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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평점 :
작가가 책에 자기 이름을 넣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어떤 작가들이 가명으로 책을 내는 것은 어째서일까. 작가에게 실제의 삶이 과연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나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어쩌면 즐겨 볼 만한 -내게 일종의 비밀 신분을 만들어 줌으로써-일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어째서 그런 생각에 그처럼 마음이 끌리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266쪽)
이상한 일이다. 감시하는 자와 감시받는 자의 얽히고 설킨 세 편의 이야기 중, 앞의 두 편 <유리 도시>와 <유령들>을 읽는 동안 도대체 작가가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지만, 마지막까지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작가가 하려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이렇게 책을 재미있게 읽고, 더구나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결국 <잠겨있는 방>까지 세 편의 이야기를 모두 읽고 나자, 아.. 하는 '도'트는 소리와 함께 '어쩌면..'하는 나만의 추측을 완성할 수 있었다.
옮긴이도 밝히고 있지만, 세 편의 이야기는 전혀 상관이 없으면서 긴밀하게 얽혀있고, 한 편을 읽으므로써 다음 편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본의 아니게 탐정 역할을 떠맡은 탐정소설가, 자신이 감시자라고 생각했지만 어느덧 감시받는 자로 드러난 탐정, 천재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 친구의 작품들과 그의 삶의 나머지들을 어느날 그야말로 느닷없이 관리하게 된, 그러나 정작 자신은 작가가 되지 못한 화자. 이들은 누군가의 괘적을 쫓는 동안 쫓기자와 동화되어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게 되고, 정작 자신이 하려던 일과 했던 일들, 혹은 삶의 터전으로부터 밀려나는 다소 당황스러운 일들을 겪게 되는데...
뉴욕 3부작이라는 전체 제목은 세 편의 단편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도대체 이 이야기들과 뉴욕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감시하고 감시받는 일이 뉴욕에서만 가능한 것도 아니련만. 감시자가 감시받는 자를 쫓으며, 뉴욕의 구석들을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뉴욕이라고는 가 본 일이 없는 나로서는 그곳이 어디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엔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자기 이름에 걸맞는,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역할을 포기하는 자와 스스로 이탈한 자를 찾아 제 역할을 기억하게 하려 하지만, 쫓는 자 그 조차도 결국엔 자기 역할을 잃어버리게 되는 이야기.
어느날 느닷없이 실종된 사람들. 그들은 어쩌면 세상을 향해 자발적 탈락을 시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관심, 칭찬, 사랑.. 혹은 비웃음이나, 미움까지 우리가 타인들로부터 기대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더라도 받게되는 그 모든 것들로 부터 탈출을 시도한 사람의 이야기. 정체성이라는 것이 타인에 의해서만 드러나지는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을 떠났을 때 나는 과연 '나' 일 수 있을까.
세 편의 이야기 중 마지막 이야기 <잠겨 있는 방>을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 사라진 친구의 작품 관리자가 되고(사실은 남겨진 그의 삶을 관리하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그의 흔적을 쫓는 동안 서서히 자신을 잃어가는 화자의 이야기인데, 재미있는 것은 사라진 작가 팬쇼의 과거 행적이 작가 폴 오스터의 과거 행적과 동일하더란 것이다.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지만, 글로는 밥벌이가 되지 않았기에 단기 선원이 되어 잡일을 했고, 전화 교환수를 했고, 또 언제인가는 순전히 돈을 위해 영화 대본을 요약했던 그러다가 영화 제작자로부터 영화에 데뷔하라는 러브콜을 받기도 했던 폴 오스터의 과거 행적을 고스란히 되풀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펜쇼의 기행은 폴 오스터의 그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오스터는 펜쇼와 같이 잠적하고 싶었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자기만의 생>을 출판했던 로맹 가리가 생각난다. 그는 두 번은 받을 수 없다는 콩쿠르 상을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두 번 수상했는데, 그가 권총을 물고 자살 한 후에야 대중은 그가 그 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자기 이름으로 책을 출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기를 인정받고자 하는 의미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쟁취한 뒤, 작가는 대중으로부터 잠적을 꾀한다. 알려진 자기로써 인정받는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자기를 창조해 그 역시 바로 자기 자신임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것이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자기만의 고유한 정신의 자유가 아닐까.
모든 인연을 끊고 은둔하며 홀로 죽어가는 펜쇼 역시 자기만의 고유한 정신의 자유를 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립을 통하여 그가 정말 자유로워 졌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죽음이 아니고서는(결국 펜쇼는 죽음을 택하지만)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세상살이 이며 삶인데, 그는 고작 뿌리뽑힌 존재로 그렇게 고독하게 죽어가는 길을 택했을 뿐은 아니였는지 하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타인에 의하지 않고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길 바란다는 것은 현실성 없게 느껴진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욕망이 없다는 이야기와 같은 걸까. 해마다 초파일이면 거리에 내걸리는 연등처럼 혹은 크리스마스 트리의 꼬마전구처럼 얽히고 설켜 줄줄이 엮여있는 것이 삶이다. 누구든 한 사람의 지난 괘적을 쫓자면 그와 관련되었던 사람들은 줄줄히 불을 켜듯 밝혀질 것이다. 또한 그들에 의해 정작 그가 누구인지가 밝혀지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정체성이라는 것은 타인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나라는 것을 나 스스로 납득하려면 역시 거울처럼 나를 비쳐주는 다른 존재들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