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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리에는 무엇보다 복수심이 있는 것이리라. 자신의 고통에 대해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우고 싶은 생각, 누군가의 '탓'을 하고 싶은 심리가 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역시 한때는 그런 생각들로 '자살'을 꿈꾸곤 했다. 그러나 '누구 때문에' 불행해 진다는 것이 가능한 일 일까.
안나의 삶이 불행으로 막을 내린 것은 안나의 성미에 맞지않으며 누가보아도 어리석게 여겨지는 카레닌의 탓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안나를 유혹하고도 완벽하게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브론스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책을 읽는동안 좀더 어린시절에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을 후회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그때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안나의 불행을 안나처럼 마냥 '누군가의 탓'을 하며 안타까워했을 것 같다.
안나의 불행은 안나의 내면이 충실하지 않았던데 있다. 안나는 불안으로 인해 불행했다. 브론스키가 자신을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 세상사람들이 자식을 버린 자신을 손가락할지 모른다는 불안, 그토록 싫은 카레닌에게 되돌아가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 혹은 물질적인 안락함에서 탈락할 지 모른다는 불안... 이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시작된 불안이 아니였을까.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아야만, 인정받아야만 자신의 살아있음을 믿을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삶은 온통 불안할 수 밖에 없다.
그런의미에서 사랑 역시 '자신'에게로부터 비롯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키티는 레빈과 브론스키를 동시에 사랑했다고 기억하지만, 브론스키에게 선택받았더라면 키티의 사랑에 레빈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 부터 비롯되는 불안처럼 사랑 또한 자신을 투영할 상대를 교체하며 이를 사랑이라 이름하는 것 뿐이 아닐까.
뿐만 아니라 인간은 절대적으로 이기적인 동물이여서, 나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이타주의라는 것도 결국에는 이기적인 동인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문학, 특히 고전문학을 읽다보면 따로 심리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을만큼 다양한 인간 군상과 심리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로 화자되는 '간접경험'일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사랑뿐만이 아니라 레빈을 통해 러시아 농민을 들여다보는 소설이라고 일반적으로 해석되는데, 아무래도 나는 안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책을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읽는 동안 자신의 신분을 잊고 사랑에 빠진채로 너무도 당당한 안나가 미웠다. 적어도 상식이 있는 여자라면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니까.
더구나 한 아이의 엄마가 아닌가. 남편과 아들을 버린 것을 괴로워하기 보다는 브론스키와 외국생활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안나가 몹시 맘에 들지 않았다. 안나에 대한 미움은, '엄마라면, 누군가의 아내라면' 마땅히 행해야 하는 '당위'에 붙들린 내 내면의 다른 표현이 아니었을까. 여자가 사랑에 빠지면 더더군다나 보이는 것이 없다라고 하는데, 나역시 다르지 않을 것 같아 안나의 행위를 비난하는 것으로 안도하고 싶은것은 아닌지 생각 해본다. 바로 그점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안나가 미웠던 것이리라.
3권의 제7부가 특히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문학동네에서 출판된 이 책은 챕터 사이에 마치 하늘에서 눈이 쏟아지는 듯한 간지를 끼워놓았는데, 안나의 불안한 심리와 그로인한 죽음이 절정을 이룬 제7부가 끝나고 제8부를 시작하는 속표지를 보았을 때, 내 마음 속에도 눈이 내렸다. 우그러진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안아주고 싶은 생각과 함께 누구의 시선도 두렵지 않았던 그녀의 솔직함을 인정하고 싶어졌다. 주변의 시선과 어때야만 한다는 규정된 가치에 매몰되어 자신을 숨겨야 하는 일이 세상사라는 것을 온몸으로 거부할 수 있었던 안나가 안쓰러워진 것이다. 내가 안나였다면, 내 감정에만 충실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를 오래도록 '나의 책'으로 묶어두고 싶다. 민음사에서 출판된 안나 카레니나도 읽을 생각이다. 옮긴이가 다른 만큼 책의 느낌도 다르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