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체제 안에서든, 개인에 대한 노력이나 희생을 강요하는 건 어느 때나 같다. 그러나 '마법'같은 노동시간의 법칙에서도, 초과가치를 쥐어짜서 생산하고는, 남은 임금이나 먹고 살아야만 하는 임금 생산을 위해 남겨진 노동계급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무식한' 진보 진영에서는 아직까지도 혈세 낭비, 국민연금, 금투세 폐지 요구 등에만 미치며, 정년기 동안 축적할 수 있는 임금들을 모아 훗날 자산으로 불리고자 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정부가 서민 경제를 말하고는, 정작 그들은 지불할 물가와 비용들은 너무나 지나치다 못해서 먹고 살 만한가. 심지어는 가만봐도 남쪽은 북녘보다 더하다고 보일 때도 있다.
통계에 따르면, 8-9시간 노동시간에 대한 임금 보장, 일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정신적 부담감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늘었다. 근현대 시기 동안에도, 사업체에서는 점심시간에 대한 1-2시간 정도에만 해당하는 '공식적인' 식사시간도 있음에도, 꾸준한 업무량과 야근을 밥 먹듯 강요하는, 대사업체들에서도, 휴식이란 눈칫밥이다. 노력하라고 하지만 쉴 틈, 낮잠 시간도 없다. 더군다나, 가족을 이룬 사람들에게는, 서민 경제로부터 취업 의사를 밝혀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속박되어 할 수 있는 일이란 빈도와 소모 면으로는 매우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시에서도 노동계급들은 취약한 질병에도 쉽게 걸린다. 정신적 질병으로는 특히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늘어났으며 노동시간과 휴식을 보장하려는 요구들은 정작 매우 드물거나, 심지어는 많이 일하고, 벌 수 있다고, 노동시간과 임금은 비례적으로 동일하다고 계산하거나, 우선시한 나머지 체력을 간과해서 죽음에 이른 경우도 있다. 심지어 문제를 알아도 체제 문제이므로 해결할 수 없다고 보는 노동자들도 많아졌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그래도 영양실조까지는 아니지만, 과도한 영양 섭취로부터 비만을 호소하거나, 건강에 적신호는 잘 보여준다. 그러나 돌아온 병원 진단은 결국, 충분한 휴식과 운동, 건강한 음식 섭취일 뿐이다. 그러나 임금을 받아야만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계급들에게, 병원마저 그러한 진단은 지키지도 못하는 처방이다. 사회에 대한 요구들을 보자. 부르주아 권리에 대한 요구만 늘지는 않았는가. 정작 죽어가는 노동계급들에 대한 휴식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거나, 건강 아닌 안정된 취업을 보장하고 생계권마저 사람들을 경제적 위기로 몰아놨기 때문이다. 물질 속 생명이란, 그리고 사람도 일할 체력과 충분한 휴식이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무용지물이기 일쑤다.
휴식을 취하지도 못하고, 시간마저 부족해서, 잠 자지도 못하거나,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마저 없다는 건, 아무리 연봉이나 액수가 높더라도, 무의미하다. 공산권에서도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거나, 심지어는 강요한다. 그러나 시간을 들인만큼 생산력이라는 사람은 생산수단들을 사용하거나, 작업장, 일터에서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지는 아니하기 때문에, 노동계급들로는,
오래 전, 프랑스에서는 라파르그와 로라 마르크스도 지적했던,
'충족한 임금, 충분한 휴식'마저 절실해졌다.
안정적이라고, 가만히만 앉아도 경제는 살아났다고 탁상이나 공론하는 지배계급들을 보라.
인플레이션이 장기화됐음에도, 물가는 솟아올랐고, 실패한 혁명을 탓하고만 있는 자유 진영과
투자(투기)에만 몰두하고 주가나 조작해서, 노동계급들을 기만하고자, 꾀만 부리는 부르주아 경제인들과 학자들에게도 한심하게 뼈만 갈던 임금 노동에 대한 최후를 보노라면, 과연 해방은 어디로 갔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