한 논의로 일방적인 책 추천이 얼마든지 바뀔 여지가 있었고, 또 근본적으로 책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수상이라면 자국민의 주기적이고 장기적인 이러한 노력에 아주 작은 성의라도 보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아무래도 수상이라는 직책은 독서할 짬이 나지 않는다는 쪽으로 나는 추측한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작가가 수상에게 권하는 책이 어떤 것이였을지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추천도서 목록에서  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와 <깊은 밤 부엌에서>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우리 아이가 무척이나 좋아해 중학교 1학년이 된 지금까지도 버리지 않고 간직하는 바로 그 모르스 샌닥의 그림책이 바로 수상을 위한 추천도서 목록에 있었던 거다.

얀 마텔은 아들의 탄생을 기념하는 뜻에서 두 권의 그림책을 고른 것인데, 무엇보다 문학의 힘이 '상상력'에 있다고 믿는 그는, 따분하고 편협만 마음을 가진 어른은 사회에 필요한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직책 때문에라도 늘 경직되어있을 수상에게 어린시절로 돌아가 마음껏 상상력을 펼쳐 볼 것을 권하는 의미였던 것이다.

얀 마텔이 수상에게 문학을 권하는 이유는 이 두권의 그림책을 고른 이유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물론 정치는 한 개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독자적인 의견으로 하는 것은 아닌, 여럿이 함께 모여 나누어야 하는 가장 사회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정치는 타협의 예술이며, 어쩌면 가장 덜 창의적인 분야이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상상력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풍부해질 수록 이성과 감성에서 모두 유능해질 수 있으며, 무엇보다 나를 내려놓고 남과의 타협을 이끌어내려면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는 상상력이 없다면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수상에게 보내진 책들은 소설과 희곡, 시, 동화와 만화, 그림책과 몇편의 논픽션이 있었으며, 놀랍게도 '할리퀸 로맨스'까지 포함되어있었다. 이 역시 그림책과 마찬가지로 쪼그라들지 않는 상상력을 위한 추천서였다. 과연 수상은 얀 마텔이 보낸 책들을 몇 권이나 읽었을까? 또 만약 읽었다면 얀 마텔의 기대대로 조금이라도 더 현명해졌을지 살짝 궁금하다. 그랬다면 그렇게 끝까지 묵묵부답으로 둘만의 특별한 독서클럽을 끝내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캐나다에 대해, 그리고 수상 스티븐 하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얀 마텔에 의하면 캐나다의 수상 스티븐 하퍼는 자신의 원칙과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며,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기만을 기대하는 원칙주의자이다. 얀 마텔은 나라의 지도자에게 이런 모습은 바람직 하지 않다라고 생각한다. 현시스템에서 '나'라는 개인은 국가의 영향을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라의 지도자인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꿈을 꾸며,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가 그의 학력이나, 경력, 재산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또한 책을, 문학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서 바른 생각과 깊은 사색을 기대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이유로 얀 마텔은 수상에게 둘만의 특별한 독서 클럽을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시도가 얀 마텔의 짝사랑으로 끝나고 말았다.

 

시작은 일방적인 것이였더라도 만약, 작가와 수상의 특별한 독서 클럽이 주고받는 관계속에서 이어졌더라면, 이는 어쩌면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사례로 오래도록 역사에 남을 기념비적 사건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더불어, 우리나라의 어떤 작가라도 박근혜 대통령께 둘만의 특별한 독서 클럽을 제안해 보았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 박근혜 대통령이 캐나다 수상처럼 작가와 노닥거릴 짬이 도저히 나지 않는다면, '나'는 어떠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한나라의 수반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위치에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그저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한사람의 독서광으로 얼마든지 특별한 독서 클럽에 흠뻑 빠져들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인데 말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추천서들 중 캐나다 작가들의 작품이 많았다. 그중 캐나다 자유당 당수를 지냈다는 마이클 이그나티에프의 <덜 악한 것>이 우리말로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아프리카인과 유럽인의 만남이 불행한 방향으로 흘러간 이유는 어느 한쪽이 열등했기 때문이 아니라 둘 모두가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427)이라고 쓴 치아누 아체베의 <모든 것은 산산이 부서지다>를 꼭 읽어야 겠다.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나는 더 현명한 사람이 되려 한다.

87번째로 보내진 책 <정다운 고향 시카고>에 관한 에피소드는 오래 생각하고 싶다. 얀 마텔은 문화 친화적인 페스티벌에서 <정다운 고향 시카고>를 쓴 작가 애슈턴 그레이로 부터 직접 이 책을 샀다. 애슈턴 그레이는 이 소설을 자비로 출판하고 페스티벌에서 직접 판매까지 했는데, 얀 마텔은 이 책이 결함도 많고 무엇을 말하려는지도 불분명한 소설이라고 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상에게 이 책을 추천한 이유는 작품의 질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려는 애슈턴 그레이의 열망에 감동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작가에게서 태어난 이야기는 병을 탈출하려는 요정처럼 누군가에게 공유되기를 원한다는 얀 마텔의 설명도 근사했지만, 무엇보다 애슈턴 그레이가 다음해인 2011년 캠핑도중 급사했다는 작가 이력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무명의 소설가이거나, 한 나라를 넘어 세계를 움직이는 지도자이거나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릴 수 있는 똑같은 생명체에 지나지 않는 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며 미친듯이 일만하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왜 사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채 어느날 그렇게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 것이다. 책을 읽거나 읽지않거나 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나는 사라질 수 있지만, 살아있는 동안 나는 삶을 절실히 느끼고 싶다. 관대하고 싶고, 겸손하고 싶다. 물론 책을 통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장장 600쪽의 장서였지만,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좋은 책이였다. 다만 아쉽게도 소소한 오타가 너무 많아서 속상했다. 철자의 실수에 대해 너그럽지 않은 얀 마텔인듯 한데, 정작 자신의 책이 한국이란 나라에서 이렇게 오타 투성이로 출판된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내심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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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 톨스토이와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인생
석영중 지음 / 예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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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톨스토이에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  톨스토이 말년에 썼다는 <부활>이나, 이사야 벌린이 쓴 <고슴도치와 여우> 읽고서는 생기지 않았던 관심이었다.  '안나'의 불안한 심리에 대한 묘사와 톨스토이 자신의 분신으로 봐도 좋을 도덕적인 청년 '레빈'에게 깊은 감흥을 느꼈다. 안나의 불안이 나 자신의 불행했던 기억과 겹치면서 묘한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면, 건실한 청년 레빈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에 가까운 인물이라서 였을 것이다. 때문에 내가 읽었던 문학동네 판이 아닌, 민음사에서 출판된 <안나 카레니나>를 읽을 작정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니 톨스토이에 대해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는 그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중점으로 하되 톨스토이의 다른 소설 <전쟁과 평화>, <크로이체르 소나타>, <이반 일리치의 죽음>, <가정의 행복>과 지은이 석영중이 '설교'라고 표현한 저작들 <나의 참회>, <인생에 대하여>, <예술이란 무엇인가> 등 작품에 나타난 톨스토이를 이야기 한다. 석영중에 의하면 말년의 톨스토이는 '도덕에 미친 노인'에 불과했다. 무엇이 그토록 톨스토이를 '도덕'에 목매도록 했던 것일까. 아마도 톨스토이 자신이 방탕한 젊은 시절을 온몸으로 체험 한 후에 내린 결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체험하지 않은 것은 설교, 혹은 잔소리 이상으로는 들리지 않는 법이 아니던가.

톨스토이가 대문호라고 하지만 제아무리 설교한들 육체적 관계를 기피해 인류가 절멸될 리도, 모든 사람이 시골로 돌아갈 리도 없는 것이다. 때문에 톨스토이의 말년 설교는 한마디로 '헛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렇다고 석영중이 톨스토이의 문학적 역량이나 그의 영향력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먼저 톨스토이가 대문호며 매혹적인 작가라는 것을 전제로 했다. 그렇더라도 실천가능성이 없는 이상주의적 설교를 늘어놓는 늙은이로의 돌변은 이해할 수 없는 미친짓 이라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인간은 변한다. 따라서 진리도 변하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가진 나는,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진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톨스토이가 평생에 걸쳐 제아무리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진리'를 발견했을 지언정, 강요는 곤란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물론 강요한다고 해서 실천할 대중은 많지 않을테지만 말이다. 때문에 이 책의 지은이 석영중이 톨스토이를 도덕에 미친 늙은이쯤으로 몰아부치는 것 또한 유쾌하지는 않았다. 도덕적으로 미친 늙은 톨스토이에 대한 비판이 부담스러웠는지 마지막 에필로그에 지은이는 실천 불가능한 주장을 한 톨스토이이지만, 그의 가르침과 설교는 잘 간추리면 결국 절제와 나눔과 베풂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는 혼돈의 시대에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근본적인 가치임을 주장한다. 이를 '진리'로 묶어 실천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한층 강조하고 있지만 말이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기 전에 이 책을 읽는 것에는 반대한다. 예술에 작가가 아닌 다른 사람의 해설이 따로 필요치 않듯(톨스토이는 예술론에서 예술에 대한 전문가의 해석은 필요치 않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나의 평소 생각과 일치한다. 이런 소소한 것들로 볼때 나는 톨스토이주의자가 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책을 먼저 읽고 나면 본인 스스로 해석하는 <안나 카레니나>가 변색될 수 있으리라 보여지기 때문이다. 다만 이 책을 읽고 <전쟁과 평화>에 대한 갈증은 커졌으며, 많은 부분에서 톨스토이의 주장이 이상적이지만, 옳은 이야기를 것을 거부할 수 없으며 한층 톨스토이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은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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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이 춤이 된다면 - 일상을 깨우는 바로 그 순간의 기록들
조던 매터 지음, 이선혜.김은주 옮김 / 시공아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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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쪽과 57쪽에 걸쳐 있는 이 사진은 '마마 보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나는 이 사진을 보는 순간 푹~하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두려울 것이 없는 당찬 엄마의 발걸음과 엄마의 기에 눌려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끌려가는 아들의 모습이 너무도 적나라 했기 때문이다.

한 장의 '작품'을 얻기 위해 반복되어 찍힌 여러장의 사진들을 보는 것은 또다른 재미를 준다. 오른쪽에 실린 같은 설정의  사진을 살펴보며 웃다가, 무용수의 이름이 '종선'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종선'이 한국 무용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나자 이사진이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딱 우리나라의 열혈 어머니와 그 아들의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가만, 마마보이는 전지구적 현상이던가?

그러나, '종선'은 한국인이 아니였다. '사진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에피소드를 읽어보니, 그는 중국인이 였으며 사진 속의 여인은 '종선'의 진짜 엄마였다. 이 책의 좋은 점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였다. 일단 사진을 제목과 함께 내 느낌대로 읽을 수 있고, 그후 뒤에 한꺼번에 요약되어 있는 사진에 얽힌 에피소드를 읽으며, 사진이 탄생한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어명으로는 'Rock Star', 우리말로는 '샤워 중, 아니면 공연 중'이라고 번역된 이 사진 역시 무척 경쾌한 느낌이었다. 하얀 타일의 평범한 욕실모습과 에로틱하리만치 부드러워 보이는 투명 샤워커튼이 무용수의 도약과 함께 묘하게 어우러져 사진을 들여다 보는 내 눈에도 뽀얗게 김이 서릴 것만 같았다. 보라색의 거품용 스폰지 때문에 무용수의 탄탄한 우유빛 근육이 더 돗보이는 것 같았다. 이런 소품조차도 물론 설정이였겠지?

이 사진을 보며 깨닫은 것은 번역의 중요성이 였다. 그저 '록 스타'라고만 제목을 붙였더라면, 그 느낌이 이토록 경쾌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역자에게 박수를!

 

 

일부러 계획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진 속엔 유독 비오는 장면이 많다. 표지사진인 '빗 속의 댄서'를 비롯해 '촉촉한 키스', '공연 첫날 밤' 외에도 많은 사진들이 빗속에서 연출되었다. 댄서들은 비를 맞으면서도 다리에 쥐가 날 정도로 반복되는 도약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사진은 얼마든지 사후 조절이 가능한 예술이지만, 사진이 찍히던 그 순간의 느낌만은 어떻게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댄서들은 반복되는 도약에 마냥 기쁘만 한 것은 아닐텐데도 그들의 표정이나 몸에서는 열기가 넘쳐 보였다. 삶이 이토록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준다. 그 느낌을 그대로 전달 받을 수 있었던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고, 행복하기까지 했다. 그래. 대체로 산다는 일은 기쁨이야!

 

 

'당신의 작품들은 너무 행복해 보여요. 하지만 삶이 늘 즐거운 건 아니죠.' 라고 출판사의 편집장이 말했다. 그래서 이 작품이 탄생한 것인데, 마침 작가는 몇달 전 어머니를 떠나 보냈지만 제대로된 애도를 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 사진을 촬영한 후, 작가는 방으로 돌아와 사진을 보며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을 보면서 울고 싶지 않다. 애도의 이 장면 조차도 슬픔보다는 깊은 사색 정도로만 느끼고 싶다. 휴가가 끝나고 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휴가지에서 조차 일상의 걱정들을 짊어질 이유는 없는 것이니까.

 

 

이것도 고정관념의 하나일 수 있겠지만, 자신의 아이를 걸고 하는 모든 작업에 경의를 표한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절실하고,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자신'보다는 '자식'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 사진집을 기획했다고 했다. 순간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아이의 열정은 도대체 언제 어디로 사라져 버리는 걸까, 작가는 그것이 궁금했다고 했다. 정말,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세상 모든 일을 그렇고 그렇게 이해하게 된 걸까.

 

페이지마다 실린 사진들은 순간에의 완벽한 몰입을 보여준다. 기획되었거나 혹은 운이 좋았던 순간과 무용수의 놀라운 기교가 정교하게 어우러진 한장 한장의 작품을 보며 나는 감탄한다. 그러나 그 외에도 사진을 찍던 순간의 몰입이, 지금 여기 책을 보는 순간에 완벽하게 재현되기 때문에 나 역시 몰입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주변의 지인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이렇게 쓴 쪽지한장 끼워서.

'우울하거나, 삶이 버거워질 때 이 사진들을 봐. 너도 모르게 살풋 웃게 될꺼야. 그리고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을 내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지.'

거기에 '사랑해'라고 쓸까,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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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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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는 사람들의 심리에는 무엇보다 복수심이 있는 것이리라. 자신의 고통에 대해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우고 싶은 생각, 누군가의 '탓'을 하고 싶은 심리가 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역시 한때는 그런 생각들로 '자살'을 꿈꾸곤 했다. 그러나 '누구 때문에' 불행해 진다는 것이 가능한 일 일까.

안나의 삶이 불행으로 막을 내린 것은 안나의 성미에 맞지않으며 누가보아도 어리석게 여겨지는 카레닌의 탓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안나를 유혹하고도 완벽하게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브론스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책을 읽는동안 좀더 어린시절에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을 후회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그때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안나의 불행을 안나처럼 마냥 '누군가의 탓'을 하며 안타까워했을 것 같다.

안나의 불행은 안나의 내면이 충실하지 않았던데 있다. 안나는 불안으로 인해 불행했다. 브론스키가 자신을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 세상사람들이 자식을 버린 자신을 손가락할지 모른다는 불안, 그토록 싫은 카레닌에게 되돌아가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 혹은 물질적인 안락함에서 탈락할 지 모른다는 불안... 이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시작된 불안이 아니였을까.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아야만, 인정받아야만 자신의 살아있음을 믿을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삶은 온통 불안할 수 밖에 없다.

그런의미에서 사랑 역시 '자신'에게로부터 비롯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키티는 레빈과 브론스키를 동시에 사랑했다고 기억하지만, 브론스키에게 선택받았더라면 키티의 사랑에 레빈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 부터 비롯되는 불안처럼 사랑 또한 자신을 투영할 상대를 교체하며 이를 사랑이라 이름하는 것 뿐이 아닐까.

뿐만 아니라 인간은 절대적으로 이기적인 동물이여서, 나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이타주의라는 것도 결국에는 이기적인 동인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문학, 특히 고전문학을 읽다보면 따로 심리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을만큼 다양한 인간 군상과 심리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로 화자되는 '간접경험'일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사랑뿐만이 아니라 레빈을 통해 러시아 농민을 들여다보는 소설이라고 일반적으로 해석되는데, 아무래도 나는 안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책을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읽는 동안 자신의 신분을 잊고 사랑에 빠진채로 너무도 당당한 안나가 미웠다. 적어도 상식이 있는 여자라면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니까.

더구나 한 아이의 엄마가 아닌가. 남편과 아들을 버린 것을 괴로워하기 보다는 브론스키와 외국생활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안나가 몹시 맘에 들지 않았다. 안나에 대한 미움은, '엄마라면, 누군가의 아내라면' 마땅히 행해야 하는 '당위'에 붙들린 내 내면의 다른 표현이 아니었을까. 여자가 사랑에 빠지면 더더군다나 보이는 것이 없다라고 하는데, 나역시 다르지 않을 것 같아 안나의 행위를 비난하는 것으로 안도하고 싶은것은 아닌지 생각 해본다. 바로 그점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안나가 미웠던 것이리라.

 

3권의 제7부가 특히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문학동네에서 출판된 이 책은 챕터 사이에 마치 하늘에서 눈이 쏟아지는 듯한 간지를 끼워놓았는데, 안나의 불안한 심리와 그로인한 죽음이 절정을 이룬 제7부가 끝나고 제8부를 시작하는 속표지를 보았을 때, 내 마음 속에도 눈이 내렸다. 우그러진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안아주고 싶은 생각과 함께 누구의 시선도 두렵지 않았던 그녀의 솔직함을 인정하고 싶어졌다. 주변의 시선과 어때야만 한다는 규정된 가치에 매몰되어 자신을 숨겨야 하는 일이 세상사라는 것을 온몸으로 거부할 수 있었던 안나가 안쓰러워진 것이다. 내가 안나였다면, 내 감정에만 충실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를 오래도록 '나의 책'으로 묶어두고 싶다. 민음사에서 출판된 안나 카레니나도 읽을 생각이다. 옮긴이가 다른 만큼 책의 느낌도 다르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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