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아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3
기 드 모파상 지음, 송덕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녀석은 출세하겠어, 이 악당은.' (468쪽)

주인공 뒤르아가 다니는 신문사 <라비 프랑세즈>의 사장인 왈테르는 납치를 해서라도 자신의 딸과의 결혼을 성사시키려는 뒤르아의 치밀한 계산을 넘겨보고 이렇게 생각한다. '이 녀석은 출세하겠어..'

뒤르아가 딸 쉬잔과의 결혼을 꿈꾸기 이전에 몇명의 정부가 있었고, 그 중 왈테르 자신의 아내가 있었던 것도 물론 왈테르는 몰랐다. 다만 뒤르아 자신의 성공을 위해 현직 장관과 뒤르아의 아내인 마들렌의 부정 현장을 덮친 것은 쉬잔과의 결혼을 위한 기획이었음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정도 배짱이라면 뒤르아는 국회의원도, 장관도 될 야심있는 인물이며, 그렇다면 자신의 사윗감으로 손색이 없지않느냐고 생각하는 것이다. 

 

스탕달의 <적과 흑>의 쥘리엥처럼 여자를 이용해 돈과 계급상승을 꿈꾼 이 남자 뒤르아에게서는 일말의 동정도 생기질 않았다. 쥘리엥과 뒤르아는 출신계급에 따라 자동으로 주어진 운명을 거부했다는 점에서는 꼭 같았지만, 그 결말은 달랐다.

쥘리엥은 마지막 자존심은 팔지 않고 차라리 죽음을 택함으로써 순종 대신 열과 성을 다해 운명에 반항하는 정신이 고결한 하층민으로 가엾게 여겨졌다. 그러나 뒤르아의 경우, 쥘리엥과 꼭같이 동정의 여지가 있는 상황이였음에도 그는 비열했다. 자신의 매력적인 외모로 사교계의 부인들을 꼬여내고 버리기를 반복했으며, 그러고도 반성을 몰랐고, 고결한 정신력이라는 것도 없었으며 신념이라고는 오직 '돈'이나 '출세'뿐이였다. 물론 배경이 된 19세기 프랑스의 상류사회는 '돈'과 '권력'과 '방탕'이 판치는 장이긴 했지만, 뒤르아는 자신이 저지른 온갖 부정과 방탕에 대한 죄값을 치르지 않고 오히려 승승장구하는 결말로 <벨아미>는 끝난다. 

그 후 뒤르아가 줄곧 성공만을 했는지, 재산가인 어린 아내와 처가를 쥐락펴락하면서, 그 후로도 몇명의 정부를 바꿔가며 인생을 끝까지 즐기기만 했는지의 여부는 독자 상상의 몫으로 남겨진 것이다. 진부하게도 나는 뒤르아가 뒤 늦게라도 죄값을 치렀으면 하는 심정이다. 

 

뒤르아에게 무엇보다 화가 나는 것은 '고마움을 모른다는 것'이였다. 친구 포레스티에를 통해 신문사에 취직하고, 그의 도움을 받아 안정된 위치에 이르렀으며, 결국 포레스티에의 아내와 결합함으로써 신분상승을 이루어내었지만, 그는 그 무엇에도 고마움을 느낄줄 모른다. 오히려 더 높이 오르고 더 많은 것을 갖기위한 욕망으로 두려움을 모르는 점에서 자기 자신과 꼭 같은 마들렌을 새로운 결혼을 위해 몰락시킨다. 영리하고 재빠르며 통찰력도 뛰어나 남편들의 뒤에서 신문기사를 쓰며 여론을 움직였던 마들렌 포레스티에가 뒤르아에게 뒷통수를 맞고 마는 장면에서는 어이가 없었다. 어쨌든 세상은 강한 자의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뒤르아를 이용했던 마들렌이니 만큼 마들렌 역시 기회가 있었다면 뒤르아를 내팽겨쳤을테니 피차 마찬가지라고 해야할까.

어쨌든 뒤르아의 승승장구가 못내 속상하다. 의리도 없고, 신념도 없으며 오로지 신분상승과 돈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뒤르아 같은 인간이 잘 나가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며 바로 그 점이 영 못마땅한 것이다. 

 

모파상은 이 소설에서 개인적 감상이나 선과 악에 따른 권선징악을 보여주려했던 것이 아니라 19세기 당시의 프랑스 상류 계층의 추악한 모습과 투기와 권력 남용의 사회상을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다한다. 그렇다면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출세와 권력과 욕망을 쫓아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자들의 것이지 않은가. '저지르는 자 세상을 갖는다'라고 했던가.

저지를 줄 모르는 나는 오늘도 문학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는다. 나는 적어도 이렇게 살지 않았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진 않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흠, 그런데 기회가 있고 기회를 알아차리고 잡을 줄 아는 머리가 있다면 인간은 누구라도 권력과 돈을 쫓아 이렇게 추악해질 수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인성교육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의심해 본다.

그렇기에 인간이란 너무 슬픈 존재이며, 결국엔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허탈한 존재이기도 하다. 누구도 영원히 살 수는 없는 것이니까. 결국엔 뒤르아도 쥘리엥처럼 죽고말테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잇 코스메틱 - ‘화장품 골라주는 여자’ 이선배의 아이템별 최고의 화장품!
이선배 지음 / 지식너머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TV나 월간지를 잘 보지 않는 나는 화장품에 대한 정보를 주로 백화점 매장 직원에게서 듣곤 한다. 매장 직원의 일이 판매이므로 당연히 자사 제품에 대한 홍보가 주된 정보라는 것을 알고있지만, 피부에 좋다는 무슨무슨 제품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귀가 솔깃해지는 건 정말 어쩔수가 없다. 때문에 제품을 구매하러가기에 앞서 필요한 제품만 구매하겠다고 다짐을 하곤 하지만, 생긋 웃는 얼굴로 전문적인 용어를 써가며 새로운 제품을 권하는 직원의 말에 매번 깜빡 넘어가곤 해 생각지않은 제품을 구매하게 되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구매한 제품은 열이면 아홉은 몇 번 쓰지도 않고 굴리거나, 얼굴에 맞든 맞지않든 돈이 아까워서라도 억지로 쓰는 일이 잦다. 거기에 덤으로 주는 샘플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수지맞는 기분으로 챙겨받을 때도 있지만, 화장대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굴러다니는 샘플들이 한둘이 아니기에 거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꼼꼼하고 자상하게 이것저것 써보라고 챙겨주는 매장 직원의 선의 아닌 선의를 뿌리칠 수 없어 한뭉치씩 들고오곤 하는 것이다.

 

어디선가 백화점의 1층에 화장품 매장이 위치한 이유는 백화점 전체 매상 중에 화장품이 가장 크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은이 이선배도 프롤로그에서 얘기한 것처럼, '립스틱 효과'는 불경기거나 호경기거나 상관없이 여자들의 욕망을 가장 쉽게 자극하고, 여자들 또한 상대적으로 쉽게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물건은 화장품이라는 의미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화려한 조명발 아래 거울 앞에선 모습은 분명 평상시 모습과는 달라 보일테고, 기적의 무슨무슨 크림을 발라도 여배우와 같은 뽀얀 피부를 가질 수 있는 느닺없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을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미 알고 있지만, 그저 그냥 그렇게 속고싶은 것이다. 아름다워 질 수 있다는, 아름다워 질 것이라는 그 속된 욕망에. 

 

월간지를 잘 보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미용실을 찾을 때마다 월간지의 화장품 사용기를 유심히 보곤 한다. 쉽게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것이 화장품이긴 하지만, 잦은 구매 실패는 아무래도 풍족하지 못한 주머니를 갖은 나로서는 타격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추천별이 많은 제품을 위주로 자외선차단제나 파우더, 립스틱을 구매하게 되는데 그것이 또 그렇게 성공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화학을 전공하고 패션 잡지에서 오랫동안 에디터로 일했으며, 어릴 때부터 '뷰티'에 관심이 많아 화장품 마니아로 산 세월이 적지않다는 이선배의 <잇 코스메틱>은 내게 너무 유용한 책이다.

 

화학 용어만 봐도 머리가 아픈 나로서는 제품 성분을 꼼꼼히 따지는 일 같은 건 이후로도 여전히 하지 않겠지만, 1장에 정리된 화장품에 대한 일반적 지식이나, 내 피부에 맞는 아이템, 그리고 꼭 필요한 화장품 정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화장품 매장 직원에게 일방적으로 넘어가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에 힘을 받는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2장의 아이템별로 지은이 이선배가 추천하는 제품들이 간단하게 정리 되어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저런 성분은 모를뿐더러 모르면서도 알려고 하지않고 더불어 꼼꼼히 따지는 일은 더더욱 못하지만, 공정함과 균형감을 최대한 지킨 뷰티 책을 내고 싶었노라는 지은이의 말을 믿고싶은 것이다. 지은이의 그말이 진실이라면 화장품 추천에 있어 아무런 사심이 없었으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추천 제품들을 써보고 내 피부에 맞는 제품인지는 내가 느껴야 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아쉬운 것은 '팩'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것인데, 푸석푸석하고 어쩐지 피곤해 보이는 날 긴급처방으로 팩을 자주 사용하는 나로써는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다. (시트팩에 대한 정보는 있다)

 

어쨌든 <잇 코스메틱>은 한번보고 말 책은 아니다. 마치 화장품 백과사전처럼 화장대 옆에 꽂아두고 필요한 제품의 구매에 앞서 한번씩 읽어보고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더불어 부록으로 실린 '해외여행 시 화장품 알뜰 쇼핑 노하우'나 '해외 화장품 온라인 쇼핑몰' 그리고 '브랜드별 특징과 대표 제품' 조차도 너무나 유용한 정보라서 비싼거면 뭐든 좋은것이겠거니 막연하게 기대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헬가 2014-11-16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제가 요즘 이곳에서 글을 재미나게 읽고있습니다 제가 읽은 책 과 느낌이 비슷하거나 명확하게 글로 전달받는것같아 잠시 님의글에 빠져있지요 ^ ^ 그냥 조용히 리딩만 하고있었는데 이부분에선 걍 지나칠수가 없네요 수년전에 읽은 <대한민국화장품의 비밀> 을 함 읽어보시라고 권하고싶네요 제가 그책 읽고 화장품 에 대한 환상을 깨게 됐거든요
 
슬픔이여 안녕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13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분명 열 몇살의 소녀때 였을 것인데, 그것이 열다섯 무렵이였는지, 열 일곱 무렵이였는지 확실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제 막 열다섯이 된 조카에게 이 책을 권해주고 싶었는데, 그 이유는 내가 소녀시절 읽었던 책이였으며,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질 않지만, 소녀가 읽기에 무리가 없는 성장기 였다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였다. 무심코 인터넷 서점을 통해 조카에게 책을 보내고, 책꽂이에서 함참을 뒤져 책을 찾아 읽기 시작한 후, 나는 이 소설이 열다섯살 소녀가 읽기에 좀 무리가 있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욕망에 충실한 바람둥이 아빠 때문만은 아니겠는데, 열일곱 살의 주인공 세실은 술도, 운전도, 담배도 서슴치 않는 이른바 '불량소녀'로 보였기 때문이였다. 그래도, 그렇긴 하지만 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읽다가 결국 인터넷 서점의 배송을 취소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세실이 스믈여섯의 청년과 육체적 쾌락을 탐닉하는 장면에 맞닥드리게 되면서 였다.
물론 지금의 나는 성적인 것을 이 소설의 주안점으로 읽지 않을 만큼 성숙했지만, 그 시절의 나는 세실이 새엄마 후보인 안느에게 갖는 컴플렉스나, 외딸을 키우며 사는 홀아비로서는 적당치 않는 세실 아빠의 성생활에 초점을 두고 책을 읽었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그렇더라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겠지만 어쩐지 나는 조카가 세실을 자기와 동일시 하다 못해 남자 친구와 몹쓸 모험이라도 버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노파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이제 나도 생의 안정을 갈구하는 '안느'와 같은 부류가 된 것이다.

프랑스와즈 사강. 매혹적인 작은 악마. 
<슬픔이여 안녕>의 스토리는 마치 사강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부유한 실업가의 막내 딸로 태어나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수도원에서 성장했다는 사강 그 자신이 바로 세실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실제 그녀의 아버지가 이미 욕망에 충실한 모습이였기 때문에 사강조차도 욕망을 쫓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제목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인간은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던 사강의 말에서 차용된 것이라니, 더더욱 놀랍다. 이십대의 그시절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주문처럼 외우며 무던히도 휘청댔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은 내 생애 최초의 모험이였고, 자유로워지고싶은 몸부림이였으며, 내 자신에 대한 파괴의 시절이였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무너짐에까지도 나는 완전하지 못했다. 늘,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했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다른 성장배경이 있었다면, 한번쯤은 완벽하게 사강처럼 처절하게 바닥까지 무너져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죽음도 불사하지 않는..
번역가 김남주는 <나의 프랑스식 서재>에서 청춘의 절정에서도 사강과 같은 기개를 갖지 못했던 자신으로서는 사강을 선망하지 않을 수 없다 했는데, 나 역시 그렇다. 어느 곳에 매복해 있다 내 발목을 잡을 지 모르는 '삶(죽음이 아닌 삶)'에 철저하게 나를 저당잡힌 채로 살아온 것이다. 나에게는 '안정'이 무엇보다 우선이였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아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었다. 사강은 브람스를 좋아하냐는 물음 뒤에는 반드시 말줄임표를 써야 한다고 했다는데, 어쩌면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냐는 물음의 대상은 브람스가 아니라 묻는 대상이라는 의미가 아니였을까.

<슬픔이여 안녕>은 소녀 시절 읽었던 책이고, <한달 후, 일년 후>와 그녀의 자전적 에세이인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를 읽은지도 이미 오래지만, 언젠가 드라마 제목으로도 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만큼은 겨우 오늘에야 읽을 수 있었다. 김남주의 <나의 프랑스식 서재>에 힘입어.
 
사강을 말할 때 흔히 불꽃같은 그녀라고 했던가, 매혹적인 작은 악마라고 했던가. 어떤 성장 배경을 가졌기에 사강은 그토록 삶에 두려움이 없을 수 있었던 것일까, 불량스럽게 보이던 그녀의 전생이 완전하게 부럽기만 한데... 그런 그녀도 역시 노쇠나 죽음을 두려워 하긴 했던 것일까. 아니, 내가 보기엔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조금 놀아본 언니로서 관조와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 약간의 경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마지막까지도 삶을 낭비하듯 쏟아부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였을까. 완벽하고도 완전하게...

'욕망을 실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때, 더 이상의 만남이 불가능해지는 때, 머릿속에서 분방한 생각들이 오가는 가운데 아침 추위로 이가 딱딱 부딪치는 때, .... 지금 유일하게 안타까운 것은 읽고 싶은 책들을 다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뿐.'이라고 노년을 함축했다는 사강의 말은 젊은 애인 시몽을 사랑하지 못하고 지레 지쳐버린 연상의 그녀, 폴의 심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데, 노년을 앞두고 있다기엔 서른아홉은 너무 지나치게 젊은 나이 아닌가? 하긴 열네살 연하인 시몽에 비한다면야 지나치게 무르익은 나이이긴 하다만.
그리고 사강이 이 작품을 쓴 나이는 스믈넷. 열아홉 살에 <슬픔이여 안녕>을 써 일약 스타가 된 그녀는 스피드광으로 22세에 자동차 사고로 이미 죽음의 문턱을 밟았으나, 기적적으로 회생했다고 한다. 그랬기때문에 자신은 정작 스믈넷이면서도 서른아홉 여인의 젊음에 대한 추억과 노쇠에 대한 갈망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익숙한 것과 결별하지 못할 때, 새로운 사람, 새로운 만남, 새로운 장소, 그런것들이 두려워지는 바로 그때가 생물학적인 시기와는 관계없이 노년의 초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강은 너무 일찍 삶을 알아버린 듯도 하고... 또 병으로 세상을 뜬 그녀의 나이가, 69세 였으니 생각보다는 오래 산듯도 하고... 아무렴 천재들의 박명은 익히 알려진 바이고 하니 오히려 69세까지 살 수 있었던 사강은 장수한 것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하고...

나라면 어떨까. 이미 습관처럼 익숙한 로제를 완전히 잊고, 낯설기에 오히려 매력적인 시몽을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 역시, 사랑은 자신에 대한 투영인 것. 완벽하고도 온전하게 사랑하는 것은 나 자신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 열세 명 어린 배낭여행자들의 라오스 여행기
김향미 지음 / 예담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여름 방학동안 대안학교에 다니고 있는 중학교 1학년 아이를 홀로 여행을 떠나 보내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았다. 적당하다고 여겨진 여행은 6박 7일간의 필리핀 공정여행이었는데, 마지막 결정의 순간에 이런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아이를 이 여행에 보내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단지 우리 가족이 여행을 좋아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중학교 1학년씩이나 되었으니, 이제는 부모와 따로 떨어져 또래끼리 하는 여행도 의미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첫번째 였고, 외동인 아이가 방학동안 혼자서 집에 지내는 것이 안타까워 이것저것 계획을 세워 바쁘게 하자는 숨은 심산도 있었다. 

또한 우리보다 사회 경제적 여건이 떨어지는 곳에서 그간 안하던 고생으로 부모밑에서 누리는 호강에 대해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보라는 의미도 있었고, 편식이 걱정되어 반찬까지 밥위에 올려주며 오만 잔소리를 늘어놓는 엄마로부터 독립해보라는 의미도 있었다. 이제 겨우 어린아이의 티를 벗고 제법 굵어진 목소리로 '싫어'를 연발하며 자기는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외치는 아이에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느껴보라는 의미도 다소간 있었으며, 무엇보다 네가 무엇을 해야할지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순전히 즐기고 오라는 의미는 아니였던 것이다. 고작 6박7일간의 여행을 계획하면서.

그랬는데 그토록 많은 숨은 뜻이 있었던 여행의 의미가 마지막 결정의 순간에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아이가 진정한 자유를 느끼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미래를 꿈꾸는데 꼭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에 가서 온갖 고생을 피부로 느낀 후에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던가.

 

부모가 청소년기의 아이를 멀리 해외여행에 떠나보내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대체로 부모로 부터 독립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과, 다양한 경험으로 큰 꿈을 품어보라는 것 두가지로 요약될 것 같다.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의 부모들 역시 그랬다. 열넷, 열다섯, 많게는 열 아홉까지 열 세명의 아이를 장장 26박 27일간의 라오스 여행에 떠나보냈던 부모들도 그런 심정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부모들이 원했던 것을 아이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다양하고도 충분하게 채우고 돌아왔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이런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여행에서조차도 무엇인가를 배우고 깨우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그저 단순하게 보고 즐기면 안되는 것일까. 무엇인가를 꼭 가슴에 담아서 꼭꼭 되씹어야 하는 것일까.

 

여행학교를 기획하고 실행한 김향미 양학용 부부는 아이들에게 일상적인 것을 특별하게, 흔한 것을 소중하게, 당연한 것을 낯설게 바라볼 줄 아는 눈과 마음을 열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였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에 품을 별하나 심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여행은 자고로 관광이라고 생각하는 나같은 어른은 아이들 스스로가 주어진 돈으로 숙소를 구하고, 식사를 해결하고, 할일을 결정해 지도를 들고 그 낯선 곳을 헤매였다는 생각을 하니 내 무릎이 다 떨리는 것 같다. 무사히 큰 사고없이 잘 지내고 돌아왔으니 다행이지 만에 하나 무슨 사고라도 있었다면 어쨌을 것인가. 혹시 이 여행학교를 떠나보낸 부모들은 무슨 각서같은 쓴 것은 아니였겠지? 만에 하나라도 여행지에서 당하게 되는 불의의 사고에 대해 책임을 묻지않겠다는 그런 무시무시한 각서같은 것에 서명이라도 한 것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는 것이다.

잃을 것을 먼저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잘 알고있지만, 아이일이다 보니 걱정이 먼저 앞서는 것이다. 그러나 온전히 '여행하는 이유'만을 생각해 본다면 여행중 만나는 크고작은 사고도 여행의 중요한 의미일 것 같다. 그것을 팔자라고 해야 하나,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저런 걱정을 뒤로 하고 아이가 여행을 통해 오로지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즐겁게, 오늘을 즐겁게 지내고 나면 그이후의 날들도 충분히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며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도 얼마든지 아이를 떠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지에서 만나게 될 상상 못할 갖가지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렇다면 이번 겨울 방학엔 나도 용기를 내어 아이를 떠나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아내와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색깔이든, 이번 여행이 아이들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훗날 삶을 살아가다 팍팍하고 어려운 순간을 만날 때면 작더라도 위안이 되고 힘이 될 수 있기를....(28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