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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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책에 자기 이름을 넣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어떤 작가들이 가명으로 책을 내는 것은 어째서일까. 작가에게 실제의 삶이 과연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나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어쩌면 즐겨 볼 만한 -내게 일종의 비밀 신분을 만들어 줌으로써-일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어째서 그런 생각에 그처럼 마음이 끌리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266쪽)

 

이상한 일이다. 감시하는 자와 감시받는 자의 얽히고 설킨 세 편의 이야기 중, 앞의 두 편 <유리 도시>와 <유령들>을 읽는 동안 도대체 작가가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지만,  마지막까지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작가가 하려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이렇게 책을 재미있게 읽고, 더구나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결국 <잠겨있는 방>까지 세 편의 이야기를 모두 읽고 나자, 아.. 하는 '도'트는 소리와 함께 '어쩌면..'하는 나만의 추측을 완성할 수 있었다.

 

옮긴이도 밝히고 있지만, 세 편의 이야기는 전혀 상관이 없으면서 긴밀하게 얽혀있고, 한 편을 읽으므로써 다음 편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본의 아니게 탐정 역할을 떠맡은 탐정소설가, 자신이 감시자라고 생각했지만 어느덧 감시받는 자로 드러난 탐정, 천재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 친구의 작품들과 그의 삶의 나머지들을 어느날 그야말로 느닷없이 관리하게 된, 그러나 정작 자신은 작가가 되지 못한 화자. 이들은 누군가의 괘적을 쫓는 동안 쫓기자와 동화되어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게 되고, 정작 자신이 하려던 일과 했던 일들, 혹은 삶의 터전으로부터 밀려나는 다소 당황스러운 일들을 겪게 되는데...

 

뉴욕 3부작이라는 전체 제목은 세 편의 단편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도대체 이 이야기들과 뉴욕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감시하고 감시받는 일이 뉴욕에서만 가능한 것도 아니련만. 감시자가 감시받는 자를 쫓으며, 뉴욕의 구석들을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뉴욕이라고는 가 본 일이 없는 나로서는 그곳이 어디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엔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자기 이름에 걸맞는,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역할을 포기하는 자와 스스로 이탈한 자를 찾아 제 역할을 기억하게 하려 하지만, 쫓는 자 그 조차도 결국엔 자기 역할을 잃어버리게 되는 이야기.

 

어느날 느닷없이 실종된 사람들. 그들은 어쩌면 세상을 향해 자발적 탈락을 시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관심, 칭찬, 사랑.. 혹은 비웃음이나, 미움까지 우리가 타인들로부터 기대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더라도 받게되는 그 모든 것들로 부터 탈출을 시도한 사람의 이야기. 정체성이라는 것이 타인에 의해서만 드러나지는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을 떠났을 때 나는 과연 '나' 일 수 있을까.

 

세 편의 이야기 중 마지막 이야기 <잠겨 있는 방>을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 사라진 친구의 작품 관리자가 되고(사실은 남겨진 그의 삶을 관리하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그의 흔적을 쫓는 동안 서서히 자신을 잃어가는 화자의 이야기인데, 재미있는 것은 사라진 작가 팬쇼의 과거 행적이 작가 폴 오스터의 과거 행적과 동일하더란 것이다.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지만, 글로는 밥벌이가 되지 않았기에 단기 선원이 되어 잡일을 했고, 전화 교환수를 했고, 또 언제인가는 순전히 돈을 위해 영화 대본을 요약했던 그러다가 영화 제작자로부터 영화에 데뷔하라는 러브콜을 받기도 했던 폴 오스터의 과거 행적을 고스란히 되풀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펜쇼의 기행은 폴 오스터의 그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오스터는 펜쇼와 같이 잠적하고 싶었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자기만의 생>을 출판했던 로맹 가리가 생각난다. 그는 두 번은 받을 수 없다는 콩쿠르 상을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두 번 수상했는데, 그가 권총을 물고 자살 한 후에야 대중은 그가 그 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자기 이름으로 책을 출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기를 인정받고자 하는 의미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쟁취한 뒤, 작가는 대중으로부터 잠적을 꾀한다. 알려진 자기로써 인정받는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자기를 창조해 그 역시 바로 자기 자신임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것이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자기만의 고유한 정신의 자유가 아닐까.

모든 인연을 끊고 은둔하며 홀로 죽어가는 펜쇼 역시 자기만의 고유한 정신의 자유를 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립을 통하여 그가 정말 자유로워 졌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죽음이 아니고서는(결국 펜쇼는 죽음을 택하지만)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세상살이 이며 삶인데, 그는 고작 뿌리뽑힌 존재로 그렇게 고독하게 죽어가는 길을 택했을 뿐은 아니였는지 하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타인에 의하지 않고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길 바란다는 것은 현실성 없게 느껴진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욕망이 없다는 이야기와 같은 걸까. 해마다 초파일이면 거리에 내걸리는 연등처럼 혹은 크리스마스 트리의 꼬마전구처럼 얽히고 설켜 줄줄이 엮여있는 것이 삶이다. 누구든 한 사람의 지난 괘적을 쫓자면 그와 관련되었던 사람들은 줄줄히 불을 켜듯 밝혀질 것이다. 또한 그들에 의해 정작 그가 누구인지가 밝혀지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정체성이라는 것은 타인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나라는 것을 나 스스로 납득하려면 역시 거울처럼 나를 비쳐주는 다른 존재들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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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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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폴 오스터가 좋았다기 보다는 제목이 너무 좋아서 고른 책이다. 글을 쓰는 일로 먹고산다는 말을 이보다 더 근사하게 할 수 있을까. 

hand to mouth, 빵굽는 타자기. 제목을 참 잘 옮긴 것 같다. 말 그대로 폴 오스터의 타자기는 폴 오스터에게 빵을 만들어주는 기기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꼭 오스터에게만 빵을 구워주는 기계였겠는가. 만약 그랬다면 오스터의 빵기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오스터가 써낸 글로 빵을 삼은 이들이 있었기에 그의 타자기는 지금껏 오스터를 위한 빵을 구워내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오스터는 열여섯 살 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래로 기초적 생계를 위한 시간제 일을 빼면 글을 쓰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번역을 하고, 서평과 시를 쓰고, 더 나중에는 희곡을 썼으며 드디어 소설을 쓰게 되었고, 현재 그의 작품은 세계 20여 나라에서 읽히고 있으며, 특별히 폴 오스터를 좋아하는 마니아 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전 내가 읽은 폴 오스터의 책은 두 권인데, <달의 궁전>과 <브루클린 풍자극>이 있다. 두 이야기는 모두 '우연'에 얽힌 운명적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오스터 특유의 요요한 글쓰기 방식으로 획기적이거나 특별한 사연이 모나지 않게 술술 읽히도록 책을 엮어나가는 글재주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작품이다. <빵굽는 타자기> 에서도 역시 그런 오스터의 식의 서술을 발견할 수 있는데, 자신의 태생이나 어린시절을 비롯한 지난 시절의 개인적 이야기가 재미있고 발랄하게 잘 씌여있다. 

따라서 오스터를 이제 막 좋아하기 시작한 나는, 몹시 사사로운 그의 이야기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이기주의적이기 보다는 개인주의적이며 독립적인 서양인들의 면모가 글로 정리된 오스터의 지난 삶 속에 잘 드러나있고, 때때로 나는 그것이 부럽기도 했다.

오스터의 부모들은 1950년대 후반의 미국 풍토가 그랬듯이 무엇보다 돈을 귀중한 가치로 여기는 평범한 미국민들이 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돈이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오스터는 불과 열 살의 나이에 더 많이 사고, 더 많이 만들고, 더 많이 쓰라는 선동을 멈추지 않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발견해 내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로 부터 동류의식을 느꼈다니 나로서는 어안이 벙벙해지고, 전혀 믿을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든다. 물질주의적인 부모에게 반항하는 정신주의자 소년이라니. 그러나 어쨌든 이시기에 오스터는 물질만능주의자인 부모들로 부터 등을 돌리게 된다. 또한 자신은 평생 실업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 무려 열 살에 말이다.

 

오스터에게 근본적으로 '돈 벌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삶은 오스터에게도 예외없는 것이여서, 살자면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돈을 위해 글을 읽고 쓰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시간제 일을 하고, 오로지 돈을 벌기위한 글을 쓰기도 하며 오스터는 진정한 작가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글이 돈을 쫓는 것이 아닌 돈이 글을 쫓는 지경에 드디어 이르게 된 것이다. 나는 여기서 또한번 오스터가 부러워 졌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어린 나이부터 알았고, 지금까지의 삶동안 포기하지 않으며 주욱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 말이다.

 

전반적으로 오스터의 글쓰기 인생에 대한 고백은 무척 재미있었다. 어떤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거쳐왔기에 '우연'에 관한한 대가가 되었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뒤에 실린 희곡 세편에 대해서라면 글쎄 나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희곡읽기의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탓도 있겠지만 역시 나에게 오스터는 소설가로 기억될 것이다.

오스터는 글을 쓰는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글을 쓴다고 했다.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나는 글을 읽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만 같아 책을 읽는다. 그런면에서 나는 폴 오스터와 닮았다고 우긴다면 억지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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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풍자극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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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삶은 사라진다. 한 사람이 죽고, 그가 살아온 모든 흔적이 차츰차츰 사라진다. 발명가는 그의 발명품들로 살아남고 건축가는 그가 지은 건물들로 살아남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어떤 기념물도, 오래도록 지속되는 업적도 남기지 않는다. 남는 것이라고는 몇 권의 앨범, 5학년 때 성적 통지표, 볼링 경기 트로피, 언제였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휴가 마지막 날 아침 플로리다의 어느 호텔 객실에서 슬쩍해 온 재떨이 정도가 고작이다. 몇 가지 물건과 몇 가지 서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수박 겉핥기식의 평가. 그런 사람들은 예외 없이 고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날짜를 뒤섞고 사실을 빼먹고 진실을 점점 더 왜곡시키고 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많다. 그리고 다음에는 그런 사람들이 죽으면 이야기들도 대부분 그들과 함께 사라진다. (386쪽)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전기를 쓸 계획을 세우는 네이선 글래스는 신문 귀퉁이에 이름 한 자 남기지 않는 유명하지 않은 평범한 망자들의 부모, 자식, 남편, 형제, 자매도 어떤식으로든 고인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싶을테니, 그런 의미에서 유명하지 않은 이들의 전기도 분명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은 이들을 글로 소생시키고, 그의 이야기들은 평생, 혹은 그들을 기억하고자하는 이들이 죽은 뒤까지도 책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에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의 전기를 쓸 계획이 영 엉터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머니들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때 보통은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말로 하자면 소설로 댓 권은 될 것이라고들 하는데, 어느 누구의 삶인들 그렇지 않을까. 그러므로 가족이나 몇몇 지인말고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보통 사람의 전기라니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아이디어 라는 생각이 든다.

 

네이선 글래스는 전직 생명 보험회사 영업사원이었으며, 현재는 이혼한 60대고, 또한 암으로 부터 회복중인 환자, 사랑하는 딸에게 마저 존중받지 못하는 언뜻 생각하기엔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죽을 곳을 찾아 들어간 브루클린에서 한동안 소식이 끊긴 조카와 조카의 딸을 만나고, 그들로 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간다. 그러던 중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인생은 60부터라고 노래해야 하나. 어쨌든 이 책은 평범한 사람의 전기를 쓰고 싶어하는 평범한 사람인 네이선 글래스의 평범한 전기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브루클린 풍자극에서 마약중독, 동성 연애, 광신도, 외도, 그리고 이혼, 따위의 일은 너무도 평범한 일상이라 딱히 얼이 빠지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 이야기들조차 평이하게 들릴 만큼 폴 오스터는 이야기를 술술 풀어가는 재능이 있다.책을 읽는 동안 세르게이 트로파노프의 몰도바가 귀에 울리는 듯 했다. 즉흥적이면서도 우아한 멜로디의.

 

아니,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보통 차로는 단조롭고 고된 일이라는 요소가 없어지는데, 전체적인 상황에서 제일 중요한 건 그거거든요. 극도의 피로감과 지루함, 정신을 멍하게 만드는 단조로움. 그러다가 뜬금없이 문득 느끼게 되는 일말의 해방감과 잠깐 동안의 진정하고 절대적인 희열. 하지만 그 순간을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요. 고통이 없으면 희열도 없는 법이니까요.(44쪽)

 

행복하다는 느낌, 희열이라는 감정을 이보다 더 정확히 설명할 수 있을까. 역시 작가는 뭐가 달라도 다른 법이다.

이 책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은 어떤 개망나니 인생을 살았더라도, 누군가가 그를 잊지 않고 찾아준다면, 한때는 착하고 예뻤던 아이로 기억해준다면 그 사람은 결국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이며, 그다지 나쁜 삶을 산 것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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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13-12-24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범한 사람들의 전기...삶이라는 것이 평범하기엔 너무도 많은 일들이 생기는거죠. 평범한 사람들도 평범하게 살 수 없는 것이 삶이라면... 세상은 말이 적다고 없다고 너무도 귀기울여 주지 않는 건 아닐까요? 원칙도 소통도...눈, 귀 꽉막아버리는 현실이 참 아픕니다. 책 콕!해둡니다.

비의딸 2013-12-25 08:00   좋아요 0 | URL
저는 작품이 마음에 들면 그 작가의 전작들을 주욱 훑는 버릇이 있어요. 또, 작가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좋아합니다. 한 작품은 전작들과 작가의 삶이 그물코마냥 얽히고 섥혀 다음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마치 역사가 그런 것 처럼요.
지난날 말못할 고통과 슬픔으로 오늘이 왔고, 오늘의 아픔들이 새로운 내일을 엮어낼 것이라고 일단은 믿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겁이 나기도 해요. 이런 현실에 무뎌져버릴까봐서. 눈 앞에것들에 만족해 버리면 어쩌나 하고…
저는 개인적으로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이 더 좋습니다. 눈이 먼 호르헤스의 말년에 책읽어 주기 아르바이트를 한 알베르토 망구엘을 생각할 수 있거든요. 아, 저는 알베르토 망구엘을 정말 좋아합니다.

여울 2013-12-29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의 궁전]을 다시 읽고 닫는 오후네요. ㅎㅎ 마치지 못해 여운이 남던 소설인데 다시 살펴보니 새롭군요. 책 읽어주기 알바...망구엘을 좋아하시는군요. ㅎㅎ 주말 잘 보내세요
 
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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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극단으로 몰아감으로써 인생을 배워 나가는 세 탐구자들의 초상을 매혹적으로 그린 소설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이 책을 읽고 난 소감을 말하자면, 인생이란 우연의 연속이며 우리로서는 우연의 끝자락 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의 아무일도 하지않는 행위조차도 중요하게 여겨 무의미하게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에 조금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포그와 자발적 은둔자가 되어 새로운 삶을 창조해 낸 에핑, 그리고 자기 몸을 부풀림으로서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솔로몬 바버가 삶을 극단으로 몰아가는 세 주인공들인데, 소설의 말미에 이들은 서로 부자간이며, 이 이야기는 할아버지로 부터 손자에 이르는 3대기 라는 것이 밝혀진다. 이 기가막힌 우연 앞에 나는 할 말을 잃는다. 그러나 소설의 초점은 얼토당토않은 우연에 있지 않다. 이들의 삶은 비극적이지만, 그 안에서 내면적 균형을 이루기 위한 개인적 투쟁을 담고 있다. 이들은 몽상가일지 모르나, 적어도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려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어쩌면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시선으로는 이들을 바라보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눈이 먼 에핑의 시중을 드는 일을 하기로한 포그는(이 장면은 눈이 먼 호르헤스에게 책읽어주기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알베르토 망구엘을 떠오르게 했다) 긴 설명으로 듣는 이를 지치게 할 것이 아니라 듣는이 스스로 그 사물들을 그려낼 수 있도록 돕는 작업을 해야한다는 깨닫음을 얻는다. 이는 내게 무척 극적으로 비쳤는데, 눈에 띄는 모든것들을 일반화하면서 세상을 쉽게만 이해하려 했던 지난날의 게으름을 반성할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그런 나태가 단박에 고쳐지지는 않겠지만.

옮긴이는 이 소설이 은은한 달빛처럼 엮이면서 달의 이미지로 리얼리티를 창조하고 전체적인 구성을 통합하고 있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 극적인 사건도 없이 교교히 흐르는 달빛 속에 마주치는 우연이라니.

그들 3대의 삶은 외로움과 고독과 고난의 연속이지만, 포그는 그토록 바라던 자신의 아이를 잃어버림으로써 대내림을 끊어낸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는 할아버지가 사막에서 돌아와 새 삶을 엮어낸 것처럼, 또는 아버지가 비대한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서 해방되는 순간 당당해진 것처럼, 걷기를 멈춘 땅끝에서 새로운 출발점을 맞는다.

 

물에 물감이 풀리듯 온갖 단어들과, 온갖 의미들을 술술 풀어놓은 폴 오스터의 소설은 그 자체로 미묘하고 매혹적이었지만, 왠일인지 자주 눈에 띄는 오타가 책에의 몰입을 방해하였다. 이럴때 마다 느끼는 것, 원서를 읽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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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시인의 사회
N.H 클라인바움 지음, 한은주 옮김 / 서교출판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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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영화소설로, 톰 슐만의 영화를 소설가 낸시 클라인바움이 각색해 책으로 출판했다.  원작이 책이 아닌 영화인 경우로, 나로서는 무척 독특한 경우라고 생각되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1990년 아카데미 최우수 각본상을 받았다. 이 영화를 아주 오래전에 보았지만 그때 당시는 별다른 감동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저, 로빈 윌리암스의 경쾌한 매력에만 푹 빠졌던 기억이 있다.

지난 주말 우연히 다시 보게 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그간 생각이 깊어진 것인지, 대사 하나하나가 새록새록 가슴에 와 닿았다. 오늘을 즐기라는 '카르페 디엠'이라든가,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적 인간이 되라는 이야기라던가, 사물을 다른 시각에서 볼줄 알아야 한다는 키팅의 시도들은 대안교육을 고민하는 요즘의 내 고민과 딱 맞아떨어져 더 가슴에 절절하게 와 닿았다.

어쨌든 아름다운 화면과 내용에 감동이 깊어 책까지 단숨에 읽어버렸는데, 책은 영화와는 다른 부분들이 제법 있었다. 특히 책에서 키팅을 고발하는 서류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토드의 모습이 영화에서는 부모와 교장의 강압적 분위기에 밀려 금방 서명하고 마는 약한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키팅으로 인해 변화한 토드의 모습 등을 책이 더 극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를 즐겨라, 인생을 독특하게 살아라! 독특함을 추구하지 않았다면, 주체적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더라면, 세상에는 다른 시각도 존재함을 깨닫지 못했더라면 닐은 죽지 않았을까.

키팅의 부추김이 없었다면 하던대로 도서관에서 조용히 공부하며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살았을 것이라고 항변하는 카메룬의 외침은 한편으론 정말 그럴 것이라 수긍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길을 넘보며 주체적 활동을 꿈꿨던 닐은 죽음으로서만 '죽은 시인의 사회'의 정회원이 될 수 있었다. 살지 못할 세계라면 차라리 알지 못하는 것이 삶을 유지하는 한 방법이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살아있어야 오늘이든 내일이든 즐길 수 있는 것일테니까.

키팅의 획기적 교육방법, 죽은 시인의 사회, 닐의 자살, 그리고 교단을 떠나는 키팅.... 그래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웰튼 아카데미의 그들은 아이비리그를 꿈꾸며 이전의 삶의 방식을 이어간다. '죽은시인의 사회'는 닐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던 연극 '한여름밤의 꿈'과 같이 막을 내린 것이다. 그렇더라도 '시도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세상은 전혀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것을 이 책 역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도하는 자, 그대  진정으로 살아있는 삶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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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13-12-20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한번 다시 봐야겠군요. 대사도 음미하면서~~ 넘 오래되었어요. 지금을 즐기려면... 반갑습니다.

비의딸 2013-12-21 08:41   좋아요 0 | URL
네.. 지금 행복한 사람이 나중에도 행복할 것이라 믿어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