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채플을 견디고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었다면 마커스는 그로부터 열한 달 뒤 와인스버그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을 것이다. 나아가 졸업생 대표로 고별사를 했을 가능성도 높았다. 그랬다면 그의 교육받지 못한 아버지가 그동안 그에게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려 했던 것은 나중에 배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매우 평범하고 우연적인, 심지어 희극적인 선택이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 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239쪽
살면서, '만일...'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자주 '만일...'에 대해 생각한다. 만일 그때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그 때 그 일을 했더라면, 만일 그 때 그일을 조금만 견뎌냈더라면, 만일 그 때 그 일을 참지 않았더라면....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선택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예측이 가능했다 하더라도 예측한 만큼만 세상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며, 결과가 어떻든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자기에게 있다. 그것이 때때로 억울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삶이며 인생인 것을.
 
유대인이며 정육점 주인의 아들인 마커스는 꼬마시절부터 익숙한 피와 살육의 정육점을 떠나 다른 삶을 살고 싶어했다. 정육점을 떠나기 위해서 마커스는 정말 하기 싫은 닭의 내장을 빼내는 일도 참고 해치울 수 있었다. 그것은 해야만 하는 일이었고, 어쨌거나 그는 정육점을 떠날 것이기 때문에.
대학에 진학한 마커스에게 정육점과 아버지를 떠날 기회가 왔고 마커스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를 위해 아버지와의 불화를 이겨냈고, 어머니의 희생을 모른척 했다. 그리고 새로 시작된 삶. 마커스는 미국이 벌이고 있는 전쟁에 강제로 소환되어 소나 닭처럼 피를 흘리며 처참히 죽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법률가가 되고 싶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 공부 밖에 없었다.
마커스는 자신이 선택한 떠남과 공부로 다가올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고, 그 결과를 위해 매진했으나 인생은 정말 말도안되고 얼토당토않은 일로 순식간에 뒤집히곤 한다.
 
마커스가 불화를 해결하는 방식은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였다. 아버지와의 불화에서도 그랬고, 처음 진학한 대학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도 그랬다. 또 새로 편입한 와인스버그에서 룸메이트들과 갈등이 있을 때마다 그 방을 떠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마커스의 그런 문제 해결방식이 잘못된 것이라곤 할 수 없지만 어쩐지 잘하는 일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건 남에게 피해주는 것 없으니 됐지 않았냐며 내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꼭 같았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당연함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떠나기 보다는 부딪히고, 갈등하면서 해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마커스의 짧은 운명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다면 내 삶도 그렇지만 부모로서 아이에게 강요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서도 좀더 자신있게 대처할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되고나니 내 삶보다는 아이의 삶이 먼저 밟히고 걱정이 되는 것이다. 나는 내 위치에서 볼 때, 아이에게 이런저런 좋다고 생각되어지는 것들을 제안하지만, 그것들이 아이의 인생에 정말로 좋은 것들을 가져다 줄 것인가 하는 것에서는 정작 자신이 없다.
마커스의 걱정많은 아버지도 그랬다. 그의 눈에는 마커스의 불안한 미래가 훤히 보였지만, 그렇더라도 걱정하는 것 외에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부모는 자식에게 길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그 길을 가게 할 수는 없는 것을. 그 길을 가게 했다하더라도 그것이 아이 인생에 정말로 좋은 일이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는 것을.
 
<울분>은 1950년대 무렵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정작 로스가 이 책을 언제 쓴 것인지는 모르겠다. 단지 혼자 추측해 볼때 비교적 근작인 <미국의 목가>나 <휴먼 스테인>,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보다는 이전에 <포트노이의 불평>을 쓸 무렵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앞의 세권과는 사뭇 다른 느낌, 로스의 이야기가 장황해지기 이전의, 작품 속에 이런저런 인물들을 끼워넣기 이전의  로스 스타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야기가 장황해진, 혹은 방대해진,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삶을 길게 설명하는 로스 스타일이 더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