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체제 안에서든, 개인에 대한 노력이나 희생을 강요하는 건 어느 때나 같다. 그러나 '마법'같은 노동시간의 법칙에서도, 초과가치를 쥐어짜서 생산하고는, 남은 임금이나 먹고 살아야만 하는 임금 생산을 위해 남겨진 노동계급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무식한' 진보 진영에서는 아직까지도 혈세 낭비, 국민연금, 금투세 폐지 요구 등에만 미치며, 정년기 동안 축적할 수 있는 임금들을 모아 훗날 자산으로 불리고자 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정부가 서민 경제를 말하고는, 정작 그들은 지불할 물가와 비용들은 너무나 지나치다 못해서 먹고 살 만한가. 심지어는 가만봐도 남쪽은 북녘보다 더하다고 보일 때도 있다.    


통계에 따르면, 8-9시간 노동시간에 대한 임금 보장, 일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정신적 부담감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늘었다. 근현대 시기 동안에도, 사업체에서는 점심시간에 대한 1-2시간 정도에만 해당하는 '공식적인' 식사시간도 있음에도, 꾸준한 업무량과 야근을 밥 먹듯 강요하는, 대사업체들에서도, 휴식이란 눈칫밥이다. 노력하라고 하지만 쉴 틈, 낮잠 시간도 없다. 더군다나, 가족을 이룬 사람들에게는, 서민 경제로부터 취업 의사를 밝혀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속박되어 할 수 있는 일이란 빈도와 소모 면으로는 매우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시에서도 노동계급들은 취약한 질병에도 쉽게 걸린다. 정신적 질병으로는 특히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늘어났으며 노동시간과 휴식을 보장하려는 요구들은 정작 매우 드물거나, 심지어는 많이 일하고, 벌 수 있다고, 노동시간과 임금은 비례적으로 동일하다고 계산하거나, 우선시한 나머지 체력을 간과해서 죽음에 이른 경우도 있다. 심지어 문제를 알아도 체제 문제이므로 해결할 수 없다고 보는 노동자들도 많아졌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그래도 영양실조까지는 아니지만, 과도한 영양 섭취로부터 비만을 호소하거나, 건강에 적신호는 잘 보여준다. 그러나 돌아온 병원 진단은 결국, 충분한 휴식과 운동, 건강한 음식 섭취일 뿐이다. 그러나 임금을 받아야만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계급들에게, 병원마저 그러한 진단은 지키지도 못하는 처방이다. 사회에 대한 요구들을 보자. 부르주아 권리에 대한 요구만 늘지는 않았는가. 정작 죽어가는 노동계급들에 대한 휴식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거나, 건강 아닌 안정된 취업을 보장하고 생계권마저 사람들을 경제적 위기로 몰아놨기 때문이다. 물질 속 생명이란, 그리고 사람도 일할 체력과 충분한 휴식이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무용지물이기 일쑤다.    


휴식을 취하지도 못하고, 시간마저 부족해서, 잠 자지도 못하거나,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마저 없다는 건, 아무리 연봉이나 액수가 높더라도, 무의미하다. 공산권에서도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거나, 심지어는 강요한다. 그러나 시간을 들인만큼 생산력이라는 사람은 생산수단들을 사용하거나, 작업장, 일터에서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지는 아니하기 때문에, 노동계급들로는, 

오래 전, 프랑스에서는 라파르그와 로라 마르크스도 지적했던, 

'충족한 임금, 충분한 휴식'마저 절실해졌다.  


안정적이라고, 가만히만 앉아도 경제는 살아났다고 탁상이나 공론하는 지배계급들을 보라.  

인플레이션이 장기화됐음에도, 물가는 솟아올랐고, 실패한 혁명을 탓하고만 있는 자유 진영과 

투자(투기)에만 몰두하고 주가나 조작해서, 노동계급들을 기만하고자, 꾀만 부리는 부르주아 경제인들과 학자들에게도 한심하게 뼈만 갈던 임금 노동에 대한 최후를 보노라면, 과연 해방은 어디로 갔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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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각도로 보는 다른 전기물보다는, 크룹스카야, <레닌을 회상하며>를 추천해본다. 오래 전 소련은 등장하기 이전, 부르주아 학자들도 혁명은 일어나지 않을거라 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서술과는 다르게도. 1917년 10월 혁명, 러시아 혁명은 뜻 밖으로 일어났다. 볼셰비키로부터, 자발적인 지지를 얻은 레닌은 추천을 받았고, 덕분에 상부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도 평생 동안 혁명을 연구했던, 레닌을 되돌아보는 기록물이다. 볼셰비키 집권 기간에도, 초기 소비에트는 과연 무슨 모습이었고, 내용을 토대로 짧게 정리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1893-1898. 


레닌은 페테르부르크, 피체르(삐쩨르)로는 1893년에 왔다. 무척이나 마르크스주의를 잘 따르는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볼가에서 왔다. 크룹스카야는 동지로부터 얻은 <이른바 시장 문제에 대하여>에 대한 기록물(노트)을 헤질 정도로 거듭 읽었다. 한 쪽에는 페테르부르크, 마르크스주의 공학자였던, 게르만 크라신에 대한 견해를 서술했으며, 군데군데, 아무렇게나 적어 놓은 사상에 대해서, 다른 쪽에는 레닌은 견해, 반박을 고이 적었고, 수정한 흔적은 없었다고 한다. 초기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에서 시장 문제, 관심사는 컸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마르크스주의 모임으로부터 이미 특정한 경향도 이뤄지기 시작했으며, 사회 발전에 대한 과정을 기계적, 도식적인 무언가로만 여겼다마르크스주의에서는 오늘날 기계론에 대한 관점을 배격할 줄 알았지만, 당시에는 심하게 동요했었다. 왜냐하면 실력이 무척이나 형편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마르크스, <자본론>에 대해서도 잘 알지는 못했으며, <공산주의 선언문>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고 한다. 단지 기계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는 모순이라고만 직감했을 뿐이었다. 처음 레닌을 본 건, 새햇날이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오흐따), 기술자였던 크라신으로부터 볼가에서 온 새로운 사람과 회동하기로 했다. 크라신, 코롭코, 세레브로프스키, 라첸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포트레소프, 스트루베도 오기로 했으나, 안 왔다. 셰블랴긴도 있었으며, 모임에서는 주로 기초적인 문맹퇴치활동에 대한 교육 활동을 중요하게 여겼다. 인민 의지당이나, 노동해방단은 전제주의와도 싸우면서부터, 자유로운 협회에 대해서라면 무엇이든 공감하다가, 와해된 뒤로는 이내 마르크스주의를 널리 알리기도 했다.

 

레닌은 크룹스카야에게, 체포된 형에 대해서도 말해줬으며, 지인들마저 가족들에게는 등 돌렸으며, 발길마저 끊겨서 아무도 방문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레닌, 어머니는 수감된 형을 보고자, 페테르부르크로 가고자, 시즈란(씨즈란)까지 마차를 타기도 했다. 레닌은 주로 동행할 사람에 대한 심부름을 했지만, 어머니와 함께 가고자 하지는 않았다. 레닌은 협회로부터 자유주의에 대한 태도에는 쓰라린 아픔도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네바 강을 걸으면서 돌아가는 길에, 크룹스카야는 알렉산드르 3세 암살 미수 사건(1887)에 가담했던, 인민 의지당 조직원으로는 성년도 채 되지 못한 차르, 구실아치로부터 죽임을 당했던, 레닌, 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레닌은 형을 무척이나 따랐으며, 주로 자연과학에 대한 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중이라 관심사는 비슷했다. 그러나 레닌에게 형은 혁명가인 줄,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형이라면 깊은 영향마저 끼쳤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레닌은 <인민이라는 벗>(1894, 가을)이라는 노란 수첩에다 적은 글을 모임에서 처음으로 발표했다. 모임에서는 투쟁에 대한 목적을 쉽게 제기했다. 저자 서명은 없었으나, 여러 손을 거쳤다. 봉건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던 젊은 사람들도, 많이도 읽었다. 사민주의 활동가, 루만체프도 <인민이라는 벗>을 두고는 훌륭하다고 평했다. 1894년부터 1895년 겨울 사이에, 레닌으로부터 가까워진 뒤로부터, 크룹스카야는 여러 지구에서 야학 교사로 일했기 때문에, 바부슈킨, 브로프코프, 그리바킨, 보드로프 형제들(아르세니, 필립), 주코프, 등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특히 스몰렌스크 학교는 600명이 다닌 매우 큰, 주로 밤에 배우는 노동 학교였다. 그러나 경찰은 학교를 단속하기도 했으며, 각종 질병을 가진 환자들도 읽거나, 쓰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야간 기술반에서는 목재를 다루기도 했다. 레닌도 학교를 방문하거나, 현장으로 들어가서, 노동게급들에 대한 관습, 생활, 사소한 삶들을 세세하고도, 깊게 보고자 했다. 그러나 지식계급들은 노동계급들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따라서 주로 모임에서 강의를 했다. 이를테면, 대체로는 엥겔스, <가족, 사적 소유, 국가 기원>을 러시아로 번역한 필사본이나 훑어보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레닌은 러시아 판으로 된 마르크스, <자본>을 직접 읽고는, 사람들에게 노동 조건에 대해서도 물어보거나, 노동계급들에 대한 삶, 사회 구조와는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방법, 현존 질서를 바꿀 수 있다고 일러주기도 했다. 레닌은 이론과 실천을 분리해서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모임에서도 구성원들에게, 기존과는 다른 접근법을 적용해서, <선동에 대하여>라는 책자를 발간했으며, 파업으로 부흥하던 프랑스 노동조합을 보며, 단지 정치투쟁만이 아니라, 경제투쟁도 필요하다고 내세웠다. 경제주의에 대해서도, 레닌은 <공장, 작업장에서 노동계급들에게 징수하는 벌금법에 대한 해설>(1895), 소책자를 쓰기도 했다. 레닌은 정치투쟁과 함께, 한 걸음씩 접근할 수 있도록 방법에서도 모범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많은 지식인인들은 소책자를 지루했지만, 매우 쉽게 쓰여졌다. 그리고, <파업에 대하여>, <공업, 재판소에 대하여> 등에서도 연구에 대한 흔적도 드러났다. 레닌은 셀로(차르스코예)와 같은 여러 마을에서도 혁명 활동에서 적임할 사람들을 도처에서 찾아내서 치밀하게 연락망도 구축했다. 그리고 인민 의지당 조직원들과 압수되기도 했던 불법 소책자들에 대한 인쇄를 돕거나, 대량 문건들도 돌리기도록 지시했다. <벌금에 대하여>, <차르, 굶주림> 등에 대한 글들도 있었다. 조직원이었던, 미하일로브나도 고인이 됐지만, 여전히 공산당원으로 남고자 했다. 교사들도 있었고, 이를테면 스투르베, 선생이었던 자스티바도 있었다. <불꽃>에서 조직을 끝까지 도왔으며, 훗날까지 스트로베 파로 가담하지는 않았다. 초기에는, 자술리치도 미하일로브나를 만나거나, 노동해방단을 돕기도 했으며, <경제 발전에 대한 특징을 보여주는 자료들>에 대한 저술집을 공동으로 출판했다. 


레닌도 도왔지만, 차르, 검열관으로부터 불태워졌다. 레닌은 공장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나눠 줄 첫 전단도 작성했었고, 여러 손을 거치면서부터, <노동 대의>를 발간하기로 했다. 그러나 비합법적 인쇄소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밖에는 없었다. 여러 검수원들도 당국에게 적발되어 추방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노동 대의>는 정작 세간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차르, 검열관으로부터 레닌마저 체포되어 수감 생활 도중에도,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을 준비했다. 수감 중 알맞은 편지에다, 필요한 자료, 통게집들을 보내 달라고 적었으며, 시베리아에서는 책 구하기도 어렵다고 불평마저 표했다. 심지어는 우유로 글쓰기를 하거나, 들키지 않고자, 레닌은 빵을 자그마한 우유 잉크병으로 만들어서, 감시관들이 드나들면, 입에다 넣곤 했다. 레닌은 수감된 가운데에서도, 절제력은 강했으며, 틀에서도 잘 적응했다. 전단을 배포하고 선전(선동)을 했으며, 덕분에 노동 운동들도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1896년, 여름, 페테르부르크에서는 3만명 운집한 노동계급들로부터 주도한 파업도 일어났으며, 사민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크게 받고는, 뒤흔들어 놓았다. 1897-1898년까지는 주로 스트루베와 자주 연락했으며, 조언을 구했다.  


여러 지역에 걸쳐, 연락원들과 주고 받으면서, 폴란드에서는 무산계급 사건(1885)도 일어났다. 징역형을 선고 받거나, 감옥과 유형지를 드나들며, 많은 고초를 겪었던 폴란드, 동지였던 펠릭스 야코블레치 곤 동지들도 알았다. 비타협적이고, 나이 든 혁명가였기 때문에 여러 호감을 두루 받았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소셴스코예 지역 인근 마을에서 레닌은 수감 생활을 마치고 오두막 생활을 하면서, 사냥을 나가곤 했었다. 노동계급들도 있었지만, 얼마 못가 폴란드로 돌아가는 길에도 질병에는 쉽게 걸리거나 일찍 사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레닌은 인근 지역 노동자들, 가난한 농민들과도, <공산당 선언>, <자본>을 같이 읽었다. 레닌은 시베리아 농촌 생활도 연구했으며, 소자산자들에 대한 잔혹함과 무고한 일꾼들에 대한 살인 사건들로부터도 무자비한 착취를 말해줬다. 마을 식구들도 늘어났으며, 스트루베로부터 받은 <영국 노동조합주의, 이론과 실천>을 번역해서 옮기기도 했다. 또한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을 반박했던, <베른슈타인, 사민주의 강령, 반비판>을 포트레소프라는 동지로부터 받았다. 레닌은 저녁이면, 헤겔, 칸트, 프랑스 유물론 같은 철학 책을 읽곤 했으며, 페테르부르크로 다시 왔을 때는 문학을 읽기도 했는데,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체르니셰프스키, <무엇을 할 건가> 등을 읽은 정도가 아니라, 몇 번 씩이나 또 읽었으며, 고전들도 매우 잘 알고 좋아했다. 훗날 레닌은 국가출판국에서, 고전을 저렴하게 재출간하라는 업무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특히나, 체르니셰프스키를 무척이나 좋아했어서 사진까지 가지고 있었다. 체스도 곧잘 뒀으며, 업무에도 지장을 받을 정도였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라틴어 연구도 병행한 적도 있어서, 러시아 문학잡지였던 <레프>에서도 레닌에 대한 문체와 구조를 분석하거나, 연설 방식도 연구하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인쇄소가 잘 없었으며, 분트로부터 출판사도 세우고자 했으나 잘 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크레도>나 <노동과 사상>, 같은 아류 이념까지도 받아들인 잡지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닌은 구체적인 조직안을 구상했을 때는, <불꽃>에서, <무엇을 할 건가>,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로 나아가고자 했다. 처음에는 마르토프, 포트레소프에게도 편지를 써서 같이 해외로 나가기로 합의를 보면서, 레닌은 유형 기간도 끝난 1900년, 2월, 처음으로 러시아를 떠났다. 동지였던 오스카 알렉산드로비치도 왔으며 칼 마르크스라고 쓰여진 치렛감(브로치)을 선물하기도 했다. 러시아 여러 지역에서도 크룹스카야는 노동계급들에 속하는 사람들을 가르쳤으며 한 지역 노동자 가운데로는 옥살이를 해서 결국 감옥에서 미치고 만 사람도 있었다.    


1901-1903. 


뮌헨. 


레닌, 마르토프, 포트레소프는 해외로 나갔지만, 뮌헨에서는 동지 집에 묵으면서, 위조 여권, 가명을 사용하거나, 러시아인 거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냈다. 자술리치도 뮌헨에 있었다. 플레하노프, 악셀로드는 스위스 한 곳에서, <불꽃>이라는 신문 말고도, <여명>을 또 발행하고자 했다. 레닌은 노동해방전선(노동해방단)에도 각별한 마음도 있었다. 플레하노프, 악셀로드, 자술리치를 존경했기 때문이다. 노동해방전선에서는 <불꽃>과 매우 가까웁던 자술리치였다. 따라서 자국, 러시아에서도 노동 운동은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동기였기 때문에, 막상 자국, 러시아와는 단절된 막막한 반동기를 거쳤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해외에서 지낼 수밖에는 없었다. 조직원들은 경찰 조직으로부터 미행을 받거나, 모든 조직원들은 외로운 생활도 이어나갔다. 이를테면 자술리치(베라 이바노브나)는 타고난 살림 솜씨를 가졌음에도, 주로 글을 쓰거나, 방문을 걸어 잠그고는 담배를 피우거나, 진한 블랙커피만 마시면서 지냈다. 왜냐하면 러시아를 지독하게 그리워했기 때문이다. 1905, 자술리치는 러시아로 가서 남았다. 그러나 플레하노프에는 반대했다. 플레하노프 운명은 비극적이었다. 현실로부터 단절됐기 때문이다. 이론에서도, 러시아 노동 운동에서도, 세운 공로는 매우 위대했다. 여러 정당 대표들, 작가, 학생, 개별 노동자들까지도 만나 봤지만, 정작 러시아 노동 대중들은 잘 알지는 못했으며, 같이 활동하지도 못했었다. 와중에, 레닌, 마르토프, 자술리치는 플레하노프와 러시아에서 오는 통신들을 거듭 읽었다. 그러나 제2차 당대회 뒤로, 레닌은 플레하노프와 러시아에서 오는 통신들에 대해서 불신 찬 태도를 보였다. 처음에 크룹스카야는 화도 났으나, 레닌은 멀리 러시아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플레하노프는 1900년대가 시작되자, 러시아를 체감할 수 없다고, 1905년에는 러시아로 다시 돌아가지도 않았다.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악셀로트는 플레하노프, 자술리치에 비하면 훨씬 수준 높은 조직가였다. 그러나 필체는 엉망이었다. <불꽃>을 운반할 때는, 운송 수단마저 없어서, 이중 바닥으로 된 여행 가방에다 넣어서 지정된 비밀 장소로 빼돌렸다. 이를테면 포스코프 지역에서레페신스키 동지, 집도 비밀 장소였으며,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도, 다른 곳에서도 있었다따라서 여행 가방에다 문건을 꺼내서 조직에다 전달했다. 라트비아 출신 롤라우와 스쿠비트로부터 생각한 방법이었다. <불꽃>, 관계인들로는, 베를린, 파리, 스위스, 벨기에 등에서 연락을 주고 받았다. 1901, 10월에는 <러시아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연맹>이라는 연락 조직도 만들었다. 특히 페테르부르크 노동자였던 바부슈킨은 <불꽃>에서 매우 적극적인 통신원이었다.


오레호보주예보, 블라지미르, 구시흐루스탈니, 이바노보보조네센스크, 코흐마, 키네슈마 같은 지역에서도 방대한 통신들을 보내왔으며, 레닌은 지속적으로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관계를 강화해 나갔다.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우랄, 남부 지역에서는 편지들도 왔다. 북부 사민주의 조직 연합체였던 북부동맹와도 편지를 교환했다. 뮌헨에서는 스트루베도 와 있었으나, 레닌은 거절했다. 당시 레닌은 <무엇을 할 건가>를 집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 쓸 때는 대개 방 안을 빠르게 오가며, 쓰려는 내용을 중얼거리는 버릇도 있었다. 크룹스카야는 익숙했다. 글 쓸 때는 아무런 말도 걸지는 않았으며, 무엇도 묻지 않았다. 한적한 장소를 찾아서 산책을 할 때는 어떤 생각을 하거나, 무엇을 쓰는지를 크룹스카야에게 말해주곤 했었다. 레닌에게는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고 나면 마르토프도 오고 다른 동지들도 찾아와 편집 회의도 이뤄졌으며, 쉴 새 없이 말했는데, 늘 여러 주제로 왔다, 갔다 하는 버릇도 있었다. 책도 많이 읽었어서 어디서 들었는지도 모를 사람이나 일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한 보따리씩이나 갖고 왔다. 레닌은 마르토프를 보며 전형적인 기자라고 하면서, 재능도 출중하고, 판단력은 뛰어나며, 감성마저 풍부하지만, 가볍게 대하는 경향은 있다고 말했었다. 마르토프는 <불꽃>에서는 알맞고도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매일 5-6시간 대화로 인해 몹시 지쳤으며, 토론도 끝나면 앓아눕기도 했으며, 능률도 떨어졌다. 마르토프는 대화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가끔 레닌은 뮌헨 독일 사회민주주의 동지였던 베라 이바노브나, 짐까, 루멘펠트와 함께 카페로 나가서 죽치고 앉아만 있기도 했다. 10월에는 <노동 대의>를 통합하고자 뮌헨에서 취리히로 갔다. 통합은 이뤄지지는 않았다. <노동 대의>에 속했던 아키모프, 크리쳅스키, 다른 사람들도 엉뚱한 소리를 해댔기 때문이다. 레닌과 잘 지내지는 못하던 플레하노프마저 통합할 수 없다고 결정했으며, 마르토프, 레닌도 더 이상 함께 일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 일화로는, 인근 카페 옆에는 체육관도 있었다. 가짜 칼을 휘두르며 펜싱 연습 중이었는데, 플레하노프는 미래 체제에서는 저런 식으로 싸운다고 말하자, 악셀로트는 미래 체제는 투쟁이 없을 테니 지겨워 죽겠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취리히에서 돌아 온 레닌은 <무엇을 할 건가>를 마무리했다. 멘셰비키는 그대로 공격했지만, 모든 활동가들과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왜냐하면 모든 러시아 조직에 대한 뜨거운 호소였기 때문이다. <무얼 할 건가>에서는 전 국민적인 무장봉기를 준비해서, 시기를 정하고, 봉기를 수행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할 준비를 늘 갖춰야만 하기 때문이다. 노동 운동은 새로운 과제를 맞이했지만, <무엇을 할 건가>는 여전히 혁명에 대한 감격을 준다고 크룹스카야는 평가했다. <인민에게 벗이란 무엇인가>는 혁명에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면, <무얼 할 건가>는 혁명 운동에 대한 계획을 보여주고, 명확한 과제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불꽃>도 전력을 다해 일했었다. 플레하노프, 악셀로트, 자술리치도 와서 맹렬한 토론을 했으며, 힘겨운 회의였다. 뮌헨 시절에는 레닌, 마르토프, 포트레소프, 자술리치 등 사이에는 심각한 불화는 크게 없었다. 왜냐하면 러시아 신문 건설이라는 목표로부터, <불꽃>으로 전력을 집중했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 리에즈에서는 거대한 소요 사태도 일어났다. 파업 중이던 노동자에게 군대는 총을 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 거주 지역에서도 동요하고 있었다. 인민회관을 보러 갔으며, 당 상층부가 모이지 못하도록, 모든 노동계급 거주 지역에서 집회를 열기로 했다. 벨기에 사회민주주의 지도부에 대한 불신도 드러냈다. 한 쪽은 군중을 쏘거나, 한 쪽은 군중을 달래는 변명이나 해댔기 때문이다.


런던. 


19024, 둘은 런던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큰 런던을 보고는 놀랐다. 맞이했던 첫 동지는 알렉세예프였다. 해외 생활에 익숙해서 런던에서도, 영어를 완벽하게 익혔다. 크룹스카야는 감옥에서 영어를 독학으로 배웠지만, 실전 영어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레닌도 열심히 영어 학습에 전념했다. 주로 하이드파크를 들렸으며, 연사들은 아일랜드 발음과 섞인 영어로 말했어서, 좀 더 알아듣기는 쉬웠고, 둘은 영어를 배우고자, 즐겨 듣곤 했다레닌은 런던을 연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박물관에 구경하러 드나들지는 않았다레닌도 대영박물관에는 자주 들렸다박물을 보려던게 아니라,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서고, 연구 작업을 하기에도 편리한 시설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대영박물관 안 고대박물관에서 10분이 지나면 레닌도 완전히 지쳐버렸기 때문에 서둘러 뛰쳐나오곤 했었다. 그러나 딱 하나, 파리, 1848년 혁명 박물관에는 꼭 들려서, 물건 하나라도, 그림 하나라도, 꼼꼼하게 들여다봤었다. 레닌은 산 런던을 연구했었다. 사람들 무리에서, 이층 버스 위 칸에도 앉아 시내를 한참 돌아다니기도 좋아했었다. 그러나 부랑자, 지저분한 룸펜, 런던 노동자들, 헤진 옷을 걸친 취한 여성들도 섞인 골목길, 런던을 보고는, ‘두 개의 국가라고 되뇌곤 했었다. 런던에서도 레닌은 언제나 시끌벅적한 노동하는 사람들 무리로 들어가거나, 노동 군중들도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었다. 당시 런던에서도 독서실도 많았는데, 한 짜리 방이었고, 들어가서 신문을 있거나, 독서대도 있었다. 레닌은 당시 러시아에서도 큰 도서관이나 독서실을 만들기를 바라기도 했다.


사회주의 토론을 듣고자, 대중식당, 교회에도 갔었는데, 영국 교회에서는 예배가 끝나면, 짤막한 강연, 토론도 이뤄졌고, 평범한 노동자들은 토론에 나서곤 해서 토론을 특히 즐겨 듣곤 했었다. 그리고 일반 노동계급들도 모여서 토론하는 노동계급 모임에도 찾아가곤 했었다. 레닌은 평범한 영국 노동계급에게 기대했었으며, 부르주아화로 된 노동귀족계급에 대한 상층부도 연구했었다. 그리고 영국 혁명에 대한 원동력도 찾아내고자 애쓰기도 했다. 그러나 레닌은 사회민주주의 교회에서 방문해서 목회자를 만나고는 설교를 듣거나, 발언자로부터 자치제 사회주의는 기회주의 정수라는 말을 듣고는, 이내 영국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적어서, 영국인은 폐쇄적인 민족이라고 봤다. 또한 한 영국 사회주의를 따르던 사람은 망명 생활을 하던 러시아인들을 순진하고도, 놀라운 시선으로 보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감옥에 갔다왔다는 걸 믿을 수 없다고 했으며 놀라워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찌들어진 소시민주의를 꼼꼼하게 볼 수 있었다. 레이몬드는 여러 유럽 지역을 돌아다녀봤었지만, 정작 화이트채플에서 열린 러시아 유대인들 거주 지역에는 한 번도 가본적도 없어서, 다른 삶을 보고는 충격을 받기도 했다레닌, 크룹스카야는 런던에서 프라임로즈힐을 자주 다녔다. 왜냐하면 당시 6펜스면, 동네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었으며, 안개마저 자욱한, 거대한 런던 전경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르크스도 묻혀 있는 묘지는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둘도 자주 걸어가곤 했다


런던에서는 페테르부르크 모임에서 야쿠보바를 만났다. 매우 활동적인 노동가였다. 크룹스카야와는 자스타바 지구에서 일요야간 학교에서도 함께 일했었다. 되도록 이전에, <노동 사상>에 대해서는 잘 말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마르토프, 자술리치도 도착했으며, 알렉세예프와 생활했다. 레닌은 대영박물관에서 자리를 잡고는 작업을 했다. <불꽃> 조직원들은 러시아에서 활동하면서도, 해외에서는 <불꽃>, <여명>, 여러 소책자들과 문건들을 다시 인쇄해서, 여러 위원회들에게 배포하는 일을 맡았으며, 모든 비합법적인 활동으로부터 통신문을 공급하고,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일로 바빴다. <불꽃>에 관련된 모든 편지를 레닌은 죄다 읽곤 했다. 그래서 어떤 조직원들은 무엇을 하는지를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모든 활동을 논의했다. 연락이 단절되면, 이어서, 여러 소식들을 알려 줬다. 니나라고도 불린 <불꽃>, 인쇄소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 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절박한 상태에서, 여러 문제들에 대해 답했다. 엄격한 보안 속에서 계획하고, 활동할 수 있는 조직들도 필요하다고 모두들 절실하게 느꼈다. 1902, 6, 벨로스토크에서 분트로부터 조직한 회의도 열렸다. 페테르부르크 조직에서는 마냐라는 노동 위원회, 바냐라는 지식인 위원회로 나뉘었다. 노동 위원회에서는 경제 투쟁을 주로 벌였고, 지식인 위원회에서는 정티를 담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혁명 정치보다는 주로 자유주의 정치 쪽이었다. 경제주의도 마찬가지로, 원론적이었고, 지역에서도 공고했다. <불꽃>은 정당한 평가를 내렸다. 레닌도 조직에서 구조를 올바르게 세우고자 올바른 투쟁을 지도했다따라서 <노동자 대의>에서 내세웠던 노동가, 지식인 벽을 무너뜨렸다. 1902-1903년에는 겨울에는 노선 투쟁도 벌어졌고, <불꽃>파는 입지를 늘려갔다레닌은 여러 경향들과 싸워나갔고, <불꽃>파에서 투쟁 방향을 제시했다. 그러나 <노동자 대의>파에서 경제주의들은 영향력을 앗아갈까봐 두려운 나머지, 해외파 지령에도 분개했다. 플레하노프와도 페테르부르크 조직과 구조에 대한 같은 문제를 많이 나누었다. 19029월 초예카테리노슬라프 감옥에서 탈출한 바부슈킨도 동지들과 혁명가로 단련됐다. 런던에는 플레하노프도 방문했다. 바부슈킨과도 만나서 러시아 문제들을 같이 다뤘다. 바부슈킨은 러시아로 돌아갔고, 1906, 시베리아에서 무기를 수송하더 붙잡히고는 다른 동지들과 노상 묘지에서 총살당했다. 여러 <불꽃파> 동지들도 런던으로 왔다.

 

19028월 중순, 대중적인 비합법 노동 기관지이자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조직 기관지였던 <남부 노동자>에서 편지도 왔다. 남부는 침탈당했고, 편집부로는 <불꽃> <여명> 조직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자 견해를 지지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불꽃>과 자유주의 간 논쟁에서 불만을 표했다190210월 초, 트로츠키도 런던을 방문했다. 트로츠키는 <불꽃>파였다. <불꽃>을 돕고자 파리에서 주로 자리를 잡았다. <인민 의지> 조직원이었던, 올레크마에서 유형을 살던, 예카체리나 미하일로브나, 알렉산드로바 자크도 왔다. 여러 노장 혁명가들도 만났고, <인민 의지> 조직원들도 존중했다. 레닌은 조직원들에게 친절했다. 보리스 골드만도 있다. 페체르부르크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동지였고,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이라는 투쟁 동맹에서 알게 된 사이였다. 훗날 미치고 말아서는 권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비합법 생활이란 고달팠고 힘겨웠기 때문에 쉽게 버틸 수는 없었다. 결국 치열했던 보리스 골드만도 이겨내지는 못했다.

 

대회 준비 작업은 강도 높았고, 190211, 조직 위원회를 구성했다. 분트는 위원회에 들어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여러 지역들에서 대회를 연계하고, 조직 위원회와도 연결하는 작업은 늘 레닌 몫이었다. 도왔던 포트레소프도 몸은 아팠다. 마르토프마저 런던 도시라는 숨 막히는 생활을 견디지는 못하다가 파리에서 머물었다. 플레하노프와 악셀로트마저 사람을 그리워하다가, 파리로 떠났다. 자술리치는 런던에는 머물렀으나, 정작 러시아와 연락을 취할 줄은 몰랐으므로, 모두 레닌 몫이었다. 러시아 편지 교환에서도 신경을 곤두 세울 수밖에는 없었다. 몇 주, 몇 달이나 답장을 기다리다가, 잘못된 일이나, 알 수 없는 상태로만 늘 놓여졌다레닌은 당을 창건하기를 바랬었고, 분트는 분트 투쟁에서도 <노동자 대의> 관점에만 여전히 머무르고만 있었다. 분트는 민족에 대한 자치권을 두고는 당과도 보조를 맞출 수 있다고 봤으나, 정작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독립하기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분투로는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과는 독립해서 정치적인 당만 내세웠고, 연대 원칙으로만 당에서 가담하고자 동의했다. 그러나 전술로는 유대계 프롤레타리아트들에게는 살인적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단독으로는 결코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어울릴 때만 비로소 세력일 수 있었다. 분트파는 알지 못했고, <불꽃>은 분트와 강력한 투쟁을 벌여왔다. 그리고 레닌은 분트파를 매우 열심히 투쟁을 벌여나갔다


이를테면, 노동해방모임에서는 제네바로 이전하고자 문제를 제기했지만, 레닌만 홀로 반대했다. 그리고 짐을 꾸렸을 때는 등과 가슴으로부터 염증마저 생기는 신경 질환을 앓았고, 신경은 쇠약해졌다. 발진도 나타났다. ‘복행진이라는 피부병이었다. 요오드를 발랐을 때, 매우 아파했다. 진료비를 1기나 내야만 했고, 영국 의사에게 쉽게 부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진료비가 비쌌고, 영국 노동자들은 민간 처방으로만 치료해야 했고, 제네바로 가는 길에도 레닌은 매우 뒤척이고는 괴로워하다가, 몸져눕고는 두 주일을 지내기도 했다그동안에도, 레닌은 <빈농에게>라는 소책자를 집필했다. 1902, 농민 봉기를 보고는 쉽게 쓰여진 소책자를 쓰고자 했고, 노동가를 위한 당이란 무엇을 원하는지를 설명하고자, 빈농은 왜 노동가와 함께 가야만 하는지를 풀어썼다. 레닌은 농민에게 호소한 맨 처음 쓴 소책자였다.


1903-1905. 


제네바. 


19034, 제네바로 이주했다. 노동 마을 셴부제리로 자리를 잡았다. 여러 대의원들도 방문했다. 제멘치예프 부부는 레닌도 극찬한 운송 전문가였고, 라첸코, 마르토프 등 지역 대표들도 강령, 분트 문제를 논의했다. <남부 노동자>, <불꽃> 편집부 입장은 많이 달랐기 때문에, 자주 의견 충돌도 일어났다. 따라서 두 진영으로 나뉘었고 한 쪽에는 플레하노프, 악셀로트, 자술리치, 다른 쪽으로는 레닌, 마르토프, 포트레소프도 있었다. 편집 위원으로는 새로운 사람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레닌은 삼두 체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같은 구성으로는 <불꽃> 편집부로도 이전과 같은 일을 처리해내기란 벅찼다2차 대회로는 브뤼셀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대회에 대한 보안 수준은 철저했다. 비밀 회담 장소로는 밀가루 창고에서 개최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의결권으로는 43명 대의원, 심의권으로는 14명 대의원이 참석했다. 18981차 대회 때는, 겨우 9명만 참석했다. 레닌도 첫 당 대회였다. 그리고 당 강령, 전술 문제들을 전 당원들이 함께 논의하고자 몇 년이나 기다렸다. 비합법 대회를 소집한다는 건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밀가루 창고에서 플레하노프로부터 개회한 당 대회는 창립 대회였다. 여태껏 당 강령마저 없었다분트를 둘러싼 문제를 주로 다뤘다. 분트로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노동당과 연대 관계만을 유지했고, 독립만을 강화하고자 내세웠다. 이면으로는, 분트는 유대인 지역 수공업자들 정서를 반영하고, 정치 투쟁보다는 경제 투쟁에 더 관심을 보였으므로, 경제주의를 더 중시했다. 그러나 <불꽃> 편집부는 국제적인 단결을 옹호했다. 분트는 민족 간 우호적인 협약만 옹호했기 때문이었다대회 구성 문제를 두고도 토론했다. 조직 위원회는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을 지지하는 해외 거주 문필가 투쟁 모임과 대의원들에게 특수한 규율만 부여하고자 했고, 대회 자체가 아니라 모임으로 축소하고자 했다. 레닌은 격분했다. 조직 위원회는 해산했다. 그러나 <불꽃> 편집부, 조직 위원회, 지역 대의원들도 분트 문제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이었다. 그리고 분트는 실패했다. 대회는 모두 37번 열렀다. 여러 중앙 위원, 후보들도 선출했다. 마르토프, 자술리치, 스타로베르, 악셀로트 등은 레닌, 플레하노프 감독을 두려워했다. 주로 삼두 체제로 구성했다.

 

긴장은 <일보 전진, 이보 후퇴>에서도 잘 드러난다. 분트에 대한 당 안에서 지위, 강령, <불꽃> 노선에 대한 승인 문제 등도 압도적으로 다수 대의원들은 의견 분열마저 보였다. 견해는 달라서 플레하노프, 레닌에 대한 태도를 노골적으로 비판했던 파블로비치, 자술리치, 악셀로트, 트로츠키도 있었다. 그리고 선거 투쟁으로는 대의원들에 대한 도덕적인 결함도 지적했다대회는 막을 내렸고, 의결권을 가진 44명 가운데, 20명은 기권했다. 중앙 위원으로는 글레보프, 클레르, 구르츠, 3명을 선출했고, 중앙 기관지 편집부로는 플레하노프, 레닌, 마르토프를 선출했다. 그러나 마르토프는 정작 편집부를 거부했다자금, 비밀 회동 장소 등을 지원하던 사람들은 멘셰비키 선동으로 넘어가서는 지원을 중단하고는 말았다. 레닌은 중앙 위원들에게 편지를 보내고는 편집부와 협력하기를 지원했다. 그러나 멘세비키 쪽에서는 거부했다. 마르토프와 같은 일로는 논의하고자 했지만, 일부 노선마저 달라갈라지고는 말아서, 멘셰비키와 투쟁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볼셰비키들은 정기적으로 모였다. 레닌은 연맹 대회를 너무나 생각하다가, 자전가를 타고 가다가 그만 전차와 부딪치고는 안구마저 파열할 뻔했다. 붕대를 감고, 창백한 얼굴로 연맹 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연맹 대회에서 멘셰비키로는 볼셰비키보다도 숫적으로는 우세했다. 플레하노프는 <불꽃> 편집부와 타협했다. 플레하노프는 멘셰비키에게 자리를 내주고자, 한 중앙 위원에게 협의회 사퇴를 요구했고, 레닌은 고심 끝에 받아들였다. 마르토프는 <포위 상태>라는 소책자에서 온갖 비난을 가했고, 트로츠키도 마르토프와 같은 태도로는, 플레하노프를 레닌 손바닥 안에 있다고 보고는, <시베리아 대표단 보고>라는 소책자를 냈었다. 따라서 레닌은 다시 반박하고자, <일보 전진, 이보 후퇴>라는 소책자를 집필했다.

 

볼셰비키 대의원들과 지역 조직들은 멘셰비키에 대한 입장을 훨씬 이해할 수 없다고 봤다. 지역 조직들도 대회 결정에 대한 결의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역 위원회들도 볼셰비키 쪽으로옮겨지고, 가담하기 시작했다. 레닌은 주로 겉만 화려한 계획, 보고서에 대한 실상을 짚어냈다. 보그다노프도 나왔다. 비상 연락망이었다. 플레하노프와는 완전하게 결별할 무렵이었다. <인민 권리> 소속이었던 여러 나탄손과 같은 여러 혁명 조직가들도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중앙 위원회는 이중적이고, 기만적인 타협 정치를 내세웠다면, 위원회들은 볼셰비키 쪽에서 지지했다. 결국 중앙 위원회는 <7월 선언>에서 레닌에게 연락 제공을 박탈하고는 말았고, 중앙 위원회를 탈퇴했다. 따라서 22인으로 이뤄진 볼셰비키 모임들은 제3차 당대회를 소집하고자 결의안을 채택했다.

 

레닌은 호텔보다는 주로 대중 식당에서 밥 먹기를 즐거워했다. 크룹스카야와 유럽에서는 배낭 여행을 했을 때는 무거운 프랑스어 사전도 들어있었다. 활기를 되찾은 레닌은 보그다노프 집에서 만났고, 제네바로 돌아올 때는 외곽 근교에서 도서관과 여러 발간하는 신문, 잡지들도 많이 구독했던 독서회로부터 연구를 전념했다. 같은 시기로는 러일 전쟁도 일어났고, 차르 전제 정치에 대한 모든 부패마저 극명하게 드러났다. 일본 전쟁에서도 볼셰비키뿐만 아니라, 멘셰비키, 자유주의마저도 패배했다. 아래로부터는 인민 분노는 물결로부터 치솟아올랐다. 노동 운동도 경찰과 대치하는 대규모 인민 집회와 경찰과 노동자들 간 직접 충돌 소식들도 들려왔다. 따라서 모두들 페체르부르크, 모스크바, 오데사 등에서부터 성장하는 노동 운동에 대해서도 많은 책임을 느꼈다. 자유주의, 사회주의혁명당 당원들도 본모습을 드러냈고, 멘셰비키도 똑같았다.

 

그러나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계급 본능, 창조하는 힘, 역사 사명에 대한 깊은 믿음을 지녔다. 갑자기 생겨난 믿음이 아닌, 마르크스 계급 투쟁에서 이론을 배우고, 깊이 생각했던 시절, 러시아 현실을 거듭 연구하고, 노장 혁명가들로부터 세계관과 투쟁하면서, 투사 개인에 대한 영웅주의를 계급 투쟁이라는 힘이라는 영웅 정신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단지 불가사의한 힘에 눈먼 믿음이 아니라, 깊은 신념과 사태에 대한 더욱 깊은 지식과 현실에 대한 성실한 연구로부터 입각한 신념이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활동한 경험으로도, 노동 계급에 대한 역량과 믿음은 더욱 살아 숨 쉬었다190312월 말, 볼셰비키 기관지, <전진>을 발간했다. 덕분에 러시아로는 혁명 운동들도 성장해갔고, 편지 교류도 늘어났다. 한 달에는 300통 가까이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레닌은 노동가들은 편지를 보내왔고, 농민들과 주로 깊은 관계를 맺었다.

 

혁명도 무르익었고, 피 묻은 일요일로 잘 알려진 1905, 19일 사건 소식은 제네바로도 알려졌다. 마침 레닌은 도서관으로 가던 도중이었다. 루나차르스키 부부를 만나서 소식을 전달 받았다. 페테르부르크에서 큰 일도 일어났다고 보고 받았다. 레닌은 모든 생각을 러시아로 집중했다. 사건을 알고자, 제네바 지역 신문이나, 영국, <타임즈>를 구독했다. 레닌은 혁명이 일어났을 때 모든 전망에 대해서는 더욱 명료하게 파악해갔다. 운동도 커가고, 혁명 인민들도 중도에서 멈추지 않고자, 노동 계급들은 모두 전제 정치와 싸우고자 돌진함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승리하고자 할 수 있는 한 완벽하게 무장했다. 그러나 멘셰비키는 혁명을 구속해야 한다고 봤고,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들에게 실마리를 얻고는 말았다. 1905년 혁명에서 노동 계급들은 패배했다. 그러나 투쟁에 대한 준비는 꺾이지는 않았음에도, 노선을 두고는 무기를 들지 말았어야만 했다는 말 밖에 할 줄 몰랐던 사람들도 있었다. 노동 계급 전위로는 당에서 투쟁하고, 조직하고, 대중을 무장하도록 하고자, 끊임없이 촉구했다. 그리고 레닌은 <전진>에서도 같은 점을 잘 써놓았다.

 

레닌은 19052월 초, <우리가 혁명을 조직해야 한단 말인가>라는 기고문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수 많은 혁명 잠재력, 사회민주주의 조직에서도 결함을 190519일 드러내고는 말았다고 적었다. 레닌은 마르크스, 엥겔스로부터 기록한 혁명, 봉기에 대한 모든 글들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고, 매우 치밀하게 글을 또 연구하고, 심사숙고했다. 전쟁술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책들을 읽었고, 무장 봉기, 봉기를 조직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한 모든 면으로도, 거듭 생각했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여기로 할애했고, 유견전도 벌어질 때는, 공격조로는 5인조, 10인조에 대한 말들도, 깊이를 가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제네바 독서회 직원에 따르면, 레닌은 작업할 때는 바리케이드 전투, 공격 기술에 대한 책을 주로 읽으면서, 사전을 꺼내고는 용어를 찾고자 움직이다가, 깨알 같은 글씨로 쪽지에다, 무언가를 빠르게, 집중해서 쓰곤 했다고 한다. 볼셰비키는 러시아로 무기를 보내고자 모든 수단을 강구했으나, 페테르부르크 안에서 전투 위원회는 정작 매우 느렸다. 따라서 볼셰비키는 무장 봉기에 대한 준비로도 적지 않은 일들도 해냈다. 매순간마다 목숨마저 걸 수 있었고, 영웅적인 실천들도 잘 보여줬다. 어리석었던 가폰 신부로부터 노동가들에게 무기를 조달하는 임무, 비합법 운송 일을 맡기도록 했다. 덕분에 레닌은 불법 여권, 연락망을 가지고, 페테르부르크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은밀하게 무기를 조달할 수 있는 사람으로는, 가폰 신부 같은 사람은 아니었고, 보다 혁명 열정에 불타오른 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온갖 희생을 감수할 준비를 마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었다.

 

레닌은 또 다른 구호로는 농민들에 대한 토지 투쟁 지원이었다. 같은 지원으로부터 노동 계급들은 투쟁에서도 농민들과도 함께할 수 있었다. 2차 대회에서 당 강령으로는, 1861년 농노 개혁 때 지주들에 대한 절취지를 모두 반환하라는 구호를 제기했고, 또 강력하게 요구했다그리고 구체적인 요구로는, 뜨거울 찻물, 노동 시간 단축, 임금 지불 준수 투쟁으로 선동했다농민들 안에서도 폭 넓은 혁명 운동은 일어났다. 탐페레에서 열린 12월 협의회로는 레닌은 절취지에 대한 항목을 강력에서 모두 삭제해야만 한다고 제안했고. 지주 영지, 국유지, 교회령, 왕실령 등에 대한 완전한 몰수로부터 농민에게 혁명 방안들을 지원한다는 항목을 도입했다. 반면 카우츠키는 <신시대>에서, 도시 혁명 운동에서 농민과 지주에 대한 관계 문제로는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노동 대의를 배신했지만, 처음에는 혁명적인 사회민주주의자였다. 베른슈타인은 1890년대 말 마르크스주의와 투쟁하자는 깃발을 내걸고는, 마르크스 학설을 재검토하거나, 사회주의는 목표도 아니고, 운동만이 전부라고 내세웠을 때,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을 반대하고는 마르크스 학설을 더 옹호했었다. 같은 카우츠키 주장에도, 레닌은 농민에 의거할 때만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카우츠키 주장을 들었을 때, 레닌은 카우츠키에 대한 마르크스 학설을 더욱 올바르게 검토하고자 했다. 따라서 레닌은 1848, 미국 농민 운동에서 마르크스 입장, 1885, 헨리 조지에 대한 엥겔스 입장을 경험에서 입각해서 연구했다. 19954, <미국판 흑토재분재에 대한 마르크스 견해>라는 기고문도 내놓았다. 그리고 레닌은 낡은 봉건 제도와 전제주의 노예 제도를 무너뜨릴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 투쟁과 새로운 공화국 창설을 지지했다.

 

제네바는 볼셰비키들에게는 중앙이었고, <전진> 편집부, 배송부, 볼셰비키 식당도 있었다. 여러 동지들도 거주했다. 볼셰비키는 란돌트 카페에도 모여 맥주잔을 기울이거나, 러시아에서도 일어난 삭너들을 논의하고, 계획을 수립하곤 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제3차 당대회를 위한 선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수파 위원국도 구성했다. 멘셰비키도 있었지만, 중앙 위원회는 타협적인 입장만 취하고는 제3차 대회 소집에 대해서는 자주 제동을 걸었다. 대회는 런던에서 개최했다. 여러 대의원들과 당원들은 1905, 혁명 시기 크라신 전투원들을 무장하도록 하고자, 전투조 훈련을 지도하고, 비밀리에 막중한 대대적인 활동을 수행했다. 여러 러시아 대의원들도 대회에도 참석했고, 러시아에서 노동 운동도 고조했다. 무장 봉기, 임시혁명정부, 정부가 벌일 전술에 대한 태도,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에서 공개 행동에 대한 문제, 농민 운동에 대한 태도, 자유주의에 대한 태도, 사회민주주의 민족 조직들에 대한 태도, 선전과 선동, 당에서 분리파 등등 여러 결의안들도 채택했다.

 

레닌은 주로 농업 문제에 대해 보고했고, 절취지 항목에 따라 지주, 황실, 교회 등에서 소유한 토지 몰수 문제를 전면으로 배치했다. 그리고 노동가, 지식 계급 사이에서 관계 문제도 다뤘다. 2차 대회로는 많은 문필가들이나, 노동 활동가들은 결속력이 매우 약했지만, 3차 대회에서는 조직들도 이미 골격을 갖췄다. 그러나 조직들은 비합법 조직이었고, 어려운 보안 조건에서 활동했다. 레닌은 노동자들도 위원회로 가입해야만 한다고 열렬하게 내세웠다. 여러 새로운 문제들도 제기했찌만, 그러한 문제들은 정작 비합법 조직 틀 안으로는 해결하기란 어려웠다. 따라서 러시아에서 일간지를 발행하고, 폭 넓게 합법으로도 출판물을 낼 때만 그러한 문제들은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출판 자유를 쟁취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러시아에서 비합법 신문을 출판하고, 대중 신문 문제를 전담할 문필가 모임을 조직하기도 했다. 3차 대회는 올바른 투쟁 노선을 선정했고, 레닌은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당이라는 두 가지 전술>에 대한 소책자를 집필했다. 출판 자유에 대한 조짐들도 여럿 보였다. 해외에서도, 중앙 위원회에서도 비합법 소책자들을 합법으로 출판해주겠다고, 여러 출판사들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중앙 위원회는 자체 출판사를 만들 계획이었다. 그리고 레닌은 중앙 위원회에다 플레하노프가 아닌 국제 사무국 대표로 다수파, 오를롭스키를 지명하고자 부탁했고 1905, 플레하노프는 러시아로 가지 않았다.


레닌은 페테르부르크에서도 늘 기다리는 처지였다. 경찰 끄나풀도 뒤를 쫓기도 했다. 독일어를 쓰는 핀란드 행동당원과도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레닌은 남의 집에서 지내기를 매우 불편해했다. 따라서 일도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빈 집을 둘러보던 가운데 문지기와도 대화하기도 했다그리고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체류를 위한 신분증을 발급받고자 애썼다. 러시아에서는 <신생활>도 발행했다. 여러 볼셰비키 모임들도 가담했다. 해당 일간 신문은 두마 회의에 대한 소식을 전달하기도 했다. 레닌은 선전가가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선동하는 일보다는 노동계급들 스스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를 더 바랬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이라는 기고문도 당에서는 명확한 구호를 제시한 지침서였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농민과 함께 토지와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및 농업 노동계급과 함께 사회주의를 위해서도 투쟁했다. 노동대표소비에트도 볼셰비키 대표와 같은 관점을 표명했다. 노동대표소비에트는 레닌은 해외에 머물고 있을 때, 1905, 1113일에 생겨난 프롤레타리아트 전투 기관이었다. 자유경제연구회에서도 레닌은 농업 문제에 대해서 보고했고, 또 연설하기도 했다. 그리고 임시혁명정부는 혁명 운동이라는불길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었고, 다른 쪽으로는 사회민주주의당으로는 노동대표소비에트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자 했다. 이윽고 서기국을 구성했고, 전투 조직을 꾸려서 주로 서기국과 관리가 아닌 기억에 의존해서 직접 실천해서 활동했다. 정부와 결전도 가까워졌으므로, 레닌은 군대는 중립적일 수 없다는 글을 <신생활>에서도 공개적으로 썼고, 전 인민에게 무장 봉기에 대한 글도 썼다. 19051126, 트로츠키는 체포된 동지에 대한 자리를 대신하기도 했다. 1905, 12월 중순에는 탐페레 회의를 개최했다. 볼셰비키는 비공식으로는 탐페레 회의에서 무장 봉기를 준비했고, 고조된 분위기에서, 휴식 시간에는 사격 연습을 했다. 그리고 무장 봉기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리고 핀란드 대중 횃불 집회에도 참석하기도 했다. 몇 사람은 침울한 상태에 빠지고는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할 수 있는가를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페테르부르크에서도 노동계급들마저 차르 전제 정치로부터 지쳐있는 상태였고, 결전을 수행하고자 빈약하게 무장했다. 따라서 모스크바 봉기는 투쟁으로 몸소 보였다.


1905-1907.


12월 봉기를 진압했고, 정부는 봉기에 가담한 사람들을 참혹하게 대했다. 레닌도 모스크바 패배를 받아들였다. 노동 무장도 빈약했고, 조직도 허약했고,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연대마저도 엉망이었다. 레닌은 1906년 봄, 농민에게 배웠고, 파업 투쟁으로 소진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힘을 비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노동계급 당에서 임무를 보다 명확하게 제기하고, 입헌적인 환상을 버리고, 새로운 세력을 모으자고 일축했다. 따라서 전제 정부로부터 지하 투쟁을 잠입해서 감행했다. 러시아 각지에서도 동지들은 모였다. 여러 수행할 활동 노선을 합의해나갔다. 주선으로부터 여러 비밀 장소도 마련했다. 장소로는 서점, , 병원, 등이었고, 주로 비합법 선전물을 발행하거나, 보관할 수 있는 곳들이었다. 레닌에게 미행이 붙은 적도 있었다. 미행을 피해서 레닌은 19064, <입헌 민주주의 당에서 승리, 노동당에서 임무>라는 소책자를 썼다. 또한 통합 대회를 위한 여러 결의안들도 작성했다. 페레트부르크에서 토론을 부치고는 고등학교로 사용하던 한 가족 집이나, 교실들 가운데 한 곳에서 토론을 했다. 볼셰비키는 매우 높은 결속력을 유지했다. 일시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꾸준한 신념으로 잘 뭉쳤다. 레닌은 페테르크부르크 노동계급들에 대한 한 보고서에서는, 대회는 농민에게 혁명 진격을 지원하고, 작은 부르주아 유토피아를 비판해야함을 물론이고, 대회는 어디서는 선거를 참가할 수 있고, 또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트 행동은 통일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해당 보고서는 같은 해, 5, <전진> 출판사에서 나왔다. 레닌은 1906, 59, 파니나 인민 회관에서 열린 경찰 없는 노동 강당에서 가명으로 러시아에서도 공개적으로 연설했다. 그러나 대중들도 레닌을 알아보았고,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모든 사람들도 끝을 보고야 말 다가오는 투쟁을 생각했다. 사람들은 붉은 옷을 찢고, 혁명가를 부르고 다들 지역으로 흩어졌다. 집회를 마치고 레닌은 레첸코 집에서 밤을 지냈지만, 혁명 기간 동안 레닌은 다시 대규모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연설하지는 못했다


1906524, <물결>은 폐간됐다. 그러나 이틀 뒤로, 1906526, <전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발행했다. <전진>1906, 615일까지 있었다. 1906, 622, 볼셰비키 새로운 기관지 신문, <메아리>를 출판할 수 있었다. <메아리>1906, 77일까지 있었다78일에는 두마는 해산했다1906, 6월 말에는 막 바르샤바 감옥에서 출옥한 룩셈부르크도 페테르부르크로 왔다. 레닌, 볼셰비키 지도부에서는 룩셈부르크를 만나기도 했다. 파파 로제라는 노인으로부터 주선했고딸도 교사였고,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큰 빈 집을 만남 장소로 빌려줬다. 레닌은 1906, 5월에는 주로 두마에 대한 글로 꽉 채웠다. 당 문제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로 강연하기도 했고, 그러나 정작 교사 모임에서는 러시아 사회민주당이 아닌, 사회혁명당에 대해 우호적인 분위기였고, 레닌에 대해서도 딴지를 걸었다. 토지 문제에서 사회혁명당원들은 정작 관료, 자유주의 단결로 밝혀졌고, 동요하던 근로파는 노동계급 쪽으로 가담했다. 그러나 정부는 두마를 믿지 못했고, 평화 시위를 탄압하거나, 집회를 열던 건물을 불태우고는, 유대인을 괴멸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190678, 두마는 해산했고, 여러 사회민주주의 신문들도 폐간됐고,각종 탄압, 체포를 시작했다. 크론슈타트, 스베아보르크에서 봉기도 일어났다. 볼셰비키 조직원들도 가담했다. 침탈도 일어나서 봉기 전보를 기다려야만 했다. 볼셰비키는 비합법 신문으로는, <프롤레타리아>를 다시 발간했고, 멘셰비키는 또 뒷걸음질치고는 부르주아 언론에게 또 글이나 썼고, 무소속 노동 대회라는 뜬구름이나 잡는 구호나 내걸었다. 그러므로 당 청산을 뜻했다. 볼셰비키는 비상 당 대회를 요구했다.


레닌은 핀란드로 망명해야만 했다. 볼셰비키였던 한 가족에게 부탁해서 집 한 쪽 구석방을 빌렸고, 기고문, 소책자들을 썼다. 중앙 위원들,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들, 지방에서 찾아온 사람들 모두 집으로 레닌을 보러 왔다. 러시아 경찰은 핀란드까지 오지는 않았다. 여러 자료, 신문, 편지 등을 담당하는 사람은 매일 레닌에게로 왔다. 레닌은 보내온 모든 걸 검토해보고는 자리에 앉아서 곧바로 글을 쓰거나, 가지고 온 사람 쪽으로 도로 보내주곤 했다. 레닌도 페테르부르크로 달려가고자 늘 열망했고, 늘 최대한 긴밀한 연락을 유지했음에도, 보그다노프와 카드 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가을부터, 비합법 신문 <프롤레타리아>는 비보르크에서 발간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신문에다 많은 시간, 정성을 쏟았다. 연락은 주로 슐리흐체르 동지로부터 이뤄졌다. 비합법 신문, <프롤레타리아>는 페테르부르크로 반입해서 각 지방으로 배포했다. 지역 주민들은 모두 유능한 조수들이었고, 보안도 잘 지켰고, 운반과 배송을 잘 조직해서 는 문건을 전달할 주소를 미리 확보해뒀다. 그리고 무슨 일이라도 호기심을 함부로 품지는 않았고무엇도 잘 묻지는 않았다1907220, 두 번째로 두마를 소집했다. 11월 협의회에서 레닌을 수장으로 두고, 폴란드, 리투아니아 대의원들을 포함한 14명 대의원들은 두마 선거에서 찬성 입장을 표명했다. 입헌민주당과 멘셰비키로는 어떠한 연합도 하지 않았다. 같은 구호 아래로 두마 선거와 관련해서 볼셰비키 활동도 진행했다. 따라서 입헌민주당 당원들은 의석은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치고는 말아서 패배했다. 선거는 거듭 지연됐다. 그러나 혁명 물결은 솟아올랐다. 페테르부르크에서도 보그다노프는 볼셰비키 의원들을 지도했다. 그리고 볼셰비키는 두마에서도 두각을 보였다. 볼셰비키 분파는 모두 늦은 밤까지 조성한 정세에 대해서 밤새워 논의했다. 레닌도 대회나 여러 일들로 늦게 돌아온 날이면, 극도로 지치거나, 신경마저 날카로워지고는 무엇도 먹지를 못하곤 했다. 레닌은 쉽게 지쳤고 또 쉬고 싶었다. 그래서 노래를 듣거나 바닷가를 보러갔다.

 

동지들은 레닌을 핀란드 오지로 거처를 옮겼다. 레닌은 그간 겪은 경험을 세세하게 되새김질하고는 종일 농업 문제에서 <사회민주주의 농업 강령>에 대한 글을 썼다. 러시아 경찰은 레닌을 찾느라고, 핀란드 전역을 다 뒤지고 다녔다. 반동도 계속됐기 때문에, 다시금 스위스로 가야만 했다. 또한 핀란드에서도 <프롤레타리아>를 발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당이든, 당원들도 등등 가릴 거 없이, 모두 러시아 사람들은 해외로 옮겼다. 1907, 베를린에 잠깐 들리기도 했다. 룩셈부르크를 만났고, 레닌은 전쟁 문제로 잠시 연대했었던, 슈투트가르트 대회 뒤로 매우 친해졌다. 대회에서 전쟁 반대 투쟁은 그저 평화를 위한 투쟁으로만 그쳐서는 안 되고,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완전하게 대체해야만 한다고 내세웠다. 따라서 전쟁으로부터 촉발한 위기로는 반드시 부르주아지 타도를 촉진해야만 했다.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는 굵직한 여러 문제들도 다뤘고, 국제 사회민주주의에서 기회주의 진영, 혁명 진영들은 서로 어떻게 대립하는가를 두고 혁명 마르크스주의 정신으로부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따라서 룩셈부르크와 레닌도 함께였다. 레닌은 19071225-190817일 사이로 잠시 앓아누웠던 동안에는, 제네바로 몸을 옮기기도 했다. 레닌은 고리키에게 감기를 앓았다고 편지를 보냈다.


1907-1910. 


반동기.


레닌도 크게 세 차례나 망명 시기를 거쳤다. 1908-1911, 반동기로는, 차르 정부는 혁명가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감옥은 차고 넘쳤고, 극도로 견디기 힘든 징역살이로부터 상습적인 구타를가했고, 사형 선고도 줄을 이었다. 따라서 비합법 조직들도 지하 깊숙하게 잠적해야만 했다. 그러나 잘 성공하지도 못했다. 당 구성원도 많이 바뀌었다. 차르 정부는 첩자들을 조직하는 데 돈을 많이 들였다. 당 중앙 기관들까지 요원들은 고안되어 들이닥치곤 했다. 정부 정보 수준도 모범이 될 만큼이었다. 모든 합법 단체들, 노동 조합, 언론 등 활동에 대한 체계적인 탄압도 진행했다. 정부로는 노동 대중들로부터 쟁취한 집회 권리, 토론 권리, 스스로를 조직할 권리 등을 빼앗는 데 더욱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노동 계급들은 독자적인 활동을 펼쳐 나갔다. 같은 해로는 사회민주주의로는 극심한 이념적인 붕괴를 겪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매우 근본적인 내용에 대한 재검토도 생겨났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전체를 둔 유물론 세계관마저도 뒤흔들려는 철학적인 경향들도 생겨났다. 암울한 현실이었다. 종교로부터 해결책을 찾고자 했고, 종교로부터 부여하고자 철학적인 근거들도 생겨났다. 학파 수장으로는 보그다노프였으니, 온갖 구신론이니, 창신론이니에 따라 문호를 개방했다. 루나차르스키, 바자로프 등도 같은 진영으로 합류했따. 마르크스는 철학으로부터, 또 관념론 투쟁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로 도달했다. 플레하노프는 유물론 세계관에 대한 기반을 닦고자 열중하기도 했다. 레닌은 여러 저작들을 학습했고, 유형지에서도 철학을 열심히 배웠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를 철학으로 수정하려는 여러 함의나, 반동기로부터 갖는 비중을 매우 심각하게 여겼다. 그래서 레닌은 보그다노프와 학파를 매우 신랄하게 비판했다.

 

보그다노프는 철학 전선만이 아니라, 주위로는 소환주의, 최후통첩파를 끌어모았다. 소환주의들로는 두마를 반동화했고, 사회민주주의 의원들을 두마로부터 소환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최후통첩파는 주마를 제명하도록 만들 연설로부터 사회민주주의 의원들에게 두마 연단에서 할 수 있도록 최후통첩을 밝혀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본질로 보자면, 소환주의, 최후통첩파 사이로는 무엇도 다르지 않았다. 최후통첩파로는 알렌신스키, 마르트도 있었다. 그들은 볼셰비키로는 무조건 노동 조합이나, 합법 단체로부터 참여하기마저 반대했다. 단지 타협해서도 안 되고, 볼셰비키는 늘 굽히지도 말아야만 하기 때문이라고만 했다. 그러나 레닌은 같은 관점을 오류라고 봤다. 모든 실천 활동, 대중으로부터, 현실에서도 조직에 대해서 더욱 멀어지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로는 1905, 혁명 전 시기로도 모든 합법으로부터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활용할 줄 알았고, 힘겨운 조건에서도 대중들도 늘 끌어들일 줄 잘 알았다. 단지 차 마실 뜨거울 물을 확보하고자 벌인 투쟁, 환풍기 설치를 위한 투쟁부터 시작해서, 한 걸음씩 차근차근 대중을 전 인민 무장 봉기로 이끌어냈다. 어려운 정세에서도 적응하면서도, 원칙으로는 일관성을 지키고, 혁명 입장을 양보하지도 않았다. 바로 레닌주의 전통이기도 했다. 소환주의들로는 볼셰비키 전통과도 결별했다. 소환주의에 대해서 벌인 투쟁이란 시련으로부터 단련한 볼셰비키, 레닌 전술을 지키고자 벌인 투쟁이었다.

 

따라서 1908, 1911년까지 몇 해 동안이나, 당을 지키고자, 당에서 비합법 조직을 지키고자 격렬한 투쟁 기간도 있었다. 반동기로 접어들어, 쇠락한 분위기를 드러낸 조직으로는 멘셰비키 활동가들이었고, 늘 여러 경향에 따라서만 휩쓸려 다녔고, 혁명 구호를 축소하고자 했고, 자유주의 부르주아들과 긴밀한 관계를 늘 유지했다. 따라서 쇠락하는 분위기로는 폭 넓은 층으로부터도 멘셰비키는 당을 청산하고자 심혈을 기울였다. 청산주의들에게 비합법 당이란 탄압으로부터 괴멸만을 초래할 뿐이었고, 노동 운동 범위를 축소하도록 만든다고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합법 당을 청산한다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로는 독립적인 정치를 포기하라는 말이었고, 프롤레타리아 투쟁에서도 혁명 정서를 폄하하도록 만들거나, 프롤레타리아트 조직, 행동에 대한 통일을 가로막고, 약화하도록 했다. 플레하노프도 한때로는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고, 기회주의 투쟁에서도 많은 일을 했었으며, 멘셰비키로는 청산주의 정서를 가진 채로 반동에 대한 일체를 모를 일도 없었고, 당 청산이라는 설교로는 마르크스주의 기초 자체로부터도 청산으로부터 발전해서는 무슨 일이든 자신들에 대한 경계를 분명하게만 하거나, 자신들에게 이로운 모임, 곧 멘셰비키 당 유지파 모임을 이루고자 했다.

 

당을 지키고자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수 많은 조직 문제들도 분명하게 밝혔고, 폭 넓은 수로 당원들도 당 역할, 당원 의무에 대해서도 보다 정확하고, 깊이 있게 이해했다. 유물론 세계관을 지키고자 위한 투쟁, 대중과 접촉을 위한 투쟁, 레닌 전술을 위한 투쟁, 당을 지키고자 위한 투쟁은 망명으로부터 엄혹한 조건에서 벌어졌다. 차르 정부로부터 탄압을 피해서 사람들도 끊임없이 해외로 도망쳤으므로, 따라서 망명가 수도 무섭게 늘어났다. 심신마저 쇠약해졌고, 전망도, 한 푼돈도, 러시아로부터 받을 수 있는 어떠한 도움이나 손길마저 없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투쟁을 더욱 힘겹게만 만들었다. 그래서 논쟁, 욕설마저 난무했다레닌 노선은 삶으로도 옳았다고 더욱 확실하게 입증해 준 현재로는 정작 투쟁에 대해서는 별 관심마저 없는 사람들도 많겠다. 그러나 투쟁은 없었더라면, 당은 신속하게 활동을 전개할 수조차 없었고, 승리를 향한 길 역시나 힘겹기만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는 레닌 성격, 신랄한 태도, 괴팍한 성격 따위만 모든 사태 핵심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투쟁이란 당 존속, 흔들림 없는 노선, 올바른 당 전술 등을 위해서였다. 논쟁에서도 늘 날카로운 양상을 보이는 이유로도 여러 문제들도 혼란스럽게 얽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레닌은 신랄하게 문제를 제기하지조차 않으면, 문제에서 본질 자체마저 묻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08-1911년으로 이르는 몇 년은 단순하게 해외에서 그저 체류만 하던 시기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전선으로는 사상 투쟁이라는 전선으로부터 긴장된 투쟁도 벌어졌던 시기였다.

 

1911-1914, 망명 기간으로는, 파업 투쟁을 성장하도록 했고, 노동 계급들도 단결해서는 1912, 4, 시베리아 레나 금광 사건, 노동 언론에 대한 발전, 두마 선거, 두마 안 사회민주주의 의원들 활동 등, 당 활동도 새로운 형태로 전개했다. 규모도 새로웠고, 노동 당원 수도 빠르게도 늘어났다. 당은 대중에게도 가까웠다. 러시아와 관계도 빠르게 강화했고, 러시아 활동에 대한 영향력도 커졌다. 19121, 프라하 당 협의히에서 청산주의들을 제명했고, 비합법 당 조직을 공식화했다. 그러나 플레하노프는 볼셰비키와 함께하지는 않았다1912, 크라코프로 자리를 옮기고는, 당을 지키고, 당을 더욱 강화하고자 벌인 투쟁으로는 해외 모임 안에서만 진행할 수는 없었다. 크라코프 시절로는, 러시아에서 레닌 전술은 옳았다고 입증한 시기이기도 했다. 레닌은 대중당에서 실천 활동이라는 문제로도 전적으로,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노동 운동은 더 폭 넓게 전개했다. 때를 같이해서 국제 전선으로는 전쟁 냄새마저 더욱 짙어지기만 했다. 레닌은 전쟁은 발발해서, 내전으로 전화할 경우로는, 많은 민족들 사이에서 정립해야 할 상호 관계라는 문제를 새롭게 생각했다. 레닌은 폴란드 사회민주주의들로부터 민족 문제에 대한 관점을 가깝게 접하기도 했다. 또한 잘못 생각하고 있다면 줄기차게 싸웠고, 더욱 정확하고, 명료하게,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정식화했다. 따라서 덕분에 볼셰비키로는 매우 중요한 속뜻을 지닌 여러 결의안들도 채택할 수 있었다.


1914-1917, 망명 기간으로는 전쟁기를 아울렀고, 망명 생활 전반으로도 빠르게 바뀐 시기였다. 국제적인 성격을 지닌 문제들은 결정하기로도 중요했고, 러시아 문제들도 오로지 국제 운동 관점으로만 다룰 수 있었던 때이기도 했다. 러시아 문제들은 이전과는 다른 토대로부터, 훨씬 더 폭 넓고, 국제 토대로부터 다뤄졌다. 중립국이었던 러시아로는 제국주의 전쟁에도 맞서는 투쟁을 선전하고,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하도록 선전할 수 있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대한 기반을 다지고자, 레닌도 온 힘을 쏟아 부었다주위로부터 일어난 여러 사건들에서도 영향을 받았고, 하나로는 새로운 생각을 했다. 제국주의, 전쟁 성격,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승리한 직후로부터 이뤄질, 새로운 형태 국가 권력, 노동 계급 정책, 전술로부터 적용할 변증법 방법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하고 싶어했다. 취리히에서는 일을 하기로는 매우 적합했고, 베른에서 취리히로도 거처를 자주 옮겼다. 덕분에 레닌은 집필에만 완전하게 몰두할 수 있었고, 마침 2월 혁명 소식도 와서는 러시아로 돌아갈 채비를 할 때까지는 종일 도서관에서만 지냈다.


1908, 제네바로 도착한 날에는 알렉신스키에게 편지를 썼다. 두마 볼셰비키 의원이었고. 다른 볼셰비키 의원들과 함께 징역형을 선고받고는 해외로 망명해서 오스트리아에서 살았다. 그리고 이틀 뒤로는 고리키에게 답장했다. 고리키는 레닌에게 이탈리아, 카프리로 방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카프리로 당장 갈 수는 없었다. 당 비합법 중앙 기관지로는 <프롤레타리아>를 제작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중앙 기관지 제작은 체계적인 지도로부터 신속하게 확립하고자, 할 수 있는 한 빨리 일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레닌 지난 몇 년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고리키와 나누고자 했었지만, 미룰 수밖에는 없었다. <프롤레타리아>를 제네바에서 발간할지를 두고는 미정했고, 다른 장소에서도 발간할 수 있을지도 결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 아들러, 유제프 제르진스키에게도 편지를 썼다. 신문을 인쇄하는 쪽은 수송보다 더 쉬웠다. 1908, 2월에는 <프롤레타리아>를 만들고자 여러 동지들과 제네바로 모였다. 편집부 삼두 편성으로는 레닌, 보그다노프, 인노켄치였다. 비엔나에 있던 트로츠키에게도 편지를 보내고는 <프롤레타리아>로 협력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거절했다. 볼셰비키와 함께 일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었고,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않았고, 바쁘다는 핑계만 댔다. <프롤레타리아> 수송 체계를 갖추고자 조치를 취했다. 여러 선원들, 노동가들로부터 오데사로 문건을 수송하는 방법에 대해 편지를 주고받았다19077, 치플리스, 에리반 광장에서 강탈을 감행했다. 볼셰비키는 전제주의 전선과도 싸웠고, 차르 국고를 강탈하고자 수탈해갔다. 그리고 치플리스 강탈 사건으로부터 얻은 돈으로는 볼셰비키에게 그대로 전해졌고, 모두 큰돈으로는 500루블짜리 지폐였고, 일련 번호를 갖고 있었으므로, 러시아에서는 환전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해외로 가서 환전할 수밖에는 없었다. 동지들은 해외 여러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500루블짜리 지쳬를 환전했다. 한 사람은 경찰에게 밀고해서는 동지를 체포하기도 했다. 차르 정부로부터 혹사당하는 혁명가들을 위해 감옥으로부터 탈출하도록 해야만 했고, 운동을 위해서는 비합법 인쇄소마저 세워야 하는 등 할 일도 많았다.

 

스위스 당도 너무나 기회주의 분위기는 널려 있었으므로. 환전을 두고는 스위스 주민들은 러시아 강도들이라고 봤고, 매우 민주적인 나라에서 최고로 공정한 재판을 이뤄지기 때문에 자국 영토 안에서 재산에 대한 범죄 행위를 용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로는 체포한 사람들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스웨덴 사회 민주주의도 일에 개입할 태세였다. 멘셰비키로는 1905, 모스크 봉기를 비난했고,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위협할 수 있는 모든 걸 반대했다. 혁명은 패배했을 때조차도, 부르주아 지식 계급은 혁명에서 발 뺀 건, 계급 본성 때문이 아니라, 볼셰비키 투쟁 방법으로부터 위협했기 때문이라고만 해석했다. 혁명 투쟁마저 고양할 때, 혁명 목적으로부터 수탈자에 대한 수탈을 할 수 있다는 볼셰비키 주장마저 신랄하게 비난하기만 했다. 왜냐하면 맨셰비키 견해로는 볼셰비키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볼셰비키와 투쟁은 피할 수 없다고 봤다. 그리고 볼셰비키와 투쟁에서 모든 수단을 다 쓰고자 허락까지 했다악셀로트는 1908226, 플레하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외국인들 눈 앞에서 볼셰비키 위신을 실추하도록 할 방법에 대한 계획을 설명해 놓고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사건 전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독일어, 프랑스어로 번역해서는 독일 당 지도부, 카우츠키, 아들러, 런던 국제사회주의사무국 등에다 보내기를 제안까지 했다. 1925년 출간한 악셀로트 편지에서도, 볼셰비키, 멘셰비키에게 길마저 서로 얼마나 멀었는지를 더할 수 없이 잘 보여준다.

 

레닌은 제네바에서 체포된 세마슈코에게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 대표로부터 국제사회주의 사무국에다 공식 성명서를 보냈다. 고리키에게도 편지를 썼고, 스위스 언론에다 옹호하는 글을 실었다. 그리고 세마슈코는 석방됐다. 레닌은 종일 도서관에서만 지냈다. 그러나 셋방은 저녁에 춥고 삭막했으므로, 주로 밖으로 나와 날마다 극장이나, 공연장으로 다니곤 했었다. 비록 끝까지 자리를 있지는 못했고, 중간쯤 일어나 나와서는 아무 곳이나, 주로 호숫가를 쏘다니곤 했다. 마침내 19082월에는 제네바에서 발간한 <프롤레타리아>, 21호는 나올 수 있었다같은 기고문에서 레닌은 혁명 부대 공격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당을 만들 수 있었고, 부르주아 혁명 단계에도 얽어매지 않으면서도 사회주의로 곧장 나아갈 수 있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 당은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약점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레닌은 한 동지에게 190510월에 대해서는, 노동 무장, 전투부대 조직, 봉기 조직, 권력 획득이라는 문제들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에 대해 상세하게 회고록을 써보라고 조언해주기도 했다왜냐하면 레닌은 혁명 경험은 훗날 몫을 다할 수 있다고 봤고, 또 치밀하고도, 주의 깊게 연구해야만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투쟁에 참가했던 모든 사람들을 파악했고, 오랜 시간이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레닌에게 노동 계급에게 주어진 과제로는 지식 계급, 소시민이 내팽개치고만 혁명 투쟁이라는 전통을 지키고, 같은 전통을 발전하도록 하고, 강화할 수 있도록, 폭 넓은 인민 대중이라는 의식 속에서 전통을 심어주고, 다음에 올 필연적인 민주화 운동 약진으로부터도 틀림 없이 굳게 지지할 수 있다고 봤다. 1905년이라는 해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모범을 바로 보여줬다. 지식 계급, 소시민에게는 미친 해였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지에 대한 모범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로는 혁명 경험을 연구하고, 몸소 비판할 수 있도록 투쟁 방법을 더욱 성공하고자 적용하는 법을 배웠고, 10월 파업 투쟁, 12월 무장 투쟁도 더욱 폭 넓고, 더욱 집중하고, 계급 의식으로까지 만들기 위함이었다. 레닌은 다가올 몇 해를 두고는 새로운 진격을 위해 준비하기도 했다. 레닌은 반동이라는 조건 속에서도 투쟁 노선을 정립해야만 했다. 당 활동을 지하로까지 옮겨 가면서도, 합법 공간을 쓰고자 두마 연단으로부터 폭 넓은 노동 계급, 대중에게도 말할 수 있는 방법을 깊이 따져봤다. 레닌은 반동에서 활동 전개에서 어렵다고 도망치는 소환주의를 두고는 좌파 청산주의로 평가했다. 알렉신스키와 같은 분트파만이 아니라 볼셰비키 분파로는 보그다노프를 주축으로 이뤄진 보그다노프, 루나차르스키, 바자로프, 수보로프, 베르만, 유슈케비치, 겔폰트 등 기고문들로 이뤄진, <마르크스주의 철학 논고>라는 책을 발간했고, <논고>는 유물론 세계관, 마르크스주의와 계급 투쟁에 대한 이해마저 수정하고자 했다그리고 신비주의에게 문을 열어주고는 수정주의라는 반동으로부터 얼룩덜룩한 색채로 전개해갔고, 지식 계급 사이에서도 쇠락하는 분위기를 여러 모로 부추겼다. 따라서 레닌은 선을 그을 수밖에는 없었다. 레닌은 늘 철학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다. 유형지에서도 철학을 열심히 배웠고, 헤겔, 포이어바흐, 칸트 등을 연구했다. 심지어 시베리아에서 유형을 살 때도 레닌은 칸트로부터 경도된 동지들과 격론을 벌이기도 했고, 같은 문제로는 <신시대>에도 실린 글들을 주시해서 읽었다. 그러므로 레닌은 충분하게 깊이마저 있는 철학 소양을 갖출 수 있었다.

 

레닌은 1908, 225-310, 편지에서도, 레닌은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보그다노프, <자연에 대한 역사관 기초>를 읽었다. 레닌은 1903, 플레하노프는 보그다노프 철학 언명들을 여러 차례 비난하기도 했다. 1904, 보그다노프, <경험일원론>은 출간하자, 레닌은 보그다노프에게 직설적이고, 플레하노프는 옳은 견해였고, 보그다노프는 아니라고 말했다. 보그다노프는 1906년 초, 감옥에서 <경험일원론> 저술을 끝마쳤다. 레닌은 격분했고, 고리키에게 <프롤레타리아>, 1호는 1908223, 해외에서 발간했을 때 레닌, 보그다노프 관계는 최악이었다. 볼셰비키 분파도 분열하고 있었고, 러시아에서는 조직들도 파괴되어만 갔다. 경찰들은 첩자 제보로부터 매우 뛰어난 활동가들도 적발했다. 대규모 집회, 회의를 열 수도 없었다. 레닌은 철학 책을 집필하다가 지침면 침대에 누워서 프랑스어 문법 책들, 프랑스어사 책들, 프랑스어 회화 특성을 연구한 책자들 등을 몇 시간이나 읽었고, 철학 논쟁 때문에 녹초 된 신경을 진정하곤 했다. 제네바에서 부르주아 학교라는 국민 학교 모습으로는 고상한 창문, 멋들어진 건물에서 노동 계급 아이들을 유순한 노예로만 길들였다. 교사는 아이들을 머리를 쥐어박고는 정작 부잣집 아이들은 그냥 냅두었다. 아이들에게 온갖 독자적인 생각들을 억누르고는 주입식으로 채워 넣고는 단계마다 아이들에게 권력, 부에 굴종하라고 가르쳤다. 민주 국가에서 같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05, 망명 기간 동안 레닌은 매우 흥미를 보인 노동 운동, 노동 집회, 노동 시위에도 관심을 보였다. 1900, 러시아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05년 혁명 뒤로는 러시아에서도 노둥 운동은 늘어났고, 여러 당들도 투쟁을 겪었으며, 두마를 겪고, 노동대표소비에트 출범을 겪고는,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에 대한 실태와 속에서도 노동 대중들은 어떤 역할을 하고, 노동 계급들에게 영향력은 얼마나 있고, 다른 당들에 대한 영향력도 얼마나 있는지, 등등 더 큰 문제에도 특수하게 다뤘다민주공화국을 위한 투쟁은 당 강령에서 한 항목이었다. 레닌은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이란 차르 전제 정치보다 훨씬 더 다듬어졌지만, 노동 대중을 노예화하는 도구임은 분명하다고 명확하게 알았다. 민주공화국에서는 모든 사회 생활에서도 부르주아 정신을 베어들도록 정치 조직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레닌은 1905년 혁명을 겪지 않았다면, 그리고 망명 기간이 없었더라면, <국가와 혁명>이라는 책을 결코 쓸 수는 없었다.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서둘러 출판해야만 했다. 제네바에서는 없는 자료들을 구해야만 했으므로 소소한 다툼마저 잦은 망명 기간에 대한 분위기로는 많은 방해만 됐다. 그래서 레닌은 런던으로 가서 대영 박물관에서 배우면서 집필을 마무리해갔다. 레닌은 1908824, 중앙 위원회 전체 회의를 열었다. 당 협의회를 조직하고자 인노켄치는 러시아로 갔고, 같은 무렵 러시아에서는 청산주의 노선을 이미 모습을 드러내서 폭 넓은 멘셰비키 층을 확보해갔다. 청산주의로는 당, 당에서 비합법 조직에게는 체포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반동으로부터 모든 혁명 활동을 포기하고, 지도를 거부하는 모든 입장으로 양보했다. 볼셰비키 대오에서 최후통첩파, 소환주의들로는 극단으로, 두마뿐만 아니라, 문화 및 교육 단체들, 모임, 학교, 합법 노동조합, 노동 상호 부금 등에 참여하기를 반대했다. 따라서 그들은 대중 속에서 폭 넓게 활동하기를 떨어져나갔고, 대중 지도를 포기하고는 말았다. 따라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95월이 되어서야 출간할 수 있었다.

 

파리.

 

반동기에는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를 위한 투쟁을 전개해야만 했고, 러시아인 망명 생활 중심지에서도 당 투쟁을 전개해야만 했다. 따라서 중심지를 파리로 정했고, 매우 혹독한 망명 생활을 겪었다. 레닌은 협의회를 골몰했고, 당 노선을 정비하고자 했다. 따라서 청산주의로부터 일격을 가했다. 파리에서는 살림도 정신 없었고, 또 일도 정신 없었다. 1908년 협의회 논쟁으로는 공동 노선을 모색해나갔고, <사회민주주의>로는 공동 당 기관지였다. 협의회 뒤로는 열린 전체 회의로부터도,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마르토프, 마르흘레프스키로부터 구성한 <사회민주주의> 새 편집부를 선출했다. 같은 해로 <사회민주주의>는 모두 아홉 호를 발간했다. 마르토프는 편집부에서 고립해갔고, 멘셰비키를 잊곤 했다. 레닌은 마르토프와 일해서 즐겁다고 잠깐 드물게는 능력 있는 기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볼셰비키 분파 사정으로는 소환주의 관계는 더욱 나빠졌다. 3년 간은 보그다노프, 추종자들과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동 투쟁만으로는 사람들을 가깝게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분파 안에서 격화된 투쟁에서 레닌은 소환주의와 치열하게 논쟁했다파리는 연구를 수행하기로는 매우 불편했다. 국립 도서관도 너무 멀었다. 레닌은 늘 긴장을 품었고,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으로 갔다. 점심 시간이면 도서관은 문을 닫았다. 필요한 책을 신청해도 관료주의에 따른 지연 처리를 뒤따라서 책을 신청하고는 하루, 이틀 지나서야만 필요한 책을 받을 수 있었다. 레닌은 파리 국립 도서관에다 불평을 쏟아 내고는 파리도 욕하고 말았다. 다른 도서관들도 둘러보았으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자전가마저 도둑 맞았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자동차에도 치일 뻔했다.

 

레닌과 솔비체고츠크에서 탈출한 이노크와 플레하노프는 청산주의와 단호하게 거리를 뒀다는 사실을 듣고는 축하했다. 플레하노프로는 190812, 청산주의로부터 주도권을 잡았던 <사회민주주의 목소리>에서 편집 위원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었고, 청산주의 관계마저 계속 악화했고, 1909,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는 주도적인 역할을 해오기를 부인한 포트레소프 기고문도 실린 멘셰비키 저작집 1,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 운동>도 나오자플레하노프로는 1909525, 마침내 <목소리> 편집부에서도 완전하게 물러났다. 레닌, 이노크도 플레하노프와 함께 활동할 수 있겠다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플레하노프에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잘 몰랐다. 철학 전선 투쟁에서 레닌, 이노크는 큰 흥미를 보였다. 철학이란 투쟁 도구였고, 모든 현상을 변증법 유물론이라는 관점으로 평가하는 문제, 모든 노선에서 실천 투쟁 문제와도 유기적이었다. 레닌은 누나였던 안나 일리니치나에게 책 출판을 서둘러 달라는 편지를 보냈고, 소환주의들과 최종 결별을 예상한 <프롤레타리아> 편집부 확대 회의를 소집했다19095,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도 나올 수 있었다. 모든 논쟁에서 종지부를 찍었다. 레닌에게 철학 문제는 곧 종교 투쟁이라는 문제와도 같았다. 따라서 19095월에는, <종교와 노동당>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고, <프롤레타리아> 45호에는, <종교에 대한 노동당 입장>이라는 기고문, <사회민주주의> 6호로는, <종교와 교회에 대한 입장에서 본 계급과 당>을 썼다. <프롤레타리아>에 실린 글로는 오늘날까지도 매우 큰 속뜻을 지닌다. 같은 글로는 종교에서 지닌 계급 성격을 강조했고, 부르주아지 수중에 있는 종교도 대중에게 계급 투쟁을 격리하도록 만들고, 의식을 마비하도록 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종교에서 뿌리를 파헤치고, 복잡한 사회로부터 온갖 문제를 제대로 끌어내야만 했다.

 

레닌은 종교에 대한 해악을 15살 소년 시절에 이미 깨달았다. 십자가를 벗어던지고는 교회에 다니기를 중단했다. 당시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닌은 눈 앞으로 던져진 많은 부조리들을 정제하고는, 노예 형식을 외관상으로도 제거한 세련된 종교야말로, 매우 해롭다고 봤다. 또한 세련된 종교로는 더욱 강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레닌에게 창신론도 바로 그러한 세련된 종교였다. 19096, <프롤레타리아> 편집부 확대 회의로부터 참가할 대의원들도 모였다. 확대 회의로는 볼셰비키 중앙이었고, 전진파도 들어왔다. 여러 동지들과, <프롤레타리아> 편집부 확대 회의로는 편집위원으로는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보그다노프 등과 지역 볼셰비키 조직들 대표로는 페테르부르크: 톰스키, 모스크바: 슐라치코프, 우랄: 나코랴코프 등과 중앙 위원으로는 인노켄치, 리코프, 골젠베르크 타라투타, 샨체르 등도 참석했다. 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로는 스크리프니크, 류비모프, 폴레타예프, 다비도프 골룹코프 등도 있었다. 편집부 확대 회의로는 621일부터 30일까지 열렸다소환주의 최후통첩파에 대한 결의안, 당 단결을 위한 결의안, 특수 볼셰비키 대회에 반대하는 결의안 등도 채택했다. 카프리 학교 문제를 제기했다. 보그다노프는 볼셰비키 분파로는 분열을 피할 수 없으리라고 알고 있었으므로, 사전에 미리 분파를 모으고는 조직했다. 보그다노프, 알렉신스키, 고리키, 루나차르스키는 노동계급들을 대상으로 한 사회민주주의 고급 선전 학교를 조직했다. 노동계급들은 논리적인 훈련에 대한 필요도 절감했다. 노동계급들은 배움을 위해 카프리 학교로 갔지만, 경험 있는 당 활동가라면, 카프리 학교란 새로운 분파를 이루고자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 편집부 확대 회의에서는 새로운 분파 조직을 두고 비판했다. 보그다노프는 회의 결정을 잘 따르지 않았으므로, 볼셰비키 분파에서도 제명됐다. 크라신은 보그다노프를 옹호했다. 그리고 볼셰비키 분파는 해체됐다.

 

가을에는 카프리 학교, 학생들은 레닌에게 강연을 부탁했지만, 레닌은 학교에 대한 분파적인 성격을 파악하고는 거절했다. 대신 파리로 오라고 했다. 카프리 학교 안에서도 분파 투쟁은 격화했기 때문이었다. 190911월 초에는 학교 조직가였던 빌로노프를 포함한 카프리 학교 열두 명 학생들 가운데 다섯 명은 확고한 레닌주의를 따랐고, 곧 학교에서 제명됐다. 카프리 학교에 대한 분파 성격을 지적한 레닌은 옳았다. 제명된 학생들은 파리로 왔다. 레닌은 카프리 학교 동지를 만나고는 고리키에게 편지를 썼다. 헤겔 말이 옳았고, 삶이란 모순으로부터 발전하고, 사람 머리로만 가리거나 잴 수 있기보다 훨신 더 많고, 매우 뜻 깊다고 적었다. 레닌은 카프리 학교를 새 분파에서 중심지로 생각했지만 완전하지도 않고, 전체적인 진리를 가르치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봤다. 따라서 노동 계급들에게는 잡다하고, 많은 요소들을 재료로 당에서 훈련받을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고 편지에도 적어놨다. 노동계급 힘에 대한 믿음도 숨쉬었다파리로는 카프리 학교에 반감을 가진 미하일과 함께 카자네츠, 루슈빈, 코지레프, 우스치노프, 로마노프도 있었다. 레닌은 매우 열심히 이들에게 강의했다. 미하일은 결핵을 얻었고, 니콜라예프 부대 수용 도중에 모진 학댈를 당하다 병을 얻고는 말았다. 190151, 숨을 거두었다. 주로 시사적인 주제들이었고, 부유한 농민 쪽에 선 스톨리핀 개혁,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선도적인 역할, 두마 의원 모임 등에 대해 말해줬다. 학생들 가운데로는 두마에 대한 활동을 두고는 군대 안에서 선동보다 더 중요하게만 여긴다고 비난하고자 애썼다. 레닌은 방긋 웃음을 짓고는 두마 활동은 중요하다는 점을 말했다. 군대 안에서 활동도 느슨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적은 조금도 없었지만, 할 수 있다면 비밀리에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일이란 말 없이 행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레닌은 머릿 속으로는 러시아에서 살았으나, 프랑스 노동 운동도 주의 깊게 연구했다. 프랑스 사회민주주의당으로는 뼛속까지 기회주의 태도를 보였다. 1909년 봄, 우편 노동계급들도 대대적인 파업을 벌였다. 도시 전체는 소요 상태에 빠져있을 때도, 당은 한 쪽으로만 물러섰다. 노동 조합 일이지, 당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만 발뺌하기만 했다. 정치 현안들을 둘러싼 토론마저 잘 이뤄지지도 않았다. 유세장들만 흥미로웠을 뿐이었다. 프랑스 선거 유세장도 민주공화국에서 선거란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만 보여줬다. 일리치는 파리 도시 외곽, 극장을 다니면서 무리 지어 있는 노동계급들을 관찰하기를 좋아하기도 했다. 파리에서는 1909년에는 모르코 침략에 항의하고자 약 10만 명은 참가한 시위를 1909년 열었다. 붉은 목도리를 두른 사회주의당 당원들도 시위를 주도했다. 노동계급들은 험악한 분위기였지만, 부자들 거주 지역을 통과할 때는 주먹을 휘두르고는 위협했다. 황급히 창문에서 덧문을 내리기는 했었지만, 시위는 너무나 평화적으로만 끝났다. 조금도 항의 시위같지도 않았다.


레닌은 샤를 라포포르로부터, 마르크스 사위였던 라파르크와도 인연을 맺었다. 폴 라파르그는 노련한 투사였고, 레닌은 라파르그 의견을 소중하게 여겼다. 레닌은 라파르그 아내이자, 마르크스 딸이기도 했던 라우라와 함께 파리에서 20-25베르스타 거리에 있는 드라베이에서 살았다. 이미 직접적인 활동에서는 손은 뗐다. 한번은 레닌, 크룹스카야는 자전거를 타고 라파르그를 찾아갔다. 라파르그 부부는 무척이나 친절하게 맞이 했다. 레닌은 라파르그와 자신에 대한 철학 책 이야기를 나누었고, 크룹스카야는 라우라를 따라 공원을 산책했다. 크룹스카야는 마르크스 딸도 바로 내 눈 앞에 있따는 사실에 무척이나 흥분한 상태였다. 라우라 얼굴을 너무나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나도 모르게 속에서 마르크스 모습을 찾고는 말았다. 크룹스카야는 당황한 나머지 러시아에 대해서, 그리고 혁명 운동에서 여성은 참가하는 문제를 두고는 아는대로 횡성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라우라는 대답해주곤 했지만 대화 다운 대화는 잘 이뤄지지는 않았다. 산책에서 돌아왔을 때, 라파르그와 레닌은 철학을 논했다. 라파르그는 레닌을 두고는 스스로에 대한 철학 신념은 얼마나 진실한가를 곧 증명할 거라고, 라우라는 라파르그를 보며 말했다. 묘한 웃음을 짓고는 서로를 쳐다봤다. 말과 눈빛은 무슨 뜻인지를 훗날 알게 됐다무신론으로는 동반 자살했다. 늙어가는데 있어 투쟁에서 필요한 힘은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1910년은 중앙 위원회 전체 확대 회의를 시작했다. <프롤레타리아> 편집부 확대 회의로는 당 단결을 위한 결의안, 볼셰비키 특별 대회 소집을 반대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동지들 모임으로는 중앙 위원회 전체 회의에서도 동일한 노선을 내세웠다. 반동기로는, 비록 지하 활동이더라도, 모든 진실을 대담하게 말할 수 있는 당은 있어야만 한다는 건 매우 중요했다. 반동은 당을 파괴하고 있던 때이자, 기회주의 세력으로부터 당을 뒤흔들고 있던 때였고, 어떻게 해서든 당이라는 깃발을 움켜잡고자 했다. 청산주의들로는 러시아에서 자신들에게 보다 합법적이고, 강력한 기회주의 중앙을 가져갔다. 그러한 중앙에 맞서고자, 당은 꼭 필요했다. 카프리 학교에서 얻은 경험으로부터, 당시 노동계급들에게도 분파란 얼마나 상대적이고, 이상한가를 알게 됐다. 사회민주주의를 따르는 노동 대중을 모두 뭉치게할 수 있는 통일할 수 있는 당 중앙은 있어야만 했다. 1910년에는 당 존립 자체를 지키고자 벌인 투쟁, 당으로부터 노동 대중에게 영햐을 미치고자 투쟁도 이뤄졌다. 레닌은 당 안에서 볼셰비키는 다수파일 수 있고, 당은 볼셰비키 노선을 따르리라고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분파가 아니라 당이었기 때문이었다.

 

1911년 파리 근교로는 당 학교를 세웠다. 전진파, 멘셰비키 당원들까지도 참여했을 때도, 레닌은 같은 노선을 견지했다. 1912, 프라하 당 협의회에서도 잘 유지할 수 있었다. 볼셰비키 노선을 수행하는 분파가 아닌 당은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에서는 청산주의는 설 자리가 없었다. 당은 투쟁하고자 여러 세력들도 모았다. 당 결정을 따르지 않을거라 미리 결심한 사람들을 위한 자리마저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 동지로는 당을 위한 투쟁을 타협하기를 넓히기만 하고는, 통합 목표마저 잃어버리고는 말았고,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조차 생각하지도 않았고, 모든 사람들을 통합하기만 하려는 방탕하기만 하듯이 갈피마저 잡지도 못했다. 레닌 관점을 전적으로 지지했던 인노켄치조차도, 근본적으로는 멘셰비키 당원들, 플레하노프주의와 통합한다고 생각한 결과로부터, 당 통합을 이루려는 열망만 강했고, 타협파 관점으로만 기울어졌다. 레닌은 바로 잡았다.

 

결의안들은 전반적으로는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레닌은 단지 타협주의들에게 찬성표를 던지고는 자신 입장을 양보했다고 생각한다면 우스운 일이다. 전체 회의는 3주간 지속했다. 레닌은 본질 입장마저 물러서지도 않았고, 조직 문제로는 최대한 양보해야만 한다고 봤다. 볼셰비키 분파 기관지로는 <프롤레타리아>는 폐간됐다. 남아 있던 500루블짜리 지폐들도 소각했다. 볼셰비키 분파 자금줄로는 이른바 피신탁인이라고 불리는 독일 동지 세 명, 카우츠키, 메링, 제트킨에게 전달했다. 돈은 당 전체를 위해 사용할 때만 지급하도록 했다. 분열은 일어날 경우로는, 남아 있는 돈은 모두 볼셰비키에게로 반환했다. 카메네프는 비엔나로 파견해서, 트로츠키 신문, <진실>에서 볼셰비키 대표를 맡기로 했다. 그러나 해외에서도 상황은 엉망이었다. 전진파로는 조직화만 계속했다. 사회민주주의당에서 위험한 일탈을 제거하고, 청산주의, 소환주의를 제거하고, 당은 굳건하게 앞으로 나아갔고, 통합이라는 틀 안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더 멀리 전진했다고, 고리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191081, 포르니크에 왔고, 826일에는 이미 코펜하겐으로 먼저 갔다. 국제사회주의사무국 회의, 인터내셔널 대회에도 참석하고자, 대회 활동을 설명하면서 레닌은 이렇게 썼다. 수정주의들로부터 견해는 달랐지만, 수정주의들로는 독자적인 강령을 내거는 단계까지 나가지는 못했다. 수정주의와 투쟁은 미뤄졌고투쟁은 필연이었다. 러시아 대표단으로는 스무 명으로 매우 대규모였다. 열 명은 사회민주주의였고, 일곱 명은 사회주주의 혁명가당 당원, 세 명으로는 노동 조합 대표들이었다. 사회민주주의 모임으로는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플레하노프, 바르스키, 마르토프, 마르티노프 등 모든 정파 대표들도 포함됐다. 트로츠키, 루나차르스키, 콜론타이로는 심의권만 가졌다. 많은 손님들도 대회를 찾았다. 대회 기간 동안에는 레닌, 플레하노프,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제3대 두마 의원으로는 폴레타예프, 보크롭스키도 참석한 협의회를 열었다. 협의회로는 해외에서 대중 신문, <노동자 신문>을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플레하노프는 외교관 역할을 했을 뿐임에도, 신문 첫 호로는 <우리 입장>이라는 기고문을 썼다.

 

파리 대회에서 알게 된 루나차르스키는 <인민>에다 <우리 당 전술 경향>이라는 글을 실었고, 모든 문제들을 소환주의 관점으로 조명하는 글이었다. 레닌은 같은 글을 일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는 않았으나, 나중에는 글로 응수했다. 대회에도 참석했던 다른 사람들도 글을 각자 논평했다. 인텨내셔널 대회에서 트로츠키는 <전진>에서 익명으로 글을 실었고, 볼셰비키를 매번 공격했고, 비엔나 <진실>을 칭찬했다. 대회 대표로 참석했던, 플레하노프, 레닌, 바르스키는 <전진>에 글을 게재한 데 항의를 표했다. 플레하노프는 제2차 당대회도 있기 전, 트로츠키는 처음으로 해외에도 등장했던, 1903년부터 플레하노프에게 적대적이었다. 2차 당 대회를 앞두고는 대중 신문 문제를 놓고는 격한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코펜하겐 당 대회에서 플레하노프는 트로츠키 연설을 반대한다는 아무런 단서 없이 서명했고,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발행하기 시작한 <노동 신문>을 두고는 편협한 당파 기관지로 단언했고,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비엔나 모임에서도 같은 주제로 강연했다. 따라서 1월 전체 회의 뒤로는 <진실>에서 파견한 카메네프는 항의 표시로 편집부를 사퇴했다. 트로츠키 영향력 아래 있던 마크로부터 이끈 파리 타협주의 역시 파벌주의를 경계한다면서, <노동 신문> 반대 운동을 벌였다. 레닌은 투쟁을 고양한 시점에서 스스로 위치를 포기하는 무원칙한 타협주의, 누가 되든 상관 없이 모든 사람들과 타협하는 분위기를 확산하는 걸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1910, <신시대> 50호에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발전 경향>이라는 트로츠키 기고문을 실렸고, 51호에는 <프러시아 논쟁과 러시아 경험>이라는 마르토프 기고문도 실렸다. 레닌은 <러시아 당내 투쟁이 갖는 역사 의의>라는 글로 답하고자 했으나, <신시대> 편집자였던 카우츠키 부름으로부터, 레닌 기고를 거부했다. 카르스키는 레닌과 사전 조율한 뒤로 트로츠키, 마르토프에게 답했다. 1910년에는 이네사 아르망도 브뤼셀에서 파리로 왔고, 그녀는 파리 모임에서도 적극적인 활동가이자 한 사람이었다. 세마슈코, 카자코프와 함께 간부 모임으로 들어가서 다른 해외 모임들과도 폭 넓게 서신을 교류했다. 딸 둘,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았다. 매우 열성적인 볼셰비키였고, 그녀를 둘러싸고 파리 사람들도 빠르게 모여들 수 있었다.

 

파리 모임은 전반적으로 조금씩 강화해갔다. 이념 결속도 다졌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끔찍한 가난에 시달렸다. 노동계급들은 어떻게든 그럭저럭 자리르 잡았지만, 지식계급들은 상황은 매우 지독하게 힘겨웠다. 노동계급은 늘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망명 기금으로 살아간다는 건, 망명 식당에서 외상으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다는 건 매우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험난했던 일들도 많았다. 한 동지는 칠장이였지만, 기술을 가지지 못해서 여러 일터를 전전했다. 다른 동지도 사기 그릇 색칠하는 일을 구했지만, 푼돈 밖에는 벌 수 없어서, 굶주림으로 주름살도 늘어나보였다. 매우 슬픈 경우로는 모스크바 봉기에 참가했던 프리가라 동지였다. 교외 노동 계급 밀집 지역에서 살았고, 동지들은 아는 바도 거의 없었다. 미치고는 말아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쉴 새 없이 해댔다. 굶주렸기 때문이었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를 만나고는 기아로부터 정신 착란이었고, 피해 망상으로 발전하면 자살할 수도 있으므로 주시해야만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주소조차 알지 못했고, 집까지 데려다 주려고 나섰지만 달아나고 말았다. 사람마저 실종됐으니 가시방석이었다. 시체는 센강에서 목과 다리에 돌로 묶여 있는 채로 발견됐다. 자살하고는 말았다.

 

소소한 다툼은 끊이질 않는 망명 생활이라는 분위기 속에서도 두 해 정도 더 살았더라면, 심신마저 다 지쳐 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동기는 끝날 수 있었다. 톨스토이 죽음을 계기로부터 시위도 시작했고, <> 창간호도 발갱했다. 모스크바에서는 볼셰비키, <사상>도 발행했다. 레닌은 기운을 되찾았고, 19101231일에 나온, <시위 시작>이라는 글로도 동지들에게 활동으로 나서자고, 모든 곳에서 조직을 건설하고, 사회민주주의당 노동계급 세포 조직도 만들어서, 강화하고, 정치 선동, 경제 선동을 발전하도록 하자고 호소했다. 러시아에서 최초 혁명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로는 자유를 위해 싸워야만 한다고, 따라서 두 번째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대중을 승리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대중에게 가르칠 수 있었다.


1910-1912.  


1910년 말에도 이미 혁명은 북돋는 징조를 보였다. 1911-1914년까지 시기, 전쟁은 시작되기 전, 19148월까지로는, 매달 노동 운동도 성장했다. 1905년에 앞선 노동 운동 성장과는 다른 조건과, 1905년 혁명으로부터 운동 성장은 이뤄질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도 많은 일들을 겪었다. 파업, 무장 봉기, 대중 운동, 패배 등 몇 년이나 겪었다. 모든 면에서 같은 점으로도 확연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레닌도 프롤레타리아트 성장을 온몸으로 느꼈다. 프롤레타리아트뿐만 아니라 전체 상황 또한 옛날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지식 계급도 이미 달라졌다1905년에는 폭 넓은 층으로부터 지식 계급은 노동계급을 지원했다. 프롤레타리아트로는 수행할 수 있는 투쟁 성격은 이미 명백했다. 투쟁은 타협 없이 냉혹했고, 프롤레타리아트로는 부르주아지로부터 원했던 제한된 헌법으로부터 얻고자 벌인 투쟁으로 빌려주지는 않았다. 노동 계급은 부르주아지 개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노동계급은 이끌어갔고, 끌려가지도 않았다. 더욱이나 투쟁 조건도 매우 달라졌다. 차르 정부에서도 1905년 혁명 경험도 생겼다. 정부는 모든 노동 조직들에다 첩자를 심어 놓았다. 그들은 그저 불쑥 나타나서 몸 숨길 기회를 주던 작자들이 아니라, 말리노프스키, 로마노프, 브렌진스키, 체르노마조프 등과 같이 당에서 중책을 맡고는, 정부 미행과 체포, 또 첩자들도 엄밀하게 계획해서는 진행했다. 그래서 기회주의들은 판을 쳤다. 노동계급 전위이자, 지도부로는 당을 청산하려는 청산주의 노선은 폭 넓은 지식인층 지지를 받았다. 청산주의들로는 좌우 양측에서도 커갔기 때문이다. 입헌민주당 당원들은 저마다 비합법 당을 향해 침을 뱉었다. 투쟁 조건마저 평등하지도 않았다. 청산주의들로는 기회주의였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강력한 합법 중앙을 가질 수 있었고, 대중 속에서 폭 넓은 청산주의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지만, 볼셰비키는 무엇 하나라도 쟁취하고자, 지하 활동이라는 힘들기 짝 없는 조건에서도 투쟁해야만 했다.

 

검열이라는 장애물을 제거하고자, 당에서 비합법 조직을 강화하고자 벌인 과감한 투쟁은 1911년부터 시작했다. 19101, 중앙 위원회 전체 회의로부터 설립한 해외 연합 안에서부터 시작했으나, 곧 틀을 넘어서 터져나왔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 모스크바에서는 <사상>을 발간했다. 그러나 해외에서 발간한 비합법 신문들은 러시아로 들어가기로는 1905년 이전보다도 훨씬 어려웠다. 러시아와 해외 모두 첩자들은 넘쳐 났고, 일 망치는 건 다반사였다. 따라서 볼셰비키로는 기고할 수 있는 합법 신문, 잡지로부터 러시아에서도 발간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레닌은 기뻐했다.

 

<> 편집부로는 볼셰비키파, 플레하노프파, 두마 파견원들로 구성했다. <> 신문은 두마 파견대 대변지였다. 창간호로는 플레하노프 사설도 실렸다. 레닌은 창간호를 썩 달가워하지도 않았다. 색채는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스크바 <사상> 1호를 보고는 매우 흡족했다. 레닌은 <>, <사상>에다 글도 열심히 썼다. 모스크바 1910, 2월에는 여러 동지들도 체포됐다. 4월에는 <사상>은 폐간됐고, 6월에는 두마 파견대, <>25호를 끝으로 발행을 중지했다. 복간은 11월이었다. <>은 이미 볼셰비키 신문이었다. 바쿠에서도 볼셰비키 신문으로는 <현대 생활>도 발행했다. 7월에는 한 동지와 협의 끝에, 페테르부르크에서 <계몽>이라는 합법 잡지를 출판했다. 잡지는 1911년 말에 이르러서야 발간할 수 있었다. 레닌은 출판문들에 대한 경과를 잘 지켜보고, 실을 글들을 썼다. 볼로냐 학생들은 카프리 학생들과 같은 방법으로 수업 경험을 하고자 했지만, 정작 아무런 소득은 없이 끝나기만 했다소환주의들로는 191011, 이미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학교를 세웠다. 학생들은 단, 플레하노프, 레닌을 비롯해서 여러 강사들을 초청하고자 했다. 그러나 레닌은 부탁을 거절했고, 파리로 와달라고 했다. 그러나 카프리 사태를 겪은 바 있어서, 전진파는 일을 꼬왔고, 멘셰비키, 중앙위원회 해외 사무국에서 공식 초청을 요구했다. 그리고 레닌에 반대하는 학생들과 함께 파리로 와서는 자율권을 요구했다. 수업은 성사하지 못했고, 중앙위원회 해외 사무국으로는 학생들을 러시아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1911년 봄, 마침내 볼셰비키로는 파리 근교에서도 당 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학교에는 노동계급들, 멘셰비키 당 유지파, 전진파 소환주의 노동 계급들도 참여는 했지만 두 집단으로는 모두 매우 적은 수에만 불과했다레닌도 여러 노동 계급들과 만날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독일에서 임시 일자리를 마련해주거나, 파리에서는 롱주모 마을에다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먼저 학생들은 방을 세냈고, 이네사 아르망은 집 한 채를 통째로 빌렸고, 집에서는 학생들을 위한 식당을 마련했다. 지노비예프 가족도 롱주모로 옮겼다. 따라서 일을 할 수 있었다. 마르토프도 투르한스크에서 유형을 살기도 했고, 나중에는 비합법 활동을 했던 동지는 살림을 맡았다. 이네사 아르망은 빌린 집에서 여러 수강생들도 파리에서 묵을 수 있었다. 레닌은 플레하노프파, 청산주의파, 전진파 등에 대해 취할 노선을 밝히고자, 서신을 자세하게 밝혔다. 주로 카프카스 볼셰비키와 우호해서 서신을 교류했다


이네사 아르망 집에는 온갖 볼셰비키 사람들은 다 모여 살 수 있었다. 마을 다른 쪽 끝에 살고는 있었지만 공동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다녔다. 학생들과 잡담을 나누고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질문할 수 있었고, 정기적으로는 시사 문제를 토론할 수도 있었다. 가죽 노동가로부터 세를 낸 방 두 개에서 살았기 때문에, 소규모 공장에서 노동계급 생활을 잘 살펴볼 수도 있었다. 집 주변에는 정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힙겹고, 암담하기만 한 삶이었다. 고된 일에만 시달리다가, 일요일에는 성당에 다디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사회 체제를 변화하도록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아무도 해보지도 못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볼셰비키를 잘 알지는 못했다. 동지들 가운데로는 프라하 당 협의회에 참석한 사람도 있었고, 볼셰비키 대열에서 오랫동안 싸우다가 백위군에게 피살되기도 했다. 그리고 백위군에게 피살된 26명 바쿠 인민 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또 첩자가 된 사람으로는 10루블이라는 푼돈을 받고, 쥐꼬리만한 임금에 의존하면서 살다가, 롱주모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었다


학기 중간에는 레닌은 수업을 매우 규칙적으로 진행했다. 레닌은 정치경제학(30), 농업 문제(10), 사회주의 이론과 실천(5)을 강의했다. 정치경제학 토론회로는 이네사 아르망으로부터 지도했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당 역사를 강의했고, 세마슈코도 강좌 두 개를 맡았다. 다른 강사들 가운데로는 랴자노프는 서유럽 노동 운동 역사를, 샤를 라포포르는 프랑스 운동을, 스체클로프, 핀예노타예프스키는 각각 공법, 재정학을, 루나차르스키는 문학, 스타니슬라프 볼스키는 신문 인쇄술을 가르쳤다. 학생들도 많은 시간을 두고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저녁 때는 가끔씩 들판으로 나가 노래를 불렀고, 건초 더미 아래로 누워 도란도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레닌도 가끔씩 함께 다녔다카메네프는 롱주모에서 살지는 않았고, 가끔 강의할 때만 왔다. <두 개 당>이라는 책을 집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 문제를 두고 레닌하고 논의하곤 했다. 마을 너퍼 골짜기 풀숲에서 레닌은 생각을 카메네프에게 들려주곤 했다. 책 서문도 써줬다. 1910, 8월 중순에는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19101월에 공들였던 모든 분파 통합마저 빠르게 붕괴해갔다. 러시아에서도 실천 활동 과제마저 제기함에 따라, 공동 활동마저 할 수 없다고 더욱 분명해져만 갔기 때문이었다. 실천 활동을 요구하자, 당 소속에서 멘셰비키 본색마저 드러났다충성이라는 그럴듯한 명분 이래로 청산주의들, 전진파를 통합하고자 했던 트로츠키 충성에 대한 본질도 무엇인지를 드러내고는 말았고, 러시아에서 활동마저 좀 더 원활하게 조직해야 할 필요를 감지했다. 모든 통합은 인위적이었다고 드러났다. 1910년 말로는 이미,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은 중앙위원회 해외 사무국에서 중앙 위원회 전체 회의를 해외에서 소집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제출했다. 한 달여 시간은 지나서야 성명서에 대한 답변을 받았다. 멘셰비키 노선으로는 중앙위원회 해외 사무국은 제안을 거부했다. 문제를 둘러싼 협상으로는 19115월 말까지 질질 끌어만 갔다. 중앙위원회 해외 사무국과는 이야기해봐야 아무런 소용마저 없었다. 중앙위원회 해외 사무국이었던 볼셰비키 대표로는 세마슈코 동지는 사퇴했고, 볼셰비키로는 해외에 있던 중앙 위원회 회의를 소집했다. 따라서 19116월 중앙 위원은 아홉 명이었다. 멘셰비키와 분프나느 도중에 회의장을 나가 버렸고, 나머지 살마들은 매우 시급한 문제부터 논의하고, 당 협의회 소집 문제를 논의해서, 러시아에서 당 협의회 소집을 위한 러시아 조직 위원회를 만들고자 결정했다. 여러 동지들도 지역으로 파견됐다. 라이프치히에서 브렌진스키라는 한 운반책은 첩자이기도 했다. 협의회는 바쿠에서 소집했다. 여러 활동가들도 체포됐다. 다섯 개 조직에서 대표는 참석했고, 협의회로는 볼셰비키와 플레하노프파로 대변했다. 훗날 첩자로 밝혀진 체르노마조프 역시나 협의회로 참석했다. 러시아조직위원회로는 몫을 다 해낸 끝에서야 19121월에서야 당 협의회는 소집할 수 있었다.

 

1911년 파리에서 볼셰비키 모임은 대단히 강력한 조직이었다. 세마슈코, 블라지미르스키, 안토노프, 쿠즈네조프, 벨렌키 형제, 이네사 아르망, 스탈, 나타샤 고프네르, 고틀랴렌코, 체르노프,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릴리나, 타라투타, 류비모프, 블라지미로프 등 동지들도 속했다. 모두 합해서 40명은 넘었다. 러시아와 제대로 된 관계를 맺었고, 혁명 경험도 풍부했다. 청산주의, 트로츠키파 등등 사람들과 투쟁으로부터 모임은 더욱 강인하게 단련했다. 적지 않은 프랑스인들, 수 많은 망명한 노동 계급들 사이에서도 일정한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는 망명객들도 무척 많았다. 스탈 동지와 크룹스카야는 꽤 오랫동안 모자 믹공, 재봉사 등 여성 망명 노동 대중 속에서 활동을 수행하고자 했었다. 수 차례 회합을 가졌으나 활동을 과소평가했고, 일은 잘 풀리지는 않았다. 회합을 할 때면, 꼭 누군가 분란을 일으키는 질문을 해댔기 때문이었다. 주로 무엇 때문에 꼭 여성들에게 회합을 소집해야만 하는가라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유용한 성과는 있었으나, 일은 시들해져만 갔다. 레닌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19119월 말, 레닌은 국제사회주의사무국이라는 인터내셔널 사무국 회의를 참석하고자 취리히로 다녀왔다. 독일사회민주주의당 중앙 위원회에서 보낸 몰켄부르크 편지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편지는 선거와 관련해서, 모로코 사태로부터 식민 정책에 대한 비판에서 위축해서는 안 된다고 내세웠다. 룩셈부르크도 편지를 출판했다. 베벨은 일에 분개하기만 했다. 레닌은 룩셈부르크를 옹호했다. 독일사회민주주의당에서 기회주의 정책으로는 회의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여행 기간 동안 스위스에서 여러 차례 강연했다. 1911, 10, 라파르그 부부는 동반 자살했다. 레닌은 죽음에 대해 심한 충격을 받았다. 몸소 방문했던 일도 있었다. “당을 위해 더 이상 일할 수 없다면 라파르그 부부와 같이 진실을 직시할 줄 알고, 그렇게 죽어야만 한다고.” 레닌은 말했다. 라파르그 시신을 앞에 두고 활동마저 헛되지 않았고, 폴 라파르그, 라우라 라파르그로부터 그토록 긴밀하게 시작했던 마르크스라는 대의로부터 폭 넓게 성장할 수 있었고, 또한 아시아로까지 번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중국에서는 대중 혁명 운동이던 신해 혁명도 일어났다. 레닌은 조사를 썼고, 이네사 아르망은 번역했다. 레닌은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 이름으로 장례식에서 죽음 사람에 대한 조사를 낭독했을 때 크룹스카야는 가슴마저 뭉클했다고 한다. 1912년을 앞두고, 볼셰비키로는 볼셰비키해외모임에서 회의를 열었다. 망명 생활로부터 모두들 지독하게 신경마저 날카로워졌지만, 그러나 분위기로는 활기로웠다.


협의회 준비 작업에도 박차를 가했다. 레닌은 국제사회주의사무국에서 체코 사회민주주의 대표였던 네메츠와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협의회 개최 문제를 결정했다. 프라하에서 협의회를 개최하고자 했다. 플레하노프는 협의회로 오지 않았다. 대신 플레하노프는 답신으로는 협의회 구성은 너무 동질이 강해서 나는 참여하지 않는 쪽이 당 통일을 위해서도 좋겠다고 답했다. 협의회에서는 첩자는 주로 참석하지 못하도록 잘 막아냈고, 프라하 협의회로는 러시아 활동가들은 1908년 뒤로 청므으로 개최해냈던 당 협의회였다. 협의회에서는 러시아 활동과도 관련한 문제들을 실무로도 논의했고, 정확한 활동 노선을 마련하고자 했다. 현 시기 당 임무, 4대 두마 선거, 두마 안에서 사회민주주의 분파, 당 활동 성격과 조직 형태, 기아 투쟁에서 사회주의 임무, 노동 계급들을 위한 국가 보험에 대한 두마 입법 초안, 청원 운동, 등등, 여러 결의안들도 채택했다. 프라하 협의회로부터 러시아 안에서도 활동에 대한 당 노선, 실천 활동에 대한 분명한 지도력을 얻어낼 수 있었다.

 

협의회로는 레닌, 지노비예프, 오르조니키제, 슈바르츠만, 골로셰킨, 스판다랸, 말리노프스키를 중앙 위원으로 선출했다. 중앙 위원은 체포될 경우로 대비해서 후보들도 미리 지명해뒀다. 협의회는 끝난 직후로는 중앙위원회로는 스탈린, 페테르부르크 노동 계급, 롱주모 학교 학생이기도 했던 벨로스토츠키를 보궐 선출했다. 중앙위원회는 단결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어려운 시기에 활동을 수행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활동으로부터 더는 분열하지 않도록 확대를 사전에 막음으로부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딜 수 있도록 한 공로는 협의회에도 있었다청산주의, 트로츠키는 악의 찬 말들, 플레하노프와 분트파 외교술 등등, 모든 걸 신랄하게 또 반박하고, 해명하고자 했지만, 같은 논쟁들에 대한 비중으로는 줄어들었고, 주요한 중점도 러시아에 대한 활동으로 옮겨졌다. 말리노프스키도 중앙 위원이었지만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고, 협의회는 끝나고 나서야 제3대 두마 의원이었던 폴레타예프, 슈르카노프로는 라이프치히에서 회의한 내용을 토대로 경찰마저 세세하고 알고 있었다는 일도 큰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알고 보니 슈르카노프 역시나 첩자였기 때문이었다. 첩자들은 활동가들을 교란하도록 했고, 또 조지을 약화하도록 한 분명한 사실도 있었지만, 경찰은 북돋는 노동 운동을 막을 수조차 없었고, 운동을 올바른 노선 정립으로부터도, 바른 궤도에도 들어섰고, 새로운 세력들도 점차 성장했다.

 

 레닌은 자금 상환 문제를 피신탁인들과 합의하고자, 라이프치히에서 베를린으로 잠시 들렸다. 폴레타예프, 슈르카노프를 만났다. 쇼트만은 파리 집을 방문했고, 핀란드에서 일하고 있었다. 프라하 협의회로는 차르 체제, 3대 두마에서 핀란드 정책을 격렬하게 비판했고, 차르 체제, 반혁명 부르주아지에 맞서 투쟁하는 핀란드,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통일할 수 있는 과제를 강조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핀란드에서는 조직은 비합법적으로 활동했다. 핀란드에서도 봉기를 준비했고, 군대 안에서도 활동하는 비합법 조직들도 이미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사태는 진격에 이르지도 못했다. 조직은 빠르게 무너졌고, 곧바로 대대적인 체포를 시작해서, 57명은 봉기를 도모한 혐의로 재판으로 회부됐다. 19124월 중순에 터진 레나 금광 지대 사건, 도처에서도 일어난 항의 파업을 보자면, 몇 해 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엇도 잊지 않으면서도, 많이 성장했다운동은 이미 높은 단계라는 대열로도 올라섰다. 레닌은 러시아 노동 운동 앞에서 제기한 많은 과제들에 대해 생각했다. 체르니셰프스키, <인민 의지>에 이르는 많은 혁명가들도 선동을 이어받아서, 확대하고, 강화해갔다. 끝까지 유일한 혁명 계급이었던 프롤레타리아트로는 수백만 농민들로부터 처음으로 공개 혁명 투쟁에 나서도록 일으켰고, 선두에도 우뚝 섰다. 로마노프 사건도 일어났고, 한 동지는 1904, 징역 12년을 선고 받기도 했다. 치타 공화국을 조직했다가, 시베리아 토벌대에게 붙잡히고는 사형을 선고 받았고, 기차로 수송됐다. 혁명가들에게 총살 장면을 보여주고 위협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사형은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러시아에서는 <진실>도 발행하고 있었다. 레닌은 꾸준하게 고리키에게 소식을 위한 편지를 보냈다.

 

1912-1914.  


크로코프로 갔을 때, 유대인들은 특수 지구에 살았고, 옷도 색다르게 입고 다니곤 했다. 바르샤바 위원회는 비밀 경찰과 관련됐다는 소문도 있었고, 레닌은 바르샤바 위원회 쪽에서 옹호하는 글을 썼고, 국제 사회주의 사무국으로부터 당 중앙 행위로는 항의하는 서한을 썼다. 바르샤바 위원회로는 바르샤바 및 기타 노동 중심지들에게 대중과 강하게 연계했다. 레닌은 로즐라모프파 사태를 남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당내 투쟁이었고, 또 방관자로만 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레닌은 자국 러시아로 집중했다. 페테르부르크 위원회를 재건했고, 뒤이어 북부지역사무국을 결성해서, 여러 동지들과 결합했다. 페레트부르크에서는 청산주의로부터 맞서는 결렬한 투쟁마저 진행했다. 레닌은 <진실>에다 강력한 편지를 썼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1912, 916, 일요일에, 노동 대표 선거를 예정했다. 경찰도 선거에 대비했다. 14일에는 이네사와 사파로프도 체포됐다. 그러나 경찰은 유형지에서 도망친 스탈린은 12일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는 못했다. 노동 선거로는 잘 치러져서, 단 한 명 우익 후보도 당선하지 못했다. 곳곳에서는 정치 성격을 지닌 결의안들도 채택했다. 10월 내내 모든 관심을 선거로부터 집중했다. 노동 대중으로는 전통으로, 후진으로부터 모든 지역에서 여전히 선거에는 무관심했고,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폭 넓은 선동도 필요했다. 따라서 노동계급들은 어디서나 사회민주주의를 선출할 수 있었다. 대규모 공업 중심지에서 노동 선거로는 볼셰비키는 모두 승리했다. 높은 권위를 누렸던 노동 당원들도 선출했다. 두마로는 6명 볼셰비키 의원들, 7명 멘셰비키 의원들을 선출했으나, 볼셰비키 노동 의원들은 백만명 노동계급들을 대표했지만, 반면 멘셰비키 노동 의원들은 25만 명도 채 대표하지도 못했다. 볼셰비키 의원들은 초반부터 매우 조직력과 결속력도 잘 보여줬다. 두마에서는 노동 시위, 파업들도 이어질 수 있었고, 1018일 개원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는 두마에서는 함께 할동했지만, 당 안에서는 관계를 매우 악화됐다. 1월에는 볼셰비키 세력 조직화에 지대한 역할을 했던 프라하 협의회를 열었다. 1912, 8월 말 비엔나, 트로츠키 적극적인 참가, 주도로부터 당 협의회를 소집했다. 청산주의 행위로부터 당 노선은 얼마나 심각하게 대치햇고, 또 전혀 멀어졌는지 생각하지도 않은 구호였다. 협의회로는 전진파도 초청했다. 중앙 위원회를 중심으로, 볼셰비키는 협의회로 참가하지 않았고, 해외에서 발행했던 플레하노프 잡지, <당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모였던 플레하노프파, 멘셰비키와 타협주의 볼셰비키 역시 참가를 거부했다. 폴란드인들도 참가하지 않았고, 전진파를 대표해서 협의회로 온 알렉신스키는 협의회 빈약한 구성을 폭로했다. 협의회 참가는 대부분 해외에서 거주하던 인물이었고, 카프카스 대표 두 명으로는 카프카스 지역 사무국 대표로 파견됐고, 모든 대표들은 매우 한정된 집단에서 선출한 사람들이었다. 협의회 결의문으로는 청산주의를 극대화했다. 선거 강령에서 민주 공화국이라는 구호도 삭제했고, 지주 토지 몰수라는 구호는 제3대 두마 농업 입법 재검토라는 구호로 대체했다. 주요한 발제자는 보리스 골드만이었다. 당은 있지도 않았고, 협의회로는 창립 회의여야만 한다고 했다. 알렉신스키조차 항의했다. 8월 블록이라 불린 협의회로는 중앙 위원회로 대립하고자 했고, 프라하 협의회로부터 결정을 갖는 권위를 실추하도록 애썼다. 사회민주주의 세력에게 통합이라는 탈을 쓰고는 볼셰비키 반대파와 통합하고자 했다.

 

러시아에서는 노동 운동은 북돋고 있었다. 12월 말, 1월 초 사이로는 두마 의원들도 첫 회의를 열었다. 두마 회의에서는 비합법 당 활동, 긴밀한 결속을 논의했고, 바다예프는 <진실>을 전담하기로 했다. 인터내셔널사무국도 도처에서 항의 집회를 조직했다. 크라코프에서도 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크라코프 항의 집회로는 특이한 성격을 띠었다. 전쟁에 항의하는 집회라기 보다는 러시아에 대한 대중에게 증오를 조직한 집회였기 때문이다. 인터내셔널 사무국으로는 1111-1112, 바젤에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비상 회의를 열었다.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 중앙 위원회를 대표해서, 카메네프도 바젤 대회로 참가했다레닌은 <신시대>에 실린 기회주의를 점철한 카우츠키 기고문을 보고는 격분했다. 글에서는 노동계급들은 전쟁에 반대하고, 무장 파업, 파업을 조직한다면 잘못했다고 말했다. 레닌은 여러 차례 1905, 혁명에서 파업에 대한 조직 역할이라는 글 썼다. 레닌은 기고문으로부터 더욱 면밀하게 문제를 조명해갔고, 노동 대중에게 모든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으로부터 파업에서도 지대한 의의를 부여했다. 바젤 대회로는 만장일치로 전쟁에도 반대하는 선언문을 채택했고, 대규모 반전 시위를 조직했다. 2인터내셔널은 기회주의로부터 얼마나 잠식당했는지는 1914년에서야 드러났다제국주의 전쟁을 발발하기 직전, 크라코프 시절, 레닌은 민족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젊은 시절부터 온갖 민족 박해를 증오했기 때문이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종속되는 더 큰 불행이 없다고 마르크스 말을 레닌은 공감했고, 또 이해했다. 그러나 전쟁은 닥쳐왔다.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정서를 고양했고, 민족 적개심으로부터 불을 질렀다. 전쟁은 닥쳐오면서부터, 약소 민족에 대한 억압, 독립에 대한 탄압도 잇따랐다. 전쟁은 반드시 봉기로 전화할 수 있고, 피억압 민족들도 독립을 강력하게 요구하기를 레닌은 의심하지 않았다. 또한 당연한 권리이기도 했다.

 

1896, 런던에서 개최한 국제 사회주의 대회로는 이미 권리를 확인했다. 1912년 말-1913년 초와 같인 전쟁을 목적으로 둔 시기로부터 민족자결권을 과소평가한 데 레닌은 분노했다. 8월 블록으로는 시대 요구 문제, 첨예화하지도 않은 채로, 문화, 민족 자치권을 강령 민족 자결권 조항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결정을 승인했다. 같은 결정은 1903, 2차 당 대회에서도 이미 논란이었지만 부결했다. 따라서 민족 문제에 대한 입장을 포기했다. 문화는 정치 체제 전체로부터 수천 갈래로 얽혔다고 분명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문화라는 문제 하나로만, 모든 투쟁을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기회주의로 봤다. 민족자결권에 대한 문제에서 주요한 논쟁으로는 폴란드들과 벌어졌다. 룩셈부르크, 즐라모프파마저도 민족자결권은 분리권을 뜻하지 않는다고 내세웠다레닌은 민족자결권에 대한 폴란드인들에 대한 정서는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잘 알았다. 차르 전제 정치에 대한 증오는 폴란드 대중 속에도 있었다. 전쟁은 닥쳐왔다. 검은 100인조 민족주의, 열강 부르주아 폐쇄주의를 고조했다. 폴란드 사회주의 당으로는 폴란드 독립을 키워나갔다. 소부르주아적 폴란드사회주의당에서는 분리주의마저 커져만 가자,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우려도 생겨났다. 그래서 폴란드 사회민주주의들로는 분리에도 반대해싿. 레닌은 폴란드사회주의당 당원들을 만났고, 당 활동가들 가운데 한 사람과도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면서 발언들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레닌은 폴란드인 관점으로만 민족자결권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민족 문제에 대한 논쟁으로는 제2차 당대횡서도 제기한 적 있었다. 1913-1914년 전쟁 직전에는 매우 날카로운 수준으로 번져갔다. 제국주의 전쟁은 고조되던 1916년까지도 계속됐다. 레닌은 논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분명하고 강력한 문제를 제기했다. 당은 소비에트 국가라는 틀 안에서 민족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고,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을 창건한 뒤로는 민족 사이에서 불평등이 있거나, 어떠한 민족 권리를 축소하는 일은 없도록 했다. 견딜 수 없는 박해를 받았던 민족들로는 문화로도 빠르게 성장해갔고, 공동 사회주의 건설로 통합하고 있는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서 모든 민족들은 더욱 긴밀하게 결합했다.

 

크라코프에서는 레닌은 민족 문제만 치중한 게 아니라, 늘 지대한 의의를 부여해 온 농민 문제와 같은 여러 문제들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레닌은 크로코프 시절, 농민 문제에 대한 40편도 넘는 글을 썼다. 두마 의원, 샤코프를 위해, <현 정부 농업 정책 문제에 대하여>를 썼고, 페트로프스키를 위해 <농업 예산 문제에 대하여>를 썼다. 레닌은 크라코프에서 미국 자료를 연구하기를 기초로부터, <농업에서 자본주의 발전 법칙에 대한 새로운 자료들>이라는 방대한 글을 썼다. 미국 통계는 정확하고, 풍부한 국가로 명성을 떨쳤다. 레닌은 수하노프 견해를 논박하고자, 글을 쓰기도 했다. 레닌은 수하노프 견해를 두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농업은 비자분주의적으로 전화해야만 한다는 힘머 이론으로는 본질적으로는 압도적 다수로부터 부르주아 교수들, 부르주아 민주주의 및 전 세계 노동 운동 안에서 기회주의 이론이라고 말했다. 크라코프에서 시작한 미국 농업에 대한 소책자는 1915년 마쳤고, 1917년에서야 출판할 수 있었다. 병석에 누웠던 1923년에 레닌은 혁명에 대한 수하노프 논고를 읽고, 글을 구술하기도 했다. 크라코프 시절 쓴 수 많은 글들로부터 레닌은 농민, 지주 농업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줬다여러 당에서 농업 강령을 설명하고, 국가 조치 성격을 폭로하고, 이주 문제, 농업에서 고용 노동, 아동 노동, 토지 거래, 농지 동원 등등 여러 문제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자 했다. 농민 요구, 농촌에 대해서도 레닌은 너무 잘 알았고, 노동계급, 농민계급들도, 잘 알았다1912년 말, 혁명 노동 운동은 북돋고 있었고, <진실>도 많은 역할을 했다. 전진파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도 알았다. 191211, 알렉신스키로는 파리에서 전진파를 대표해서 <진실>에게 협력하기를 제안했다. 알렉신스키는 <진실>에서 많은 글을 쓰기도 했고, 전진파 논문집<최근 쟁점에 대하여> 3호에서 청산주의를 투쟁하고자 볼셰비키 안에서 투쟁을 중단하고, 모든 볼셰비키 구역을 이룰 필요가 있다는 글까지 썼다. <진실> 편집부는 알렉신스키가 가입된 파리 모임뿐만 아니라, 보그다노프까지도 투고하고자 명부에도 포함했다. 레닌은 원칙적인 문제를 대할 때는 철두철미 신중하면서도, 사람들을 대할 때는 매우 밝았다. 낙천주의로는 오류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대의를 위해서는 무척 유익했다. 그러나 원칙 문제에서 합일점을 찾지도 못한다면, 타협이란 있을 수는 없었다.

 

크라코프 시절, 레닌은 이미 사회주의 건설로 향했다. 크라코프 시절로는 사회주의 건설 준비기였다. 레닌은 문화 문제에도 무척 많은 관심을 보였다. 12월 말, 페테르부르크에서 피트메르고등학교는 수색을 당하고는 학생들은 체포됐다. 교장과 남편은 1890년대 초창기 마르크스주의 모임에서도 적극 참가했고, 1905-1907년에는 볼셰비키를 여러 가지로 돕기도 했다. 피트메르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 정치 참가, 모임 조직 등을 금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경찰은 급습했다. 학생들은 체포됐고, 두마에서 조사를 실시했다. 카소 장관을 해명했지만, 과반 수 의원들은 해명은 불충분하다고 판단했다레닌은 1913, <계몽>, 3, 4호에서 게재한 기고문, 10장에서, 두마로부터 피르메르 고등학교 학생들에 대한 체포와 관련해서, 카소 인민 교육부 장관에 대한 불신을 표명한다고 지적했다. 레닌은 문화에 대해서도 언제나 정치 및 경제 구조 관계를 강조했다. 문화, 민족 자치라는 구호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1913, 2, 레닌은 <러시아인과 흑인>이라는 특수한 글을 쓰기도 했다. 1913년 여름, 레닌은 바다예프 동지로부터, <인민 교육부 정책 문제에 대하여>라는 두마 연설문 초안을 작성했다. 두마 의장은 바다예프를 제지했고, 발언권을 박탈했다. 레닌은 러시아에서 문화는 후진했고, 인민 교육에 할당된 재원들마저 형편 없고는, 차르 정부 정책으로부터도 인구 90%에게 교육 기회를 차단했음을 드러냈다. 미국에서는 국민 11%가 문맹이고, 흑인들은 44%가 문맹이라고 말했다. 1910, 흑인들은 러시아 농민들보다도 더 계몽됐다. 왜냐하면 미국 인민으로는 반 세기 전부터 이미 미국 노예 소유를 완전하게 박설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몽 문명 국가를 만들고자, 러시아 인민도 자국 정부를 타도해야만 해씩 때문이었다. 샤코프 동지를 위해 쓴 연설문에서도, 레닌은 지주로는 농민에게 토지를 넘겨줄 때만 러시아는 게몽 국가일 수 있다고 적었다. <인민 교육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글에서도 레닌은 미국 도서관 분야를 상세하게 묘사했고, 러시아에서도 마련해야만 한다고 적었다. 6월에는 <노동계급, 신맬서스주의>에서도 교육 투쟁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회주의 건설 문제에서도 실천 의의를 지닌 다른 많은 문제들을 다뤘다. 

 

크라코프 시절, 레닌은 <기술에서 위대한 승리 가운데 하나>로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발명과 사회주의 아래에서 발명과 역할을 비교하기도 했다. 자본주의 발명에서는 한 줌 백만장자들만, 더욱 부유해지고, 노동 계급들에 대한 전반적인 처지로는 더욱 악화되고, 실업마저 증가한다. 사회주의 아래에서는 램지 시스템으로부터, 수백만 광산 노동계급들은 노동에서도 해방할 수 있고, 모든 노동계급들에 대한 노동일도 곧바로 8시간에서 7시간으로, 또 아래로도 단축할 수 있다고 봤다. 모든 공장, 철도를 전기화하면, 노동 조건도 더욱 위생적이고, 수백만 명 노동계급들도 연기, 먼지, 진흙 따위에서 벗어날 수 있고, 더럽고 역겨운 작업장들도 깨끗하고, 밝고, 품위를 갖춘 실험실로 바꿀 수 있다고 촉진하고자 했다. 모든 집에서 전기 조명, 전기 난방을 이용한다면, 수백만 가사 노예들도, 삶을 3/4를 어두침침한 부엌에서 보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기술이란 노동하는 사람들을 고용 노예 상태라는 사회 조건들이란 날로 갈수록 증대하도록 만든다고 적었다일찍부터 레닌은 전기화, 하루 7시간 노동, 취사 공장, 여성 해방 등에 대해 생각했다. <최신 업종 가운데 하나>라는 글에서도, 사회주의 아래에서 자동차 개발에 대한 의의를 깊이 생각했다<농업에서 철제품>에서 철을 국가 문화에서 단단한 기반이라고 말했다. <선진 자본 사상>이라는 레닌 글로는 한 미국 백만장자 사상을 분석하기도 했다. 주로 백만장자 산업가들이 자신들의 중세 특권을 푸리슈케비치라는 검은 100인조 패거리와 협작하고는, 중세 반문화주의로부터 조국을 해방하도록 하는 일에 대해서는 탄식했기 때문이다. 레닌은 한 미국 백만장자를 두고는 전 세계 노동계급을 바보라고 믿냐고, 따져묻기도 했다. 1912, 가을, 부하린을 알았다. <진실>에서 신문 구독 명단으로는, 주로 90%는 노동계급이었다. 배포 도표로는 몰랐던 큰 공장도 나오곤 했다. 크라코프에서는 그네비치, 단스키는 발행하기도 했다. 레닌은 보험 문제에서, 대중, 당 관계를 강화하도록 할거라고 생각했다.

 

19132월 중순, 중앙 위원회 회의로는 크라코프에서 열렸다. 두마 의원, 스탈린도 왔다. 레닌은 탐메르포르스 협의회, 스톡홀름 협의회, 런던 대회 등으로부터 스탈린을 알았다. 레닌은 민족 문제에 대해서 스탈린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진지한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같은 문제를 분석한 사람을 만나 기뻐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비엔나에서 두 달을 지내면서, 민족 문제를 연구했다. 비엔나 동지들, 부하린, 트로야노프스키와 주로 가까운 사이였다. 스탈린으로는 222, 러시아로 돌아가자, 페테르부르크에서 체포됐다. 9월에는 중앙 위원회 회의를 열기로 했다. <진실>은 폐간당했고, <노동 진실>을 발간했으나, 압수당했다. 파업도 높이 치솟아 올라, 페테르부르크, 리가, 니콜라예프, 바쿠 등지로도 파업은 벌어졌다. 카메네프 가족은 집 이층으로 이사 왔다. 레닌은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오랫동안 주방 식탁에 앉아서, 러시아로부터 오는 소식들에 대해 논의했다여름 회의로 잘 알려진, 당 협의회를 위한 준비 작업도 진행했다. 회의로는 1913922-101일까지 포로닌에서 열렸다. 여러 파견단 의원들도 참석했고, 말리노프스키로는 <노동 진실>, 모스크바 신문, <계몽>, 파도 출판사, 협동조합 및 판매원 대회, 정례적인 다른 과제 등도 논의했다. 협의회 중간에는 이네사 아르망도 도착했다. 19129, 체포된 이래로 다른 사람 이름으로 감옥에 수감됐고, 힘든 환경 속에서 결핵을 앓아서 건강은 많이 나빠졌다. 그러나 당 활동에 더욱 투신했다. 협의회로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22명이었다. 노동 운동 성장 배경으로는, 5차 런던 대회를 열린 이래로, 대회를 필요로 했다. 노동 운동도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으로는 파업 운동, 정치 총파업 준비, 선동 임무, 일련 대중 소책자 출판, 민주 공화제 구호 선동 축소 불허용, 지주 영지 몰수, 하루 8시간 노동제 등 여러 문제들도 회의에서 다뤄져야만 했다. 두마 사회민주주의당에서 소수 노동계급들에 대한 견해만 대표할 7인조로부터 볼셰비키를 반대표를 던지기를 허용할 수 없고,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고, 전적으로 레닌, 민족 문제에 대한 중요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19141, 말리노프스키로는 카르코프로 와서 레닌과 함께 파리로 갔다고 다시 브뤼셀로 갔다. 113일에 열린 제4차 라트비아 사회민주주의 대회로 참석하고자 했다. 레닌은 파리에서 돌아온 직후로 겨울에는 <진실> 지도, 두마 파견단 작업을 위해, 카메네프를 러시아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신문도, 두마 파견단도 도움은 필요했따. 1914, 38, 페레트부르크에서 대중 잡지, <여성 노동> 첫 호는 나왔다. 파리에서는 이네사, 스탈, 크라코프에서는 릴리나, 크룹스카야는 <여성 노동>에도 글을 썼다. 일곱 호를 발간했다. 8호에서는 비엔나에서 열릴 여성 사회주의 회의와 관련한 기고문들을 싣기로 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전쟁은 일어났다. 비엔나에서 8월로 예정한 국제 대회 기간 동안 당 대회를 열기로 했다. 일부 사람들은 합법으로 국경을 넘을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6월 중순, 국제사회주의사무국으로는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에서 각기 다른 경향, 11개 조직 대표들에게 브뤼셀에서 회동을 갖고, 통합을 위해 각 조직은 서로 의견을 교환하자고 했다. 그러나 청산주의, 트로츠키파, 분트 등은 볼셰비키 활동을 제한했고, 여러 가지 조항들로부터 활동을 구속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영향력은 커져만 갔다. 바다예프, <국가 두마 안에서 볼셰비키>라는 책에서도 지적했지만, 1914년 여름 무렵부터, 페테르부르크에도 있던 18개 노동 조합 가운데 14개 조합 지도부로는 볼셰비키로 구성할 수 있었다. 모든 노동 조합 조직 가운데 수적으로도 매우 많고, 매우 힘 있는 조합으로는 금속 노동 조합을 비롯해서, 강력한 모든 조합들도 볼셰비키 쪽이었다. 보험 기관 노동계급들 가운데에서도 같은 비율이었다.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와 같은 수도권 보험 기관, 노동 대표로 선출한 사람들 가운데로는 37명은 볼셰비키였고, 멘셰비키는 모두 7명이었다. 전 러시아 보험 기관에서 선출한 사람들 가운데 47명은 볼셰비키, 10명은 멘셰비키였다. 따라서 비엔나에서는 국제 대회를 위한 선거를 폭 넓게 조직해갔다. 대다수 노동 조직들도 볼셰비키에게 국제사회주의대회 위임장을 넘겨주고자 했다.

 

청산주의, 트로츠키파, 전진파, 플레하노프파, 카프카스 지역 위원회 등으로는, 브뤼셀에서 사적인 회동을 갖고는 반볼셰비키 구역을 결성하고는, 조정된 정세를 활용해서 볼셰비키에게 압력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통합을 둘러싸고는 브뤼셀에서 질질 끌린 일로부터 1914년 여름, 레닌은 또 다른 극히 중대한 사태에도 몰두했다. 바로 말리노프스키 사태였다. 내무성 장관으로 임명한 준코프스키 장군은 말리노프스키를 첩자로 활동했다고 알았고, 두마 의장, 로잔코에세 사실을 알리고는 정치 추문은 일어나지 않도록 무마하고자 했다. 58, 말리노프스키는 로잔코에게 두마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고는 해외로 나가버렸다. 지역, 중앙 기관들은 말리노프스키는 무정부주의와 같고, 조직을 파괴하는 행동에 대해 책임을 묻고는 당에서 제명했다그러나 말리노프스키를 두고 첩자라고 비난한다면, 너무도 황당했기 때문에, 중앙 위원회로는 가네츠키를 위원장으로 하는 특수 위원회를 구성했고, 레닌, 지노비예프도 소속됐다. 레닌도 믿지 못했다. 위언회는 말리노프스키에게 첩자 행위를 추적하거나, 증언을 들었지만, 궤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말리노프스키로는 프로닌을 배회하다가, 정체는 2월 혁명 때 드러나고는 말았다. 10월 혁명 뒤로 제 발로 러시아로 돌아와서는 소비에트 정권으로 인계됐고, 대법원 판결로부터 총살됐다러시아에서는 투쟁도 격화했다. 파업 운동도 커져갔다. 바쿠 성장은 폭발했다. 노동 계급은 바쿠 파업 참가자들을 지지하는 가운데 12천 명도 모인 푸질로프 공장 집회에서 경찰은 총 쏘았다. 경찰과 충돌도 심각한 양상을 띠었고, 두마 파견단은 궐기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도했다. 대규모 파업은 일상이었다. 77, 페테르부르크에서 13만 명은 파업했다. 프롤레타리아트로는 전쟁을 준비했다. 파업은 가라앉지도 않았고, 더욱 커져만 갔다. 붉은 페테르부르크 거리로는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81, 독일은 러시아에다 선전 포고를 했다. 83일에는 프랑스, 84일, 벨기에는 선전 포고를 받았다. 같은 날 영국은 독일에다 선전 포고를 했고, 86일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로는 러시아에다, 811일로는 프랑스, 영국은 오스트리아, 헝가리에다 선전 포고를 했다. 세계 대전은 시작됐다. 전쟁을 북돋던 러시아 혁명 운동을 일시적으로 정지하도록 만들었고,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일련 위기마저 만들어 내고는 말았다. 혁명 투쟁 문제들도 더욱 새롭고 날카롭게 제기했고, 모든 노동 계급에 대한 지도가로는 프롤레타리아트 역할은 두드러졌고, 새로운 계층들도 투쟁으로 일어섰고, 프롤레타리아트 승리는 러시아로부터 생사 문제였다.


1914-1917. 전쟁기. 


크라코프. 


이미 오래 전부터 전쟁 기운은 감돌았다. 막상 전쟁을 선포하자 모두들 충격에 휩싸였다. 레닌은 코펜하겐 동지에게 편지를 쓰고는 스톡홀름, 연락망 구축하기와 여러 부탁을 했다. 산골 지역 주민들도 동원을 시작하자 완전 짓눌린 분위기였다. 심지어 누구와 전쟁을 하는지도, 무엇 때문에 전쟁을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어떠한 각성도 없는 상태로 도살장으로 끌려가듯 전쟁터로 갔다. 191487일에는 헌병대는 레닌을 체포하겠다고 위협까지 했다. 더군다나 전쟁 초기에는 지나가다 사람 하나 죽는 건 일도 아니었다. 치호미르노프는 올로네츠에서 유형을 마치고 돌아왔다. 유형지에서 이미 망가진 심신을 휴양하고, <진실>에도 실을 자료들을 기초로부터 러시아에서 벌어진 노동 출판물 운동 등에 대한 정리 작업을 하고는 레닌을 돕고자, <진실> 편집부로는 포로닌으로 보냈다.

 

레닌, 크룹스카야도 밤새 잠을 못 이뤘다. 너무나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차르 황실 관구 촌장은 레닌은 국제 사회주의 사무국 회원이므로, 데리고 있는 사람은 생명에도 책임을 져야만 한다고 한바탕 소동마저 일으켰다. 레닌은 비엔나 인터내셔널 사무국원이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당 의원 빅토르 아들러에게 편지를 썼다. 레닌도 정치적이거나, 간첩 행위를 한 증거가 없음을 변호하고자, 여러 동지들도 전보를 부쳤다. 수 많은 지역 농민들은 수감됐다. 단지 여권이 만료됐거나, 세금을 내지 않았거나, 지역 정부와 분쟁을 벌였다는 이유만으로도 체포해갔다. 동지들은 탄원서를 써주기도 했다. 레닌은 형사범 감옥 안에서도 수감자들은 잠든 상태에서도 밤마다 당은 무엇을 해야 하고, 발발한 세계대전으로부터도 프롤레타리아트, 부르주아 세계적인 충돌로부터 전화하고자 어떤 행보를 취할 수 있는지 늘 생각했다. 크룹스카야로는 전쟁에 대한 소식을 입수하면 레닌에게도 전달했다. 레닌은 풀려난다 하더라도, 포로닌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크룹스카야는 짐을 쌌고, 꼭 챙겨 가야만 하거나, 포로닌에 남겨 둬야만 하는 걸 골라냈다. 집 형편은 엉망이었다. 레닌은 체포됐지만, 크룹스카야 가족들은 전쟁에 동원된 줄로 알기도 했다. 레닌을 변호했던 비엔나, 빅토르 아들러 의원, 리보프 지아만드 의원은 압력을 행사해서 마침내 효력을 나타냈다. 레닌은 819일에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임시 거처로 정한 건물 창문으로부터 참혹한 광경을 보기도 했다. 크라스니크에서 사망자, 부상자를 실은 기차도 막 도착했다. 크라니스크 일대에서 전투에도 참가했던 사람들은 친처들도 들것 주변으로 몰려들어 두려운 눈으로 가득찬 채로 죽은 사람들, 죽어 가는 사람들 가운데 아는 사람들도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부상 정도는 비교적 경미한 사람들도 목이고, 팔이고, 붕대를 칭칭 감고는 천천히 역 밖으로 걸어 나왔다. 겨우 첫 전투에 불과했다.

 

크라코프에서는 중립국이던 스위스로 출국할 권리를 아주 빨리 취득할 수 있었다. 처리해야 할 일들도 좀 있었다. 여러 가족들 덕분에 1917년 가운데까지도 아껴뒀던 여비 돈은 조금 남아서 일시적인 생활비로 그래도 충당할 수는 있었다. 19177, 페테르부르크에서 집을 수색 당했을 때도, 경찰은 돈 영수증을 압수해갔고, 레닌은 간첩 활동을 한 대가로부터 독일 정부로부터 돈 받았다는 증거로 삼고자 가져가기도 했다. 비엔나에서는 필요한 증명서들을 입수하거나, 돈 문제를 처리하느라, 스위스로 입국할 수 있도록 보증해 달라는 전보를 스위스로 보내느라 하루 동안 머물기도 했다. 스위스 사회민주주의당 노당 당원, 그로일리히는 레닌에게 보증을 서주기도 했다. 비엔나에서 라쟈노프는 레닌을 데리고 체포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준 빅토르 아들러를 찾아갔다. 레닌은 차르 정부로부터 적이었다.


베른.


191495일에는 스위스에서 입국해서 베른으로 향했다. 제네바와 베른 가운데 어디에서 살지는 아직 완전하게 결정을 못 내린 상태였다. 레닌은 옛날에 살던 익숙한 곳이던 제네바로 마음은 끌려 있었다. 러시아 장서 등을 훌륭하게 갖췄던 독서회도 있었기 때문에 일하기도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다른 도시들에서도 망명가들도 몰려들어 너무나 많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기도 했다. 따라서 베른에서 방을 구했다. 레닌은 곧바로 제네바와 연락을 취했고, 러시아와는 연락망을 구축하고자 사람들을 모았다. 러시아로 갈 수 있는 사람, 러시아 인쇄소, 전단 등을 알아보았다. 베른에 있던 볼셰비키, 여러 동지들과도 회동했다. 발발한 전쟁 성격을 두고 제국주의 약탈 전쟁으로 규정하고, 전쟁 채권 발행에도 찬성한 제2인터내셔널 지도부 행위를 프롤레타리아트 대위에 대한 배반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결의안을 앞서 채택했다. 결의안 내용으로는 러시아 모든 민족 노동 계급, 노동 대중 관점에서 볼 때도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에서 수 많은 민족들을 압박하는 차르 군주정, 군대는 패배하는 쪽이 그나마도 더 낫다고 했다. 결의안으로는 또한 사회주의 혁명, 내전, 모든 나라에서도 어김 없이 나타나는 애국주의 및 폐쇄주의에 대한 가차 없는 투쟁 등에 대한 구호도 내걸었고, 군주정에 맞서는 투쟁, 혁명 선전, 공화국 쟁취 투쟁, 대러시아인들로부터 억압받는 민족들에 대한 해방 투쟁, 지주 소유지 몰수, 하루 8시간 노동 쟁취 투쟁이라는 큰 러시아 행동 강령을 정했다.

 

베른 결의안에서 핵심으로는 자본주의 세계 전체에 대한 도전이었다. 베른 결의안은 은밀하게 보관하고자 작정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결의안은 먼저 볼셰비키 해외 지부로부터 각각 배포했다. 다음으로는 러시아 중앙 위원회 및 두마 파견단 토의로부터 사모일로프 테제들을 가져갔다. 러시아와 통신은 두절된 상태였다. 러시아 중앙 위원회, 볼셰비키 두마 파견단은 처음부터 올바른 노선을 취했었다. 전쟁에 대한 국제 대회 결의안으로는 선진 노동계급들과 당 조직들에게 종이 조각에 불과하지도 않았고, 행동 지침이기도 했다. 동원령을 발포했을 때는 전쟁 초창기에 중앙 위원회로는 <전쟁 타도. 전쟁에는 전쟁으로>라는 호소문을 살포했다. 페테르부르크 일부 기업에서도 예비군을 동원하던 날 파업도 일어났고, 시위를 조직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쟁은 검은 100인조 애국주의를 들끓게 하고는 군부 반동을 강화하도록 했고, 따라서 많은 일들도 실패했다. 그러나 두마 파견단은 전쟁에 대한 투쟁, 차르 권력에 대한 지속할 수 있는 투쟁이라는 노선을 굳건하게 지켜나갔다. 멘셰비키조차 감동해서는 사회민주주의 분파 전체는 공동 결의안을 채택할 수 있었고, 두마 연단에도 공표했다. 사회민주주의 파견단으로는 전쟁 채권 투표에도 참가하지 않았고, 항의 표시로 회의장을 박차고 나오기도 했다. 볼셰비키 조직으로는 신속하게 지하 깊숙하게 숨어들고는, 혁명 전쟁을 전개해나갔고, 심화하고자 전쟁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지시하는 전단을 발행하고자 했다. 지방에서도 반전 선전을 했다. 지역에서 온 소식들로부터 혁명 성향 노동 계급들도 같은 선전을 지지하기도 했다. 해외에 있어서 한참 뒤에서야 알았다. 그러나 두마 파견단, 러시아 볼셰비키 조직만큼 굳건함을 견지하지는 못했었다. 왜냐하면 문제를 분명하게 파악하지도 못했고, 어느 쪽에서 침략자냐는 식으로만 말들만 많이 해댔기 때문이었다.

 

파리로는 대다수 모임들도 우여곡절 끝에 전쟁, 자원병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명하기는 했었지만, 일부 동지들은 자원병으로도 프랑스군으로 들어갔다. 멘셰비키, 일부 볼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 등도 80명 정도 자원병들은 러시아 공화주의를 대표해서 성명을 채택하고는 프랑스 언론에다 성명을 발표했다. 파리를 떠나는 자원병을 앞에 두고 플레하노프는 환송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파리 모임은 자원병들을 비난해댔다. 그러나 다른 모임에서는 문제를 제대로 명확하게 잘 인식하지도 못했었다. 레닌은 중차대한 시기로는 온갖 미묘한 사안들에서도 의미를 초반부터 곧바로 규정한다면 불합리할 수 있기 때문에, 볼셰비키로는 사태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고, 동지로부터 의견을 교류하고, 끝까지 논의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한 사례로는 제네바 지부 입장을 피력한 카르핀스키 동지로부터 보낸 편지에도 답하면서 레닌에 대한 비판과 카르핀스키에 대한 레닌, 반비판와 같이 더욱 좋은 토론 거리일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레닌은 편지에서도 동지 토론으로부터 더 좋은 결론으로 도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때는 때이니만큼 볼셰비키라는 협소한 모임 안에서도 동지 토론이라는 틀로만 머물거나, 오래도록 묶여 있을 수는 없었다.

 

10월 초에는 파리로 돌아온 플레하노프로는 이미 제네바에서 연설하고자 강연하러 로잔으로 가고자 했다. 레닌은 마음 상했다. 플레하노프는 방어론만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플레하노프는 과거 군 생활을 겪어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했다. 베른에서는 두 주 정도, 늦게 도착했던 지노비예프 부부, 이네사 아르망도 살고 있었다. <레닌 연구소 회보>에서는 회고록 가운데로는 강연회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여러 곳에서 강연장으로 모여들었고, 베른에서는 지노비예프, 이네사, 슈클로프스키 등, 클라렌스 부근, 보쥐에서는 로즈미로비치, 크릴렌코, 부하린 및 로잔 동지들도 갔다. 레닌은 플레하노프와 멘셰비키 때문에 많은 수 볼셰비키를 들여보내 주지는 않을까 매우 불안했다. 슈투트가르트, 코펜하겐, 바젤 등지에서도 국제 대회로는 임박한 전쟁에 대한 사회주의 입장을 취하고자, 이미 결정한 바 있었다. 사회민주주의들로는 자국 폐쇄주의 위협으로 맞서 싸울 때 의무를 다하고자 했다. 그리고 시작된 전쟁을 프롤레타리아트, 지배 계급 사이에서 결정적인 격돌로 전환하도록 해야만 했다. 레닌에게는 10분이라는 시간만 주어졌고, 요점만 말해냈다. 플레하노프는 레닌을 반박했다. 압도적인 다수였던 멘셰비키는 플레하노프에게만 박수를 쳐댔다. 사흘 뒤로는 1014, 플레하노프로는 강연했던 바로 같은 장소에서 레닌은 강연했다. 강당은 만원을 이루었고, 강연은 매우 성공했다. 레닌은 전투 분위기였다. 레닌은 전쟁을 두고 제국주의 전쟁으로 보는 견해를 충분하게 털어놨다. 레닌으로는 이미 중앙 위원회로부터 만든 반전 전단도 나왔고, 카프카스 조직, 몇몇 다른 조직들도 같은 전단을 유포했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레닌은 강연에서 유럽에서는 마르토프로부터 기고하고 있는 <목소리>는 매우 훌륭한 사회주의 신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르토프와 의견으로 심각하게 대립할수록, 사회민주주의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더욱 단호하게 말하고자 했다. 마르토프는 자국 정부를 비판하고, 자국 부르주아지를 폭로하고, 자국 장관들을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마르토프도 볼셰비키 쪽으로 가담하기를 좋겠다고 여러 번 말하곤 했었다. 아무튼 레닌 강연은 매우 성공했다. 제네바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같은 강연을 했다.

 

벨기에로는 대의원으로부터 두마 안에서 사회민주주의당 두 분파, 모두에게 전보를 보냈다. 벨기에로는 러시아 정부로는 협상국 쪽에서 독일과 결전을 수행하도록 사회민주주의 의원단도 협조해주기를 호소했다. 초기 전쟁 채권에도 투표하기를 거부했던 멘셰비키 의원들도 대다수 사회주의 정당들은 어떠한 입장을 취했는지 알자 심하게 동요했다. 따라서 벨기에에서 보낸 답신으로부터 이미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이었으므로, 전쟁에도 반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볼셰비키 의원단으로는 전쟁을 지지하고, 차르 정부에 맞선 투쟁을 중단에 대해 일축하는 답신을 보냈다. 그리고 볼셰비키 의원단은 취했던 주요한 노선을 옳았다. 따라서 레닌은 슐라프니코프는 스톡홀름에도 남아서 두마 의원단 및 러시아와 연락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고 내세웠다. 레닌은 제네바에서 전단에 대한 내용을 두고 여러 테제를 채택했고, 선언문으로 개정하고자, 동지들과 여러 가지로 의논했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 신문을 중앙 기관지로 발행하고자 결정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접했다. 10월 말, 레닌은 다시 강연하고자, 몬트레, 취리히로 갔다. 취리히에서는 트로츠키도 연설했다. 누가 어떤 노선을 취하는지 분명하게 밝히고자, 모든 문제를 일부러 극히 날카롭게 제기했다. 그리고 방어론에 대한 투쟁도 전면적으로 진행했다. 진행 중인 투쟁은 당 안에서 벌어지는 투쟁도 아니었고, 러시아 문제로만 국한되지도 아니했고, 국제 성격에서 투쟁이었다.

 

레닌은 기회주의에 잠식된 제2인터내셔널은 죽었다.”고 내세웠다. 따라서 기회주의를 쓸어버리고 새로운 세 번째 인터내셔널을 위해 세력을 결집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들을 제외하고는 전쟁 채권에 투표하지 않는 나라들로는 세르비아 사회민주주의들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세르비아 의회에서도 단 두 명에만 불과했다. 독일에서 전쟁은 시작하자 모든 사람들은 전쟁 채권에다 찬성표를 던졌지만, 910일에는 칼 리프크네히트, 프란츠 메링, 로자 룩셈부르크, 클라라 제트킨 등은 독일사회민주주의당 다수로부터 취한 입장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성명서를 작성했다. 성명서를 10월 말에서야 스위스 신문들에다 발표할 수 있었고, 독일에서는 정작 성명서는 신문에도 실리지를 못했다. 독일 신문들 가운데 전쟁을 시작한 순간부터 매우 좌익 입장을 취했던 신문으로는 <브레멘 시민 신문>이었다. 신문은 823,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은 붕괴했다고 발표했다. 프랑스에서는 게드, 베이앙을 수반으로 하는 사회주의당 폐쇄주의 손을 들어줬다. 당 바닥에서부터 전쟁을 반대하는 분위기는 매우 확산해갔다.

 

벨기에 당 성격으로는 반데르벨데 처신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영국에서는 기회주의 독립노동당 맥도날드, 케어 하디로부터 하인드만 영국사회주의당 전체로부터 폐쇄주의로도 반격을 가했다. 중립국들로는 반전 분위기는 퍼졌고, 평화주의 성격은 주조를 이뤘다. <전진>을 필두로 이탈리아 사회주의당은 다른 당들보다 혁명을 추구했다. 당은 폐쇄주의에도 맞서 투쟁했었고, 전쟁 호소로부터 숨어 있던 탐욕스러운 이면도 폭로했다. 선진 노동 계급들도 지지했따. 927일에는 루가노에서 이탈리아, 스위스 사회주의 협의회를 열었다. 전쟁에 대한 테제들을 협의회에다 보냈다. 협의회로는 전쟁 성격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평화를 위해 투쟁하기를 요구했다.

 

레닌은 카우츠키는 누구보다도 해롭다고 더 말했다. 왜냐하면 인터내셔널을 그저 단순하게 재건하자는 구호만으로는 옳지 않고, 평화라는 구호도 옳지 않고, 국가 간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하자는 구호여야만 했다. 전쟁을 방해하거나, 그러한 분위기에서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행동이 아닌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도록 할 수 있는 방향으로부터 대규모 선전도 말했다. 러시아에서는 불행한 벨기에, 우크라이나로부터 하는 말들 속에서, 또는 독일인들에 대한 카이사르주의에 대한 인민 증오 속에서부터 폐쇄주의는 숨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의무로는 같은 궤변들에도 맞서 투쟁한다. 보다 정확하고 분명한 노선에 따라 투쟁을 이뤄지고자, 러시아에서는 노동 대중, 노동 계급이라는 이해 관계라는 관점으로도, 러시아인들은 죄를 덜 지을 수 있도록, 전쟁에서 차르 전제 정치를 타도해야만 하고, 차르 전제 정치로는 카이사르주의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말했다. 따라서 전쟁을 방해할 게 아니라, 폐쇄주의에도 맞서 투쟁해야만 하고, 내전을 목적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적인 단결을 선전하고, 선동하는 데 매진하고자 했다. 단지 장교들을 사살하는 개인적인 행동을 촉구하거나, 카이사르주의로부터 협력하고 싶지 않다는 등 주장을 허용한다면 잘못됐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행동은 무정부주의로 기울어졌고, 카이사르주의와 협력 거부만 내세운다면 기회주의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 군대로도 대규모로 아니면, 최소한 집단 진격을 준비해야만 하고, 자국 군대로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 모든 선전, 선동 활동으로도 같은 방향에서 수행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국가 간 전쟁을 내전으로도 전환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긴 시간도 들어도, 완강하고, 체계적인 작업으로부터, 개시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레닌은 전환 시점을 무르익도록 만들고자 했다.

 

그러므로 레닌은 평화라는 구호는 현 시점에서도 옳지도 못하고, 성지자들이나 내거는 평범한 구호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 구호로는 내전이어만 했다. 레닌은 바젤 결의안도 같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레닌에게 내전은 함부로 약속할 수도, 지시할 수는 없다고 했다. 매우 장기적으로 활동을 수행하기를 의무라고 받아들였다. 전쟁이 발발한 지 두 달 반만에, 레닌은 이미 분명하고, 명확한 투쟁 노선을 수립해냈다.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으로부터 제기할 수 있는 새로운 과제들에 대해서도 그토록 신속하고, 굳건하게 올바른 노선을 취할 수 있었다. 당 건설, 노동 계급들을 조직하고자, 이전 몇 년 동안 어렵게 활동해 온 결과이기도 했다. 국제 투쟁이라는 한가운데로 있었던 경험마저 없었더라면, 레닌은 굳건하게 러시아를 프롤레타리아트 10월로 승리를 이끄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사회민주주의>, 33호는 1914, 111일에 나왔다. 처음에는 겨우 500부만 인쇄했다가, 나중에는 1,000부를 추가 발행했다. 1114일에 레닌은 중앙 기관지로는 국경에서 멀지 않은 지점 가운데 한 곳에 도착했다. 1113일에는 나인, 그라버로부터 뇌샤텔 노동 중심지였던 쇼드퐁에서 프랑스어로 간행하는 스위스 신문 <파수꾼>에 대한 선언문을 요악한 내용을 게재할 수 있었다. 선언문 번역본을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신문들에 보냈다. 레닌은 제2인터새녀설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대의에 대한 배반에 맞서 투쟁을 전개했고, 베른으로 도착하자마자 그라나트 백과사전에 실릴, <칼 마르크스> 항목 내용을 작성하는 데 착수했따. 레닌은 마르크스 학설을 논하면서부터, 마르크스 세계관 개요로는 철학 유물론, 변증법으로 글을 시작했고, 마르크스 경제 학설을 서술한 뒤로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투쟁 전술이라는 문제로 어떻게 접근했는지를 조명했다. 레닌은 마르크스 학설을 설명하면서, 철학 유물론, 변증법에 대한 장을 저술하면서, 레닌은 헤겔, 다른 철학가들을 열심히 다시 읽었다. 마르크스 관련 글을 끝낸 뒤에도 같은 공부를 멈추지는 않았다. 철학을 공부한 목적을 두고 철학을 구체적인 행동 지침으로까지 전환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도 얻어냈다. 1921, 트로츠키, 부하린 등과 노동 조합 문제에 대한 논쟁을 붙었을 때, 모든 현상에 대해 변증법으로 접근해야만 한다고 짤막하게 언급하기도 했고, 베른으로 도착하면서부터 마하주의들로부터 싸우던 1909-1909년 철학 연구 연속선으로도, 행했던 철학 연습은 큰 결실과 여러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따라서 레닌에게 투쟁, 학습, 학술 활동은 언제나 튼튼한 매듭이었다. 얼핏 보면 평행선을 달리하듯이 보일 수 있지만, 관계로는 언제나 무엇보다 직접적이고, 더욱 심도 깊었다. 그리고 1915년 초에는 해외 볼셰비키 모임으로부터 단결을 위한 활동을 꾸준하게 강화해갔다.

 

해외조직위원회라 불리우던 볼셰비키 모임에서 중앙은 전쟁 전까지 파리에 있었다. 따라서 중앙을 중립국이던 스위스 베른으로 옮겨야만 했다. 중앙 기관지 편집국 역시 베른에 있었다. 전쟁에 대한 평가, 당 앞에 마주한 새로운 과제들, 과제들에 대한 해결 방법 등에 대해서도 최종적인 합의를 필요로 했고, 모임 활동을 구체적으로도 정할 필요는 있었다. 크릴렌코, 부하린, 로즈미로비치와 같은 보쥐파는 해외 기관지, <>을 발행하기로 결정하고는 성급하게 일에 착수하기만 했고, 중앙 기관지와 협의하지도 않았다. 발행하는 일도 별로 합리적이지는 않았고, 중앙 기관지 발간에 필요한 돈도 없는 상태였다. 또한 견해도 많이 달랐다. 2월 말, 베른에서는 해외 모임 협의회를 소집했다. 파리 방어론 분위기를 상세하게 말해줬다.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새로운 동지마저 절실하게 필요했다. 주로 일본, 미국 등지에서 활동한 키예프 파타코프, 옐레나 표도로브, 로즈미로비치라는 보슈 남매 동지도 있던 일본파를 좋아했다. 덕분에 해외 모임에서 힘을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동지마저 절박하게 필요한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협의회로는 전쟁에 대한 분명한 결의안을 채택했고, 유럽합중국 구호에 대해 토론했고, 해외 모임들로부터 활동 성격을 정했고, 보쥐 신문을 발간하지 않기로 결정했따. 또한 베른 사람들 가운데로는 슈클로프스키, 카스파로프, 이네사 아르망, 릴리나, 크룹스카야 등 새로운 해외조직위원회 위원으로 선출했다. 카스파로프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1913년 베를린에서 살았다. 레닌은 바쿠에서 온 예누키제, 샤우만 등으로부터 전재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레닌은 민족 문제에도 특히 몰두했다. 같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과 좀 더 긴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했다. 1913년 여름, 카스파로프는 <계몽>에다 실을 민족 문제에 대한 글을 썼다. 레닌은 민족 문제에 대한 편지를 썼다. 카스파로프에게 민족 문제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일들을 맡겼다. 1914, 7,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노동 운동도 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어려운 과제였고, 1915, 214일에 열린 협상국, 영국, 벨기에, 프랑스, 러시아 사회주의 정당들도 런던 협의회를 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다. 협의회로는 영국독립노동당와 여러 국가에서 사회주의 당원들도 들어왔다. 레닌은 중앙 위원회 선언문 초안을 작성했고, 반데르벨데, 게드, 상바 등에게 즉각 벨기에, 프랑스 부르주아 내각에서 사퇴하고, 모든 사회주의 정당은 차르 전제 정치에 맞선 러시아 노동 투쟁을 지지하기를 촉구하는 내용을 제시했다. 선언문은 독일,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로부터 전쟁 채권을 지지하고, 융커, 성직자, 부르주아 등과 시민 평화를 체결함으로부터, 사회주의와 인터내셔널에 대해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고, 벨기에, 프랑스 사회주의들도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러시아 노동계급들은 독일에서 칼 리프크네히트, 세르비아, 이탈리아 사회주의들, 독립노동당 영국 동지들, 영국사회주의당 일부 당원들, 그리고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에서 체포당한 동지들 같이 행동하는 사회주의들엑게 동지로 손을 내밀었다. 사회주의 길로 나서기를 촉구하고, 프롤레타리아 대의를 파괴하는 폐쇄주의를 타도하고자 했다. 그리고 국제 사회주의를 환영한다고 선언문에다 적었다. 같은 시기로는 국제여성협의회도 준비했다. 협의회는 단지 평화주의 성격을 띠지는 말고, 명백하게 혁명 입장을 취하도록 했다. 이네사 아르망은 클라라 제트킨, 발라바노바, 콜론타이, 영국 여성 등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국제 연락에서 첫 가닥을 이어 갔다. 이네사 아르망, 스탈은 프랑스 동지들과 편지를 교환했었고, 발라바노바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했고, <전진>으로 참가했다. 이탈리아사회주의당은 매우 혁명 정서를 지니고 있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방어론에도 반대하는 분위기는 퍼져갔다. 122, 칼 리프크네히트로는 전쟁 채권에 반대하는 표를 던졌다. 클라라 제트킨은 국제여성협의회를 소집했다. 제트킨은 국제여성사회주의사무국 서기였다. 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프란츠 메링과 함께 클라라 제트킨은 독일사회민주주의당 다수파 폐쇄주의에도 맞서 투쟁했다. 콜란타이로는 멘셰비키와 결별했다. 그리고 콜란타이와 편지로 연락해서, 볼셰비키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주로 평화 구호를 내걸었던 콜론타이로는 협의회로 오지는 못했다. 베른 국제 협의회로는 326-328일까지 개최했다. 최대 규모로 잘 조직한 대표단은 클라라 제트킨을 수반으로 한 독일 대표단이었다. 러시아 중앙위원회 대표단으로는 아르망, 릴리나, 라비치, 크룹스카야, 로즈미로비치였다. 폴란드 로즐라모프파 대표로는 돔스카야라는 카멘스카야도 있었다. 주로 중앙 위원회 대표단과 함께 움직였다. 조직 위원회를 대표하는 러시아인은 두 명 더 있었다. 발라바노바는 이탈리아 대표단이었고, 프랑스 여성으로는 루이즈 소모노로는 발라바노바 영향을 많이 받았다. 네덜란드 대표들은 완전 평화주의 분위기였다. 따라서 좌익에 속하기만 했던 롤란트 홀스트는 올 수도 없었고, 폐쇄주의 트뢸스트라파 대의원들도 왔다. 영국 대표들은 기회주의 독립노동당 소속이었다. 스위스 대표들은 역시나 평화주의로만 경도됐다. 그리고 같은 경도는 지배적이었다. 독일 대표들 대다수로는 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모임에도 속했다. 이마 자국 폐쇄주의 추종자들과 갈라서서, 자국 정부로부터 맞서 싸웠다. 로자 룩셈부르크로는 이미 자국에서는 체포된 상태였다. 국제 무대에서 실제로는 전선 승전국 나라 대표단이었으므로, 최대한 양보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협의회에 대한 실패 책임을 피하고자, 클라라 제트킨은 평화주의들로부터 양보했고, 결의안에서 혁명 내용을 희석하고자 했다. 레닌은 콜론타이에게도 편지를 썼던 관점으로부터, 피상적인 단결이 아니라, 폐쇄주의로 맞선 혁명 투쟁 단결, 지배 계급에도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투쟁을 위한 단결 문제였다. 그러나 정작 독일, 영국, 네덜란드 대표들로 구성한 위원회에서 작성한 결의안에는 폐쇄주의를 비난하는 내용은 없었다. 따라서 따로 특수한 결의안을 들고 나갔고, 이네사 아르망, 폴란드 대표 카멘스카야도 지지했다.


특수 결의안에서는 분열 정책을 비난했다. 그리고 입장은 옳았다. 영국, 네덜란드와 같은 착한 평화주의로는 국제 행동을 한 걸음도 앞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전쟁 조기 종결에 대한 제 몫을 한 건, 정작 혁명 투쟁, 폐쇄주의 결별이었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국제 전선에서도 투쟁 세력을 모으는 데 모든 열정을 바쳤다. 레닌은 콜란타이뿐만 아니라, 제트킨에게도 평화주의로 경도해서도 안 되고, 모든 문제들을 날카롭게 만들어야만 한다고 열렬하게 부탁했고, 또 설득하고자 했다. 417, 베른에서 또 다른 국제 협의회를 열였다. 사회주의청년협의회였다. 스위스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에도 참전하고자 전선에 나가기를 원하지 않던 많은 교전국 청년들도 많았다. 중립국이던 스위스로 망명했다. 청년들은 혁명 정서를 갖고 있었다. 여성협의회에 이어서 사회주의청년협의회를 열었다. 이네사, 사파로프로는 협의회에서 당 중앙 위원회를 대표해서 연설했다. 크룹스카야 어머니도 돌아가셔서, 가정생활도 힘들어지자, 집주인은 다른 방을 구해보라고 했고, 다른 방으로 이사하기도 했다. 210, 5명 두마 의원들에 대한 재판도 열었다. 페트로프스키, 무라노프, 바다예프, 사모일로프, 샤고프 등 볼셰비키 의원 전원은 유형을 선고 받았고, 카메네프에게도 유형을 선고했다. 레닌은 1915, 329일자로,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 의원단에 대한 재판은 무엇을 보여주는가>를 기고했다. 그리고 무라노프 활동으로부터 러시아에서 의식 있는 노동 계급들로는 4/5는 단결을 이룰 수 있었다. <진실>을 구매했던 노동 계급들 수로는 약 4만 명이었다.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도 훨씬 더 많았다. 프롤레타리아트 계층들도, 입헌민주당 당원들, 트루도비키, 플레하노프와 <우리 여명> 등에서도 보인 사회 폐쇄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끌어갔다. 그리고 사회 폐쇄주의에도 맞서 단결을 지켜내야만 했고, 단결을 따라 노동 운동을 단지 민족주의, 자유주의를 따르는 유럽 방식이 아니라, 사회 혁명이라는 방향으로까지 발전하도록 해야만 했다. 레닌은 얼마나 옳았는지도 증명했다. 레닌은 국제주의 사상을 또 선전했고, 온갖 형태로 사회 폐쇄주의를 폭로하는 일에서 잠시도 손을 떼지도 않았다. 크룹스카야는 갑상샌 질환은 재발했을 때, 베른을 떠나기 전에는 보슈, 퍄따코프 동지들도 왔다. 주차대한 문제들을 상세하게 논할 수 있는 비합법적인 잡지를 해외에서도 간행할 계획을 세워 뒀다. <공산주의>라는 잡지로는 중앙 기관지 편집국에서 발간해야만 했고, 일본파는 일에서도 합류도록 합의를 봤다. 레닌은 같은 해 여름에, <공산주의>에도 실을 <2인터내셔널 붕괴>라는 장문 기고문을 썼고, 같은 기간, 국제주의협의회 준비와 관련해서, 지노비예프와 공동으로, <사회주의와 전쟁>이라는 소책자도 쓸 수 있었다. 레닌은 스위스를 좋아했다.

 

독일에서는 투쟁은 격화됐다. 4, 로자 룩셈부르크, 프란츠 메링은 <인터내셔널>을 창간했고, 발간 즉시 폐간당했다. 유니우스, <독일 사회민주주의 위기>라는 소책자도 나왔다. 칼 리프크네히트로는 <주적은 자기 나라에 있다>라는 독일 좌파 사회민주주의 호소문도 나왔다. 6월 초, 칼 리프크네히트, 둥커는 전쟁에 대한 사회민주주의당 다수 태도에도 항의하는 <사회민주주의당 중앙위원회와 제국의회 파견단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작성했다. 수천 명 당 실무가들도 <공개서한>에다 서명했다. 독일사회민주주의당 중앙 위원회로는 좌파 사회민주주의들에 대한 영향력을 증가하는 걸 보고는 반대 행동을 결정했다. 카우츠키, 하제, 베른슈타인으로부터 서명한 선언문을 발표해서는 합병을 반대하고, 당 단결을 호소했고, 다른 쪽으로는 의회 파견단 일므으로 좌파 반대에 대해 반대하고 나섰다. 스위스로는 로베르트 그림은 좌파 국제 협의회를 준비하고자, 예비 회의를 711, 베른에서 소집했다. 회의에는 그림, 지노비예프, 악셀로트, 바르스키, 발렌츠키, 발라바노바, 모르가리, 7명은 참석했다. 예비 회의로는 지노비예프를 제외하고는 참된 좌파는 없었고, 참석가들 가운데, 좌파 협의회 소집을 진지하게 원하는 사람도 정작 아무도 없었다.

 

레닌은 참된 좌파 입지를 확보하고, 좌파들 상호 간 최대 단결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왔다. 8월 중순에는 볼셰비키로는 이미 선언문, 결의안, 성명서 초안을 작성했고, 매우 좌파 동지들에게 검토하도록 했다. 10얼에는 레닌, 지노비예프 소책자, <사회주의와 전쟁>은 독일어로 번역했다. 협의회로는 95-8일까지 짐머발트에서 개최했다. 11개국 대표들, 모두 38명도 참석했다. 짐머발트 좌파에 속한 사람들은 고작 9명뿐이었다. 레닌, 지노비예프, 베르진, 회글룬트, 네르만, 라데크, 보르카르트, 플라텐, 협의회 끝난 뒤로 뒤늦게 합류한 롤란트 홀스트였다. 러시아 대표 협의회로 참석한 다른 사람들로는, 트로츠키, 악셀로트, 마르토프, 나탄손,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체르노프, 분트파 한 명이었다. 트로츠키는 짐머발트 좌파에는 가담하지도 않았다. 협의회 다수파로는 좌파 초안을 거부했더고, 훨신 모호하고, 덜 전투적인 선언문을 채택했다. 따라서 좌파는 공동 선언문에다 서명했다. <첫 걸음>이라는 레닌 기고문에서도 짐머발트 협의회에 대해 평가하기도 했다. 협의회에서는 소책자, <사회주의와 전쟁> 독일어판을 배포하기도 했다. 기회주의에도 맞서 일관되지 못한 입장을 비판하고, 독일, 프랑스, 스웨덴, 노르웨이, 스위스 등 소수파와 함께하는 일보 전진을 거부한다면, 분파주의라고도 말했다. 스위스에서도 속물주의는 만연했다. 이네사 아르망은 레닌에게 활동에 대한 편지를 자세하게 썼다. 그리고 트로츠키, 메렝은 네덜란드 잡지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고 알렸다. 행동위원회 회합에서는 호소문을 논의하기도 했다. 트로츠키 초안은 기각했고, 메렝 초안으로 대체했다. 여러 논쟁도 벌였다고 했다. 논쟁에서 이네사 아르망은 게드파를 옹호하기도 했었다. 이네사 아르망은 청년 활동, 전단 발행 계획, 기계공·인부들·기타 노동조합주의 접선 등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써주었다. 이네사 아르망은 파리 모임으로도 많은 활동을 했다. 처음부터 전선에도 자원했었고, 볼셰비키 견해에도 공감했다. 또한 프랑스 병사들 속에서 선전을 개시한 사포슈코프와도 만났다. 베른 활동은 주로 이론을 대했다. 1914, 111, 중앙 기관지에서도 중앙 위원회 선언으로는 폐쇄주의에 대한, 제국주의 경제적인 본질도 보다 명확해졌다. 레닌은 자본주의 아래에서 유럽합중국은 식민지 분배 협정이나 마찬가지이고, 세계합중국도, 민족 연합, 민족 자유에 대한 국가적 형태이고, 사회주의와 연관할 수는 있으나, 독자적인 구호로는 올바르지 못하다고 봤다. 1915년 말, 1916,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 시기, 방법 및 발전에 대한 좀 더 분명한 생각을 갖고자, <자본주의 최고 단계로 제국주의>라는 소책자를 쓰고자, 자료를 모으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다시 읽고 또 읽으면서, 같은 문제를 연구했다.


취리히.


1916, 1, 레닌은 돛 출판사에도 낼 제국주의에 대한 소책자를 집필했다. 레닌은 취리히 도서관에서 일하러 갔다. 크룹스카야는 존 리드, <혁명가 딸>을 읽기도 했다. 존 리드로는 매춘부를 직업이나, 사랑이라는 문제 관점이 아니라, 다른 이해 관계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밑바닥 세계를 그릴 때, 생활 상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취리히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고리키, <밑바닥에서>를 상영한 예술 극장에서 보기도 했다. 일본에게도 자금 문제를 솔직하게 제기하기도 했었지만, 가진 게 없다고 말하기도 했고, 스톡홀름에서는 생활비마저 훨씬 비쌌다고 한다. 레닌은 또 도서관에서 일하고, 많은 시간들을 보냈다. 취리히 운동으로는 당 서기관으로는, 프리츠 플라텐으로부터 지도했고, 짐머발트 좌파로 가담했다. 취리히 신문, <인민 권리>도 있었다. 편집장이던 노브스도 짐버발트 좌파로 가담했다. 빌리 뮌젠베르그를 수반으로 한 청년 이주 노동가들도 취리히에서도 많았다. 매우 좌파를 지지했다. 그러나 스위스에는 강력한 노동 계급은 없었다. 휴양을 최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부스러기나 먹고 사는 작은 나라였다. 민주주의, 민족 문제 해결만으로는 스위스는 사회주의 혁명 전원일수는 없었다. 레닌은 스위스 노동 계급들 앞에서도 강연하기도 했고, 플라텐, 노브스, 뮌젠베르그 등과 긴밀한 관계도 유지할 수 있었다. 취리히 모임 폴란드 동지들과도 함께 스위스 조직, 공동 회의를 구상하기도 했다. 취리히에서 레닌은 주로 제국주의에 대한 소책자 집필 작업에 매달렸다. 작업에 몰두해서 많은 발췌를 하기도 했다. 주된 관심으로는 식민지였다. 자료들을 엄청 모아뒀다. 아르피카 식민지에 대한 영문 자료를 번역 맡기기도 했다. 소책자는 7월 탈고할 수 있었다. 1916, 424-30일까지 제2차 짐버발트 협의회라는 킨탈 협의회를 개최했다. 1차 협의회 이래로 8개월 시간도 흘러갔고, 8개월 기간 동안, 제국주의 전쟁도 더욱 확산해갔다. 짐머발트 좌파도 늘어갔다. 짐머발트 선언문에서는 지속적인 평화 투쟁이란, 자본주의 기초가 아니라, 사회주의 실현 투쟁 속에서만 발휘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자본가뿐만 아니라, 사회 폐쇄주의 추종가들, 카우츠키파 역시나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말해야만 했다.

 

추디비제에도 잠시 머물기도 했다. 이론 노선을 확립하고자, 로자 룩셈부르크, 라데크, 네덜란드 사람들, 부하린, 파탸코프, 그리고 콜론타이와도 견해는 달랐다. 매우 큰 견해로는 키예프스키라는 퍄타코프와 달랐다. 8, <프로레타리아트와 민족자결권>이라는 기고문을 레닌은 읽었고, 답장으로는 <마르크스주의 희화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에 대하여>라는 소책자 한 권이었다. 1894-1901년까지 옛 경제주의들로는 자본주의는 승리했고, 정치 문제를 도외시했다. 따라서 러시아에서 정치 투쟁을 부정했기 때문이었다. 제국주의 경제주의들도, 제국주의는 승리했으므로, 따라서 정치 민주주의 문제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다고 적었다.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도 민주주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와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현해야만 한다고 봤다. 그리고 러시아 경험에서도 레닌은 입증했다. 레닌은 1915-1916년 사이에서 이미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깊이 사고했고,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관점으로도, 191510, 파라벨룸이라는 라데크, <베른 파수꾼>11월 반박하기도 했다. 반자본주의 혁명 투쟁에서 민주주의 요구에 대한 혁명 강령, 전술과 결합하고자, 공화국, 민병대, 인민 관리 선출, 여성 평등, 민족 자결 등등도 그러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로는 예외적이고, 불완전하고, 왜곡된 형태로만 실현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파라벨룸을 반박하는 기고문은 1927, <마르크스주의 희화화>1924년에 나왔다. 레닌, 트로츠키와 늘 나 있던 깊었던 골은 바로 트로츠키로는 민주주의라는 참된 정신, 사회주의 건설에서 민주주의 원리, 대중 생활 양식 전체를 재조직하는 과정 등을 이해하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1916년에는 레닌, 부하린 사이에서도 생긴 견해는 싹으로 자라 달라졌다. 레닌은 <청년 인터내셔널>에서 부하린, 8월 말, <청년 인터내셔널> 6호에서 게재한, <주목하라>라는 짧은 글에서 국가 역할에 대한 과소평가, 프롤레타리아트 역할에 대한 과소평가를 드러내고는 말았다. 레닌은 1916년 하반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특히 관심으로 뒀다. 레닌은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 엥겔스 글들을 열심히 다시 읽고, 발췌했다. 레닌은 스위스 좌파였던 빈터투르에서 온 아르투르 슈미트에게도, 1130일 전쟁에 대한 태도 문제를 놓고, <레닌 저작집> 17권에 발표한 191612월 편지에서도, 군국주의에 대한 완전한 폐지는 자본주의 폐지로부터 이뤄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레닌은 모든 사태에 대해 변증법으로 접근하는 문제에도 특히 골몰했다. 레닌은 엥겔스로부터 에르푸르트 강령 초안 비판에다 쓴 문구를 곧바로 거머쥐웠다. 레닌은 유니우스 소책자에 대한 서평으로도, 마르크스 변증법은 각각 특수한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요구한다고 썼다. 1916년 가을, 1917년 초에는 레닌은 이론 작업에 골몰했다. 레닌으로는 제2인터내셔널, 국제사회주의사무국, 카우츠키 일파 등과 결별할 필요도 있었고, 짐머발트 좌파 세력으로는 제3인터내셔널을 세워야만 한다고 내세웠다. 그리고 러시아로는 지헤이제, 스코벨레프, 조직위원회 지지가들, 트로츠키와도 즉각 결별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주의를 위한 혁명 투쟁을 수행하고, 기회주의들을 참으로 가차 없이 폭로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기회주의들은 말과 행동마저 다른 사람들이었다. 사실상 부르주아지에게 봉사하고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대의를 저버리고, 배신하고는 말았다. 레닌은 그토록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던 기간으로는, 1916년 마지막 몇 개월, 1917년 초 몇 개월 간이었고, 정말 유일무이한 경우였기 때문이었다. 혁명은 서서히 닥쳐오고 있다고 레닌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1917-1919. 


2월 혁명.


1917122, 망명지였던 취리히 인민 회관에서 열린 청년 회합을 연설했다. 레닌은 1905년 혁명에 대해 말했다. 취리히에서는 다른 나라들, 곧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도 제국주의 저쟁에도 참가하기를 거부하는 혁명 정서 청년들도 많았다. 레닌은 청년들에게 노동 계급들에 대한 혁명 투쟁 경험을 할 수 있다면 풍부하게 조명하고, 모스크바 봉기 중요성을 보여 주고자 했다. 레닌은 다가올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고,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내다봤다.

 

브론스키로부터 혁명 소식을 접했다. 긴급 속보로 타전했다. 전보를 수 차례나 읽었다. 러시아에서도 혁명은 일어나고 말았다. 레닌은 집중해서 생각했다. 나머지 시간과 밤도 후딱 지나갔다. 파리 코뮌 기념일이던 318, 레닌은 스위스 대규모 노동 중심지인 쇼드퐁으로 다녀왔다. 파리 코뮌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또 러시아 혁명 운동에도 적용하고자 노력했다. 318, 페테르부르크에서 <진실>을 발행했다. 또한 <먼 곳에서 온 편지들>을 썼다. <1차 혁명 첫 단계>, <새 정부와 프롤레타리아트>, <프롤레타리아트 민병대에 대하여>, <어떻게 평화를 성취할건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국가 체제 건설이라는 과제>, 이렇게 모두 다섯 글이었다. 레닌은 페테르부르크에서 도착하던 날에서야, 겨우 첫 번째 편지만 게재했다. 세 글은 편집국에 그대로 놓여 있었고, 다섯 번째로는 아예 <진실>에도 배달하지 않은 상태였다.

 

<프롤레타리아트 민병대에 대하여>는 레닌 사망 1924년에야 발표했다.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대한 생각을 잘 서술해놨다. 레닌, <국가와 혁명>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먼 곳에서 온 편지>도 반드시 읽어야만 한다. 글 전체는 구체적으로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은 <인민 권리>에다 보낼 기고문으로는 <러시아 혁명에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 임무>, <스위스 노동가들에게 보내는 작별 편지>를 썼다. <포로가 되어 고통 받는 동지들에게>라는 편지도 썼다. 덕분에 여러 포로 동지들도 만날 수 있었다. 베른 인민 회관에서도 러시아로 가는 여러 동지들도 모두 모였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대중, 노동계급들, 병사들, 수병들도 지도가를 맞이하고자 나왔다. 친한 동지들도 맞이했고, 또 많이 있었다. 롱주모 학교 학생들도 축축한 붉은 색 넓은 띠를 어깨에 두른 채로 있었다. 얼굴은 모두 눈물로 젖어 있었다. 주위로는 온통 사람들 물결로 바다를 이루었다. 붉은 깃발들, 크론슈타트 수병들로 이뤄진 의장대, 핀란드 역에서부터 크셰신스카야 저택까지 길을 비춰주던 페트로파블로프스카야 요새 탐조등 불빛, 장갑차들, 길을 둘러싸고 사슬같이 이어진 노동계급들, 치헤이제, 스코벨레프는 페트로그라드 노동벼사대표소비에트 공식 대표 자격으로, 핀란드역으로 맞이했다. 동지들은 차르 접견실로 안내했고, 대위 한 명도 다가와 차렷 자세로 경례했다. 뜻 밖에 사태에 다소 당황했던 레닌도 거수경례를 했다. 덕분에 장갑차를 탈 수 있었고, 크셰신스카야 저택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수 많은 사람들도 외쳤다. 당 중앙 위원회, 당 페트로그라드 위원회도 들어섰다. 다과회와 동지들은 환영사도 준비했으나, 레닌은 화제를 돌렸고, 전술 문제에 대해 말했다. 크셰신스카야 저택 옆에도 노동계급들, 병사들도 장사진을 이뤘다. 발코니에서 연설해야만 했다. 전 러시아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 볼셰비키 구성원들도 회동 자리로 레닌을 데려갔다. 레닌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 견해를 몇 가지 테제로 서술했다. 멘셰비키도 회의를 열었고, 볼셰비키 회합은 나중에 전체 사회민주주의들 합동 회합에서 연설을 다시 한다고 결정했다. 레닌도 따랐다회합은 타브리다 궁전 대강당에서 열었고, 골젠베르크는 의장석에 앉았다. 1905년 혁명 때 굳건한 볼셰비키였지만, 플레하노프 뒤좇아, 방어론을 지지했다. 레닌은 연설했고, 골젠베르크는 반대 연설도 했다. 레닌은 혁명 민주주의 사이에서 내전 깃발을 높이 세웠다고 말했다. 콜론타이도 레닌 테제들을 열렬하게 옹호했다. 플레하노프로는 <단결>에서 레닌 테제들을 헛소리라고 일축했다. 사흘 뒤 47, 레닌 테제들은 <진실>에도 게재했다. 레닌 테제와 거리를 둔 카메네프 기고문, <우리 견해 차이>도 등장했다. 카메네프는 <진실> 기존 입장을 고수했고, 볼셰비키로는 중앙위원회사무국 테제들을 승인했다. 볼셰비키 조직 안에서도 투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투쟁은 오래 가지는 않았다.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시 협의회를 열었지만, 레닌 관점은 승리했다. 협의회는 414-22일까지 8일간 지속했고, 같은 기간 레닌은 옳았음을 증명한 굵직한 사건들도 이어서 나타났다. 47, 레넨 테제들도 언론에 등장한 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로는 자유 공채에도 찬성하는 표결을 했다.

 

부르주아 신문들, 방어론 신문들은 레닌, 볼셰비키를 두고 미친 듯이 공격해댔다. 아무도 카메네프 발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볼셰비키 조직 안에서 레닌 관점은 우위를 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닌에 대한 공격으로 테제들은 빠르게 유명해지기도 했다.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약탈 전쟁이라고 칭했기 때문이었다. 410, 레닌으로는 이즈마일로프 연대에서도 연설했고, 15일에는 <병사 진실>도 나올 수 있었다. 16일에는 페트로그라드 병사, 수병들은 레닌, 볼셰비키에 대한 공격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할 수 있었다418일이라는 51, 러시아에서는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거대한 규모로 메이데이 시위도 열렸다. 러시아에서는 외무부 장관 밀류코프로부터 전쟁을 계속하고자 임시 정부 이름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무엇을 했을까. 볼셰비크는 의무를 언론으로부터 잘 설명했다. 볼셰비키로는 니콜라이 2세 정부, 차르 일당이 내린 의무를 임시 정부는 수행하고 있다고 약속했음을 지적했다. 따라서 부르주아지 앞에 놓인 의무라고 고발했다. 대중들도 거리로 나왔다. 421, 대중은 넵스키 대로에서 시위를 벌였다. 임시 정부 지지가들 역시 넵스키 대로에서 시위를 벌였다. 같은 사건들로부터 볼셰비키는 단결할 수 있었다.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조직으로는 레닌 관점에 입각해서 결의안을 채택했다. 421, 22, 중앙 위원회로는 임시 정부를 폭로하고자 했다. 그리고 밝히고자 결의안을 냈따.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화해 전술을 비난했다. 노동 계급, 병사 대표들을 재선출하기를 촉구했고, 소비에트를 강화하자고, 더욱 촉구했다. 폭 넓은 홍보 활동을 수행하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또한 임시 정부를 즉시 전복하려는 시도는 시의적절하지는 않다고도 지적했다. 레닌 테제들로부터 공표한 뒤로 3주나 지난 뒤, 전러시아협의회는 개최될 무렵부터, 볼셰비키 사이로는 이미 단결을 이뤘다. 중앙 위원들도 찾아왔고, 레닌은 바빴다. 밤에 집 창문을 열고, 열띤 논쟁을 듣기도 했다. 병사, 이웃집 요리사, 젊은이들 너 나 할 거 없이, 밤새 열띤 논쟁을 벌였다. 여전히 정치, 집회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테르부르크 백야는 철야 집회였다. 중앙 위원회 서기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많은 경향 지지가들, 곧 볼세비키,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 무정부주의들 등도 있었다. 5만 명에 달하는 젊은이들도 조직에 들어왔다. 중앙위원회 회의나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소식인지라, 학생들은 볼셰비키를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교사 대회에도 참석했따. 교단은 순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이었다. 방어론들도 대회에서 연설했다. 알렉신스키도 연설했다. 볼셰비키, 국제주의 멘셰삐키 등 사회민주주의들로는 15-20명이었다. 별도 작은 방에도 모여, 어떤 학교를 만들지, 그리고 투쟁할지에 대해서 서로 생각을 교환했다. 회합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은 나중에 지역 평의회로부터 일했다. 많은 교사들은 폐쇄주의로 오염되어 있었다.

 

레닌은 메이데이집회에도 참석했다. 오흐타, 그리고 화성 광정에서 연설했다. 여러 동지들을 만났고, 424-29일까지 전 러시아 4월 협의회를 개최했다. 151명 대의원도 참석했다. 협의회로는 새로운 중앙 위원회를 선출하고, 현 시국, 전쟁, 3인터내셔널 준비, 민족 문제, 농업 문제, 당 강령 등과 같은 매우 중요한 문제들을 토론했다. 정치 경험에 대한 중요성을 말했다. 레닌은 현 시국에 대해 러시아 혁명은 소비에트를 창출했다고 말했다. 과제에 대해서는 소비에트로부터 토지 사적 소유 철페를 말했다. 그리고 낡은 국가 관료제도를 비판했다. 레닌은 연설에서 한 석탄 광부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책에 있는 말을 하나도 쓰지 않으면서, 어떻게 혁명을 이뤄냈는지를 레닌에게 이야기해줬다. 대통령이 나올 수 있는 가라는 따위가 아니었다. 광부들에게 문제는 광산을 장악했을 때, 생산 중단을 막고자 케이블을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고, 그리고 빵 이야기를 먼저 나눴다. 그러니까 가진 빵이 없을 때, 빵을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을 어떻게 하면 마련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바로 책에서 읽는 게 아닌, 참된 혁명 강령이었기 때문이었다.

 

19175월 초, 레닌은 당 강령 개정안을 작성했다. 크룹스카야로는 <병사 진실>에다 레닌에 대한 글을 썼고, <당 역사 한 쪽>이라고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레닌은 글 초고를 읽고는 몇 가지를 정정해주기도 했었다. 1917513일 자, <병사 진실> 21호로 게재했다레닌은 자주 지치곤 했다. 1913, 레닌은 민족 문제에 대해 샤우만과도 활발하게 편지를 주고 받았다. 19145, 레닌은 모든 민족, 또는 대다수 민족 마르크스주의들로부터 민족 평등, 소수 민족 권리 보호를 위한 법률 초안을 작성해서, 두마로부터 제출할 필요는 있다고 개진했던 편지도 흥미롭다. 레닌은 초안에 따르면, 평등이라는 개념을 해석할 때는, 들어가는 모든 곧 언어, 학교, 문화 등을 포함한 모든 문제들을 포함할 수 있어야만 하고, 모든 관계 및 상관 관계 측면으로도, 다 고려해서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1917, 레닌은 스체판을 만나서, 볼셰비키로부터 직면했던 날카로운 문제들을 충분하게 토의했다. 여러 연설과 6월 지방 평의회 선거도 치렀다. 대중은 혁명 분위기를 북돋았다.

 

볼셰비키로는 610, 시위를 열기로 했다. 소비에트 대회로는 사흘 동안 어떠한 시위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내렸고, 시위를 금지하고자 했다. 레닌은 페트로그라드 위원회로부터 정한 시위는 취소해야만 한다고 내세웠다. 레닌은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한다면,대회 결정에 불복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한다면 반대가들 손으로 무기를 쥐어 주는 격이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소비에트 대회로는 618일 자체 시위를 벌였다. 시위로는 약 40만 명 노동 계급, 병사들도 참가했다. 시위대는 깃발, 현수막으로는 90% 볼셰비키 중앙 위원회 구호로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열 명 자본가 장관들을 타도하라.’ 라고 내걸었다. 나머지는 임시 정부를 지지한다는 내용 뿐이었다. 레닌은 618일을 분기점으로 규정했다. 6월 지방 평의회 선거는 끝났다. 비보르프스키 지구에서는 볼셰비키, 소수 국제주의 멘셰비키만 선출했다. 그러나 멘셰비키로는 평의회 활동을 거절했다. 노동 대중들도 여러 정치, 문화 분야에서도 두각을 발휘했다. 인민 교육 소비에트도 빠른 속도로 설립했다. 교육 위원회로는 기관총 연대 문화교육위원회와도 몇몇 문화 활동 문제를 공동으로 논의하고자 월요일에 모이기로 합의를 보기도 했다. 기관총 연대에서는 아무도 오지는 않았다. 중앙 위원회로는 평화 구호를 내걸고자 했으나, 노동 시위대, 기관총 연대로는 이미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있었다. 중앙 위원회로는 시위를 중단하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작성했지만, 임시 정부로는 사관 생도들, 카자크 병사들을 동원했다. 사도바야 거리에서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해댔다사관생도들은 <진실> 편집국을 습격했다. 파업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중앙 위원들을 만났다. 노동 운동은 진압됐다. 여러 동지들도 레닌에게 독일 첩자라는 둥 악의적인 비방을 퍼뜨렸고, 중상모략으로 영향력을 마비하도록 하고자 했다. 77, 임시 정부로는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를 체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크셰신스카야 저택도 정부군을 점거했다. 레닌은 피신했다. 여러 집 수색을 당하기도 했었다. 79일에는 카메네프를 체포했고, 712일에는 전선에서 사형 집행 명령을 내렸고, 715일에는 <진실>, <참호 진실>도 폐간됐다. 전선에서는 집회 금지령도 내려졌고, 헬싱포르스에서는 볼셰비키를 체포했고, 볼셰비키 신문, <파도>마저 폐간됐다. 718일에는 핀란드 국회를 해산했고, 코르닐로프 장군은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722, 트로츠키, 루나차르스키는 체포됐다


7월이 지나자, 케렌스키로는 군대 내 규율을 강화하고자 여러 조치들을 궁리해냈다. 7, 기관총 연대 무장을 해체하도록 한 채로 광장으로 내몰아 모욕을 줬다. 무장해제 당한 연대는 광장으로 걸어갔지만. 증오마저 타올랐다. 기관총 연대로는 10월에 헌신해서 볼셰비키를 지원했고, 스몰니에서도 레닌을 호위하기도 했다. 볼셰비키당으로는 반헌법 상태였으나, 무척이나 컸고 또 셌다. 6차 당대회 726일 무렵에는 당원 수로는 이미 177,000명에 달했다. 3개월 전 러시아볼셰비키 4월 협의회에 비하면, 두 배는 넘었다. 825, 코르닐로프 군대는 페트로그라드 진격을 시작했다. 페레트부르크 노동계급들, 비보르스키 지구 사람들은 맨 먼저 페트로그라드를 방어하고자 달려갔다. 코르닐로프 군대 부대들, 이른바 야만 군단에 맞서고자 선동가들도 파견했다. 따라서 금방 와해할 수 있었고, 실질적인 진격마저 잘 이뤄지지도 못했다. 페트로그라드로 파견된 부대 지휘관이었던 크리모프 장군은 권총으로 자살했다.

 

레닌은 라즐리프 오두막에서 더 지내기는 어려웠으므로, 핀란드로 거쳐를 옮겼고, <국가와 혁명>을 집필했다. 핀란드에서는 신문을 잘 살펴볼 수 있었다. 가발을 쓰거나, 분장을 하기도 했다. 913-14, 레닌은 중앙 위원회에다 <마르크스주의와 봉기>라는 편지를 썼고, 9월 말에는 이미 페테르부르크로 더 가까이 있을 수 있도록 헬싱포르스에서 비보르스키로 거처를 옮겼다. 또한 <볼셰비키는 국가 권력을 잡을 수 있는가>라는 기고문에서 농민, 병사들에게 보내는 격문, 페테르부르크시협의회 비공개 회의에서 쓴 편지에서도, 볼셰비키로는 권력을 잡고자, 구체적인 조치들도 취했다. 중앙 위원회, 모스크바 위원회, 페테르부르트 위원회 등 위원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모스크바 소비에트 볼셰비키 의원들에게도 같은 내용으로도 글을 썼다레닌은 107, 비보르스키에서 페테르부르크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철저한 보안을 지키고자, 몸을 숨긴 주소를 중앙 위원들에게도 말하지는 않았다. 1010, 레닌은 수하노바 집에서 열린 중앙 위원회 회의에도 참석했다. 회의에서 무장 봉기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중앙 위원 열 명, 레닌, 스베르들로프, 스탈린, 제르진스키, 트로츠키, 우리츠키, 콜론타이, 부브노프, 소콜니노프, 로모프는 무장 봉기에도 찬성했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반대했다. 1015, 페트로그라드 조직 회의를 개최했다. 스몰니에서 열었고, 지구 대표들도 여덟 명, 참석했다. 16일에는 레스노이 대로에 있던 레스노이 지구 평의회 사무실에서 중앙 위원회 확대 회를 열였다. 중앙 위원들 외로,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군사 조직 집행 위원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대표들, 노동 조합, 공장 위원회 및 철도 노동 계급들도 회의로 참석했다. 회합에서 두 개 노선을 논의했다. 즉각적인 봉기에도 찬성한 사람들은 대다수였고, 반대했던 사람은 소수였다. 레닌 결의안은 압도적인 다수표를 획득할 수 있었다. 찬성 19, 반대 2, 기권 4표였다. 결정은 났고. 중앙 위원회 비공개 회의에서 군사 혁명 중앙을 선출했다. 레닌을 만나러 갈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1024일에 레닌은 중앙 위원회에다 즉시 권력을 장악해야만 한다고 편지를 썼다. 비보르스키 지구로는 봉기를 준비했다. 1917, 1025일이자 117, 아침에 임시정부는 전복됐다. 페트로그라드 프롤레타리아트, 경비대를 통솔하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기구로는 군사혁명위원회로는 국가 권력을 넘겨줄 수밖에는 없었다. 바로 제2차 전 러시아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 대회에서 노동, 농민 정부를 수립했고, 인민 위원회를 창설해서는 레닌을 의장으로 지명했다.


10월 혁명.

 

10월 권력 장악은 프롤레타리아트 당이던 볼셰비키 당으로부터 모든 면에서 연구하고, 준비했다. 7월 봉기로는 자연발생이었다. 그러나 당에서는 끝까지 진중한 사고를 견지했고, 시기상조로 봤다. 진실을 직시할 필요도 있다. 대중은 아직 봉기할 준비는 되지 않았다. 중앙 위원회에서는 봉기를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전투로 폭발해서 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을 자제하도록 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볼셰비키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할 바를 다했다. 봉기 순간까지도 올바르게 선택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핀란드에 몸을 숨겨야만 했고, 912-14일 사이에 중앙 위원회에다 편지를 썼다. 레닌은 봉기를 성공하고자 세 가지를 제안했다.

 

1. 음모나 당에 의존할 게 아니라 보다 나아간 진보 계급에게 의존한다.

 

2. 인민 혁명으로 북돋고자 의존한다.

 

3. 봉기로는 혁명 역사에서 매우 북돋는 상태에서 진보 인민 대오로는 크게 활동하고, 적들 대오로는 유유부단해서 약하고, 어중간한 벗들 대오로는 매우 심하게 동요하거나, 그러한 분기점에 의존한다.

 

따라서 반란부들에 대한 사령부를 조직하고, 역량을 배치하고, 믿을 수 있는 부대를 매우 중요한 지점으로 이동하도록 하고, 알렉산드린카를 포위하고,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를 점거하고, 사령부와 정부 각료를 체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장 노동계급들을 동원해서라도, 마지막 전투까지 결사로 싸우기를 촉구해야만 했다. 전신, 전화국을 일거에 점령했고, 중앙 전화국으로는 봉기 사령부를 설치해서, 모든 공장 부대, 무장 투쟁 지점들로부터 사령부와 전화로도 통신할 수 있다고 해야만 했다. 기술 하나론는 봉기에 접근하지 않고서는 현재 정세에서도 마르크스주의에만 충실할 수도, 혁명에만 충실할 수도 없다고 보여 주는 예시에 불과하다고 봉기에 대해서는 말하기도 했다.

 

레닌은 핀란드에 머물면서, 봉기 호기를 놓치지 않고자, 107, 페테르부르크 시협의회에다 편지를 썼고, 중앙 위원회, 모스크바 위원회,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모스크바 소비에트, 볼셰비키 대표들에게도 편지를 썼다. 마지막 한 달 동안은 오로지 봉기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무장 봉기란 정치 투쟁에서 특수한 형태이고, 주의 깊게 고찰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무장 봉기야말로, 전쟁과도 꼭 마찬가지로는 기술이라고 진리를 매우 분명하게 드러냈다.

 

1. 봉기를 가지고 장난을 쳐서도 안 된다. 시작했다면 끝까지 가야만 한다고 굳게 알아야만 한다.

 

2.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장소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세력을 모을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더 잘 준비되고, 조직된 적은 반란군을 괴멸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봉기를 시작한다면, 위대한 결단력을 가지고 행동해야만 한다. 무조건 공세로 넘어간다.

방어는 무장 봉기에서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4. 적에게 허를 찌르도록 노력한다. 또한 군대를 분산하는 순간을 잘 포착한다.

 

5. 어떠한 경우라도 도덕적 우위를 견지하면서 아주 작더라도, 도시 단위로는 매시간, 매일 성과를 올려야만 한다.

 

마르크스로는 혁명 전술에서 대가들 가운데 당통으로부터도 배울 수 있는 대담함을 빌려 무장 봉기에 대한 모든 혁명 교훈들을 총괄하고자 했다고 적었다. 191710, 러시아에서도 적용해보자면, 안과 밖 모두에서, 노동 거주 지역과 같은, 핀란드·레벨·크론슈타트에서도 할 수 있는 한 기습할 수 있고, 빠르게 페테르부르크로 진격하고, 모든 함대는 공격을 단행한다. 15천 명에서 2만 명 규모로는 사관생도와 같은 부르주아 수비대, 방데 군대보다 매우 더 많은 세력들을 모으고 결집해야만 했다.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전화, 전신, 철도역, 교량을 먼저 점령해서 지켜낼 수 있도록, 3대 주요한 병력으로는 함대, 노동계급, 일부 육군을 결합하도록 한다.

 

결단력 높은 분자들로는 타격대, 청년 노동계급들, 그리고 훌륭한 수병들도, 매우 중요한 지점들을 점거하고, 도처에서, 모든 중요한 작전에도 참가할 수 있도록 하고자, 소규모 부대로 분산해서 편성해야만 한다. 작전들 예시로는, 페테르부르크를 포위해서 고립하고자 한다. 함대·노동계급·육군으로는 합동 공격을 감행해서, 페테르부르크를 장악하는 등이다. 기술과 더불어 세 배 대담함을 요구하는 임무이기 때문이다.

 

전멸하더라도, 적을 보내 주지 않는다는 구호를 내걸고, 적 중심부 사관학교, 전신, 전화 등등을 공격해서, 포위하고자, 소총, 폭탄을 가진 최정예 노동 부대를 구성해야만 한다. 지도가들도, 당통, 마르크스에 대한 유훈을 성공해서 적용할 수 있으리라 바란다고 했다. 2-3일 간 투쟁으로도 러시아 혁명, 세계 혁명 성공은 달려 있다고 말했다. 21이자 8, 22일이자 9, 중앙 위원회를 열어, 무장 봉기에 대한 결의안을 통과하도록 했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봉기를 보란 듯이 반대했고, 중앙 위원회 긴급 전체 회의 소집을 요구했따. 카메네프는 중앙 위원회를 사퇴한다고 선언했다. 레닌은 당에서 그들에게 매우 엄중한 징계를 내리도록 요구했다.

기회주의 경향을 분쇄해갔고, 봉기 준비도 강도 높았다. 1025일이자 12,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 위원회로는 군사 혁명 위원회 설립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29일이자 16일에는 중앙 위원회, 당 조직들 대표들은 함께 모여 확대 회의를 열었다. 바로 중앙 위원회 회의로부터, 스탈린, 스베르들로프, 제르진스키 등을 수반으로 한 봉기 실천 지도부로는 군사혁명본부를 구성했다. 30일이자 17일로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뿐만 아니라, 소이베트 전체로는 군사혁명위원회 조직안을 승인했다. 닷새 뒤로는 연대 위원들 회합에서,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를 페트로그라드 군 부대 지도 기관으로 인정하고, 군사혁명위원회로부터 서명 인증도 없는 사령부 명령에는 복종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115일이자 1023일로는 이미 군사혁명위원회로는 군부대에서 인민 위원이던, 코미사르들을 임명했다. 다음 날로는 116일이자, 1024일로는 임시 정부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들을 기소했고, 군부대로 임명한 인민 위원들을 체포하라는 결정을 내리고는 사관생도들을 겨울 궁전으로 소집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미 뒤늦은 일이었다. 군부대들도 볼셰비키 쪽이었고, 노동계급들은 소비에트 권력을 넘기기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사혁명위원회로는 당 중앙위원회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 일했다. 스탈린, 스베르들로프, 몰로토프, 제르진스키, 부브노프 등 대부분 중앙 위원들도 군사혁명위원회로 들어왔다. 봉기를 개시했다.

 

116일이자, 1024일로는 레닌은 비보르프스키 변두리에 있는 당원 포파노바 집, 볼쇼이 삼프소니예프스키 거리, 세르도볼스카야 거리로부터 만나는 모퉁이 92/1번지 42호에서 은식하고 있었다. 봉기를 준비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활동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로 괴로워했다. 마르가리타로부터 봉기를 지연하도록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쪽지를 전달했다고도 한다. 레닌은 핀란드인 동지였던 아이노에게 스탈린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으나, 군사혁명위원회 소속이었어서, 멀어서 올 수는 없었다. 레닌은 곧장 스몰니로 몸소 바로 가기로 결정하고는 서둘렀다. 비보르프스키는 지구는 밤에 무장을 갖추었고, 봉기를 준비했다. 스몰니로는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고, 온통 열기로 가득했다. 붉은 근위대, 공장 대표들, 병사들 지시를 받고자 방방곡곡으로 모여들었다. 타자기를 두드리는 소리, 전화벨 울리는 소리, 한 묶은 전신들을 분류하고, 군사혁명위원회 회의도 열리고 있었다. 스몰니 앞 광장에서는 장갑차들 엔진 소리도 요란했고, 3인치 야포를 대기하도록 했고, 바리케이드를 세울 장작도 쌓여 있었다. 입구로는 기관총, 무기들도 세워졌고, 문마다 보초를 섰다.

 

1025일이자, 117. 오전 10시로는 이미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로는 이름으로, <러시아 시민에게>라는 호소문을 언론에다 배포했다. 다음 내용은 이와 같다.

 

임시 정부는 점복됐다. 국가 권력은 페트로그라드 프롤레타리아트, 경비대 지도부이자 페트로그라드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 기관이던 군사혁명위원회로 넘겨졌다. 인민은 곧장 민주주의 평화, 지주 토지 소유 철폐, 노동 생산 관리, 소비에트 정부 수립이라는 대의를 쟁취하고자 싸워 왔다. 대의를 이행했다. 오후 230. 페트로그라드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 회의를 열었다. ·우체국·전신·국립은행 등도 접수했다는 보고를 맞이했다. 겨울 궁전에 대한 공격도 진행했다. 병사들도 놀라운 영웅심을 발휘했다. 무혈 변혁으로 이뤄졌다. 소비에트는 회의에 참석하러 온 레닌을 열렬하게 환영했다. 레닌은 연설했다. 거머쥔 승리에 대한 대단한 말은 전혀 하지도 않았다. 레닌 특징이었다. 소비에트 권력 앞에 놓인 과제들, 반드시 끝까지 이행해야만 하는 과제들에 대해서만 말했다.

 

소비에트 정부로는 부르주아지 참가 없이도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1.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를 철폐하는 법령을 공포한다.

 

2. 생산에 대한 노동 계급들로부터 감독하도록 도입한다.

 

3. 사회주의 투쟁을 전개한다.

 

4. 낡은 국가 기구는 분쇄되어 파기하고, 새로운 권력, 소비에트 조직들로 권력을 수립한다.

 

대중 조직 힘으로도,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자 했다. 수도에서 승리를 거둬야만 했다. 국제 프롤레타리아트도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자 돕고 나섰고, 이미 혁명 동요에 대한 징후마저 나타났다. 특히 연설은 페트로그라드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 구성원들에게도 매우 가까웠다. 대중은일어설 수 있었고, 부르주아 권력은 무너졌다. 지주에게 땅을 몰수하고, 공장주에게 재갈을 물릴 수 있고, 더욱 중요하게로는 평화를 쟁취할 수 있었다. 세계 혁명도 도왔다. 레닌은 옳았고,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소비에트 제2차 대회로는 저녁에 열렸다. 대회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선언했고, 승리를 공식적으로 승인해야만 했다. 소이베트 대표들도 모여들었고, 선동을 진행했다. 노동 권력도 농민과 함께 해야만 했다. 사회주의혁명가당은 농민 의견을 대변하는 당이었다. 부농, 곧 쿨라크 계급으로는 사회주의혁명가당우파를 이념 대변인으로 삼고 있었다. 소농민 이념 대변인으로는 사회주의혁명가당좌파로는 전형적인 소부르주아지 대표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부르주아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동요하고만 있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수반으로는 나탄손, 스피리도노바, 캄코프 등이었다. 레닌은 첫 번째 망명 시기 때, 나탄손을 잘 알고 있기도 했다. 페테르부르크,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대중 볼셰비키 성향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 다른 누구보다도 볼셰비키를 우호했다. 볼셰비키로부터 모든 지주 땅을 몰수해서, 농민에게 양도하고자 열심히 투쟁하기를 보았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평등한 토지 이용을 도입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볼셰비키로는 농업 전체를 사회주의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닌은 지금 매우 중요한 건 지주 토지 몰수이고, 개혁은 어떻게 이뤄지는 경험으로도 알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레닌도 토지 법령에 대한 작성을 두고 고심하기도 했다. 포파노바 회고록 가운데로는 레닌은 <전러시아농민대표소비에트 소식>, 지난 호를 모두 구해달라고 하기도 했다. 연구용 교재였다. 레닌은 밤낮으로 일에 전념했고, 사회주의혁명가당을 샅샅이 연구했다. 마르가리타로는 직업은 농업학이기도 해서, 활동하면서 같은 문제들을 다룰 수 있었다.

 

1025일 밤 1045, 2차 전러시아소비에트 대회를 개최했다. 밤 대회로는 간부회를 구성해서 선출하고, 권한을 정했다. 670명 대표들 가운데로는 볼셰비키로는 겨우 300명뿐이었다. 사회주의혁명가 당원으로는 다음으로 많은 193명이었고, 멘셰비키로는 68명이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멘셰비키, 분트파는 길길이 날뛰었다. 그들은 선언문을 낭독하거나, 대회장을 나가 버리곤 했다. 멘셰비키 국제주의 가운데 일부도 나가버렸다. 사회주의혁명가당 대표들 가운데 압도적 다수 193명 가운데 169명을 점하고 있었던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는 남아 있었다. 대회장을 도중에 나간 사람으로는 모두 50명이었다. 레닌은 25일 회의에 참석하지는 않았다.

 

2차 소비에트 대회를 열린 시간에, 겨울 궁전에 대한 공격을 진행했다. 케렌스키는 병사들, 노동계급들로부터 권력을 장악한 페트로그라드 출병을 조직하고자, 모스크바로 갔다. 키슈킨을 비롯한 나머지 각료들은 사관생도들, 여성 타격대 비호를 받고는 겨울 궁전에 숨어 있었다.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분트파로는 겨울 궁전을 포위하기를 두고 믿지 않을만큼 신경쇠약증 반응을 보이기도 했었다. 에을리히는 시 평의회 일부 의원들은 궁전에 대한 사격을 중지하지 않는 까닭에, 비무장 상태로부터 겨울 궁전 광장으로 총받이로 갔다. 농민대표소비에트 집행 위원회, 멘셰비키 분파, 사회주의혁명가당 분파도 합류했다.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은 퇴장한 뒤로 정회를 선포했다. 회의를 재개한 310분에, 겨울 궁전은 함락했고, 각료들은 체포됐고, 장교와 사관생도들도 무장 해제됐고, 케렌스키로는 페트로그라드로 보낸 제3자 전거대대로부터도 혁명 인민 쪽으로 넘어왔다는 소식마저 전달 받았다. 레닌은 1026이자, 118일 저녁, 대회에서 토지에 대한 법령을 도입해야만 하는 근거를 설명하는 연설을 했다. 1026일이자, 118, 저녁 회의에서 평화에 대한 법령, 토지에 대한 법령도 승인했다. 같은 지점에서는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과 합의를 이뤘으나, 정부 구성 문제로는 한층 더 힘들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농민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잃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025,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멘셰비키는 도중에 대회장을 나가고는 볼셰비키 모험주의, 권력 장악 등등을 비난했기 때문에 매우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 지도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캄코프는 민주적인 연립 정부를 지지한다고 천명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대회장을 도중에 나간 당들과, 볼셰비키 간 중재 역할을 하기를 원했다. 볼셰비키로는 협상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레닌은 같은 대화로 나올 수 있는 건 무엇도 없으리라고,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1026일 대회를 열리기 두 시간쯤 전에는, 같은 문제를 두고,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 대표들과 회동했다. 저녁 9시에 회의를 열었고, 토지에 대한 법령 근거를 설명하고자 연설했다. 케렌스키로부터 전선에도 도입했던 사형 제도를 폐지했고, 평화에 대한 법령, 토지에 대한 법령, 노동 감독에 대한 법령 등을 채택했고, 최고 인민위원회에서도 볼셰비키 구성원들을 확정했다. 최고인민위원회 의장으로는 레닌을 지명했다. 내무로는 리코프, 농업에는 밀류친, 노동에는 슐라프니코프, 육해군 위원회로는 각각 안토노프, 크릴렌코, 디벤코, 통상 및 공업에는 노긴, 인민 교육에는 루나차르스키, 재무로는 스체파노프, 외무로는 트로츠키, 법무로는 로모프, 식품으로는 테오도로비치, 체신으로는 글레보프, 민족 문제로는 스탈린 등을 지명했다. 교통 통신 최고인민위원 자리로는 공석으로 남았다. 관료주의와도 매우 멀었고, <노동과 농민 정부를 수립하기를>라는 제2차 소비에트 규정에도 잘 드러났다. 매주 약 40개 공장에서 온 대표들과 회합을 갖고는 무엇을 해야 할지, 여러 조치들을 어떻게 수행할지를 두고 의논했다. 그리고 결정할 수 있으면, 곧바로 실천으로 옮겼다. 공장 경연진을 압박해서 자금을 확보했고, 학교 교육, 보육원 현황, 도서관 사업 형태를 토론했다. 핵심은 노동계급 창발이었다. 상당한 역량도 인민 교육국으로 결합했다. 관료주의를 매우 비판했다.

 

그러나 먼저 해야 할 일로는 소비에트 권력을 무력으로 쓰러뜨리려는 적 시도, 내부로부터 붕괴하도록 하려는 시도로부터 권력을 지키고자 했다. 그리고 대오를 강화하도록 했다. 119-15일에 걸쳐 소비에트 권력 자체로부터 실현을 위한 투쟁을 며칠간 벌였다. 레닌은 파리 코뮌을 매우 주의 깊게 연구했다. 적에게 보여준 유약함에서 파멸을 찾아냈다. 10월 혁명 초기로도, 불필요한 유악함도 적지는 않았다. 케렌스키를 도망치도록 해주거나, 다른 여러 각료들을 도망가도록 해주거나, 겨울 궁전을 지키던 사관생도들을 선서만 받고 풀어주거나, 진격에나선 케렌스키 부대를 지휘한 크라스노프 장군을 가택 연금 상태로 그저 두기 등이었다.

 

제국주의 전쟁에서도 지친 인민으로는 무열 혁명을 원했다. 적들은 전투로 내몰았다. 사회 체제 전체를 사회주의로 재건하는 문제를 무엇보다도 더 많이 고심했던 레닌으로는 혁명을 수호하는 일에 맨 먼저 매진해야만 했다. 119, 케렌스키는 가치나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포드보이스키 동지로는, 1927116, <붉은 신문>에서 <변혁 나날들 속 레닌>이라는 글에서 페트로그라드 방어 기간 동안 레닌으로부터 수행한 어마무시한 활동들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묘사했다. 레닌은 지역 사령부에도 와서 필요한 상황을 보고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지도를 더욱 꼼꼼하게 들여다봤고, 여러 공장이나, 소비에트 방어에도 집중하고자, 탁월한 인민 지도가로도 성장하고 있었다. 레닌은 대중을 행동하도록 만들 줄 알았고, 또 늘 앞서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할 줄도 알았다.

 

1111일이자 1029, 케렌스키는 전력으로 진격하자, 선서를 하고는 겨울 궁전에서 풀려난 사관생도들도 케렌스키를 돕기로 결정하고는 반란을 일으켰다. 붉은 근위대 병사들은 사관생도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했다. 레닌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연대 대표 회의에서 연설했다. 케렌스키로는 코르닐로프로부터 실패한 8월 군사 쿠데타와 같은 가련한 모험이라고 말했다. 1114, 케렌스키 반란은 진압했고, 가치나을 탈환했다. 러시아에서는 내전으로 격화했다. 118일이자, 1026, 칼레진 장군은 돈스카야 지역에서 계엄 상태를 선포했고, 소비에트 권력으로 대항할 카자크들을 조직하고자 했다. 119, 카자크 대장이던 두포프로는 오렌부르크를 함락하도록 했다. 모스크바에서 사태는 질질 끌려갔다. 백위군은 크레믈린을 장악했다. 전투로는 페테르부르크에서보다 더 격렬한 상태였다.

 

118일이자, 1026, 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퇴장했던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멘셰비키와 다른 분파들로는 조국혁명구원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들은 소비에트 권력을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주위로 결집하고자 했다. 시 중앙평의회 대표 9, 예비의회 간부회 전원, 전러시아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 및 농민대표소비에트에서 집행위원회 각각 3, 사회주의혁명가당, 멘셰비키 분파, 멘셰비키통합파 대표들, 전러시아수병중앙집행위원회 대표들, 플레하노프 모임인 단결 대표 2명도 가담했다. 권력을 움켜쥔 모험주의들로부터 조국, 혁명을 구해 내고자 했다. 그러나 많은 일을 이룰 수는 없었다. 평화를 위해. 토지를 위해. 라는 구호로는 대중 사이에서도 이미 너무 잘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대중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볼셰비키를 지지했다모스크바에서 만들어진 사회완전위원회도 페테로그라드 조국혁명구원위원로 가담했다. 기구로는 모스크바 시 평의회 발의로 창설했고,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루드네프도 위원장이었다. 모스크바 사회안전위원회로는 공개적으로 반혁명을 지원했다.

 

모스크바에도 지원권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철도집행위원회는 취했던 입장 때문에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철도집행위원회로는 내전에서는 중립적인 입장만 취했었다. 어느 쪽에서도 군대를 통과할 수 없다고 천명하고는 말았다. 중립은 볼셰비키를 겨냥했고, 모스크바로 지원병을 보내기를 방해했다. 철도집행위원회 방해 공작을 깬 건, 군대 수송을 지지한 철도 노동계급들이었다. 1116일이자 3일로는 군사혁명위원회로는 페트로그라드에서 모스크바로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도착하기도 전에 모스크바에서는 백위군 저항으로는 곧 분쇄되고는 말았다.

 

페트로그라드 사관생도들 반란을 진압하고, 케렌스키는 진격해오고, 모스크바에서 투쟁도 벌어졌을 때, 중앙 위원들로는 모두 동요했었다. 상황이 절망적이라고만 보고, 양보해야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같은 동요로는 극명하게 드러난 철도집행위원회와 협상할 때도 있었다. 119, 철도집행위원회로는 볼세비키로부터 인민사회주의까지를 포함하는 모든 사회주의 정당들로 구성한 정부를 수립해야만 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고자, 중재가로 나서겠다고 제안했다. 중앙위원회와도 협상하면서부터 철도집행위원회로는 좌파만 참석했다. 중앙위원회로는 카메네프, 스콜니코프에게 협상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고,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로는 처음에는 협상에도 개입하지는 않았으나, 케렌스키 진격, 모스크바에서 상황으로는 볼셰비키로는 궁지에 몰렸다고 여겨지고는 중앙위원회 안에서도 동요하기 시작했다고 알아차리자, 극도로 뻔뻔스러워졌다. 철도집행위원회 회동에도 참석해서 소비에트 권력을 거부하고, 10월 변혁 주동가들도, 정부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체르노프, 압크센치예프를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를 요구했다. 카메네프를 수반으로 한 볼셰비키 대표단으로는 회합에서 퇴장하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부터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로부터 제기한 안건도 토의했다. 1114일이자 1, 중앙 위원회를 소집했다. 레닌은 칼레진, 코르닐로프 같은 쪽에 선 철도집행위원회 협상을 즉각 중단하기를 요구했다. 당 중앙위원회로는 상응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1117일이자 4, 노긴, 리코프, 밀류친, 테오도로비치 등은 모든 사회주의 정당들로 구성한 사회주의 정보를 조직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는 최고인민위원직에서 물러났다. 대다수 다른 최고인민위원들도 그들 쪽으로 가담했다. 카메네프, 리코프, 지노비예프, 노긴, 밀류친 등은 당 중앙 위원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그들 모두 10월 혁명 승리 직후로 모든 당들로 참여하는 연립 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중앙 위원회로는 그들에게 당 규율로부터 복종하기를 요구했다. 레닌은 화를 내고는 전력을 다해 그들을 압박했다. 지노비예프로는 중앙 위원회 복귀를 선언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레닌으로는 사회주의 체제 건설, 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채택한 결정들을 실행하는 문제로 완전하게 몰입했다.

 

따라서 1117일이자 4, 레닌은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에서 연설했고, 전선에서 온 대표들, 페트로그라드 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로부터 공동으로 연 회의에서도 연설했다. 케렌스키 정부에 대해 일축하고는 사회주의 정신이란, 국가 관료주의 무의식 작동과는 완전하게 다르고, 살아 있는 창조 사회주의로는 인민 대중 스스로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방해 공작을 선동했다. 19171121, 경질된 카메네프를 대신해서, 스베르들로프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선출했다. 레닌은 추천했다. 뛰어난 조직가였다.

 

스탈린도 부각됐다. 최고인민위원회들도 임명했던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레닌은 스탈린에게 민족 문제를 맡기기로 제안했다. 레닌은 오랜 세월 민족 해방, 민족 자결권을 위해 투쟁했다. 레닌은 열강 폐쇄주의를 지독하게 혐오했고, 소비에트 공화국으로는 약소 민족들을 억압하는 제국주의 정책과 완전하게 대비하는, 민족들에 대한 완전한 해방 정책, 동지로 배려하는 정책을 쓰기를 참으로 원했다. 그래서 민족 문제에 대한 스탈린 견해도 잘 알고 있었다. 크라코프에서 같은 문제를 두고 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다. 스탈린으로는 과거 몇 년 동안이나 생각하고 검토해왔고, 스탈린에게는 명예로울 수 있다고 확신했다. 모든 민족들에게 자결권을 주어져야만 했다. 과제는 복잡하고, 어려웠던 건 날카로운 게급투쟁이라는 조건 속에서 그러한 권리를 실현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민족 자결권 실현이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투쟁, 소비에트 권력 실현을 위한 투쟁과도 결합해야만 했다. 프롤레타리아트 국제 투쟁 문제, 내전 문제들과도 긴밀하게 연관했다. 민족 전선 활동을 책임질 사람이라는 폭 넓은 시야, 투철한 신념, 실천으로 일을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레닌은 스탈린을 그러한 업무로 추천했었다. 따라서 새롭게 활동하는 법, 자신에게도 모든 습관을 바꾸는 법, 혁명 문제를 반대했던 사람을 책임감 있고, 능력 있고 손 굵은 사회주의 체제 건설가로 바꾸는 법을 배워야만 하는 문제도 당 활동가들로는 큰 과제로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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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국가론이 강조되는 현 시점에서, 무산계급 통일관을 내세우고자 한다. 

오로지 혁명을 모색하고, 몰두 할 때만이 비로소 쓰여질 수 있겠다. 

빌린 저서 가운데로는, 

김수행, 박승호, <박정희 체제의 성립과 전개 및 몰락>,

방인혁, <한국의 변혁운동, 사상운동>을 읽고 있다. 

윤소영,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도 저자 발언 및 논란도 있었지만, 

아마 다 정리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방인혁, <한국의 변혁운동, 사상운동>은 

1980년대를 중심으로, 국내 마르크스주의 전망에 대한 사상적인 기조만 다뤘다. 

긴 분량에 걸맞게, 어느 정도, 개요를 파악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경제학마저 다뤄야 하기 때문에, 


<현대 마르크스 경제학 쟁점들>, <마르크스와 한국 경제>도 정리해서 읽고는 싶다. 

본인과 관련해서는 대학가에서도, 마르크스주의 토론회들이 일부 보인다는 걸 알고 있다.  

정작 너무나 벗어난 주제들을 보자면, 일반인들은 참석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정리하지도 못하고, 심화하지도 못한, 학문적 유행만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더욱 복잡한 논의들이다.  

 

주로 스탈린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 사상에 대한 평가는 주를 이루거나, 역사적이고, 비교 문헌들로 구성했다. 아직은 수입에 의존된 마르크스주의를 기반하거나, 바탕으로 서술했다는 흠이 있다. 또한, 북한과 주체 사상에 대한 이전, 근거 자료 부족도 보인다. 보다 심화된 사상적 서술 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대체로는 중복된 내용들도 상당 수 보이기 때문이다. 더욱 국내 마르크스주의와 경제학들을 정리한, 저작들은 드물지만, 실천에 기반한 역사적인 의의를 되짚어 볼 기회였다. 그러나, 국내 여러 운동가들에 대한 소개보다, 주로 사상에만 치우친 탓에, 통계나, 분석들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들은, 산별적이거나, 분산됐다. 


제2인터내셔널에 대한 프랑크푸르트 학파, 루카치, 코르쉬, 마르쿠제와 같은 비판과 영향력에 비견할 때도, 짙은 수정주의 경향과 경제 결정론, 자연 변증법에 대한 엥겔스를 부정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인터내셔널(국제노동협회)에 대한 혁명에 대한 성과들과 뜻을 되새겨보지는 않았고, 그대로 혁명에 대한 패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초기화를 반동화라고 부르고자 한다. 따라서 국내에서도,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후기 마르크스주의와도 깊은 이론적 관계를 맺었고, 다름 아닌 상부적 토대와도 지배적으로 교류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단지 소수 견해가 아니라, 통일관에 대한 일부로는 대중들의 선택을 고려하자는 주장들도 있다. 그러나, 꼭 자유 진영에서만 통일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역대 정부들은, 평화적인 통일을 실천하고자 했지만, 북진 통일을 내세워서, 자주적인 통일에 기여하자는 생각들도 있어왔기 때문이다. 바로, 북한과의 전쟁으로부터 무력으로 통일을 내세운다. 그러나 대체로 무력을 내세우거나, 도발하는 쪽은 늘 남한 쪽이었다. 단지 대중들의 선택을 고려하기에는, 서동독이 분단됐을 때를 생각해봐도 장벽이 무너지고, 아무리 서로의 진영에 대한 우세를 강조하고, 계급적 타협과 통일에 대한 염원들을 지우는게, 곧바로 현실적이라 말한다. 노동계급들은 비참하고, 비루한 삶을 견딘다. 겉으로는 아무리 기적 같이 보여도, 부정된 현실에는 직면하고 도전한 현실도 있기 때문이다. 자국의 편의를 내세우고, 자국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대중만을 위한 그러한 통일이라면 죽는다. 지배자들과 (소)자본가만을 위한 무리 섞인 대중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국내 운동권들도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론과 실천에서도 얼마나 무너졌는지는 되도록 돌아가지는 말고, 그대로 가늠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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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구권(제3세계)에서도 독립에 대한 요구들은 늘 있어왔다. 그러나, 앞다투어 경제적인 면에서도 밀리거나, 식민지로 분할됐다. 그러나 종속적으로 억압되진 않았다. 비서구권, 특히나 아시아권에서도 제국주의에 대한 운동들은 규모 면에서도 컸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들도 함께 해왔다. 그러니까, 아무리 서구권에 대한, 그리고 넓은 대륙이나, 인구 유입 면에서도, 인구율에서도 많은 국가들이나 지역들에서는 훨씬 비정상적으로,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대체로 선진국들이라는 배경에는 

제국주의에도 찬성하고, 자본주의에도 동의했다. 아직도, 같은 비서구권 국가들에서는, 개발도상국이나, 경제적으로 이룩할 수 있는 선진국으로 향한 몸부림들을 부린다. 바로 국민들이라는 희생, 그리고, 노동계급들에 대한 죽음들을 토대로 말이다. 각국에 혁명가들에게는, 여러 글이나 시사들을 읽어보자. 과연, 노동계급들에 대한 죽음들은 얼마나 다루었으며, 


혹시 그러한 논리나, 근거들은, 지배계급들을 위한 처우에만 개선됐거나, 심지어는 경제적으로는, 개량화에만 머문 통계들은 아닌가. 자국에서는, 민족투쟁도 늘 함께해왔지만, 정작 민족투쟁자들 가운데 일부는 도시민과 민중마저 배신(배반)했으며, 위선으로 똘똘 뭉쳐서 구축했다. 그러한 친절에는 과연 얼마나 감사할 수나 있을까. 자국 혁명이란 바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무엇도 할 수 없다는 패배감에서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알기로는, 앞서 간 혁명 선배들은 제국주의 초기 전쟁 시기 동안에는, 각국에서도 내전과 혁명으로도 전환할 수 있도록 무산계급들, 심지어는 인민들까지도 지도했으며, 노동계급들을 설득하고자 매우 노력해왔다. 따라서 앞당겨진 종말론에 맞서, 계급적인 분노를 정당화하고자 한다.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동지들에게, 안부를 먼저 전한다. 우선 뒤늦게나마, 고맙다고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단지 자결권만 필요한 국가에도 맞서, 세계주의에 대해서만 국제화를 선전했던, 민족투쟁들과 자국 혁명에 대해서는 심화된 연구를 더 해보겠다. 또한 할 수 있다면, 선진화에 대한 특히 경제 부문들에 대해서도 검토 해보고자 한다.  


이를테면, 비서구권(제3세계)에 대한 대가로, 우선 종속이론을 제외하고, 카다피는 <녹색서>를 집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한 한계는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명확했다. 그러나 주로 미국과도 연관됐다. 제3세계에 대한 당시의 상황들이나 정보들을 조사해보면, 현재를 보더라도, 추종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꼭 틀린 말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러나 국내 여론들도 카다피를 직접 만나서 묻기도 했었지만, 질문인들마저, 제국주의 우호적인 발언들도 있었다.  


현실 사회주의 정권 의의.


본지는 현존하는 사회주의 국가 전반에서 부르주아지 독재를 내세우기 위한 명분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제국주의와 자본 국가들과 치밀하고도 지독한 싸움 끝에 그래도 독자적인 정권을 세우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 사회주의에서도 얼마든지 독재 체제로부터 얼마나 부패하고, 또한 내부 모순을 간직한 채로 부르주아지와 군부 쿠데타라는 협조 끝에 제국주의 아래에서 식민지에 대한 민낯으로 자행될 수 있다는 점을 오히려 지적하고자 한다.   


같은 투쟁 노력이란 바로 자본 국가들에 대한 위선과 비겁함을 폭로하고자 하기 위함이고, 

또한 모든 부르주아 국가 권력에 대한 여전히 잔혹하고 건재함을 밝히고자 하기 위함이다. 


어쩌면 남한에서는 아옌데, 게베라에 대한 최초 언급일지도 모르겠다. 바로 칠레와 쿠바다. 두 국가는 인민대중정당과 공산당도 있고, 주로 사회당을 주축으로 현재에도 이루고 있다. 한 쪽에서는 포퓰리즘으로 비판을 받고, 한 쪽에서는 게릴라 전술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로는 오히려 유치할 뿐더러, 치사하다는 지적을 겸하고자 한다. 두 국가는 비록 공산당에 대한 헌신을 잘 보여주기도 했지만,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모습과 정책들을 잘 보여준 국가들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의료 정책에 대한 깊은 흥미 때문이기도 하고, 자본 국가보다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 제도를 후원한다. 물론 아메리카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이나, 반공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난을 겸한 비판까지도 잊지 않고 인민 혁명에 대한 열정도 잘 보여준다. 


자본 국가에서는 두 사람 모두를 소비하고, 판매한다는 건 이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자본주의에 충실한 국가일수록 오히려 깎아내리고, 수사하는 데만 예산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노력에 대한 열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또한 뜻을 자주 되새기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앞서 여전히 현실 투쟁이자, 계급 투쟁에 대한 깊은 영감을 주고 있고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자본 국가 부상에 따른 현실 사회주의 정권 붕괴라는 지적도 아니고, 현실 사회주의 정권에서 정책에 대한 의의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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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으로는, 중국에 대한 현대화된 특색사회주의는 때로는, 암묵적으로 교조화됐다. 특히나 북방국가에서는 오랜 전통이기도 해왔는데, 그러한 사상들에 대한 중심이나 대책들로는, 공산화에 대한 전범을 더욱 정당화한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전 시기, 마오의 정책들 가운데에서도, 그리고 서방국가들에서, 청일전쟁과 중국 사회 내에서 혼란기를 조사해보고자 하며,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고찰, 독점적인 스탈린주의에 대한 승인과 수용, 그리고, 특히 미국과의 치열한 냉전 종식을 둘러싼, 각국들에 대한 지배적인 외교 전쟁들도, 다뤄보고자 한다. 계급화된 중국도 내부적으로는 분열됐기 때문에, 그러한 자본화된 일부 정책들마저 수용되는 현 상황에 대해서도 모순들을 조사해보고,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를 사수하고, 실천적인 의의를 닿는 한, 비판적으로도 살핀다.



- 기계적 유물론. 


- 홍위병과 유격 전술론. 


- 현실 사회주의 속 특색 사회주의. 


- 신식민주의.     


- 공산권들에 대한 국가독점자본주의론 비판. 


권력이란 총구로 나올지 몰라도,  

반동을 모른다면, 총알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마오의 모순 


예전에는 흐루쇼프 아래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소련 후임을 둘러싼 내부 권력 다툼이 치열했기 때문인데, 바로 소련도 내부의 모순을 자본주의로부터 압박을 받아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과거의 역사를 투영하거나, 반사적이고, 또한 반영적인 부분들은 매우 왜곡되기도 한다. 바로 우리는 중국에서 일어난 문화 대혁명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문화 대혁명이란 홍위병을 들고 일어나 서책주의 반대 운동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혁명을 봉건화했고, 스탈린도 우려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관건은 마오도 지적한 내부 투쟁이라는 모순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인민에게는 내부 모순이야말로 바로 더욱 투쟁하는 원인이자, 이유라는 사실을 잊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같은 통일이라도 다를 수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보다 정돈되고 종합할 수 있는 통일을 요구한다. 바로 분단이라는 드러난 쪼개진 현실에도 앞서 말이다.   


대표적으로 아직까지도 분단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남한과 북한을 보더라도, 스탈린 소련과 마오 중국은 더욱 미온적인 태도로만 일관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고, 오히려 베트남, 북한에서도 내전이라는 전쟁 학살로 발전하게 됐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라고 해서 모두 천재는 아니다. 공산주의자도 사람이다. 마오는 중국에서 오래된 봉건주의를 타파하고자, 또한 그러한 낡은 잔재를 부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문화 대혁명은 홍위병을 후퇴하도록 만들었고, 주위 혁명가들도 숙청해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혁명이 아니라 고리타분한 반동이라고 봐야만 옳다. 


마오의 대표 저작은 다름 아닌 <실천론>, <모순론>이다. 실천과 모순을 기치로 중화 인민들에 대한 혁명을 실천했다. 그러나 혁명에 대한 비춰진 직관과 경험에만 의존하거나, 자세한 연구를 선행하지도, 계획도 없이 추세만 따르는 실천하는 인식이란 어불성설하다. 스탈린주의와 같은 내부 모순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반동 국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사물이란 관념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시각적으로든 사람들로부터 겉으로만 드러나는 인식이나, 외부로부터 반영된 내부 자체만으로는 모순을 볼 수 없다. 객체라는 외부로부터 그러한 모순을 논리로부터 증명해서 파악하고, 의심부터 생겨난 의문을 해결하고,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물에서 일어나는 질과 양이라는 상호 모순으로부터 비판하면서부터 발전해서, 비로소 주체로부터 실천할 수 있는 혁명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논의까지도 더욱 추진하고 진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국 전쟁이 끼친 내전은 역사적으로 정당화되고 제국주의 아래에서 수정된 이념으로부터 오히려 파괴된 공산주의의 모습만 보여준 역작일 뿐이었다. 그리고 중국이란 특색 사회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수정 사회주의라는 결과로만 보여진다.


"모든 무기란 반동을 잘 잡을 줄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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