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173999.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스토노 반란을 시작했다. 영국 본토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대 규모 노예봉기였다. 글을 읽을 줄 알던 제미라는 남성 노예가 대부분 중앙아프리카 출신인 22명과 함께 

자유!’라고 쓴 깃발을 휘두르며 행진하면서 한 상점을 습격해 무기와 탄약을 챙겼다. 이들은 에스파냐 식민 당국이 영국 지배를 잠식하고자 탈출한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는 플로리다로 갈 계획이었다. 프롤리다로 가는 도중 플랜테이션 농장을 불태우고 다른 노예들을 풀어주며 백인을 살해하기도 한 일행은 결국 중무중한 기마 민병대의 공격을 받았다. 반란자 47명과 민병대원 23명이 사망했다. 민병대는 살해한 노예들의 머리를 잘라 경고 표시로 말뚝 위에 걸었다.

 

도망친 노예들은 대부분 나중에 잡혀 처형되거나 카리브해 노예주들에게 팔려갔다. 뒤로 당국은 반란 재발을 막겠다며 엄격한 법을 제정했다. 노예들이 집단으로 모여 글 배우기를 금지하는 한편, 10년 간 아프리카로부터 노예 수입을 금지했으며, 노예에게 중노동을 시키거나, 지나치게 잔인한 노예주를 처벌하기 시작했다.

 

194599. 2차 대전 직후 한국 미 군정청이 일본 식민 정부를 그대로 유지한다고 발표했다. 격렬한 항의에 군정청은 일부 일본인 관리를 미국인으로 교체했지만, 물러난 일본 관리들을 고문으로 뒀다.

 

177674.

 

 

미국의 독립혁명 중에 아메리카 13개 식민지들이 모인 대륙회의가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선언서는 뜨거운 언어로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다고 밝혔지만, 새로운 자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독립 뒤로도 노예제는 100년 가까이 지속됐고, 아메리카 원주민을 겨냥한 거의 전면적인 종족학살이 가속화됐고, 새로 세워진 정부 또한 그전의 영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다른 수 많은 나라를 침략하고 정복하며 그 나라에서 선출된 정부를 무너뜨렸다.

 

1777724.

 

 

보스턴에 사는 한 노동계급 여성이 토머스 보일스턴이라는 판매상에게서 커피를 빼앗았다. 미국 독립혁명 기간에 수십 차례 일어난 식량 폭동 중 하나였다. 이런 폭동은 주로 북부에서 일어났지만 동부 지역인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에서도 벌어졌다. 그중 3분의 1은 여성들이 조직한 행동이었다.

 

1800824.

 

 

버지니아주 중부에서 가브리엘이라는 대장장이 노예가 이끄는 한 무리 노예들이 830일로 예정된 반란에 참여할 노예들을 모집하고자 모였다. 이들은 리치먼드까지 몰려가서 주도를 장악하고 주지사를 인질로 삼아 노예들의 자유를 얻어내겠다는 대단히 야심 찬 계획을 궁리한 상태였다. 유감스럽게도 누군가 계획을 누설해 참가자 중 26명이 처형됐다. 하지만 노예제 폐지를 향한 투쟁은 계속됐다.

 

1811, 18.

 

 

미국에서 최대 규모였던 노예 봉기도 루이지애나 해안에서 벌어졌다. 노예 수백 명은 주인들을 공격하고는 깃발, 북을 들고서 농기구를 무기 삼아 뉴올리언스로 행진했다. 노예들은 봉기 도중에 플랜테이션 농장에도 불을 질렀고, 반란자들을 충원했으며, 무기가 부족해도 아랑곳 않고 지역 민병대와 맞서 싸웠다. 그러나 노예들 행진으로는 미국 중남부 도시, 배턴루지에서 충돌한 제2 민병대도 도착하면서부터 결국 저지됐다.

 

 

1816727.

 

 

미 육군이 플로리다 애펄래치콜라강에 있는 한 요새를 소이탄으로 공격했다. 요새에는 흑인과

 

촉토촉 30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이 공격은 세미놀 전쟁의 신호탄이자 미국이 프롤리다를 정복하게 되는 출발점이 됐다.

 

1824, 526.

 

 

로스아일랜드주, 포터킷에 있는 슬레이터 공장에서 일하는 소녀, 성인 여성, 102명은 공장에다 감시선을 설치하면서부터, 미국 역사에서는 최초로 기록한 공장 파업도 일어났다. 이틀 전 도시, 공장주들은 모든 노동자에 대해 임금 인상 없이 하루 노동 시간을 1시간씩 늘리는 한편, 동력 방직공 임금을 25% 삭감하기로 결정했다. 임금 깎인 방직공들은 전부 15-30세 여성들이었다. 고용주들에 따르면, 이전까지 젊은 여자치고 지나치게 많은 임금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장주들은 결정에 대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로, 초창기 섬유 산업, 미국 어느 공장에서도 일어난 적도 없던 일을 불러왔다. 여성들,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서 파업에도 나섰기 때문이다. 다른 노동자들, 지역 사회 구성원들도, 파업 대열에도 합류하면서부터 공장을 봉쇄했고, 시위는 이어졌고, 공장주들 저택에는 돌맹이도 쏟아졌다. 지역에서 저명한 정치인 조지 F. 젱크스도 분쟁 당시를 일기로도 적었다고 한다.

 

 

일주일을 꼬박 채운 파업 마지막 날, 한 공장에서 불 붙었다. 이튿날 공장주들은 노동자들과 교섭에도 나서 타협에 다다랐다. 쟁의 끝난 뒤로부터 다른 노동자 무리들도, 스스로, 조직을 이루기 시작했고, 뒤로는 몇 년 간 뉴잉글랜드 섬유 산업 곳곳에서 파업도 벌어졌다.

 

 

1831821.

 

 

버지니아주 사우샘프턴 카운티에서 70여 명 노에가 냇 터너 반란을 일으키며 남부 노예 소유주들을 패닉에 빠뜨렸다. 글을 읽을 줄 알고 신앙심이 깊었던 터너는 신뢰하는 동료 몇 명과 반란을 시작한 플랜테이션 농장을 돌면서 노예들을 풀어주고 마주치는 백인을 모조리 살해했다. 반란은 며칠 만에 연방군에게 진압됐다. 터너는 몇 주 동안 도망쳤으나 결국 붙잡혔고, 말 뒤에 묶여 형장까지 끌려간 뒤 기둥 위에 매달린 다음 4등분해서 처형되는 중세 형벌을 선고받았다. 봉기 직후 복수에 나선 백인 인종주의자 폭도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자유인들을 비롯해 노예 수십 명을 살해했다. 남부 많은 노예주는 노예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고

 

자유를 더욱 제한하는 새로운 법을 도입했다.

 

 

 

 

1834, 220.

 

 

여성 섬유 노동자, 800명은 15퍼센트 임금 삭감에도 반대하면서, 일손을 놓았다.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는 첫 번째 로웰, 공순이(mill girls) 파업도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곧바로 저금을 전액 인출하면서, 지역 은행 2곳에 비상이 걸리도록 했다. 비록 임금 삭감을 막는 데는 실패했지만, 파업으로부터 지역 여성 노동자들은 더 이상 유순하고, 고분고분하게, 일만 하지는 않는다고 보여준 강력한 성명(메시지)이었다.

 

1845915.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와 주변 방적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 5000명이 하루 최대 10시간 노동 및 아동 노동의 종식을 요구하며 파업을 시작했다. 몇 달 뒤, 수 백 명의 노동자가 지역에서 매우 큰 공장인 블랙스톤으로 행진했다. 여성들이 공장 문을 부수고 파업 파괴자들을 쫓아내는 동안에도 동행한 남성들은 경찰 접근을 저지했다. 여성 노동자들 요구는 수용되지는 않았지만 파업은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1848년에 이르러 같은 해 독립기념일에 펜실베이니아주 의회는 하루 10시간 노동법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 법에는 허점이 많았고 집행되지도 않았다. 노동 조건 개선과 노동 시간 단축을 위한 투쟁은 방적 노동자들이 중단한 싸움을 이어받을 다음 세대 노동자 활동가들이 나타날 때까지 멈춰 섰다.

 

 

18481221.

 

 

조지아주 서배나에서 탈주 노예인 엘런과 윌리엄 크래프트 부부는 성탄절 아침에 필라델피아에 도착하는 증기선에 올랐다. 피부색이 밝은 엘런은 중산 모자를 쓰고 크라바트를 해서 백인 남성으로 변장하고는 윌리엄을 노예처럼 대동했다. 1850년 탈주노예법은 통과되면서 북부에 있는 탈주 노예를 남부로 돌려보내기 시작하자 크래프트 부부는 영국으로 망명해 그곳에서 19년 간 살았다. 영국에서 자녀 다섯을 두고 노예제 폐지 운동과 여성 참정권 투쟁에 참여한 부부는 남북 전쟁 이후 미국으로 돌아왔다.

 

 

1849917.

 

 

노예제 폐지론자 해리엇 터브먼과 그의 형제 벤, 헨리는 메릴랜드에서 노예 상태로부터 탈출했다. 이후 벤과 헨리는 다시 마음을 돌렸고, 터브먼도 어쩔 수 없이 동행했다. 하지만 곧이어 다시 탈출한 터브먼은 필라델피아로 향했다. 그는 끈질기게 일하면서 추후 남부로 돌아가 다른 노예들을 해방하는 데 쓸 돈을 모았다. 나중에는 존 브라운이 하퍼스페리에서 함께 반란을 일으킬 투사들을 모으는 걸 돕기도 했다. 만년에는 여권 운동에서 활동하다가 1913년 세상을 떠났다.

 

 

 

 

1851, 215.

 

 

아프리가계 미국인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군중들은 보스턴 법원 청사를 습격해서는 수감 중이던 탈주 노예, 샤드락 밍킨스, 프레더릭 젱킨스를 구출한 뒤로 캐나다로 몰래 빼냈다.

 

 

 

1853, 420.

 

 

노예 출신 노예제 폐지론자, 해리엇 터브먼은 노예를 자유주로 탈출하고자 하는 비밀 조직, 지하 철도에서 활동했다. 터브먼은 직접 70명 정도를 탈출하도록 했고, 훨씬 많은 사람들을 도왔다.

 

18591016.

 

 

노예제 폐지론자 존 브라운이 이끄는 흑인과 백인으로 구성된 작은 무리가 웨스트버지니아주 하퍼스페리에 있는 연방 조병창을 습격했다. 무기를 탈취해서 노예들을 무장시키고자 벌인 행동이었다. 반란은 이튿날 로버트 E. 리 장군이 지휘하는 해병대에게 진압되면서 사망자 7, 부상자 10명이 발생했다. 브라운을 비롯한 생존자 몇 명은 현장에서 붙잡혀 반역죄 재판을 받았다. 판사와 배심원 12명 전원이 노예주로 구성된 재판에서 이들은 유죄 판결에다 사형 선고를 받았다. 가까스로 탈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오즈번 페리 앤더슨은 마침내 캐나다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그는 당시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1861<하퍼스페리의 목소리>라는 회고록을 남겼다. 그는 이후로 다른 생존자들과 북군에서 복무했다.

 

 

 

 

1860, 226.

 

 

오늘날, 캘리포니아 주 유레카, 인디언 섬에서는 위요트족 학살도 벌어졌다. 백인 정착민들은 툴루와트에서 위요트족을 습격해서는 원주민 250여명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백인 정착민들과 충돌한 적은 없었던 위요트족은 공격을 예상하지는 못했으며, 따라서 공격 당일 부족에서는 젊은 남성들은 대부분 생활 물자를 구하고자, 섬을 비운 상태였다. 몽둥이, 도끼, , 총 몇 정으로 무장한 백인 정착민들은 섬에 사는 원주민들을 모조리 차근차근 죽이고자 했다. 대부분, 여성, 어린이, 노인들이었다. 뒤로는 며칠 간 같은 지역에 사는 위요트 족 사람들은 더 살해됐다. 많은 백인들도 학살을 비판했었지만, 아무도 살인죄로 처벌받니느 않았으며, 살인 행위를 비난하는 사설을 쓴 한 언론인마저 살해 위협으로 지역을 떴다. 학살 뒤로는 살아남은 위요트 족 사람들은 섬으로 돌아가는 일마저 금지됐다. 많은 생존자는 인근 백인 정착손을 습격했으며, 저항했지만, 결국 원주민 보호 구역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위요트 족, 후손들은 고향을 되찾고자, 싸움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2000년에 이르러, 후손들은 옛 땅에서 한 구역을 매입했으며, 2019년에는 나머지 토지 대부분을 시로부터 돌려받았기 때문이다.

 

 

 

1860, 37.

 

 

1000명에 이르는 제화 산업에서 여성 파업 노동자들은 거센 눈보라, 잔뜩 쌓인 눈더미를 무릅쓰고는 매사추세츠루 린에서 벌어진 숙녀대행진에도 참가했다. 2주 전에 임금인상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시작한 남성 노동자 5000명도 대열로 합류했으며, 며칠 뒤로 여성 노동자들도 가세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쟁의에도 참여하면서 파업은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한 지지까지 받았지만,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 임금인상 요구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요구를 반영한다면 고용주들은 귀 기울이지 않기를 두려워했다. 여성들은 일터로 돌아갔으며, 일부 남성들은 10% 임금인상을 받아냈지만,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따라서 패배했다.

 

18621226.

 

 

1862년 미국 다코타족 전쟁 와중에 다코타족 38명의 교수형이 집행되면서 미국 역사상 매우 큰 규모의 처형이 이뤄졌다.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재판 중 일부로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았고,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직접 재판 서류를 검토하며 사형을 승인했다.

 

 

1863, 62.

 

 

노예 출신, 지하 철도 활동가, 해리엇 터브먼은 북군 흑인 병사, 150명을 이끌고는 컴비강 기습을 벌였다. 남북 전쟁 가운데, 유일한 여성 지휘 군사작전이었던, 행동으로는 대성공을 거두어, 노예 750명을 풀어준 한편, 몇몇 부유한 연방 탈퇴론자 지주들 농장을 약탈하고는 불태웠다.

 

 

 

 

1864, 229.

 

 

뉴욕 주 트로이에서는 칼라세탁노동조합(CLU) 소속 여성 노동자들, 300명은 25퍼센트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6일 간 파업한 끝에 승리했다. 전날 몇몇 고용주는 굴복했으며, 이어서 대부분 고용주들은 여성들 요구로부터 굴복한 날이었다.

 

18641129.

 

 

미군이 성조기를 내걸고 야영을 하는 샤이엔족과 아라파호족의 평화로운 모임을 공격하면서 샌드샛강 학살이 벌어졌다. 앞서 미국은 샤이엔족과 아라파호족이 오늘날 콜로라도, 네브래스카, 와이오밍, 캔자스에 걸친 넓은 땅을 소유한다는 것을 인정한 바 있었다. 하지만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자, 정착민들은 원주민 땅을 침범했고, 정부로는 원주민들에게 토지 90% 이상을 포기하도록 하는 새로운 조약을 강요했다. 몇몇 추장들은 이런 조약을 배신으로 여기면서 무시했지만, 블랙 케틀이 이끈 샤이엔족과 아라파호족은 평화에 대한 염원으로 조약에다 서명했다. 원주민들은 이후 정부 지시에 따라 라이언 요새로 갔고 다시 빅샌디샛강으로 옮겨 갔다. 지정된 미군 주둔지에다 성조기와 항복을 뜻하는 백기를 내거는 등 미국 정부 요구를 전부 따랐다. 그러나 전사들이 사냥을 나간 사이 800명에 이르는 군대가 원주민들을 공격했다. 군인들은 대부분 여성과 아이들인 비무장 원주민 170여 명을 고문하고 살해한 다음, 희생자들의 머리 가죽을 벗기고, 팔다리를 잘랐다. 여성 성기를 도려내 자기들 모자에다 붙이기도 했다. 공격한 군인들 중에서는 9명에서 24명이 사망했다. 로버트 벤트는 <뉴욕트리뷴>으로부터 강둑에 한 인디언 여자가 다리가 부러진 채로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병사가 군도를 빼 들고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가 자기를 보호하려고 팔을 들자 병사가 칼을 휘둘러 팔을 잘랐다. 여자가 몸을 굴리면서 반대쪽 팔을 치켜들었으나 병사는 다시 칼을 휘둘러 나머지 팔까지 자른 다음 죽이지 않고 자리를 떴다. 여자의 갈라진 배에서 떨어져 나온 태아는 그 옆에 누워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어느 지역 신문에서는 학살이 군인들의 대단한 무공이자, ‘영광스러운 승리라고 치켜세웠다.

 

18681127.

 

 

조지 커스터 장군이 지휘하는 미군 파견대가 잠자던 샤이엔족 천막촌을 습격했다. 백기를 내걸고 지정 거주지에 있던 샤이엔족은 현지 요새 사령관에게 안전을 보장 받은 상태였다. 이른바 워시타 전투라고 불리는 학살 사건으로 마을은 파괴됐고, 평화를 추구했떤 샤이엔족 추장 블랙 케틀을 비롯한 아메리카 원주민 103명이 사망했다.

 

 

 

 

1876, 317.

 

 

미군, 몬태나, 파우더강 전투 기간 가운데 잠자던 샤이엔족, 오글랄라수족을 기습하면서, 수족대전쟁을 시작했다. 미군은 마을을 파괴하고는 약탈했다. 2000발 가까이 총알을 쏜 미군은 사상자 1명 생겼지만, 샤이엔족, 수족 전사들은 200발 정도로 군인 4명을 죽이고는 6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원주민 전사들은 빼앗겼던 말 500마리를 이튿날 아침에서야 되찾았다.

 

 

미군 지휘관, 조지프 레이놀즈 대령은 공격마저 실패한 뒤로, 군사법원에도 회부되어 정직 처분을 받았다. 사건을 계기로 블랙힐스에 사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지정 거주지로 강제 이주하도록 하는 정책에 대한 저항도 활발해졌다.

 

 

1876, 625.

 

 

리틀빅혼 전투를 시작했다. 라코타족, 아라파호족, 노던샤이엔족 연합 부대는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이끌던 군대를 완패하게 하도록 한 싸움이었다. 블랙힐스에서 새롭게 발견한 금을 캐고자, 미군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지정 거주지로 쫓아내려고 벌인, 1876, 수족 대전쟁에서도 최대 규모, 교전이었다. 625-26, 아메리카 원주민 전사들은 미합중국 제7기병대, 병력 700명과 싸우고는 12개 중대 가운데 5개 중대를 전멸하도록 하고, 지휘관이던 커스터를 비롯한 친척 4명을 죽였다.

 

 

187678.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햄버그에서 무장한 백인 폭도 붉은셔츠단은 흐긴 공화당 지지자가 다수인 지역을 행진하면서 햄버그 학살 사건이 시작됐다. 다음 날 이른 새벽 폭도들은 흑인 주 방위군 민병대원 6명을 죽였다. 그중 4명은 항복했는데도 살해했다. 민주당원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투표를 가로막고는 공화당을 붕괴시키고자 벌인 캠페인 일환이었다. 활동은 성공을 거두었다. 민주당은 그해 말 선거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주를 탈한한 뒤로 백인우월주의 일당통치를 확ㄹ립하고, 법적 차별(짐크로법)을 시행하고, 1895년 새로운 헌법으로부터 아프리카계 미국인 투표권을 박탈했다.

 

1886, 51.

 

 

임금 삭감 없는 하루 8시간 노동을 내걸고, 미국 전역, 30만 명에서 50만 명, 노동자들은 파업과 집회를 개시했다. 시카고는 운동 중심지로, 고용주와 정부는 운동을 진압하기로 했다. 53, 경찰은 감시선을 넘어서는 파업 대체 인력을 보호하는 과정에서, 노동자 한 명은 사망하고, 여러 명은 부상을 입었다. 이튿날, 무정부주의 노동자들은 헤이마켓 시위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고, 현장에 있지도 않았으며, 누구도 폭탄을 던진 혐의를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7명은 사형을 선고받고는 1명은 15년 징역형을 받았다. 4명은 실제로 사형을 집행했고, 다섯 번째 사형수는 자살로 교수형 집행을 피했다. 훗날 피고인 8, 전원은 사면을 받으면서 남아 있던 3명을 석방했다.

 

 

뒤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단체들은 헤이마켓 열사들과 하루 8시간 노동 운동을 기념하고자 51일을 세계 노동자 날로 지정했다. 오늘날 세계 곳곳 여러 나라에서는 같은 날을 공휴일로 기린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급진적인 기원을 알지는 못한다.

 

18871123.

 

 

티보도 학살이 벌어졌다. 루이지애나주 흑인 사탕수수 노동자들은 현금 대신 전표로 지급되는 열악한 임금에 항의하고자 흑백 인종을 아우르는 노동 기사단과 손 잡고 월초부터 파업을 벌이는 중이었다. 전표는 회사 상점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는데, 상점은 터무니 없는 가격으로 생필품을 팔았다. 제식기업 농장주들은 첫 번째 한파가 닥치며 작물 피해를 입게 되자 분노했다. 백인 파업 파괴자 2명이 총에 맞아 부상을 입으면서 루이지애나 민병대는 지역 유지 무리 지원을 받아 총격에 나섰다. 총격으로 일단 1달러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던 비무장 흑인 사탕수수 노동자 가운데 최소 50명이 사망했고, 파업 지도자 2명은 린치를 당했다.

 

 

18901215.

 

 

수족 추장 앉은 황소는 사우스다코타주의 인디언 지정 거주지 스탠딩록에서 인디언 경찰에게 살해됐다. 인디언 중재자 제임스 매클로플린은 백인 팽창주의 종언을 예견하는 유령춤이라는 영적 운동이 성장하기를 우려해서 앉은 황소를 체포하고자, 경관 39명과 지원병 4명을 보냈다. 앉은 황소는 경찰에게 협조하기를 거부하자, 그들은 완력을 사용했다. 자리에 모여 있던 군중은 분노하는 가운데 누군가 경찰에게 총을 쏴댔다. 경찰은 보복이라도 하듯 앉은 황소 가슴, 머리에다 총을 쏴서 살해했다. 곧바로 전투는 벌어져서 마을 사람 7, 경찰관 8명은 추가로 사망했다.

 

 

18901229.

 

 

사우스다코타주 운디드니 샛강 근처에서 미군 제7기병 연대 병력은 라코타족 남녀노소 200명을 비롯해 자기 동료들의 일부까지 학살했다. 라코타족은 대부분 비무장 상태로 도망치는 중이었다. 군인 20여 명이 용감한 행동으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

 

1892, 629.

 

 

펜실베이니아주, 홈스테드에 있는 카네기 철강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새로운 생산 요구안을 거부하자, 회사는 직장 폐쇄로 맞섰다. 앤드루 카네기는 공장 숙련 노동자들에게 속한 제철철강노동자통합노동조합(AA)를 깨부수려고 단단히 마음 먹은 상태였다. 공장 관리자,

 

헨리 클레이 프릭은 직장 폐쇄로부터 노동조합원들을 배제한 다음 72, 해고했다.

 

그러자 노동조합에 속하지 않던 미숙련 노동자들은 항의 뜻으로 파업을 벌였다.

 

 

프릭은 파업을 깨뜨리고자, 사설 탐정 회사로는 핑커튼 무장용역 300명을 고용했다.

 

용역들은 파업 노동자 9명을 살해했지만, 1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은 무장을 갖추어,

 

용역 공격을 물리쳤다. 노동자들은 11월가지 버텼지만, 주지사는 민병대 8000명을 동원해 공장으로 들여보내고는 파업 파괴자들을 호위하도록 했다. 분쟁으로부터 노동조합들은 결국 파괴됐고, 카네기는 임금 삭감, 노동 시간 증대를 실행했다.

 

1897910.

 

 

펜실베이니아주 래티머에서 파업을 벌이는 비무장 석탄 광부와 광산 노동자들이 해산을 거부하자 루제른 카운티 보안관이 조직한 치안대가 19명을 살해하고, 36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대부분 등에 총을 맞은 파업 광부들은 원래 파업 파괴자로 들어왔다가 뒤로는 스스로 조직을 갖추어 싸우게 된 이주 노동자들이었다. 살인자들은 재판에 회부됐지만 모두 무죄 방면됐다. 하지만 이 학살은 미국 광산 노동자 조직화에 전환점으로 작용했고, 광부, 특히 이주 노동자들이 전미광산노동조합에 몰려들며 많은 성과를 얻어냈다.

 

 

 

1899, 24.

 

 

미국은 신생 독립국 필리핀을 지배하길로 결정하면서, 미국, 필리핀 공화국 사이에서는 전투도 발발했다. 잔인한 게릴라 진압 작전을 벌인 미국은 1902년에는 승리를 선언했지만, 뒤로는 많은 시민들도 점령자들에 맞서 수년 간 전투를 계속했다.

 

 

 

1900, 120.

 

 

하와이, 호놀롤루에서는 보건 관리들은 페스트를 차단하겠다며, 차이나타운 주택, 상점을 선별해서 불태우려다가, 불은 삽시간에 번지면서 차이나타운은 아수라장이었다. 오래된 카우마카필리 교회 목조 지붕에 붙은 불은 17일 동안 확산되면서, 일대 38에이커(15헥타르) 땅은 폐허로 됐다. 대부분 중국인, 일본인들도 사는 주택, 400채는 잿더미로 변했다.

 

 

당국은 쥐가 전염병을 퍼뜨린다는 증거를 무시했으며, 중국인 회계 직원 1명에 대한 목숨을 앗아간 선페스트(가래톳페스트) 발병에 대해서는 아시아계 주민들을 희생양으로도 삼았다. 과학이 아니라 중국인 주택은 더럽다는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에 근거해서, 방역 통제선을 설치하는 대책을 실행했다. 당국은 몇 주 동안이나 도시에 사는 아시아계 주민들을 격리하게 했다.

 

 

당국은 아시아계 주민들에 대한 가재도구를 거리에도 내놓았고, 주택에서는 석탄산(페놀)을 살포했으며 임시로 만든 목욕탕에서도남들이 보는 가운데 강제로 샤워하도록 했다. 관리들은 중국인, 일본인들이 사는 주택을 불태웠다.

 

 

1월에 난 화재는 번지자, 주민들은 목숨을 건지고자 도망쳤으나, 백인 자경원들에게 지원을 받은 주 방위군들은 주민들을 다시 끌고 왔다. 가까스로 방역 통제선에도 출구 하나 열렸고 사람들은 화재를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 당시 하와이 주 최대 일간지,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는 아시아 나라들에서는 우리 나라로 넘어온 전염병과도 싸우고자 앵글로색슨 식 지적인 방법을 활용한다고 선언했다. 또 다른 지역신문으로는 화재 덕분에 전염병을 근절하는 값 비싼 부동산 도로, 블록을 깔끔하게 정리했다며 치켜세웠다. 화재 뒤로는 집 잃은 많은 주민은 지역으로 다시 돌아가지도 못했으며, 인구 구성은 영구적으로 바뀌었다.

 

190272.

 

 

 

필리핀-미국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종전됐다. 미국은 최대 25만 명의 민간인을 죽음으로 내몬 악랄한 전투 끝에 신생 독립국을 손에 넣었다.

 

1905, 627.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창립총회로부터 세계산업노동자연맹도 설립했다. 대표적인 창립자들로는 유진 V. 데브스, 마더 존스, 루시 파슨스, 빅 빌 헤이우드 등이었다.

 

 

미국 최초 다인종 노동조합으로 손꼽히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은 모든 노동자는 하나로, 거대한 노동조합으로 단결해서, 사회를 통제하기를 주창했다. 따라서 연맹은 미국에서도 조직화하지 않았던 많은 부문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했고, 구타, 투옥, 살해까지 당하면서도, 고용주들에게 야만적으로 억압받던 수십만 노동자를 위한 대대적인 개선을 쟁취했다. 연맹은 칠레,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 등 다른 나라로도 확산했다. 과거에 비해 몸집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은 여전하고, 조합원들도 적극적으로 여러 활동들을 벌인다.

 

 

19071228.

 

 

뉴욕시 1만 가구는 임대료 급등에 항의하며 집세 납부 거부 운동에 들어갔다. 16세 섬유 노동자 폴린 뉴먼은 젊은 여공 400명을 모으고 가족들의 동참을 호소하면서 촉발된 행동이었다.

 

집주인들은 단수와 보복 퇴거로 반격했지만 사람들은 굳건히 버텼고, 1월 초에 이르러서는

 

2000 가구는 집세 인하를 얻어냈다.

 

 

 

1908, 315.

 

 

뉴욕주 로체스터 지역신문, <데모크래트 앤드 크로니클>은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으로부터

 

아나키스트 여성들을 비난했다. 여성 아나키스트들은 세계 경찰 두려움 대상이다. 기사는 계속해서, 세계 수호자들은 통치자가 살해당할 때면 언제나 연루된 여자를 찾아낸다.

 

감정적인 여자라면 두려울 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라고 보도했다.

 

 

 

1910, 223.

 

 

뉴욕, 섬유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얻어내고자, 5개월 간 지속했던 파업, 일명 2만인 봉기를 끝내기로 결정했다. 파업 중심에는 머지않아 악명을 떨친 1911, 같은 공장에서 146명 노동자는 사망한 화재 사고도 일어난, 트라이앵글 블라우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유대인, 이탈리아계 이주 노동자들은 선두에 섰으며, 대부분 여성이었다. 노동자들은 노동 조합을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작업에는 복귀하기로 결정했다.

 

 

 

1910, 39.

 

 

펜실베니아주에서는 슬로바키아 이민자인 광부, 15000명은 일손을 놓으면서 웨스트모얼랜드 카운티 탄광 파업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1년 넘도록 65개 광산을 폐쇄했으나, 경찰 폭력 진압으로부터 16명은 사망하고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굴복했다.

 

 

1910, 729.

 

 

텍사스주 슬로컴에서 백인의 경제적 우위를 지키고자 테러를 발생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대다수인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무장한 백인 인종주의자 수백 명이 도시를 공격하면서 집에 숨거나 일하거나 도망치려 한 흑인들을 총으로 쓰러뜨렸다. 공식 집계상 사망자는 8명에서 25명이었지만, 많은 이가 실제 희생자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라고 본다. 학살과 그로 인한 흑인 주민들의 탈출 이후 인종주의자들은 그들의 집과 재산을 훔쳤다. 지금까지도 이 도시에는 백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가해자 가운데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고 피해자들은 전혀 보상받지도 못했다.

 

 

 

1911, 325.

 

 

뉴욕에 자리한 트라이앵글블라우스 공장에서는 화재도 일어나 노동자 147명은 사망했다.

 

희생자들로는 주로 노동력을 착취 당하며 공장에서 일하던 13-23세 소녀, 여성들이었다.

 

일부는 불에 타 사망했고, 일부는 탈출하고자 필사적으로 계산 비상구로 몰려가다 밟히고는 사망했다. 비상구는 작업 중단을 막고자 불법적으로 잠겼다. 불길을 피하고자 고층에서 뛰어내린 노동자 50명은 사망했다. 회사 소유자들을 7가지 살인죄로 기소했지만 무죄판결을 받았다.

 

 

1912, 111.

 

 

로렌스 파업, 빵과 장미 파업도 발발했다. 뉴잉글랜드 면직공장에서 일하던 폴란드계 여성들은 삭감된 임금을 알아채고는 방직기를 멈춰 새운 채로, 임금이 적다!고 외치며 공장을 나섰다. 대부분 여성, 소년인 다른 노동자들도 조업을 중단하고, 일주일 만에 2만 명이 파업에도 동참했다. 야만적인 탄압에도, 3월 중순까지 버틴 노동자들은 모든 요구사항들을 관철했다.

 

비슷한 파업을 방지하고자, 한 다른 고용주들도 같은 요구를 받아들였다.

 

 

대중적인 파업은 사회주의를 따르던 로즈 슈나이더먼 연설에서 나온다. 노동자에게는 빵이 필요하지만, 장미도 필요합니다. 로렌스, 젊은 여성들은 요구를 현수막에 새겨 넣기 시작했다.

 

 

 

1912, 26.

 

 

미국, 눈부신 파업으로 손 꼽히는 시애틀 총파업도 시작했다. 10만 명에 육박한 노동잗르은 파업 중 조선소 노동자들을 지지하면서, 연장을 내려놨지만, 총파업위원회를 선출하고, 도시, 필수 서비스를 직접 운영했다. 조선소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5일 간 이어진 총파업은 노동자들 스스로 사회를 운영할 수 있음을 보여준 역사적, 성공적 실험이었다. 같은 날, 몬태나주, 뷰트, 노동자들은 하루에 1달러씩 삭감되는 임금에서 자체적으로도 총파업에 돌입했다. 노동자들의 분열을 막고자, 노동자병사평의회를 결성해서 파업을 진행했다.

 

 

 

1912, 224.

 

 

세계산업노동연맹에서 소속된 여성 중심 섬유 노동자, 2만 명은 빵과 장미 파업을 벌이는 동안에, 경찰은 파업 노동자, 파업 기간 가운데, 다른 가정에서 지내고자 이동하는, 자녀들을 경찰봉으로 구타했다. 한 임산부는 구타를 당한 뒤로, 유산했다. 뉴욕시 파업 지지자들은 노동자들은 파업하는 가운데, 생활고를 견딜 수 있도록 해 당한 자녀들을 맡아서 돌봐줬다. 방법도 효과를 보자, 당국은 필라델피아로 향하는 어린이 100명을 저지하고자, 나섰다. 체포된 여성, 아이들은 벌금을 거부하고는 감옥에 갇히는 쪽을 선택했다. 경찰 폭력으로는 역효과를 생기도록 해서, 전국 각지에서는 파업을 지지하는 여론마저 거세졌다.

 

1912, 57.

 

 

뉴욕시 벨몬트 호텔에서 일하던 노동자 150명은 파업에 들어갔다. 종업원, 호텔 노동자, 최초 총파업을 시작했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에서 조직한 파업은 정점에 이르렀을 때, 노동자 6000여 명은 주 1일 휴무, 임금 인상, 노동 조합원 차별 금지 등을 요구하고는 일손을 놨다. 고용주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대체 인력으로 고용하고는 인종 간 증오를 부추기려고 하자, 노동자들은 유색인웨이터연합(CWA)와 손 잡고는 흑인 노동자들에게 파업 동참을 호소했다.

 

 

여러 호텔에서는 개별적으로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요구를 일부만 받아들이고는, 경찰 폭력 진압, 언론 괴롭힘, 현지 대학생 등 파업 대체 인력 증가, 등도 결합하면서부터 파업은 6월 말에야 끝났다. 일부 핵심 조직자들은 흑표를 적었다. 그러나 호텔 노동자들은 뒤로도 몇 년 간 여러 차례 파업을 벌였다. 오늘날, 뉴욕시 호텔 노동자들은 세계에서 매우 높은 임금을 받는다.

 

 

1912, 312.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는 여성 의류 노동자는 대다수 2만 명은 빵과 장미 파업을 벌였다.

 

내건 요구안들을 고용주들은 전부 수용했다. 폴란드계 여성들로부터 시작한 파업은 세계산업노동자연맹에서 조직한 행동이었다. 노동자들은 경찰과 군대에 대한 야만적인 탄압에도 직면해서는 최소 2명은 사망했으며, 많은 사람들은 구타당하고 투옥됐다. 의류 산업 전반에서 뜻 깊은 양보를 얻어냈다.

 

 

 

 

 

 

 

 

 

 

 

191277.

 

 

루이지애나주 그라보에서 학살사건이 일어나 4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을 입었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소속 목재노동자조합(BTW)이 그라보에서 파업을 벌이는 동안 목재 노동자 수십 명이 갤러웨이 일가가 소유한 공장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노동조합 조직자 A. L. 에머슨이 발언을 시작하는 순간 사무실에서 나온 한 남자가 그에게 총을 쐈다. 총알은 에머슨의 모자챙을 스치고 지나갔다. 15분간 총격이 이어지는 동안 300발 정도가 발사됐다. 사장들은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지만, 파업 노동자 다수는 연행되어 폭동과 살인을 비롯한 중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결과적으로는 노동조합이 대승을 거두면서 모두 무죄방면됐지만 말이다. 그해 말노동조합 총잡이였던 레더 브리치스 스미스가 자경단에게 살해됐다.

 

 

 

 

1912109.

 

 

뉴욕주 리틀폴스에 있는 피닉스 공장에서 여성이 주축을 이룬 노동자들이 주당 노동 시간을 60시간에서 54시간으로 단축하는 새로운 주 법을 고용주가 준수하도록 강제하고자 살쾡이 파업에 들어갔다. 길버츠 공장의 다른 노동자 2000명도 파업에 가세했고, 노동자들은 세계산업노동자연맹에 가입했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은 마틸다 로빈슨, 빅 빌 헤이우드 등 조직 담당자들을 파견했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의 동료 회원인 헬렌 켈러도 파업을 지지했다.

 

경찰서장은 단호하게 선언했다. ”우리는 파업과 외국인에게 대처 해야 한다. 과거에 우리는 그들을 통제했고 지금도 그들이 본분을 지키도록 할 것이다.“ 경찰서장은 노동자를 공격하고 파업 본부를 습격하도록 경찰을 보냈지만 파업 노동자들은 끝까지 버텼고 1월에 이르러 임금 삭감 없는 노동 시간 단축을 얻어냈다.

 

 

 

1912112.

 

 

항쟁 과정에서 살인이 벌어진 그라보 학살 때문에 재판을 받던 파업 목재 노동자 수십 명이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루이지애나주 그라보에 있는 한 공장 앞에 모인 목재노동조합 소속 파업 노동자들에게 목재 회사 고용주들이 발포하면서 시작된 학살은 총격전으로 확대되며 4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을 입는 결과를 낳았다. 무죄 판결 4일 뒤 공장은 화재로 전소됐다. 공식 보고서는 방화가 아닌 사고라고 결론지었다.

 

 

 

19121231.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이 조직한 뉴욕시 호텔 노동자들과 웨이터들의 파업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노동 조건이 특히 열악한 몇몇 호텔들만이 참여했다. 오후 11시가 막 지났을 때, 호텔 애스터 앞에서는 싸움도 벌어졌다. 사설 탐정과 무장 경찰 25명이 파업 중이던 웨이터 30명과 충돌했고, 웨이터들은 벽돌을 휘두르며 맞서 싸웠다. 파업은 1월에 총파업으로 확대되며 노동자들의 여러 요구가 제기됐다. 수고비를 폐지하고, 적정 임금으로 대체하라는 등의 요구였다. 고용주들로부터 이렇다 할 양보를 얻어내지 못한 채로 1월 말에 파업이 끝났지만 이후 몇 차례 더 파업은 벌어지며 임금 인상과 노동 조건 개선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고, 이때 성과는 오늘날까지도 어느 정도 이어지고는 있다.

 

 

1913, 13.

 

 

미국 세계산업노동자 연맹(워블리)으로 조직된 이주 여성들은 많은 노동계급들에 대한 요구사항을 관철하면서, 뉴욕주 리틀폴스 섬유 파업은 끝났다. 109일에 파업을 시작했으며, 임금 삭감 없이 주당 노동시간을 60시간에서, 54시간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1913, 213.

 

 

웨스트버지니아주 찰스턴에서는 광부들 파업을 진압하고자, 계엄령은 선포된 끝에, 82세 노동운동가 마더 존스는 체포됐다. 존스는 폭동을 선동하거나, 보도에 따르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자 했다. 살인을 음모한 혐의로 기소됐다. 군사법원 재판에 회부된 마더 존스는 유죄판결을 받고는 20년 징역형에 처해졌다. 웨스트버지니아에서든, 미국, 어디서든 같은 일을 했스비다. 감옥에서 나오면 똑같은 일을 하겠다고 말했으며, 존스는 85일 복역한 뒤 사면 조치를 받고는 석방됐다. 그러나 감옥에서 폐렴을 얻었다.

 

 

 

1913, 215.

 

 

오하이오주, 애크런에서는 세계산업노동연맹으로부터 조직한 고무 노동 파업 참가자는 3500명으로 늘어났다. 같은 달 초. 대부분은 비조합원이던 파이어스톤 타이어 공장 노동자 300명은 파업에도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세계산업노동연맹에 의지하고는, 연맹은 여러 기업에서 최대 2만 명까지 파업에 합류하도록 도왔다. 경찰 폭압에도 직면한 파업은 실질적 양보를 얻어내지도 못한 채로 몇 주 뒤 끝났다. 그러나 20년 안에, 애크런에서는 고무 노동자들은 굳건하게 조직화됐으며, 점거 파업으로는 대대적인 성과를 얻어냈다.

 

1913, 514.

 

 

필라델피아, 부두 노동자들은 파업에도 들어갔다. 파업 노동자, 4000명 가운데 절반 가량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었다. 집회를 연 파업 노동자들은 미국에서 실질적인 힘을 가진 다인종 노동조합 초기 사례 가운데 하나로도 손꼽히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에도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2주 뒤 노동자들은 파업에서 승리했다.

 

 

1913, 528.

 

 

필라델피아, 부두 노동자는 수천 명은 2주간 파업으로 임금 인상, 노동 조합에 대한 인정을 얻어냈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 8지부로 조직한 노동자들 지도자로는 흑인 부두 노종자, 벤 플레처였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일랜드계 미국인, 동유럽 이민자, 기타 종족 집단을 두루 포괄한 8지부는 제1차 세계대전 시대, 미국에서 인종·민족으로 매우 통합한 노동 조합 지부였다. 8지부로는 고용주, 정부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무릅쓰고는 10년 가까이나 부두를 지배했을 만큼, 세계산업노동자연맹에서 손꼽히게 탄탄한 지부였다.

 

 

19131224.

 

 

미시간주 캘류멧에서 이탈리안홀 참사, 일명 1913년 학살이라고 알려진 비극이 벌어졌다. 7월부터 파업 중이던 구리 광부 부인들은 이탈리안홀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다. 그 후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밤이 끝날 무렵 광부둘의 자녀 59명을 포함한 73명은 사망했다. 혼잡한 건물에서 앞다퉈 도망치다가 계단에서 깔려 죽은 것이었다. 하원 소위원회에서 증언한 목격자 8명은 시민 연맹배지를 단 남성은 불이야라고 외치자 사람들은 우르르 계단으로 몰려갔다고 설명했다. 시민 연맹은 파업을 깨뜨리고자 고용주들과 협력하는 반노조 자경단이었다.

 

 

1914, 420.

 

 

콜로라도주, 러들로에서 군대는 파업하던 광부들, 가족들도 사는 천막촌에다 기관총으로 사격을 개시했다. 광부, 12000명은 전미광산노동조합(UMWA) 활동가 한 명을 살해한 뒤로부터 지난해 9월부터, 록펠러 가문으로부터 소유한 콜로라도 연료 제철사(CF&I)에도 맞서 파업을 벌였다. 광부들은 작업장 안전 개선, 회사 전표라는 회사 상점에서만 사용하거나, 현금화할 수 있는 상품권 대신, 현금으로 지급하도록 임금을 요구했다.

 

 

록펠러 가문은 파업 광부, 가족들을 내쫓자 사람들은 집단적인 천막 도시를 만들었고, 광부 부인들도 운영을 도왔다. 회사 측 깡패들은 파업 광부들을 괴롭히고는 이따금 천막촌 옆을 달리면서, 기관총을 쏴대면서 천막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한 과정에서, 노동자, 노동자 자녀들은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마침내 주 방위군은 파업 천막촌을 전부 철거하라는 명령을 받고는, 420, 아침, 러들로에 있는 최대 규모 천막촌을 공격했다. 군대는 노동자, 가족들도 거주하는 천막에다 기관총을 쏘았으며, 노동자들도 대응 사격을 하긴 했다. 천막촌, 주요한 조직자, 루이스 티카스는 주 방위군을 책임지는 장교를 찾아가서는 휴전을 교섭하고자 했었찌만, 몰매를 맞고는 땅에 쓰러뜨린 등 뒤에다 여러 발, 총을 맞아 사망했다. 같은 날, , 군대는 천막촌에다 진입해서는 불을 질렀고, 아이 11, 여성 2명은 사망했고, 교전 과정에서는 추가로 13명은 사망했다. 매우 어린 희생자로 엘비라 밸디즈는 불과 태어난 지 3개월이었다.

 

 

전국, 각지에서도 학상에 항의하는 시위도 벌어졌지만, 콜로라도연료제철사 노동자들은 패배했고, 뒤로도 많은 사람들을 해고했다. 같은 자리로는 비조합원 광부들로 대체했다. 파업 과정에서도 총 66명을 사망하게 하도록 했다. 주 방위군, 회사 깡패들 가운데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다.

 

 

1915, 119.

 

 

미국, 뉴저지에서는 비료 공장 사장들에게 돈 받은 보안관보들은 비무장 파업 노동자들에게 발포해서 2명은 사망하고, 18명은 부상 입은 루스벨트 학살도 벌어졌다. 20퍼센트 임금 삭감을 되돌리고자 싸웠다. 사망자로는 28, 알렉산드로 테시토레, 38, 컬먼 버치였다. 파업을 깨고자, 고용된 보안관보들은 흥신소에서 총잡이를 고용했다. 살인에도 노동자들은 굳게 버텼으며, 임금 삭감을 뒤집는 데 성공했다. 미국 노동자 학살 사건 가운데, 이례적으로, 다수 보안관보 체포됐다. 9명은 뒤로부터 살인 유죄 판결을 받거나 2년에서 10년 징역형을 살았다.

 

1915, 927.

 

 

미국연합의류노동조합(ACWA)이 시카고 의류 노동자 5000명의 파업을 소집하면서 임금 인상,

 

노동 시간 단축, 흑표 폐지 등을 요구했다. 고용주들은 파업에 대한 보복으로 다수의 경찰을 동원하고는 파업 노동자 수백 명을 해고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25000명의 파업을 조직하기로 대응했고, 분쟁은 몇 달 간 지속됐다.

 

 

 

 

1915, 1119.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조합원이자 작곡가인 스웨덴계 미국인 조 힐이 식품점 주인과 아들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총살형을 당했다. 힐은 두 사람을 살해할 동기가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범죄에 연류됐다는 직접적인 증거도 없었다. 대다수 사학자들은 그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을 거라고 본다. 재판 과정에서 그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조합원이라는 사실이 자주 거론됐다. 그는 평생 동안 <노동조합이 힘이다>, <케이시 존스 노동조합 파업 파괴자>, <목사와 노예>, 등 수 많은 곡을 만들었다. 그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지도자 빅 빌 헤이우드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안녕 빌. 나는 충실한 반역자로 죽습니다. 애도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을 조직하십시오.”

 

 

 

1916, 415.

 

 

세계산업노동자연맹에서 발행한 신문은 콜로라드주, 덴버에서 가사노동조합을 결성했다고 발표했다. 조합 활동가, 제인 스트리트는 1917, 오클라호마주 털사, 다른 가사노동자 조직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들은 어떻게 해서 조직을 만들었고, 임금, 노동 조건 향상을 위한 행동에도 나섰는지를 말해줬다.

 

 

20달러에서 30달러로 임금을 올리고자 한다면, 여성들 10여 명은 구인 광고를 보고는 30달러를 요구하거나, 광고를 낸 여성이 임금을 올리겠다는 제안에도 함부로 가지말고는 나중에 와서 말하자고 하면, 임금뿐만 아니라 노동 시간까지 조정할 수 있고, 업무도 쉬워진다고 했다.

 

1916, 115.

 

 

워싱턴주 시애틀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조합원 300여 명이 파업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고자 증기척 2척을 타고 에버렛에 온 뒤 최소한 5명의 조합원이 경찰과 회사 쪽 깡패들에게 살해 당했다. 조합원 200여 명을 실은 베로나호 한 척만이 에버렛의 부두에 도착했는데, 그들을 기다린 것은 경찰과 반노동조합 자경단원 200여 명이었다. 보안관 돈 맥레가 누가 지도자냐고 묻자 선상에 있던 노동자들은 우리 모두가 지도자요라고 대꾸했다. 잠시 뒤 노동조합과 무관한 승객과 선원들도 타고 있던 배에 격렬한 총격이 가해졌다. 혼란한 와중에 증기선은 방향을 돌려 다시 시애틀로 향했고 또 다른 증기선 칼리스타호에도 시애틀로 배를 돌리라고 조언했다. 시애틀에 도착하자마자 워블리 74명이 체포되어 재판에도 회부됐다. 6개월 뒤에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고, 노동조합에게 뜻 깊은 승리였다.

 

 

 

1917, 128.

 

 

미국에서 일하던 17, 멕시코 하녀 카르멜리타 토레스는 국경에서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행해진 강제 휘발유 목욕을 거부하고는, 다른 전차 승객 30명을 설득해서 같이 항의했다. 토레스 항의로는 목욕 폭동 사태로 확산됐다. 토레스는 매일 멕시코, 후아레스, 미국, 엘패소 사이 국경을 넘나드는 많은 노동자 가운데 하나였다. 공중보건이라는 미명 아래, 멕시코 노동자들도 걸핏하면,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다. 노동자들은 발가벗고는 유독한 휘발유 목욕을 하고는, 옷가지도 증기로 소독해야만 했다. 절차를 내세운 목적으로는 발진티푸스를 퍼뜨릴 수 있는 이를 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경을 오가는 모든 사람들이 아닌 멕시코 노동계급에게만 적용됐다. 휘발유는 독성 뿐만 아니라 치명적인 화재 위험도 있었다. 엘패소 교도소에서는 휘발유 목욕을 하던 한 무리 죄수들도 화재 사고로 사망했으며, 미국 보건 노동자들은 벌거벗은 멕시코 여성들을 몰래 촬영하기도 했다. 관행에 대한 분노는 폭발했으며, 토레스는 몇 시간 만에 여성, 대다수인 수천 명 시위대를 집결했다. 시위대는 엘패소로 들어가는 모든 교통, 전차를 봉쇄했다. 이민국 관리들도 해산을 시도하자, 시위대는 돌멩이, 병을 던졌으며, 폭동은 군인들로부터 진압했으며, 토레스도 체포되자 이내 시위는 잠잠해졌다. 멕시코 노동자들을 휘발유, 나중에는 DDT, 치클론B 같은 유독성 화학물질로 목욕하게 하고는 증기를 쐬게 하던 관행으로는 1950년대까지 계속됐다. 국경에서 치클론B를 사용하는 걸 본 나치 독일, 과학자들은 1930년대 말 화합물을 국경, 강제수용소에서 이를 잡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홀로코스트에서 수백만 명을 절멸하는 데 사용했다.

 

1917712.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소속으로 파업을 벌인 구리 광산 노동자 1000여 명이 무장 자경단으로부터 에리조나주 비스비에서 뉴멕시코주로 무단 추방됐다.

 

 

 

 

 

 

 

 

 

 

191979.

 

 

펜실베이니아주 앨런타운 바텐더들이 조만간 도입될 예정인 금주법이 야기할 참화를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파업에 들어갔다. 금주법을 저지하고자 파업 행동은 맥주가 없으면 노동도 없다는 구호 아래 노동계급 수십만 명 행동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실제 파업은 바텐더들의 파업뿐이었다.

191781.

 

 

몬태나주 뷰트에서 광부 파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체로키 혼혈 조직자인

 

프랭크 리틀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리틀은 애너콘다광업사를 비롯한 광산 소유주들에 맞서

 

구리 광부 17000명이 벌이는 파업을 지원하과 애리조나에서 몬태나로 달려간 인물이었다.

 

현지 언론에 그를 향한 협박장이 실렸고, 곧이어 복면을 쓴 남자 6명이 하숙집에 있던 리틀을 납치해 차량 뒤에 묶고 끌고 가서는 두들겨 팬 뒤 철도 교량 위에 목매달았다.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애너콘다가 살인자들을 고용했다고 본다. 리틀의 장례식에는 6800명이 참석했다.

 

 

 

 

1919826.

 

 

의류 노동자 출신이자 전미광산노동조합 조직가 페니 셀린스가 펜실베이니아에서 탄광 파업이 벌어지는 가운데 회사 측 깡패들과 보안관보들에게 살해당했다. 한 광부가 구타당하던 순간에

 

개입하려다가 총에 맞았다. 살인자들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191994.

 

 

웨스트버지니아주 로건 카운티에 위치한 캐너와 탄전의 광산 경비원들이 여성과 아이들을 구타하고 살해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광부 4000명이 무기를 집어들고 행진을 벌였다. 주지사 존 J. 콘웰이 군대를 투입하겠다고 위협하는 한편 광부들의 고충을 조사하겠다고 약속하면서 행진은 중단됐다.

 

 

191795.

 

 

미국 보안관들이 사회당과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사무실, 그리고 여러 주의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지부 20곳을 불시에 단속하면서 급진적 노동자들을 대대적으로 연행했다.

 

 

19171114.

 

 

버지니아주 오코콴 강제 노역소에서 테러의 밤을 시작했다. 전국여성당(NWP) 당원이 주축을 이룬 한 무리의 여성들이 같은 날 백악관 앞에서 여성 투표권을 지지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된 상태였다. 교도관들은 구금 상태이던 여성들을 고문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자정 직후로는 1115일 참정권 수감자 33명이 잔인하게 구타와 학대를 당했다.

 

 

 

1919, 27.

 

 

뉴저지주, 에식스에서는 75000명 조합원을 대표하는 건설노동조합 활동가들은 예정대로 71, 주류 판매 금지가 발효될 경우 파업을 벌이기로 의결했다. 이틀 뒤, 뉴욕시 노동자, 20만 명도 파업을 의결했으며, 뒤로는 2주 간 15만 명도 추가로 투표를 진행할거라고 보도했다. 로스앤젤레스, 신시내티,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세인트루이스, 캔자스시티, 밀워키 등 여러 도시 노동조합 지부에서도 뉴욕 노동조합들에게 응원 편지를 보냈다. 운동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은 맥주 없이는 노동 없다라는 문구를 담긴 배지를 착용했다. 그러나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다음 달 파업 결정을 번복하면서, 파업을 두고는, 우스꽝스럽다고 이유를 밝혔다.

 

 

 

1919, 328.

 

 

미국, 아칸소주는 다른 다수 주들과 마찬가지로 무정부주의, 공산주의를 금지하는 법률을 도입했다. 무정부와 볼셰비키주의를 분명하게 정의해서 처벌하도록 하는 법은 아칸소주, 미합중국 정부를 전복하려는 시도이고 정부를 전복하려고 의도하는 깃발 등을 내거는 행위를 아예 금지했다. 법을 위반하면, 최대 1000달러 벌금, 최고 6개월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1919930.

 

 

아칸소에서 미국 역사상 최악의 인종 폭력 사태로 손꼽히는 일레인 학살이 벌어졌다. 백인 재식기업 농장주에게 고용된 소작농들이 주축을 이룬 흑인 노동자 약 100명은 미국진보농민가내노동조합(PFHUA) 회의에 참석해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자 조직을 이루려고 했다. 노동조합은 공격에 대비해서 회의가 열리는 교회 앞에 무장 경비원을 배치했다. 사건이 발발한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총격전이 벌어졌고, 백인 보안관보가 부상을 입었고, 백인 철도 경비원 한 명이 사망했다. 곧이어 천 명에 이르는 백인 인종주의자들이 시내로 몰려와서 흑인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군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수백 명을 임시 울타리에 가둔 채 많은 이를 고문했다. 흑인 노동자들은 백인 고용주에게 심문을 받고 풀려날 때까지 갇혀 있었다. 당국은 학살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122명을 여러 범죄 혐의로 기소해 12명에게 신속하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전기의자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을 섣고받은 이들은 나중에 항소심에서 감형됐지만 흑인 27명은 끝내 징역형을 받았고 그중 일부는 형기가 상당히 길었다. 정확한 희생자 수는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살해 당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100명에서 수백 명에 이른다고 추정된다. 백인 가해자들 가운데 일부는 고문에 참여했다고 인정했으나 학살을 저지른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어떤 범죄 혐의로도 기소되지는 않았다.

 

 

19191030.

 

 

펜실베이니아시각장애인노동회관(PWHBM)에 사는 주민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다음 주에 파업에 들어가겠다고 경고했다. 시각 장애인들은 빗자루, 거품기, 카펫 등 제품을 만들었는데, 회관이 임금을 올려주지 않으면서 집세를 인상한 상태였다. 시각 장애인들은 노동 조합을 결성하고, 미국노동총연맹에 가입했다. 고용주는 <뉴욕타임즈>와 인터뷰에서 시각 장애인들이 일반인들처럼 파업 열병에 걸렸다고 말했다.

 

19191122.

 

 

루이지애나주 도시 보걸루사에서 노동자 학살이 벌어졌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조직가 솔 다쿠스가 그레이트서던목재사의 대리인들에게 위협을 받자 미국노동총연맹의 지역 대표를 포함한 백인 노동조합원들이 그를 옹호하고 나섰다. 그중 4명이 인종주의자 준군사조직에게 살해됐다.

 

 

 

 

 

 

1920, 12.

 

 

미국에서는 2차 파머 단속도 시작됐다. 단속으로, 미국 법무부는 외국 태생 노동자, 급진적 좌파, 무정부주의자들을 잡아서 국외로 추방하고자 했다. 3000명에서 1만 명으로 잡혀서 재판 없이 구금됐으며, 대부분은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다수는 기소 없이 풀려났지만, 500여 명 외국인들은 국외로 추방됐다.

 

 

1921, 531.

 

 

흑인 남성, 백인 여성을 공격했다는 헛소문도 퍼지면서부터, 미국 역사상 최악 인종 폭력 사태로는 털사 학살도 벌어졌다. 300명은 사망했다. <털사 트리뷴>, 1면에서는 <엘리베이터에서 여자를 덮친 검둥이 체포>라는 기사를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뒷면에는, <오늘 밤 검둥이를 린치하러 갑시다>라는 사설을 게재했다.

 

 

분노에 사로잡힌 지역 백인들은 흑인 동네로는 그린우드를 습격했다. 당시, 미국에서 매우 번영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동네였던 그린우드는 흔히 블랙 월스트리트라고도 불렸다. 폭도들을

 

지원하는 민간 비행기들은 소이탄을 떨어뜨리고는 흑인 주민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35, 블록 전체 잿더미로 변하며, 수백 명은 사망하고는 최대 1만 명을 집을 잃었다. 글을 쓰는 지금, 2020년 초까지도 생존자들은 정의 실현, 피해 보상을 기다리고 있다.

 

 

1921825.

 

 

블레어마운틴 전투가 시작됐다. 남북 전쟁 이래 미국에서 벌어진 최대 규모 무장 반란이었다.

 

웰치와 샤플스에서 광부들과 지지자들이 살해당한 뒤 19218월 말에서 9월 초에 이르는 5일간, 웨스트버지니아주 로건카운티 석탄 광부 1만 명이 무장한 파업파괴자 및 보안관보들과

 

충돌했다. 연방군과 공군까지 투입된 압도적 화력을 맞닥뜨린 광부들은 결국 항복하거나 집으로 돌아갔다.

 

 

 

 

 

 

1924, 24.

 

 

미국 메인주 그란빌에서는 KKK는 세계산업노동연맹 활동가들을 위협한 사태는 일어난 뒤로 소속 조합원 약 175명은 거리를 순찰하던 가운데, KKK와 충돌했다. 현지 조합원 밥 피스는 IWW도 가만 있지 않겠다고 큰 소리쳤다. 피스는 KKK는 세계산업노동연맹으로부터 활동하는 목재 산업으로부터 뒷돈까지 받았다고 의심했다.

 

 

19241210.

 

 

시카고 군인 출신 우편 노동자 헨리 거버는 미국 최초 동성애자 권리 단체인 인권 협회를 창설했다. 몇 달 뒤 경찰은 거버를 비롯한 주요 회원들을 체포되면서 단체는 사라졌다.

 

 

 

 

1926, 38.

 

 

뉴욕시에서 국제모피가죽노동조합 소속으로 주축을 이룬 여성 파업 노동자 약 600명은 맨해튼을 관통해서 행진하던 가운데 경찰에게 구타당했다. 경찰은 파업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모욕하고, 우우 소리를 내며 야유를 보내서 대응한 거라 주장했다. <뉴욕타임스>는 경찰은 노동자들을 해산하고자, 거리낌 없이 곤봉을 사용했다고 보도했다. 노동자들은 굽히지 않았고, 18주 동안 파업을 이어갔으고, 고용주 협회로는 10% 임금 인상, 540시간 노동에도 동의했다.

 

 

 

1929, 429.

 

 

미국 흑인 건설 노동자, 로드니 킹은 신호 위반을 이유로 경찰들에게 구타당하는 모습을 촬영한 영상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관들을 무죄 방면하자, 로스앤젤레스 곳곳에서도 폭동도 일어났다. 도시 전역에서는 벌어진 방화, 약탈로부터 약 12000억 원, 10억 달러 이상 재산 손괴도 일어난 사건으로, 19960년대 뒤로부터 일어난 최대 규모로 도시 폭동이었다.

 

192983.

 

 

로스앤젤레스 외곽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운영하던 어린이 여름캠프가 불시에 단속을 받아 젊은 여성 6명과 남성 1명이 체포됐다. 단속을 수행한 건 지방검사가 지휘하는 미국재향군인회였다. 체포된 이들 중 하나인 19세 공산주의자 예타 스트롬버그와 나머지 여성 5명은 후에 적기를 소지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투옥됐다. 스트롬버그는 1년에서 10년 징역형을 받았고, 다른 피고인들은 샌퀜틴 주립교도소에서 6개월에서 5년 징역형을 받았다. 유죄 판결을 받은 1차대전 참전 군인 이사도어 버코위츠는 판결 뒤 목 매달아 자살했다. 캘리포니아는 1919년에 붉은색 사회주의 깃발이나 검은색 아나키즘 깃발의 게양을 금지한 24개 주 중 하나였다. 당시 이는 종종 10년형 이상의 형벌을 받을 수도 있는 범죄였다. 스트롬버그는 사건을 대법원까지 끌고 갔고, 1931년 대법원은 이러한 금지법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수정헌법 제1조에 위배된다며 원심 판결을 뒤집었다.

 

 

 

1931, 226.

 

 

로스앤젤레스, 일부로는 군복을 입은 이민국 공무원들로 무장한 채, 맥시코계 사람들로 밀집한 동네에 자리한 라플라시타 공원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분증을 제시하라고 요구했으며,

 

수십 명을 연행하고는 다수를 국외로 추방하도록 했다. 단속은 멕시코인 송환(Mexican Repatration)이라고 알려진 조치 일환이었다. 조치로부터 18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은 불법적인 단속으로부터 추방됐다. 대부분은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자란 미국 시민들이었다. 앞서 1929,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대공황으로 한창인 와중에, 외국인(Other), 멕시코인, 멕시코계 미국 시민으로 간주된 사람들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백인 노동자를 위한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결정했다. 같은 관행으로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이던, 1936년까지도 계속됐으며, 노동조합들마저 지지했다.

 

 

 

1932, 126.

 

 

유대인, 세입자는 주축을 이룬 뉴욕 군중, 4000명은 세입자 17명을 퇴거하려고 한 경찰 예비대를 공격했다. 시위대를 이끈 여성들은 지붕 위에서 확성기로 방향을 지휘하면서부터 경찰을 향해 각종 물건을 던졌다.

 

 

 

1932, 37.

 

 

디트로이트, 경찰과 포드 경비원들은 미국 공산당 실업자평의회로 조직한 시위에도 발포해서 실직 노동자 4명은 사망하고, 60명은 부상을 입는 포드기아행진 학살사건도 벌어졌다.

 

1932728.

 

 

미국의 1차대전 참전군인들이 약속한 대로 전시 보너스를 지급하라고 정부에 요구하면서 행진하자 정부가 탱크와 총검, 최루가스, 군도로 무장한 군대를 보내 참전 군인들과 가족들을 진압했다. 진압 과정에서 3명이 사망했다. 보너스는 1945년에 지급될 예정됐지만, 대공황이 덮쳐 많은 참전 군인이 가난에 빠지자 이들은 조기 지급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흑인과 백인을 망라한 최대 25000명의 참전군인이 보너스 군대를 결성해 워싱턴D.C에 천막을 세웠다. 조지 패튼 소령은 총검을 휘둘러서 다수의 시위자들을 죽여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라고 부대에 명령했다. 시위대에는 전쟁 당시 그의 목숨을 구해준 장병도 있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은 패튼의 작전을 지휘한 이들이다. 이 작전으로 참전군인 2명과 생후 11개월 된 갓난아이가 사망하고, 8세 소년은 한쪽 눈이 멀었으며, 1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1934, 516.

 

 

팀스터 노동조합 소속, 미니애폴리스, 트럭 운전사들은 파업에 들어가면서부터 도시 거의 모든 상업 운송을 마비했다. 3개월 넘게 쟁의를 지속한 끝에, 노동자들에 대한 요구안들도 대부분 수용해서, 미니애폴리스 노동자 조직은 더욱 커지는 길도 열렸다. 경찰, 사설 경비원들에 대한 보호를 받는 파업 파괴자, 파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몇 달 간 격렬한 싸움도 벌어진 파업은 20세기 미국 역사에서는 중요한 노동 쟁의였다.

 

193475.

 

 

샌프란시스코 경찰이 파업 중이던 부두 노동자 2명과 행인 1명을 살해하고 115명을 구타해 병원에 입원시키면서 피의 목요일 사건이 벌어졌다. 노동자들은 항만 임시고용 방식에 항의하며 파업을 벌이던 중이었다. 2주 만에 도시 곳곳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뜻을 어기고는 총파업에 들어갔지만, 미국노동총연맹(AFL)이 인정하지 않으면서 파업을 종식했다. 그러나 부두 노동자들은 노사 공동으로 운영하는 직업소개소를 설립하는 성과를 얻었다.

 

193493.

 

 

노스캐롤라이나 섬유 노동자 65000명이 노동 시간 단축에 따른 임금삭감에 항의하는 앨라배마 노동자 파업에 합류했다. 앨라배마 노동자들은 지난 7월 고용주들이 노동시간을 주당 40시간에서 30시간으로 줄이고 임금을 25% 삭감하자 파업에 나섰다. 이들은 처음에 외로운 싸움을 벌였는데, 이는 정부가 현황을 검토하고 섬유노동조합(UTW)에 노사관계위원회 한자리를 내주는 것을 대가로 노조가 총파업 위협을 철회했기 때문이었다. 노스캐롤라이나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이면서 가동 중인 공장을 찾아가 파업을 확산시켰다. 이틀 만에 325000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그러자 당국이 지역 곳곳에다 계엄령을 선포했고, 경찰과 주 방위군이 총검을 휘둘러 수 많은 노동자를 살해했다. 섬유노동조합은 파업을 철회하면서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고용주들로부터 어떤 양보도 얻어내지 못한 말뿐인 승리였다.

 

 

 

1934924.

 

 

한 달 간 이어진 캘리포니아주 살리나스에서의 상추 파업이 노동자들의 요구가 관철되기로 끝이 났다. 미국 필리핀노동자연맹(FLU) 소속 농업 노동자들이 벌인 파업은 인종주의자 폭도와 무장 자경단의 대대적인 탄압에 직면하면서도 끝까지 이어지며 임금 인상과 노동조합에 대한 인정을 얻어냈다.

 

 

 

 

1936, 629.

 

 

뉴멕시코주 갤럽에서 파업이 벌어진 뒤로, 헤수스 파야레스를 비롯한 멕시코계 미국인 광산 노동자 100명은 위험한 외국인으로 규정되어 추방당했다. 파야레스는 광부 8000명을 에스파냐어권노동자연맹(LOHE)로 조직하는 데 조력한 인물이었다.

 

 

갤럽에서 파업은 1935, 에스파냐어권노동자연맹 조합원을 비롯한 광부들이 벌였다. 파업을 깨뜨리고자, 6개월 동안이나 계엄령을 선포했다. 광부, 광부 가족 수백 명은 집에서 쫓겨났고,

 

광부 2명은 경찰 손에 사망했고, 파야레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연행해갔다. 수십 명은 뒤로 미국으로 추방됐다.

 

19361230.

 

 

미국 미시간주 플린트에 위치한 제너럴모터스 자동차 공장에서는 노동조합 탈퇴 지시를 거부한 검사관 3명을 전보 발령한 데 항의하는 노동자 50명이 살쾡이 파업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경영진이 생산 시설을 다른 곳으로 이전할 준비를 하고 있음을 눈치챘고, 대부분 조합에 속하지 않은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는 법원 명령과 경비원과 경찰의 폭력 진압에 맞서며, 2월까지 버텼다. 회사는 결국 굴복하고, 노동조합을 인정하면서 노동자와 경영진 사이 힘의 균형은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파업 노동자들의 전투적인 기상 및 로스코 밴 잰트와 J. D. 돗슨 같은 흑인 노동자들의 참가에도 불구하고, 전미자동차노동조합이 체결한 협약에 따라 짐크로법의 엄격한 작업장 인종 분리는 유지됐다.

 

 

 

 

1937, 216.

 

 

폴란드계 여성으로 주축을 이룬 디트로이트 시가 담배, 제조공 한 무리는 10퍼센트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부터 연좌 파업에도 들어갔다. 도시에서 시가 산업계 전반에서는 전투적인 연좌 파업 물결을 불러일어나도록 했다.

 

 

1937, 56.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I.N. 본 회사에서는 담배 수확을 하는 흑인 여성 노동자 400명은 산업 전반에서 소요 물결로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남부흑인청년회(SNYC) 도움을 받은 여성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면서부터 일손을 놓았고, 백인 섬유 노동자들도 감시선에 섰다. 48시간 뒤로 임금 인상, 하루 최대 8시간 노동, 5일 노동, 노동 조합 인정 등을 얻어냈다.

 

1937, 619.

 

 

오하이오주, 영스타운에서 리퍼블릭 철강, 파업 노동자들을 지지하고자, 노동자 부인, 자녀들은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16명을 살해했고, 300명 가까이나 부상을 입혔다. 여성날 학살사건도 벌어졌다. 노동조합 지지자, 1000명은 해고된 데 항의한 파업을 진행하던 가운데였다.

 

파업 노동자, 부인들은 남편들을 지지하고자, 여성날 행사를 조직했다. 여성들도 시위에 나서자, 분개한 경찰서장은 해산을 명령했다. 거부한 여성들은 경찰들에게 침 뱉고, 욕설을 퍼붓자, 경찰은 여성, 어린이, 갓난아기까지 있던 군중들을 향해 최루탄을 쐈다. 격분한 노동자들은 가족들을 지키고자, 현장으로 달려갔고, 순간 경찰 발포로부터, 수백 명, 사상자는 나타났다. 대부분은 도망치다, 등에 총을 맞았다.

 

1938, 131.

 

 

텍사스, 서던피칸가공사에서는 피칸 껍데기를 벗기는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에도 항의하고자 파업을 벌였다. 선동가, 에마 테나유카는 지휘하는 가운데, 라틴계 여성으로부터 주축을 이룬 노동자들은 한 달을 버틴 끝에 승리를 거뒀다.

 

193881.

 

 

하와이 경찰이 파업 중이던 비무장 부두 노동자 무리에 발포하면서 힐로 학살이 벌어졌다.

 

파업은 각기 다른 노동 조합과 상이한 종족 집단에 속한 부두 노동자들이 단결해 미국 서부 해안의 항만 노동자들과 함께 동일 임금 지급을 요구하며 벌였다. 81, 항구에 모인 노동자 200명은 증기선 입항에 항의하며 시위했다. 진압에 나선 경찰은 노동자를 향해 발포했고 4분의 1이 부상을 입었다.

 

1942, 58.

 

 

흑인 손님들을 노골적으로 차별한 시카고 식당, 잭스프래트커피하우스에서 흑인, 백인, 젊은이들 한 무리는 앉아 있기 운동을 벌였다. 식당은 경찰을 불렀지만, 경찰은 점거자들을 끌어내리기를 거부했다. 법을 어긴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당은 인종 차별 방침을 철회했다. 지난 해, 설립한 인종평등회의(CORE)에서 주도한 점거 농성이었다.

 

 

 

 

 

1943, 63.

 

 

미국, 해군, 백인 수병 50여 명은 부대 본부에서 나와 로스앤젤레스, 알파인스트리트로 몰려가서는 주트 슈트 차림, 1930-1940년대 미국에서 반항적 하위문화를 상징하고, 멕시코계, 흑인 등 소수 종족 사이에서 유행한 옷차림, 통 넓은 바지, 어깨에 두툼한 패드를 넣은 헐렁한 상의는 특징이다. 멕시코계 미국인 청소년들을 공격했다. 수병들은 12-13세 소년들 한 무리를 몽둥이로 두들겨 패고는 옷 벗긴 뒤, 무더기로 쌓아놓고는 불 질렀다. 폭도들은 곧바로 현지 헌병대에게도 구금됐지만, 해군 고위 장교는 도착하자, 전부 기소 없이 풀려났다.

 

 

이튿날, 멕시코계 젊은이들은 부대 본부 앞으로 차를 몰며, 경비병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밤 되자 백인 수병들은 다시 외출을 나왔다. 멕시코계 미국인 지역인 이스트로스앤젤레스로 가서는 거리, 술집, 극장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했다.

 

 

뒤로부터 며칠간 다른 많은 병사는 공격에도 가세했다. 언론은 자경 단원들을 치켜세우고는 경찰들은 폭행범들이 아닌 피해자들을 연행해갔다. 로스앤젤레스 시의회는 주트수트 착용을 금지하려고까지 했다. 멕시코 여성 청소년을 가리키는 속어, 파추카라고 불리던 여성들 모임으로는, 슬릭칙스, 블랙위도스를 포함한 흑인, 멕시코계 주트슈터, 주트슈트를 즐겨 입는 사람들이 한데 뭉쳐 반격에도 나섰다. 로스앤젤레스, 충돌로부터 서서히 잦아들자, 뉴욕, 필라델피아, 디트로이트에서 충돌도 벌어졌다. 디트로이트에서 충돌로는 흑인 주트슈트들은 습격을 당한 뒤로 발발했다. 몇 주 만에, 디트로이트에서는 도시 역사상 최악 인종 폭동도 폭발했다.

 

주트슈트는 흑인, 멕시코계 노동계급 자부심, 저항, 반란 정신 상징이었다.

 

 

 

 

1944, 422.

 

 

하워드 대학교, 학생들로부터 주축을 이룬 200, 워싱턴 D.C에 자리한 인종 분리 레스토랑이던 톰슨스에서 앉아 있기 시위를 벌였다. 워싱턴 D.C는 인종 분리를 합법화한 각종 입법, 짐 크로 법을 시행하지는 않았어도, 관습적으로도, 인종 분리가 있는 도시였다. 매출도 대폭 줄어들자, 톰슨스 본사는 아프리카계 흑인도, 손님으로 받으라고 지시했다. 연방 교부금마저 끊기기를 우려한 대학은 뒤로부터 학생들에게 직접 행동 중단을 요구했다. 톰슨스는 곧바로 다시 인종 분리를 시행했다. 직접 행동, 핵심 조직자 가운데 한 명으로는 폴리 머리는 스스로를 반은 여성이고, 반은 남성으로 인식한 젊은 흑인 활동가, 여성주의(페미니스트), 유의미한 낭만적 관계를 같은 여성만 맺었다.

 

 

워싱턴 D.C1953년에 이르러서야, 식당에서도, 인종 분리를 법으로도 금지했다.

 

 

 

1945, 411.

 

 

미국은 접근하는 가운데, 레지스탕스 운동에도 나선 재소자들은 독일,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를 장악했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따르면, 연합군들은 강제 수용소를 접수했을 때, 동성애 때문에 구금된 몇 사람은 풀려나지도 않은 채로 동성애 혐오적이던 나치 형법에 따라 받은 형기를 모두 채우기를 요구받았다.

 

 

성소수자(LGBT+) 수천 명은 강제 수용소에도 갇혔고, 대부분 옷에는 분홍색 삼각형을 붙여야만 했다. 다수는 생체 실험을 당하거나, 거세당하고, 살해됐다.

 

 

해방, 뒤로부터 미군은 독일 점령 안내서로부터 대다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강제 수용소에서도 풀어줘야만 한다면서도 아직 징역형기가 남은 번죄자는 민간 교도소로 이송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게이, 양성애자, 남성, 성전환(트랜스) 여성들은 나치스로부터 강화한 독일 형법, 175항에 따라서 유죄 판결도 받았다. 따라서 일반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동성애는 또한 당시, 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국 법률에도 위배됐다.

 

 

다하우, 남서쪽, 란츠베르크 요새에서 구금하던 헤르만도 해방을 축하하는 대열에는 합류했다. 그러나 2주 뒤, 한 미군 감독관은 헤르만 문서집(파일)을 들고는 감방으로 찾아와서는, 동성애는 범죄이고, 당신은 여기 계속해서 있어야만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군, 점령 당국은 나치 형법 175항을 계속 유지했고, 전쟁은 끝나고도 처음 4년 간은 해마다 조항을 근거로, 1500, 정도를 체포했다. 점령 끝난 뒤로부터도 서독도 같은 조항을 유지하면서부터 5만여 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다가, 1969, 조항을 폐지했다. 한편 동독은 나치 이전 175항으로 돌아가서는 4000명 정도를 처벌하다가, 1968, 폐지했다. 성소수 사람들은 홀로코스트 피해자로도 인정받지는 못했고, 강제 수용소에서도 구금된 기간만큼 연금마저 깎이기도 했다. 대부분은 어떤 보상도 받지는 못했다.

 

1945921.

 

 

미국의 석탄 광부 20만 명이 관리직 노동자들의 단체 교섭 요구를 지지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2차대전 직후 일어난 파업 물결의 일부였다.

 

 

 

1945105.

 

 

6개월 간 이어진 무대 장식 노동자들의 파업이 켈리포니아주 버뱅크에 자리한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 정문 앞에서 유혈 폭동으로 번졌다. 파업 파괴자들이 피켓라인을 넘어 진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은 오늘날 할리우드의 검은 금요일이나 버뱅크 전투불리운다. 같은 날 저녁 경찰과 보안관보 300여 명이 현장으로 달려왔고 신고된 부상자만 40명이 넘었다. 분쟁이 일부 작용한 결과로, 정부는 1947년 노동자 조직을 깨뜨리고자 태프트 하틀리 법안을 통과시켰다.

 

1946, 523.

 

 

경찰, 300명은 복직, 노동 조합 인정을 요구하며, 파업 가운데 지자체 노동자 208명을 일제하게 연행하면서 뉴욕주, 로체스터, 역사상 최대 규모 검거 사태는 벌어졌다. 경찰들은 감시선을 지키는 노동자들 외에도 출근하는 교사 1, 근처를 지나던 배관공 1, 심지어 파업 노동자 반려견 1마리까지 연행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고, 파업은 확산하면서 일주일 뒤 승리했다.

 

 

 

 

1946123.

 

 

미국노동총연맹 142개 지부가 여성 노동자 400명이 벌이는 파업을 지지하면서 연대 파업에 들어가 10만 명이 넘게 참여한 거대한 파업 물결이 일었다. 훗날 오클랜드 총파업이라 불리게 된 행동이었다. 현장에 있던 상선 선원 스탠 위어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밤이 되자 파업 노동자들은 약국과 시장을 빼고는 모든 상점을 닫을 것을 지시했다. 술집은 문을 열어도 됐지만 맥주만 팔았고, 볼륨을 최대로 올린 주크박스를 인도에 내놓아 무료로 사용하도록 했다. 건물마다 넘버원 히트곡이 울려 퍼졌다. “총 든 마누라, 그 총 내려놓지.” 54시간 동안 이어진 파업 초반 24시간은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수 많은 남녀는 거리에서 쌍쌍으로 춤 췄다. 참가자들은 역사를 만들었고, 그 사실을 알고 즐기고 있었다.

 

 

파업 대연일 탄탄했음에도, 미국노동총연맹 노동 위원회는 125일 아침 파업을 철회했다. 파업 중인 여성들이 어떤 양보도 얻지 못했는데도, 노동자들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손을 뗐다.

 

 

1947827.

 

 

노스캐롤라이나 보퍼트 카운티 교도소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수감자 조앤 리틀이 정당방위로 백인 교도관을 살해하고 탈옥했다. 리틀은 얼음송곳을 들고 위협하며 강간을 시도하는 교도관에게서 송곳을 가로채 그를 살해했다. 탈옥한 다음 주에 경찰에게 자수한 리틀은 1급 살인죄로 기소됐다. 자동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는 죄목이었다. 로자 파크스를 비롯한 민권 운동가뿐만 아니라 여성주의자와 사형 반대 활동가들까지 많은 이가 리틀 사건을 지원했다. 리틀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성폭행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무력을 행사한 것이라는 항변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19481018.

 

 

뉴욕시 전미양조노동조합(UBW) 간부 3명이 브루클린 노동자학교에서 살쾡이 파업을 벌이던 양조 노동자들의 집회에서 발언하려다 무대 뒤에서 야유를 받았다. 앞서 조합원들은 간부들에게 파업 노동자들이 직접 만든 운영 위원회와 대화하는 데 동의하지 않으면 연설을 듣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 뉴욕시 맥주 공장 14곳 가운데 12곳에서 일하는 3000명에 가까운 노동자들은 운전사 21명이 노동 조합 승인 아래에서 해고된 데 항의하고자 5일 전부터 파업을 벌였다. 같은 시점에 이르러 맨해튼 술집 70곳에서 맥주도 동난 상태였다.

 

 

 

19481111.

 

 

뉴욕시에서 한 달 간의 살쾡이 파업을 벌인 맥주 양조장 노동자들이 충분한 상하차 시간을 보장하지 않는 운송 차량 일정을 폐기하라는 요구를 관철했다. 나머지 3000명의 파업 노동자들은 대규모 집회를 열어 같은 날 밤 자정에 파업을 끝내고는 다음 날부터 작업으로 복귀하기로 뜻을 모았다. 고용주들은 전미맥주노동조합(UBW)을 상대로 수백 만 달러의 소송을 제기했으나, 취하했다. 노조는 어쨌든 파업을 비난하고 노동자들이 작업으로 복귀하도록 명령하는 등 공작을 했기 때문이다. 노조 관리 에드워드 휼렛은 집회에서 떠들썩한 야유가 쏟아져서 두 번씩이나 연설 마이크를 넘길 수밖에는 없었다. <뉴욕타임스>국제적인 노동조합의 관리에 대한 반감이 위협적일 정도로 높아져서 순찰 경관 6명이 옆 방으로 달려 나와 그를 보호해야 했다고보도했다.

 

 

 

1950, 626.

 

 

미국, CIA는 문화 냉전, 일환으로 문화자유회의(CCF)라는 국제 예술 단체를 설립했다. 단체로는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대한 인기마저 높아지는 현상에 대응하고자, 에술을 장려하려 한 CIA 여러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추상표현주의는 같은 단체 지원을 받은 주요한 예술 운동 가운데 하나였다. 1966, CIA는 지원한다는 소식마저 폭로하자 문화자유회의는 문 닫았다.

 

 

 

 

 

1950726.

 

 

미국 지상군이 한국 민간인 100명에서 300명을 학살한 노근리 학살이 일어났다. 미군이 저지른 대규모 학살 가운데 하나다.

 

 

 

19501017.

 

 

뉴멕시코주에서 국제광산 제철 제련노동조합(IUMMSW) 소속 광부들이 엠파이어아연사에 맞서 파업에 돌입했다. 광부들이 초기에 내건 요구는 멕시코계 노동자보다 백인을 우대하는 임금 차별과 주거 분리를 철폐하자는 것이었다. 이후 광부들은 멕시코계 미국인 가정에서 실내 화장실과 온수 보일러를 설치하기를 추가로 요구했다. 회사가 반격에서 나서면서부터 파업 참가자들은 회사에서 운영하는 잡화점에서 신용 거래를 정지 당했고 파업 파괴자들이 투입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의 다른 회사에서 일하는 광부들이 피켓라인에 합세했다. 파업 8개월째로 접어들어 회사가 파업 노동자들이 피켓라인에 복귀하기를 금지하는 법원 명령을 얻어내자 회사의 법적인 전술을 우회하고자 노동자의 부인들이 피켓라인을 이뤘다. 여성들은 성차별과 경찰 폭력, 대규모 체포에도 직면했지만 탄탄하게 버텼다. 15개월 뒤 회사는 거의 모든 요구에 굴복하면서 임금과 수당을 인상하고 시내 가정에다 온수를 공급하는 데 동의했다. 파업은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고 1954년에는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도 오른 제작자와 감독으로부터 <대지의 소금>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대부분 역할을 직업 배우가 아닌 실제 노동자들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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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내용은 노동계급 세계사에서 발췌했다. 해당 저서는 <워킹클래스히스토리>라는 라디오 방송에서 청취자들을 위해 현재에도 노동 계급에게 일어나는 여러 투쟁과 탄압에 대한 역사를 소개한다. 말 그대로 아직까지도 날마다 일어나는 노동계급 투쟁사를 깊은 역사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지만, 실제로는 무정부관에 심취한 편집이나 글로만 보아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란 힘들거나, 수정된 견해들도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에 대한 계급투쟁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취지와는 동 떨어진 모순을 간직한 여성 운동이나 무정부주의에 대한 강조가 드러난다는 점과, 서사 중심으로 쓰여진다는 점에서도 문제 제기가 나올 수 있다. 따라서 사실 관계에 따른 확인은 특수하게 필요하다. 우리는 해당 저서에 대한 추천서에 나오는 인물들이 대체로는 무정부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주장들을 오랫동안 봐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많은 거리를 두고 있다. 실제로도 사상 운동에서도 심각한 오류를 가진 채로 활동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채효정, 홍명교는 해고된 노동자 운동을 많이 지지했고, 동아시아 운동사를 소개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정작 수정주의를 내세우기도 하는 매우 정치적인 사람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부르주아 운동 안에서도 지배 계급도 내세울 수 있는 사상을 지지하는, 도시민에만 국한된 시민 항쟁이라는 표기와 또 다른 성별 갈등을 조장할 수 있는 서술을 보더라도, 번역서만큼이나, 다음 저서가 본지로는 정치적으로 매우 편중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바이다. 왜냐하면 좌익 공산주의에 대한 주된 비판으로는 수정주의로 해당할 수 있는 부분들도 많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서술되는 추천사를 보더라도,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내용을 토대로 날짜 순서대로가 아니라, 국가 별로 기록해서 다시 정리해봤다. 그리고 무정부주의자 인사들도 적어둔다. 우리가 무정부주의자를 별도로 소개하는 의도를 아신다면 주의 깊게 다루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책을 또 다시 편집해서 소개하는 근거란 바로 세계사의 일부가 아니라 국제 노동 계급에 대한 역사로 정리한 서적이 그렇게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일부 내용은 수정이 아니라, 정정했다. 우리에게 계급 투쟁이란 노동 탄압이라는 장구한 역사이기도 하다.  


비판을 위한 참고 자료. 


채효정, 홍명교,

록산 던바오티스: <미국 원주민의 역사

제레미 브레처: <파업!> 

킴 켈리:언론인: <틴보그>

마이크 잭슨: 광부들을 지지하는 성소수자들 공동설립자,

보비 길레스피: 프라이멀스크림 보컬,

존 오브라이언: 스톤월 항쟁 참가자·성소수자해방전선 공동설립자

신디 밀스타인: <유토피아로 가는 길들>

워드 처칠: <말을 무기처럼 휘두르다>

사샤 릴리: <어게느트 더 그레인> 진행자

피터 라인보우: <메이데이>

댄 조자카스: <디트로이트: 나는 정말 죽기 싫다>

허브 보이드: <검은 디트로이트

안드레이 그루바치치: <자본주의 가장자리에 살다>

앨빈 글랫카우스키: SS 컬림비아글호 반란자

조지 카치아피카스: <아시아 민중봉기>

스콧 크로: <검은 깃발과 풍차>

노엄 촘스키 등


 

아메리카.

 

가이아나.


1823년 8월 18.

 

오늘날 가이아나인 당시 영국 식민지 데메라라에세퀴보에서 데메라라 노예 반란이 일어나 크레올이 주축을 이룬 노예 1만여 명이 플랜테이션 농장들을 돌아다니면서 무기를 훔치고 농장주를 감금했다일부 농장주에게는 차꼬까지 채웠다반란은 식민 군대와 무장한 민병댈로부터 진압됐다포로로 잡혔던 백인들은 반란자들에게 인도적 대우를 받았다고 보고했지만수백 명의 반란자가 끝까지 추적당해 잡혀서 처형됐고그렇지 않은 이들도 채찍질 1000대를 선고받았다반란 소식이 카리브해 전역과 잉클랜드에까지 퍼지면서 노예제 폐지운동은 급격하게 확산됐다자메이카에서 훨씬 큰 규모의 반란이 일어난 뒤 영국령 카리브해 지역의 노예제는 10년에 걸쳐 대부분 폐지됐다.

 

1917, 14.

 

가이아나 부두 노동자들은 열흘 간 파업을 했다. 1차 세계대전 여파로, 식료품 물가가 상승했지만, 임금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1939, 214.

 

불 때는 사람, 화부 10명은 짧은 조업 중단 뒤로부터 작업에 복귀한 뒤로부터, 가이아나에서 자리한 레오노라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도 일하는 삽질 작업조 노동자 80-90명은 야외 작업에서 한 구역당 9센트를 주겠다는 제안을 거부하면서 소요를 일으켰다. 노동자들은 12센트를 요구했다. 이틀 뒤 영국 경찰은 항의 시위를 벌이는 노동자들을 학살했다.

 

1964, 217.

 

가이아나, 설탕 노동자들은 설탕샌사자협회(SPA)에서 가이아나농업·일반노동조합(GAWU)을 인정하기를 요구하면서 전국적인 파업을 일어나고자 했다. 영국인으로부터 소유한 회사들은 아프리카인 대체 인력을 활용해서는 동인도계 노동자는 주축을 이루는 파업을 깨뜨리고자 했지만, 전국적으로는 인종 간 갈등만을 악화한 결과를 초래했다. 뒤로는 1년 가까이, 아시아계 노동자들은 살해 당하는 일들도 벌어지면서부터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커졌다.

   

과테말라.

 

194471. 과테말라의 독재자 호르헤 우비코가 총파업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나며 사회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됐다.

 

그레나다.


1951, 2월 19.

 

당시 영제국 일부였던 그레나다섬에서는 농업 노동자막노동자들은 임금인상그레나다육체·정신노동자연합(GMMWU)에 대한 인정을 요구했으며총파업에 들어갔다영국군은 급하게 출동하면서카리브해 지역 다른 곳에서 식민 경찰들도 달려왔으며파업을 지지하던 남녀 몇 명은 총에 맞아 사망했다폭력 진압에도 불구하고노동자들은 싸움을 멈추지는 않았으며, 5월 19일 50퍼센트 임금인상최초 유급휴가를 얻어냈다투쟁으로부터 200일 이상 일한 노동자는 연간 7유급휴가를 받았다싸움을 끝으로도, 2차 대전 뒤로카리브해 지역에서도 일어난 파업 물결은 일부였다.


1974, 27.

 

경찰, 준군사조직, 폭력에도 항의하는 전국적인 총파업은 11일부터 지속되면서, 소란스러운 시민 소요 시기는 이어진 끝에 그레나다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나콰라가.

 

1979, 416.

 

니카롸가, 혁명가, 이다니아 페르난데스는 미국 지지를 받는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 독재 정부 군대로부터 두금된 상태에서 살해됐다. 페르난데스는 정보원 밀고로도 체포된 상태였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사망하자, 많은 사람들은 저항에도 나섰고, 정권은 한 달 만에 무너졌다.

 

도미니카.

 

1522·1831·1837년 12월 25.

 

1522년 크라스마스에 오늘날의 도미니카 공화국 산토도밍고에 위치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들 디에고의 사탕수수 제식 농장에서 어느 무슬림이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다서아프리카에서 온 노예들을 포함해 사탕수수를 벨 때 쓰는 마체테로 무장한 반란자들은 식민 정착민들을 다수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 진압됐다찾아낸 시신 15구 가운데 9구는 유럽인이었다반란자 다수는 가까스로 산악 지대로 도망쳐서 타노족 사이에서 독자적인 공동체를 이뤘다. 3세기 뒤인 1831년 같은 날자메이카 노예들은 해방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노예들은 무장 반란을 일으키자 영제국은 같은 지역에서 노예제를 불법화했다다시 6년 뒤인 1837년 크리스마스에 플로리다의 세미놀 국가를 이뤘던 아프리카인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자신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미국 침략군을 물리쳤다미군은 이들이 세미놀 국가로 초기에 이뤘던 무지개 동맹을 깨부수고는 아프리카인들을 다시 노예로 삼으려고 쳐들어온 길이었다.


1937102.

 

미국이 지지하는 도미니카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아이티인 2만여 명이 희생되는 대학살이 시작됐다. 파슬리 학살이라고 알려진 사건이다.

 

19601125.

 

미국이 지지하는 도미니카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에게 반대하는 활동을 하던 세 자매, 파트리아 메르세데스 미라발 레예스, 미네르바 미라발 레예스, 안토니아 마리아 테레사 미라발 레예스는 암살 당했다. 세 자매는 파트리아가 목격한 학살 사건이 벌어진 날짜를 따 ‘614일운동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미네르바와 마리아 테레사는 투옥되어 강간을 당하고, 고문도 몇 차례 받았고, 남편들도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끈질긴 저항에 트루히요는 한꺼번에 다 죽이기로 결정했다. 1960518, 미네르바와 마리아 테레사는 남편들과 함께 도미니카 국가 안보를 훼손한 혐의로 유죄 판결에 3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이상한 과정 속에서 89, 미네르바와 마리아 테레사는 트루히요 명문 규정에 따라 석방됐다. 하지만 남편 둘은 계속 수감됐다. 겉으로는 트루히요가 자비를 베푸는 듯 보였지만, 사실은 군사 정보국 비밀 경찰이 두 사람을 암살하고자, 계획한 과정의 일부였다. 1125, 트루히요 심복들이 자매들과 그들이 탄 지프를 모는 루피노 데 라 크루스를 멈춰 세웠다. 비밀 경찰은 그들을 따로 분리한 뒤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그리고는 지프에 싣고 산악 도로로 달려가서는 벼랑으로 떨어뜨렸다. 사고로 위장하려는 시도였다. 유엔은 뒤로 이들 자매를 기리고자, 1125일을 세계 여성 폭력 추방 날로 지정했다.


멕시코.


1517, 2 8.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선박 3척을 끌고는 쿠바에서 서쪽으로 항해에 나섰다멕시코 남부 해안을 탐험하는 항해는 노예로 삼아 광산에서 강제 노동을 하게 할 원주민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마야족에게 패배한 코르도바는 후퇴했으며쿠바로 돌아간 직후 상처는 악화되어 사망했다.

 

1766년 7월 30.

 

멕시코 레알델몬테에 있는 은광 광부들이 25% 임금 삭감에 항의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북아메리카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파업이다광부들은 에스파냐 식민 지배층 사장들이 거느리는 사병들의 진압 작전에 맞서 9월까지 버텼고결국 고용주들의 굴복을 이끌어냈다.


1826, 1 22.

 

칼리포르니아(캘리포니아산후안카 피스트라노 선교단농장 노동자들인 아사체멘족 원주민들은 작업을 거부하고는 멕시코에 속했던 주에서 최초 농장 노동자 파업도 일어났다. 10여 명노동자는 모였으며 폭동을 일으켰고지역 신부를 감옥에 가두라고 요구했다노동자들은 지역 경비 대장을 모욕하면서부터 신부를 잡아서 넣지 않는다면가두겠다고 위협했다전까지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선교회를 비롯한식민 지배자들에도 맞서저항한 오랜 역사도 있었다.

따라서 단지 처음으로 알려진 파업이다.


1900년 8월 7.

 

리카르도 플로레스 마곤이 공동 창간한 멕시코에서 급진적인 신문 레헤네라시온》 창간호가 발간됐다이 신문은 멕시코와 미국에서 걸핏하면 탄압을 받았지만 창간 이후 20년간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존재하면서 멕시코 혁명 중 큰 영향을 끼쳤다.

 

1906, 5월 5.

 

멕시코소노라카나네아연합구리사(CCCC)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1862프랑스 군대에게 승리를 거둔 5월 5일을 축하하는 멕시코 축제일싱코데마요 축하 행사 가운데 임금 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멕시코 노동자들은 미국인 직원과 같은 일을 했다. 40%나 적은 임금을 받았다당국은 시위에다 계엄령을 선포했다멕시코 광부들은 파업에도 들어갔고많은 사람들은 회사 깡패들에게 살해당했다.

 


1907, 1월 9.

 

멕시코리오블랑코에서는 임금 인상노동 시간 단축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파업 중이던 노동자들은 노동자 반란으로부터 군대에도 진압됐다노동자 200명은 살해됐으며, 400명을 체포하고는, 1500명을 더 해고했다.


1910, 6월 9.

 

멕시코에서 반란도 벌어지면서부터, 5일 전 해방구로 된 유카탄주바야돌리드시를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 군대는 공격했다반란자 200명은 사망하고, 500명은 부상을 입었고,

600명은 포로로 됐다주모자막시밀리아노 보니야아틸라노 알베르토스호세 E. 칸툰은 처형됐고나머지는 장기 중노동형을 선고받았다그러나 일부 반란자들은 몸을 피해서는 마야족 지역에도 은신했다비록 바야돌리드 반란은 진압했지만사건을 계기로독재에 대한 저항들은 불 붙었고따라서 반란은 같은 해 11본격적으로 시작한 혁명첫 번째 불꽃으로 불린다.


1911, 1월 29.

 

멕시코 북부에서는 티후아나 항쟁으로 알려진 투쟁에서 첫 번째 싸움은 벌어졌다아나키즘 정당멕시코 자유당(PLM), 국제적 지지인들과 세계산업노동연맹 조합원들은 동트기 전에멕시칼리시를 습격하고 장악하면서 교도소장을 살해했다항쟁에는 심각한 결함도 있었지만국경 지역으로까지 퍼졌으며, 5월에는 티후아나시를 장악하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1913년 11월 20.

 

멕시코 교사이자 명사수무정부주의자인 마르가리타 오르테가가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정ㅂ로부터 체포·수감됐다마르가리타와 딸은 멕시코 혁명에서 세력을 조직하고싸우는 데 열중했다정부군에게 체포된 마르가리타는 고문을 당했지만동지들의 이름을 대기를 거부하면서 소리쳤다. “겁쟁이들아네들이 내 살을 갈기갈기 찢고뼈를 부러뜨리고내 피를 전부 마신다고 해도내 동지의 이름은 하나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마르가리타는 3일 뒤 총살 당했다.


1919, 4월 10.

 

멕시코 혁명당시나우아족메스티소농민 지도자였던 에밀리아노 사파타는 아얄라시 치나메카에서 혁명적인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정부파블로 곤살레스 장군에게 암살당했다초반사파타는 모렐로스 지역 원주민들에 대한 권리를 주창했다부유한 지주들은 게속해서 원주민 땅을 가로채는 데도 저우는 아무런 대응마저 하지 않는 걸 지켜보면서 무장 토지 점거에 참가했다. 1910멕시코 혁명은 발발하자사파타는 남부 해방군(LAS) 지도자로 됐다남부 해방군은 멕시코 무정부주의리카르도 플로레스 마곤은 처음 내세운 구호(슬로건), 땅과 자유를 위해 싸우던 농민 민병대였다. 1911프란시스코 마데로는 집권하자마자 사파타는 마데로에게 혁명을 배반했다고 비난했다급진적인 당시 토지 개혁 강령(프로그램)이던 아얄라 계획을 작성했다뒤로는 반혁명세력빅토리아노 우에르타는 마데로를 끌어내렸다샤파타남부군판초 비야베누스티아노 카란사가 이끄는 북부 혁명군과 손을 잡았다이내 빅토리아노 우에르타를 축출하고는 신정부를 수립하고자 제헌의회를 소집했다제헌의회 소집자들은 하나도 선출하지 않자사파타는 신정부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권력을 잡은 카란사는 아얄라 계획에도 한참 못 미치는 온건한 개혁만 실행하자 사파티스타(사파타주의)는 싸움을 계속했다카란사는 사파타 목에다 현상금을 걸면서부터 투사 가운데 누군가 배신하기를 기대했지만 정작 배신자는 나오지도 않았다카란사 부하들 가운데 하나로는 변절할 의향을 거짓으로 내보이고는 사파타를 꾀어냈다부하를 만나러 간 사파타는 곧바로 총탄 세례를 받고는 카라사 부하들은 선전 목적으로 시신 사진까지 찍었다오늘날까지 사파타는 멕시코에서는 국가적인 영웅으로까지 추앙받는다. 1994봉기로부터 자치 지역을 만든 치아파스 원주민 반란자들로부터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은 같은 이름에서 유래했다.


1922, 3월 6.

 

멕시코베라크루스 성 노동자들은 대여한 매트리스의자 등 가구를 이용해서 거리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는 거대한 모닥불을 피우고자 계획하면서 임대료 파업 물결은 시작됐다경찰은 마지막 순간에 행동을 진압했었지만 시위 소식은 퍼지면서 도시 전역에서도 세입자들에 대한 시위로 촉발했다.


1922년 11월 21.

 

사포텍 메스티소 혈통 멕시코 무정부 공산주의자 리카르도 프롤레스 마곤이 캔자스 레번워스 교도소에서 몇 달 간 질병에 시달리며 방치된 끝에 사망했다마곤은 멕시코 혁명과 멕시코 혁명 운동의 손꼽히는 사상가이자무정부주의 정당이던 멕시코 자유당 당원이었다그는 또한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을 조직했고무정부주의 신문 <레헤네라시온편집자로 일하기도 했다신문은 포르피리오 디아스 독재에 맞서 노동자들을 일깨웠다수감 중 그는 미국 정부 박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무시무시하게 작동하는 거대한 기계에 갇힌 채 피부가 갈가리 찢기고뼈가 박살이 났고내 신음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전율이 멈추지 않지만기계는 계속 나를 갈고갈고갈아댈 것이다.”

 

1923, 5월 11.

 

멕시코몇 달 간 항의 운동도 벌어진 끝에 지난 해베라크루스에서 감옥에도 갇힌대부분 여성 임대료 파업자 150명을 석방했다교도소에서 파업을 조직한 여성들은 교도관들과도 싸웠고바깥에서는 노동자들은 수감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위해 총파업을 벌이겠다고 위협했다세입자들은 10명씩 짝을 지어 교도소에서 나왔다아름다운 드레스에다 빨간 리본을 달린 밀짚 모자 차림이었다지지인들은 노래를 부르고는 구호를 외치면서폭죽을 터뜨렸다사람들은 지속해서도시 중심가를 행진하고세입자 조합 사무실로 향했고집주인들에 맞서는 직접 행동을 지속하기를 선언했다.


1968년 10월 2.

 

올림픽 개막을 앞전에 둔 멕시코 시티에서 경찰이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학생 수백 명을 살해하면서 틀라텔롤코 학살이 벌어졌다당시에 많은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은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해 싸웠고정부는 이른바 더러운 전쟁이라고 시기를 명명하며 폭력적인 탄압으로 대응했다사람들은 올림픽 개최에 따른 막대한 비용뿐만 아니라 경찰의 탄압에도 분노했따. 10월 2, 1만 명에 이르는 학생과 대학생들이 멕시코 시티 3문화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이면서 구호를 외쳤다. “올리픽 따위는 필요 없다우리는 혁명을 원한다.” 오후 6시 직후 광장을 애워싼 병력 5000명이 군중과 인근 건물을 향해 총격을 개시했다밤새 이어진 군인과 경찰의 탄압으로 사람들이 체포됐으며 시위대와 구경꾼지역 주민들이 구타당하고 살해됐다당국과 언론은 군대가 저격수의 총격에도 맞서 방어에 나선 것이라고 내세웠지만훗날 총격을 시작한 저격수들이 대통령 경호대 소속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올림픽 반대 시위가 확산되기를 우려한 CIA는 멕시코 당국과 긴밀하게 접촉했고미군은 장비와 무기탄약을 제공했다학살 6일 전멕시코 연방 보안국은 CIA에게 조만간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할거라고” 장담했다.


1968년 10월 16.

 

1968년 멕시코 시티 올림픽에서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받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단거리 육상 선수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가 미국 국가가 울려 퍼지는 동안 블랙 파워를 상징하는 주먹 경례를 했다스미스는 훗날 이러한 행동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혔다. ”나는 블랙 파워의 사회적 힘을 말하고자 검은 장갑을 꼈고가난을 말하고자 신발 대신 양말을 신었으며흑인들이 나라를 세우는 내내 당한 린치를 말하고자 목에 검은 스카프를 했다같은 항의 행동 뒤로 미국 스포츠계는 두 사람을 대대적으로 배척했다. <타임>은 오늘날 이 사진을 역대 가장 상징적인 장면으로 꼽지만당시 사진과 함께 실린 기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더 빨리더 높이더 강하게는 올림픽의 모토다하지만 지난 주 멕시코 시티에서 펼쳐진 장면은 더 더럽게더 추하게에 가깝다귀국한 스미스와 카를로스는 곳곳에서 모욕을 당했고자신들뿐만 아니라 가족까지도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시상대에 같이 섰던 오스트레일리아 선수 피터 노먼도 두 사람의 시위에 연대를 표하면서 자국 정부의 백호주의에 항의하는 뜻으로 인권을 위한 올림픽 프로젝트’ 배지를 가슴에 달았다역시 이후로는 자국 올림픽 당국에게 질책을 받았고차기 올림픽 국가 대표에서 제외됐다다만 멕시코에서 행동 때문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는 있다. 2006년 노먼이 급작스럽게 사망했을 때스미스와 카를로스는 그의 운구 행령에도 함께했고장례식에서 추도 발언을 했다.


1983년 11월 17.

 

멕시코 치아파스주에서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EZLN)이 결성됐다창건자 6명 중 일부는 북부 도시 출신이었고나머지는 치아파스 산악 지대의 농촌 원주민 사회 출신이었다. 11년 뒤원주민이 주축을 이룬 3000여 명의 사파티스타 무장 구성원들이 주의 상당한 지역을 장악하는 봉기를 일으키며 죄수들을 석방하고경찰과 군 병영을 파괴했다멕시코 군의 반격을 받은 유격대들은 많은 지역의 통제권을 빼앗기고는 라칸돈 밀림으로 후퇴했다뒤로 사파티스트는 수 많은 코뮌을 세웠고전체 인구가 30만 명에 이르렀다개인 물건 외에는 사적 소유를 폐지했고토지를 공동 소유했고작업장 또한 공동 소유·운영했다학생을 성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급진적이고민주적인 학교를 세우고는보편적인 보건 의료 서비스를 만들어공중 보건을 크게 개선했고따라서 유아 사망률이 감소했다또한 원주민과 여성성해방 권리를 강력하게 옹호했다.

 

1984년 11월 19.

 

멕시코 산후아니코에 있는 페멕스(PEMEX) 석유탱크가 폭발해서 500여 명이 사망하고, 5000명이 화상을 입었다이는 세계 최악의 산업 재해로 꼽힌다공장 안전 설비는 끔찍할 정도로 열악했지만회사는 이를 수리하려면 이윤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방치한 상태였다.

 

1994년, 11.

 

멕시코에서는 치아파스 원주민들은 들고일어나서, 지역을 장악하고, 권력을 재분배하거나, 직접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부터 사회를 운영하면서, 사파티스타 봉기는 시작됐다. 국가테 대한 탄압, 폭력, 학살에도, 3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은 참여한 운동이었며, 자주관리를 유지한다.

 

1995, 2월 9.

 

멕시코 정부는 미국 체이스맨해튼은행 고문으로부터 행동을 취하기를 요구 받은 뒤사파티스타 반군과 진행하던 평화 교섭을 취소하고는 치아파스근거지를 침공했다유출된 체이스 은행비밀 기록물에는 투자자들 다수는 치아파스는 멕시코 정치적 안정에 위협을 가한다고 생각하며멕시코 정부는 국토안보정책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사파티스타를 제거해야 한다고 적었다메모 작성자는 계속해서 집권당은야당이 선거에서 정정당당하게 이기는 경우승리를 허용할지 여부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썼다그러나 자율적인 사파티스타 공동체는 끈질기게 버텼다.


1997년 12월 22.

 

멕시코 치아파스의 사파티스타 반군 운동을 지지하는 원주민 45명은 평화 기도 집회 중 준군사조직에게 학살 당했다준군사조직은 임신한 여자를 쏘고는 배를 난도질하는 등 잔학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정부군이 근처에도 있었지만 개입하기는커녕 천주교 신자들이 살해 당한 교회에서 그들의 피를 닦아내며 학살을 은폐하고자 했다.


2006, 5월 22.

 

멕시코오악사카주 교사들은 25년째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 정부에도 항의해서는 파업에도 들어갔다독특했던 건 교사들은 도심에다 천막을 치고는 학생학생 가족들에게 동참을 호소하고는 직무에도 복귀하라는 지시를 거부하고자체 라디오 방송국까지 만들었다수만 명도 참가한 파업은 5개월 간 지속했고지역 경찰연방 경찰준군사 조직들도 대대적인 탄압에도 직면했다같은 과정에서 동지이던 뉴욕 출신 언론인브래드 윌을 비롯해서 무려 27명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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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노년의 인구 수가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부양 인구 수는 줄어들고 있다는 말이다. 총 인구 수를 고려한다면, 여성과 돌봄 연구로만 한정한 매우 미시적인 분석에만 열중한 결과는 아닐지 의문이 드는 통계이다. 노인 인구 대비 출생률로 파악한다면,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는 1990년대부터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한 세대가 끝나는 만큼 서막이라 믿었던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끝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의료에서도 민영화를 추진했고, 병원 수는 늘어났지만, 정작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의사는 턱 없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렇게 입시 제도로부터 정당한 시험이라 여겼던 의대 시험들도, 문턱 높은 전공의 의사와 간호사는 환자를 제대로 돌볼 여건마저 있었는지는 자문 해보게 된다. 


한 의사는 환자 수는 늘어나지만, 감당할 의사가 부족하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의료 보험이라는 혜택을 받으면서도 환자는 늘 대기한다. 더욱 급한 의사들은 더 쉬운 전공을 택하고자 마음을 돌리고, 힘든 전공을 기피한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이후로도, 긴급 병원들에서는 의료법을 지키지도 않고, 불법 시술만 더 늘어나고 있다. 언젠가부터 건강이란 피부와 미용에만 해당하는 일이었고, 건강이란 신체 운동에만 해당하는 지키지도 못할 처방을 내려준다. 


있는 사람들은 걱정 하나 없는 국민들이 납부할 세금만큼이나 부담해야 할 건강보험료도 올랐다. 남들은 기나긴 토론을 해오는 국민 연금 제도를 보더라도, 앞으로는 연금 고갈을 먼저 우려하는 한국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먼저 재벌 자본가들의 배를 불러서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을 초과 생산으로 쥐어 짜내고, 노동 임금을 착취하면서 고작 심심풀이에 불과한 자신들의 연금을 땅콩으로 늘려왔는지를 고려해보지도 않았다. 전공의들이 의사가 될 때도 같은 고민을 할까. 같은 연유로 한 대학에서는 교수가 강사들을 부려먹는다고 한다. 그리고 반도체 노동자가 숨졌음에도, 기업들은 모두 노동 시간을 줄일 노력은 하나도 없고, 더 정치적으로 근무 제도에만 기댄다. 모두 자본주의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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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 들렸다. 반환되거나 환수하지 못한 문화재도 여러 점 있다. 무기 전시관은 따로 없어서 칼에 대한 유물들을 잘 볼 수 없었다. 한국에서는 주로 국궁이 유명하다. 그럼에도 옆 나라들에 비하면 무예 실력도 출중했다. 하지만 정작 문화재들은 전쟁으로 인한 파괴나 소실로 인해 훼손되거나 다른 나라에서만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일본에서는 검 문화가 발달했다고 한다. 사무라이 정신이란 실제로는 약탈과 범죄로 무장한 침범을 일삼았고, 악랄했다. 물론 조선도 양반 정신이 그렇게 썩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왜냐하면 기생과 노비를 뒀기 때문에 신분만 세탁하는 일도 빈번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래 전에는 국내에서도 예술과 무기 문화를 전파했고, 바로 옆 나라와 교류하는 나라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문화재청>에 따르면 아직까지도 반환되지 못한 문화재들이 상당 수 있다고 들었다. 2023년에만 일본,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러시아 등에서도 우리나라 문화재를 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교류가 깊은 독일에서도 한국 칼에 대한 문화재가 여러 점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문화재들은 왜 해외로 퍼질 수 있었을까. 왜냐하면 조선 후기로 들어갈수록 일제에 대한 침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폭 넓은 개방 정책이 오히려 독립 문화재마저 수출하고 수입하는 자본 거래의 대상으로 상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같은 문제를 식민주의로만 볼 수 있을까. 물론 일본 식민지를 전제한다. 그러나 조선 왕조도 근대화에 따른 개항을 추진하더라도 정작 봉건주의라는 잔재 속에서 제국 간 전쟁을 옹호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일본 식민주의에 따른 소실된 문화재만이 아니라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에서도 특히 아메리카와 유럽 등지에서도 국내 문화재를 여럿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는 남한만이 아니라 북한도 존재한다는 점을 잊곤 한다. 그래서 각국에서도 문화재에 대한 노력을 서로 기울여야만 하는 이유다.   


여태까지 국가적으로 문화재에 대한 제한된 관람을 보여주는 이유란 무엇일까. 바로 부단하게 정치적이고, 문화재는 자본 거래에 대한 대상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국궁만이 아니라 무예 실력도 출중했던 충무공의 칼만이 아니라 수 많은 전쟁에 참가했던 국내 검객들은 예전에는 무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 많은 문화재가 다시 국내로 반환하고, 환수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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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이여, 자각하라. 

당신은 노동자다. 


연일 터지는 동료 노동자의 사고를 접한다. <근로기준법>을 맞추지도 않고, 허가 받지도 않은

작업장에서, 비좁은 터전 속에서 출퇴근을 일삼는 노동 계급들은 과연 무엇을 알고 있는가. 

노동자라는 자각이 현실임에도 노동자는 자본가들 앞에서 경쟁과 수발을 자처하고 있으니 

노조의 침묵과 공백은 여전하고, 또 비난을 받는다. 가입에 대한 권유는 강요가 됐으며, 

노동 개선에서는 모두들 둔할 뿐이다. 외국에서는 노조는 많지만 노동자는 없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쭉정이 빠지도록 모두 빼먹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성이 차지는 않는 모양새다.  

 

정부는 노동 계급을 탄압하기 위한 온갖 묘수를 부리면서도 노조 파괴 공작에 힘써왔다. 

산림을 지우고, 살림을 파괴한다.  

차기 들어설 정부도 또 다른 탄압과 경제 위기와 상승과 하락이라는 회유로부터 배우지 못한 노동 계급을 설득하고자 애쓴다. 노총들의 자료와 통계에서도 노동자는 빠졌다. 비대한 두뇌만 클 뿐이다. 

아무도 노동 조합에 대한 역할과 투쟁을 고민하지 않는다. 

사연은 중요하지만 당신들의 하소연은 이제는 그만두시라.  

우리는 바로 학자에게 공물하는 통계와 데이터 따위가 아니라! 

바로 노동 계급이 요구하는 더 많은 통계와 자료가 절실하다. 

과연 펜만 굴리는 우리의 전문가들은 얼마나 객관적이던가! 

과연 얼마나 더 많은 착취라는 증거가 필요하실까! 


자본가들에게는 주어진 일만 잘 처리하면 아무 일도 없을테니까. 

조용히 주는 돈만 벌면 침묵하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리고 노동자들은 서로를 경쟁하고 또 속인다. 


어느덧 취업과 퇴사라는 불안한 자유에서도 청년 노동자들에게도 과연 여가는 있던가. 

당연한 듯 행동하는 의식들은 모두 이념과 사상에만 몰두하다, 

죽은 노동자를 시체 더미 위로 버리고는 만다. 


우리는 간부들끼리 함께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노동자와 함께한다. 

우리는 늘 농촌 뿐만 아니라 노동에서도 함께해왔고, 또 함께할 것이다.

<뼈 아픈 후회>란 바로 그런 것이다. 

내가 죽인 칼이 바로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그 순간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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