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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평점 :
빵굽는 타자기. 폴 오스터가 좋았다기 보다는 제목이 너무 좋아서 고른 책이다. 글을 쓰는 일로 먹고산다는 말을 이보다 더 근사하게 할 수 있을까.
hand to mouth, 빵굽는 타자기. 제목을 참 잘 옮긴 것 같다. 말 그대로 폴 오스터의 타자기는 폴 오스터에게 빵을 만들어주는 기기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꼭 오스터에게만 빵을 구워주는 기계였겠는가. 만약 그랬다면 오스터의 빵기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오스터가 써낸 글로 빵을 삼은 이들이 있었기에 그의 타자기는 지금껏 오스터를 위한 빵을 구워내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오스터는 열여섯 살 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래로 기초적 생계를 위한 시간제 일을 빼면 글을 쓰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번역을 하고, 서평과 시를 쓰고, 더 나중에는 희곡을 썼으며 드디어 소설을 쓰게 되었고, 현재 그의 작품은 세계 20여 나라에서 읽히고 있으며, 특별히 폴 오스터를 좋아하는 마니아 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전 내가 읽은 폴 오스터의 책은 두 권인데, <달의 궁전>과 <브루클린 풍자극>이 있다. 두 이야기는 모두 '우연'에 얽힌 운명적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오스터 특유의 요요한 글쓰기 방식으로 획기적이거나 특별한 사연이 모나지 않게 술술 읽히도록 책을 엮어나가는 글재주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작품이다. <빵굽는 타자기> 에서도 역시 그런 오스터의 식의 서술을 발견할 수 있는데, 자신의 태생이나 어린시절을 비롯한 지난 시절의 개인적 이야기가 재미있고 발랄하게 잘 씌여있다.
따라서 오스터를 이제 막 좋아하기 시작한 나는, 몹시 사사로운 그의 이야기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이기주의적이기 보다는 개인주의적이며 독립적인 서양인들의 면모가 글로 정리된 오스터의 지난 삶 속에 잘 드러나있고, 때때로 나는 그것이 부럽기도 했다.
오스터의 부모들은 1950년대 후반의 미국 풍토가 그랬듯이 무엇보다 돈을 귀중한 가치로 여기는 평범한 미국민들이 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돈이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오스터는 불과 열 살의 나이에 더 많이 사고, 더 많이 만들고, 더 많이 쓰라는 선동을 멈추지 않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발견해 내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로 부터 동류의식을 느꼈다니 나로서는 어안이 벙벙해지고, 전혀 믿을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든다. 물질주의적인 부모에게 반항하는 정신주의자 소년이라니. 그러나 어쨌든 이시기에 오스터는 물질만능주의자인 부모들로 부터 등을 돌리게 된다. 또한 자신은 평생 실업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 무려 열 살에 말이다.
오스터에게 근본적으로 '돈 벌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삶은 오스터에게도 예외없는 것이여서, 살자면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돈을 위해 글을 읽고 쓰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시간제 일을 하고, 오로지 돈을 벌기위한 글을 쓰기도 하며 오스터는 진정한 작가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글이 돈을 쫓는 것이 아닌 돈이 글을 쫓는 지경에 드디어 이르게 된 것이다. 나는 여기서 또한번 오스터가 부러워 졌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어린 나이부터 알았고, 지금까지의 삶동안 포기하지 않으며 주욱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 말이다.
전반적으로 오스터의 글쓰기 인생에 대한 고백은 무척 재미있었다. 어떤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거쳐왔기에 '우연'에 관한한 대가가 되었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뒤에 실린 희곡 세편에 대해서라면 글쎄 나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희곡읽기의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탓도 있겠지만 역시 나에게 오스터는 소설가로 기억될 것이다.
오스터는 글을 쓰는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글을 쓴다고 했다.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나는 글을 읽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만 같아 책을 읽는다. 그런면에서 나는 폴 오스터와 닮았다고 우긴다면 억지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