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노이의 불평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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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 <휴먼 스테인>,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포트노이의 불평>순으로 필립 로스를 읽어온 나는, 이번에 읽은 책 <포트노이의 불평>에서 몹시 당황했다. 왜냐하면 여든살을 넘어선 필립 로스의 근작과는 상당히 다른 삼십대의 필립 로스를 만났기 때문이다. 앞의 세 권이 미국의 근대사 속 유대인, 2차세계 대전 후 미국 사회에서 상처받은 개인들에 대한 이야기 였다면, <포트노이의 불평>은 그야말로 한 개인의 사적인 성생활에 대한 불평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적인 문제 뒤에 숨은 것은 역시 유대인이면서 이방의 땅 미국에서 살아가는 한 남자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디언 지는 <포트노이의 불평>에 대한 서평에서 '로스는 코믹 작가다' 라고 평했다는데, 내가 이전에 읽은 세권의 책에서 로스는 전혀 코믹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너무 진지한 작가였다. 심각할 정도로 너무 진지했기 때문에 <휴먼 스테인>에서 칠십대의 콜먼 실크가 자기 나이의 딱 반 밖에 되지 않는 여자와의 노골적인 정사 장면조차도 전혀 외설스럽거나 천박하지 않게 표현했다고 기억한다. 그런데 전혀 외설스럽지 않게 표현했다는 것은 내 생각이고, 정사장면 조차도 너무 진지하고 냉철했기 때문에 독자로서 나는 그것에서 야하다거나 외설스럽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던 것이라는 것을 <포트노이의 불평>을 읽으며 알겠다.
 
<포트노이의 불평>은 책 제목에 걸맞게 처음부터 끝까지 포트노이의 독백으로 씌여졌다. 미국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삼십대 초반의 앨릭잰더 포트노이가 정신과 의사를 상대로 자신의 문제를 고백하는 것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여느 상담과는 다르게 정신과 의사의 피드백은 전혀 없고, 포트노이가 마마보이였던 어린시절부터 성도착증세를 보이는 삼십대의 남자가 된 현재까지를 오로지 혼자서만 진술한다.
상담은 이야기를 끄집어 내고, 그에 대해 진술하고,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 답을 찾는 것인데 포트노이는 상담자의 피드백 없이도 그 스스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퍼즐 조각을 맞춰간다. 표면적으로는 전혀 해결되는 것이 없지만, 기억을 거슬러 자신의 문제를 되짚어 내는 것만으로도 독자는 포트노이의 비뚤어진 성적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있다.
한편 그 독백이 얼마나 외설스럽던지 근간의 로스만을 읽어온 나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옮긴이의 말을 따르자면 필립 로스는 적나라한 표현으로 꽤 악명이 높은 작가라는데, 이전에 세권을 읽는동안 나는 로스의 글이 야하다라거나 노골적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못했던 것이 의아스러웠다. 생각해보면 옮긴이의 말처럼 로스는 선정적인 장면에서도 감상을 뺀 냉철하고 건조한 관찰자의 문체를 고수했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포트노이의 불평>만은 전철과 같은 공공장소에서는 읽기 낯뜨거울 정도로 외설스러운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나는 의아스럽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적인 것이 인생에서 이다지도 큰 부분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역시 문학이기에 가능한 것일까? 아니라면 내가 성적인 면에서 많이 부족한 것일까?
 
이 책에서도 역시 이전에 읽었던 로스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유대인이고, 그는 이방인의 나라에 속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 문제로 혼란을 겪는다. 부모는 포트노이를 이방인들과 이방인들의 문화로 부터 보호하려는 미국내 유대인으로, 그들은 이방의 땅에서 이방인들과 선긋기를 통해 자신들은 선택된 민족, 즉 유대인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디아스포라 후 세대인 포트노이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있다.
이방의 것에 대한 부모의 공포는 포트노이에게로 그대로 전달되어, 자신을 이방인과 동일시하기를 선망하는 만큼,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사춘기에 접어든 포트노이가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성'뿐이라는 무언의 깨닫음을 피부로 얻는 발로가 된다. 그로부터 점차로 성도착증세로까지 발전되는 포트노이의 성적 취향은 안정보다는 성적 모험을 감행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반대로 가정을 꾸리고, 유대인의 피를 이어가기를 끝없이 바라마지 않는데, 그러지 않음으로서 자신이 유대인임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포트노이도 그 자신이 유대인임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는 타고난 '선민'이라는 핏줄의 끌림보다는 끝없는 교육에 의한 세뇌, 즉 후전적으로 '득의' 된 것으로 보여진다.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보면서 유대인에 대해 그다지 좋은 인상을 갖고있지 않은 나는 근본적으로 유대인이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 이라는 것에는 무감각한 편인데, 포트노이가 이방의 땅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유대인으로서 정체성 문제로 갈등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선민의식이 살아남기 위한 '적응훈련'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체는 모두 후손을 남김으로서 존재로서의 영속성을 꾀하기 마련이 아니던가 말이다.
 
이전에 읽었던 세 권의 책과 필립 로스가 삼십대에 쓴 <포트노이의 불평>은 크게 다른 책인 것 같지만, 여러 모습에서 비슷하다. 첫째로 이방인의 땅에 사는 유대인으로서 오히려 그땅의 주인을 이방인으로 역차별하며, 남의 땅에 사는 이방인이라는 내면의 공포를 표현했다는 것과, 부모를 넘고, 민족을 넘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몸부림 치는 자식, 후세들이 등장하는 점에서 말이다.
전작주의자는 아니지만, 한 작가의 책을 쭈욱 따라 읽는 것은 그 작가의 생애를 읽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유대인이었던 필립 로스가 이방의 땅(미국)에서 이방인(유대인)으로서 겪었던 정체성의 혼란에 대해 조금은 더 알 수 있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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