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 풍자극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대부분의 삶은 사라진다. 한 사람이 죽고, 그가 살아온 모든 흔적이 차츰차츰 사라진다. 발명가는 그의 발명품들로 살아남고 건축가는 그가 지은 건물들로 살아남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어떤 기념물도, 오래도록 지속되는 업적도 남기지 않는다. 남는 것이라고는 몇 권의 앨범, 5학년 때 성적 통지표, 볼링 경기 트로피, 언제였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휴가 마지막 날 아침 플로리다의 어느 호텔 객실에서 슬쩍해 온 재떨이 정도가 고작이다. 몇 가지 물건과 몇 가지 서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수박 겉핥기식의 평가. 그런 사람들은 예외 없이 고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날짜를 뒤섞고 사실을 빼먹고 진실을 점점 더 왜곡시키고 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많다. 그리고 다음에는 그런 사람들이 죽으면 이야기들도 대부분 그들과 함께 사라진다. (386쪽)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전기를 쓸 계획을 세우는 네이선 글래스는 신문 귀퉁이에 이름 한 자 남기지 않는 유명하지 않은 평범한 망자들의 부모, 자식, 남편, 형제, 자매도 어떤식으로든 고인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싶을테니, 그런 의미에서 유명하지 않은 이들의 전기도 분명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은 이들을 글로 소생시키고, 그의 이야기들은 평생, 혹은 그들을 기억하고자하는 이들이 죽은 뒤까지도 책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에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의 전기를 쓸 계획이 영 엉터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머니들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때 보통은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말로 하자면 소설로 댓 권은 될 것이라고들 하는데, 어느 누구의 삶인들 그렇지 않을까. 그러므로 가족이나 몇몇 지인말고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보통 사람의 전기라니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아이디어 라는 생각이 든다.

 

네이선 글래스는 전직 생명 보험회사 영업사원이었으며, 현재는 이혼한 60대고, 또한 암으로 부터 회복중인 환자, 사랑하는 딸에게 마저 존중받지 못하는 언뜻 생각하기엔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죽을 곳을 찾아 들어간 브루클린에서 한동안 소식이 끊긴 조카와 조카의 딸을 만나고, 그들로 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간다. 그러던 중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인생은 60부터라고 노래해야 하나. 어쨌든 이 책은 평범한 사람의 전기를 쓰고 싶어하는 평범한 사람인 네이선 글래스의 평범한 전기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브루클린 풍자극에서 마약중독, 동성 연애, 광신도, 외도, 그리고 이혼, 따위의 일은 너무도 평범한 일상이라 딱히 얼이 빠지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 이야기들조차 평이하게 들릴 만큼 폴 오스터는 이야기를 술술 풀어가는 재능이 있다.책을 읽는 동안 세르게이 트로파노프의 몰도바가 귀에 울리는 듯 했다. 즉흥적이면서도 우아한 멜로디의.

 

아니,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보통 차로는 단조롭고 고된 일이라는 요소가 없어지는데, 전체적인 상황에서 제일 중요한 건 그거거든요. 극도의 피로감과 지루함, 정신을 멍하게 만드는 단조로움. 그러다가 뜬금없이 문득 느끼게 되는 일말의 해방감과 잠깐 동안의 진정하고 절대적인 희열. 하지만 그 순간을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요. 고통이 없으면 희열도 없는 법이니까요.(44쪽)

 

행복하다는 느낌, 희열이라는 감정을 이보다 더 정확히 설명할 수 있을까. 역시 작가는 뭐가 달라도 다른 법이다.

이 책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은 어떤 개망나니 인생을 살았더라도, 누군가가 그를 잊지 않고 찾아준다면, 한때는 착하고 예뻤던 아이로 기억해준다면 그 사람은 결국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이며, 그다지 나쁜 삶을 산 것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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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13-12-24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범한 사람들의 전기...삶이라는 것이 평범하기엔 너무도 많은 일들이 생기는거죠. 평범한 사람들도 평범하게 살 수 없는 것이 삶이라면... 세상은 말이 적다고 없다고 너무도 귀기울여 주지 않는 건 아닐까요? 원칙도 소통도...눈, 귀 꽉막아버리는 현실이 참 아픕니다. 책 콕!해둡니다.

비의딸 2013-12-25 08:00   좋아요 0 | URL
저는 작품이 마음에 들면 그 작가의 전작들을 주욱 훑는 버릇이 있어요. 또, 작가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좋아합니다. 한 작품은 전작들과 작가의 삶이 그물코마냥 얽히고 섥혀 다음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마치 역사가 그런 것 처럼요.
지난날 말못할 고통과 슬픔으로 오늘이 왔고, 오늘의 아픔들이 새로운 내일을 엮어낼 것이라고 일단은 믿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겁이 나기도 해요. 이런 현실에 무뎌져버릴까봐서. 눈 앞에것들에 만족해 버리면 어쩌나 하고…
저는 개인적으로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이 더 좋습니다. 눈이 먼 호르헤스의 말년에 책읽어 주기 아르바이트를 한 알베르토 망구엘을 생각할 수 있거든요. 아, 저는 알베르토 망구엘을 정말 좋아합니다.

여울 2013-12-29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의 궁전]을 다시 읽고 닫는 오후네요. ㅎㅎ 마치지 못해 여운이 남던 소설인데 다시 살펴보니 새롭군요. 책 읽어주기 알바...망구엘을 좋아하시는군요. ㅎㅎ 주말 잘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