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1381, 614.

 

잉글랜드, 농민 반란도 벌어졌다. 와트 타일러는 반란군 5만 명-10만 명에서 런던브리지, 런던 타워를 점령했다. 반란군은 대법관이던 서드베리 대주교 사이먼, 재무상 로버트 헤일스를 살해했다.

 

반란은 지난 5, 15세 이상 모든 사람들에게 인두세를 부과하고, 노동자, 빈민에 대한 경제적 고통을 가중한 데 항의하고자 일어났다. 사람들은 세금 징수인, 무자비한 행동에도 격분했다. 세금 징수인들은 연령을 확인하고자, 사람들 음모 길이를 쟀는데, 여성 경우 국가로부터 승인한 성폭력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반란은 금세 봉건 사회 급진적인 변혁을 요구하는 심대하고 복잡한 사회 운동으로 발전했고

런던타워 점령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615, 와트 타일러는 국왕 리처드 2세와 교섭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리처드는 취약한 입지를 깨닫고는 반란자들에게 인두세 폐지는 물론, 강제 노동, 농노제 폐지를 비롯한 많은 요구안들을 실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인두세만 폐지했을 뿐이었다. 반란자들은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고, 더 이상 위협은 되지도 않자, 리처드는 다른 약속을 전부 깨뜨리고는 1500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권력자 약속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잔인하지만 중요한 교훈을 준 사건이다.

 

1531, 616.

 

잉글랜드, 헨리 8세는 전년도에 제정한 부랑자법을 개정했다. 부랑자법은 노동계급을 만들어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법이다. 울타리(인클로저), 때문에 공유지에서 쫓겨났으나,

 

임금 노동에도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부랑자로 지정했다. 처음 부랑자로 잡히면, 채찍질을 당했다. 두 번째로 잡히면, 채찍을 맞고는 한쪽 귀 반은 잘렸다. 세 번째로 잡히면 처형했다.

 

잉글랜드를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도입한 법률으로부터, 노동력 말고는 팔 게 무엇도 없는 노동계급도 처음 만들어졌다. 인구 절대 다수는 이렇게, 몸뚱어리만 남는 상황에서, 뒤로는 식민 지배로부터 지구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자본주의, 임금 노동은 흔히 생각하듯,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상태가 아닌, 국가는 대대적인 폭력을 동원해서,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든 체제였다.

 

1649, 41.

 

농부이자, 작가, 제라드 윈스탠리, 30-40명 남녀는 잉글랜드 서리, 세인트조지 언덕을 터전 삼아 집단으로 땅을 일궜다. 몇 달간 많은 현지인들도 합류하면서 디거스(Diggers)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윈스탠리는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는 소책자를 쓰직 시작한 개신교인이었다. 천주교 교회는 전통적으로 하느님은 하늘 위 천국에 산다고 믿었다. 윈스탠리는 하느님은 우리 안에 있는 영()이라고 주장했다. 1646, 1, 펴낸 소책자에서 태초에 하느님은 세상을 만드셨다. 태초에는 인류 한 집단은 다른 한 집단을 다스려야 한다는 말은 없었으나, 이기적인 상상 때문에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통치한다고 정했다. 디거스 정치학은 원형적 공산주의 무정부주의로 직접 행동, 공동 소유, 위계 철폐 등을 내세웠다.


1797, 426.

 

 

잉글랜드, 플리머스, 왕립 해군 선박 15척 수병들은 2주 전, 포츠머스 인근 스핏헤드에서 시작된 반란에도 가세하면서부터 임금 인상,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했다. 수병들은 대표단을 선출해서는 다른 반란자들과 함께 교섭에도 참가하도록 보냈다. 힘을 합친 수병들은 요구안 대부분을 수용하도록 얻어냈다.


17971227.

 

영국 왕립 해군 마리 앙투아네트호 수병들이 장교를 살해하고 카리브해 프랑스 항구로 배를 몰고 갔다. 열악한 노동 조건과 수병들 사이에서 고조된 노동 계급 의식으로 영국 함대에서는 잇따라 일어난 폭동의 일부였다.


1812818.

 

잉글랜드 리즈와 셰필드에서 여성이 주축을 이루어 이끄는 식량 폭동이 일어났다. 리즈의 한 지역신문에서는 곡물과 밀을 탈취하고 판매상들을 공격하는 여성과 소년들을 러드 부인의 작위를 받은인물들이라고 묘사했다. 셰필드의 밀가루 거래업자들은 밀가루 가격을 1스톤 당 3실링으로 낮출 수밖에는 없었다.

 

1819816.

 

6만 명에서 8만 명의 노동계급 군중이 맨체스터 세인프피터광장에 모여 투표권을 요구하자 기병대가 군중을 향해 돌격하면서 피털루 학살이 일어났다. 이 학살로 15명이 사망하고 최대 700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특히 흰색 옷을 입은 여성 시위자들이 표적이 됐다. 학살 직후 시인 퍼시 비시 셸리는 걸작으로 손꼽히는 시 <무질서의 가면극>을 발표했다. 이 시는 무기를 들라는 가슴 떠리는 호소로 끝을 맺는다.

 

잠에서 깬 사자처럼 일어서라

저들이 도저히 격파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를 모아

잠든 사이 맺힌 이슬방울 털어내듯

너희 몸에 묶인 족쇄를 떨쳐내라

너희는 다수고, 저들은 소수이니.

 

1830828.

 

잉글랜드 켄트 성난 노동자들이 탈곡기를 파괴했다. 스윙 항쟁 시작이었다. 농업 노동자들은 스윙 대장이라는 이름으로 고용주들에게 요구 서한을 보내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폭도가 농장을 습격해 불을 지르고 기계를 깨부술 것이라고 협박했다.


18301129.

  

임금 인상과 일자리 증대를 위해 싸우는 스윙 대장 농장 노동자들이 영국 도싯 스투어프로보스트 마을에서 농장주와 경찰관을 공격했다. 그들 중 일부로는 체포되어 샤프츠베리로 이송됐찌만, 지역 스윙 동조자들이 죄수들을 풀어줬따. 밤이 지나기 전에 다른 다섯 마을에서 추가로 폭동이 일어났다. 스윙 대장은 노동자들이 고용주에게 요구 서한을 보낼 때 사용한 가공 반란 지도자 이름이었다.

 

1831, 531.

 

런던, 배심원단은 경찰관을 칼로 찔러 살해한 피고인에 대해 정당 방위라고 평결했다.

검시관은 배심원들을 방에 가두다시피 하고 생각을 바꾸도록 설득했으나 허사였다.

해당 사건은 구성한 수도 경찰들이 전국노동계급연합에서 벌인 시위를 폭력 진압하자,

자위에 나선 노동자들은 경찰관 3명을 칼로 찔러 1명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당시, 런던 사람들, 인식에서 경찰들은 부자들 재산을 보호하고, 노동계급을 비참한 빈곤 상태로 억누르고자 만들어진 폭력배였고, 따라서 사람들은 경찰을 혐오했다. 경찰관들은 거리에서도 조롱받는 일은 다반사였고, 사람들은 경찰을 산 바닷가재라는 붉은 군복을 입은 군인들을 가리키므로, 별명도 붙였다. 파란 악마, 수도 경찰들을 창설한 로버트 필이라는 이름을 따서, 필로 거느린 지랄 맞은 깡패들이라는 별명도 불렀다. 경찰은 습격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해서 초창기 신입 경찰 몇몇은 칼에 찔리고는 눈마저 멀기도 했다. 한 경찰관은 제압당한 채로 짓밟히기도 했다.

 

1831, 531.

 

영국, 웨일스, 소액 채권 재판소 집행관들은 루이스 루이스, 사냥꾼 루이스 집에다 들이닥쳐 물건을 압루하고자 하면서부터 머서티드빌 봉기도 일어났다. 루이스는 이웃들 도움으로 가까스로 집행관들을 막았다. 다음 날, 제철 노동자 시위대로는 집행관들 집을 약탈해서 물건들을 원래 소유자들에게 돌려주기 시작했다. 곳곳으로 확산한 항쟁으로는 6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18351127.

 

마부 제임스 프랫과 노동자 존 스미스는 성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런던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두 사람은 영국에서 동성애 때문에 공식적으로 처형된 마지막 남성들이었다.

 

184588.

 

영국 의회가 공유지를 빼앗고 인클로저 감독관을 임명하는 인클로저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라 인클로저 감독관은 의회에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고도 더 많은 토지에 울타리를 칠 수 있었다.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영국 정부는 5000여 개의 인클로저 법안을 통과시켜서 이전까지 공중이 사용권을 갖고 있던 공유지 680만 에이커에다 울타리를 쳤다. 조금이라도 저항이 벌어지면 대개 군대를 동원해서 진압했다. 인클로저는 자본주의 발전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밖에는 다른 생존 수단이 없는 땅 없는 사람들 곧 노동 계급을 양산했기 때문이다.

 

1874, 214.

 

런던에서 발행된 주간지,<페니일러스트레이티드>에 실린 그림은 1873-1874년에 이르는 비하른 기근을 묘사한다. 지역을 덮친 가뭄으로는 식량 공급이 위태로워지자 새로 임명된 영국 벵골 총독, 리처드 템플은 대규모 구호작업을 조직하면서, 버마(비얀마)에서 수십만 톨 싸을 수입해서는 300만 개 구호품 꾸러미를 만들었다. (각 꾸러미는 1인용 하루치였다.) 신속한 행동 덕분에 기근으로 죽는 사람은 거의 전혀 없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지출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며 템플 조치를 강하게 질책했다. 그리고는 1876, 인도 남부, 서남부에서 또 한번 기근이 덮쳤을 때, 템플은 구호작업을 대폭 축소한 한편 수십만 톤에 대한 식량을, 잉글랜드로 수출했으며, 인도인 약 550만 명은 아사했다.

 

1888, 418.

 

런던, 오늘날 우간다, 케냐 지역을 영국 식민지로도 운영하고자, 영제극동아프리카회사도 설립했다. 영국은 모든 식민지에서 그러하듯이, 여기서도 영국인들은 동성애를 불법화하고는 동성애 혐오 가치관을 전파했다. 2017, 우간다, 케냐를 비롯한 동성애를 범죄시하는 국가들 가운데 절반은 과거 영제국 일부였다.

 

1889827.

 

부두 노동자들의 파업이 진행 중인 가운데 런던 이스트엔드의 유대인 재단사들도 총파업을 시작했다. 대부분이 러시아 출신 유대인 이민자인 노동자 8000명은 파업위원회를 선출하고 파업을 벌이면서 하루 최대 12시간 노동을 요구했따. 부두 노동조합 지도자는 유대인 노동자들에 반감을 품었지만, 아일랜드 가톨릭교도가 압도적 다수인 부두 노동자들은 파업 기금을 모으며 재단사들이 10월까지 버티도록 지원했다. 결국 고용주들이 굴복했다.

 

1908830.

 

앨라배마주 버밍엄에서 폭력적인 진압 작전이 이어진 끝에 노동조합 지도부가 흑인과 백인 석탄 광부들의 파업을 철회했다. 주지사가 파업 광부들의 천막촌 철거에 군대를 동원한 지 4일 만의 일이었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계속하려고 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무장한 깡패들이 파업 광부들을 위협하면서 한 흑인 광부를 린치하는 한편, 언론은 흑백 인종이 섞인 노동자들에 관한 히스테릭한 기사를 내보냈다. <버밍엄에이지헤럴드>한 검둥이가 점잖은 백인 여자들과 순진무구한 어린 소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인 연사를 끌어안았다며 노동조합 집회를 비난했다. 파업의 실패는 남부 광산 노동자들과 노동계급의 인종적 단합에 타격을 줬다.

 

19091113.

 

브리스틀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가 테리사 가넷 내무부 장관 윈스턴 처칠을 말채찍으로 때리며 소리쳤다. “모욕 당한 잉글랜드 여성들의 이름으로 채찍질을 받아라!” 가넷은 폭행 혐의로 체포됐지만, 법정에 나가고 싶지 않았던 처칠은 그를 고발하지 않았다. 따라서 가넷은 치안방해죄1개월 징역형을 살았다. 교도소에서 가넷은 다른 참정권 운동가들과 함께 단식 투쟁을 벌였고, 교도관들은 강제로 음식을 먹였다. 가넷은 항의하고자 감방에 불을 질러 징벌방으로 옮겨졌다.

 

19101216.

 

영국 런던 이스트엔드에서 하운즈디치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금은방 절도에 실패한 라트비아 출신 혁명가 무리는 경찰관 3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다. 수사관들은 주빌리 스트리트에 있는 무정부주의 클럽에 주목했고, 이로 인해 이탈리아 출신 무정부주의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부당하게 연루됐다. 사건은 경찰과 군인 수백 명이 급진주의자들과 격전을 치른 저 유명한 시드니스트리트 포위전의 서곡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검거망을 피한 라트비아 출신 혁명가 도장공 피터는 이스트엔드 노동 계급 반영웅이었다.

 

191195.

 

웨일스 래넬리의 학생들이 교감에게 체벌을 받은 소년에게 동조하는 뜻으로 파업을 벌이면서

영국 전역에서 학생 파업 물결이 일었다. 한 학교를 시작으로 최소한 62개 크고 작은 도시로

확산되어 전국적으로 일어난 파업에서 학생들은 수업시간 단축과 체벌 종식을 요구했다. 학생들의 파업은 여름에 벌어진 노동 쟁의를 이어받은 행동이었다.

  

1911913.

 

잉글랜드 헐에 있는 세인트메리로마가톨릭 학교 학생 12명이 체벌과 과도한 학업량에 항의하는 파업에 학생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이들은 인근에 자리한 여러 학교로 행진하면서 학생 수 백 명을 끌어들여 햄버강으로 수영을 하러 갔다.

 

1912, 29.

 

영국, 도싯주 브리지포트에 있는 건드리(Gundry), 그물, 밧줄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한 무리는 임금, 노동 조건을 문제 삼으면서 노동조합 승인을 받지 않은 비공식 파업, 살쾡이 파업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여성참정권을 주장하는 노래를 부르고는 파업기금을 모금하면서도, 도시를 행진했다. 지역 하원의원에 대한 중재를 거부했으며, 일주일 뒤로 런던 노동조합 관리는 합류해서 분쟁을 해결한 다음에야 작업에 복귀했다.

 

1912, 424.

 

RMS, 올림픽호, 타이타닉호 자매 선박으로, 이튿날 출항 예정이었다. 탄 보일러공 284명은 출항 직전에 설치된 접이식 구명보트는 항해 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항의하면서부터 파업으로들어갔다. 그러자 경영진들은 사우샘프턴, 리버풀에서 파업 대체 인력을 데려왔다. 다음 날, 파업 노동자 대표단은 접이식 보트 시험을 참관했고, 결함 있는 한 척만 교체하면 항해에 나서겠다고 동의했다.

 

경영진들은 비조합원, 대체 인력을 계속해서 일하게 하고자 했지만, 승무원들은 거부했고, 선원 54명은 항의 뜻으로, 배에서 내리면서부터 출항을 취소했다. 사람들을 모두 체포했고, 반란 혐의로도 재판을 받았지만, 유죄 판결을 받았어도, 한 명도 처벌받지는 않았고, 경영진들은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대중 지지를 우려해서, 복귀를 허용하도록 했다. 여객선은 반란을 일으킨 승무원들과 함께 515, 항해를 시작했다.

 

1913114.

 

여성 권리와 노동 계급 해방을 위해 싸우는 이스트런던여성참정권연맹(ELFS)이 런던 빅토리아 공원에서 처음으로 준군사조직 집회를 열고 총기 훈련을 실시했다. 다음 날 연맹은 경찰 탄압에 저항하고자 지역 민병대인 민중군대를 공식 창설했다. 좌파 공산주의자이자, 유명한 여성 참정권 운동가 에멀라인 팽크허스트의 딸인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이스트런던여성참정권연맹과 민중 군대의 핵심 조직자였다.


1914, 59.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여성참정권론가들은 집회를 단속하는 경찰들에 맞서 싸웠다. 강당을 급습한 경찰들은 마구잡이로 날아오는 화분, 탁자, 의자를 마주해야만 했고, 주짓수 훈련을 받은 참가자, 경호원들은 몽둥이, 지휘봉, 막대기, 나무 판자, 공포탄을 장전한 권총으로 무장한 채로 경찰을 물리쳤다. 경찰들은 연사들을 체포하고자 했었지만, 무대에 내건 꽃 장식 속에 감춰진 철조망 때문에 신속하게 접근하지는 못했다.

 

1914, 611.

  

여성참정권론자들, 1090, 지어졌고, 세계적으로는 유명한 교회,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폭탄을 터뜨렸다. 우파 성향 일간지, <데일리텔레그래프>는 악랄하다고 묘사했다. 진보 성향 논평가들은 영국 여성참정권운동은 폭력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흔히 무시한다.

 

1914710.

 

27세의 여성참정권론자 로다 플레밍이 스코틀랜드의 도시 퍼스에서 왕과 왕비가 탄 리무진에 뛰어들어 유리창을 깨뜨릴고 두들겼다. 언론은 이 행동을 여성참정권운동 역사상 가장 대담한 행동이라고 묘사했다.

  

19151117.

 

영국 글래스고 가정 주부와 노동자 수천 명이 집세 납부 거부자 2만 명을 지지하며 주 법원 앞으로 행진했다. 투쟁은 영국 전역에서 임대로 통제를 도입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투쟁을 지켜본 노동 운동가, 윌리 갤리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른 아침부터 여성들이 주 법원이 자리한 시내까지 행진을 벌였다. 하지만 그들이 행진하던 바로 그 순간에도 강력한 증원군이 공장과 일터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멀리 서쪽 댈뮤어, 동쪽 파크헤드, 남쪽 캐스카트, 북쪽 하이드파크에서 거친 무명천 작업복 차림으로 프롤레타리아트 군대는 시내로 쳐들어왔다.

 

1916, 413.

 

글래스고, 시의회는 결사 자유를 제한하는 조례를 도입했다. 제정된 조례로는 1922, 노동계급, 급진주의들로부터 글래스고그린 공원 집회를 막는 근거로도 발효하자, 표현 자유를 위한 투쟁을 돌입했다. 뒤로 10년 간 항의 시위를 조직하고는 조례에도 도전하는 집회를 열었고, 발언자를 체포해서는 수감한 한편, 최대 10만 명에 이르는 군중들은 경찰과도 싸우고는 폭동을 벌이고, 상점을 약탈했다. 덕분에 조례를 철회했다.

 

1919, 34.

 

웨일스에 자리한 킨멜파크에서 귀국과 동원 해제를 기다리던 영국 육군 소속 캐나다인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비위생적, 과밀한 환경에서 병영에 묶여 있던 병사, 15000명은 한 달이 넘도록 절반뿐인 배급, 지급되지도 않는 봉급에만 시달렸다. 병사들 울분으로 병영 사령관 릴은 저녁 외출을 나갔을 때 폭발했다. 병사들은 병영 물자, 부사관 식당을 약탈하고는 불 질렀다. 소총 몇 정 손에 넣었고, 손잡이에다 면도칼을 붙이면서 무기를 빠르게 만들었다. 장교, 충성스러운 병사들은 무장을 갖췄고, 폭동을 진압하면서 20명을 체포했다. 장교들은 총 쐈고, 오전 430분에 이르러 병영을 다시 장악했다. 같은 사건으로 폭동자 3, 경비병 2명은 사망했으며 78명을 체포했다. 25명은 반란죄를 선고 받고는 최대 10년 징역형을 받았다. 군 당국은 병사들 동원 해제를 대규모로 빠르게 진행했다.

 

1916, 512.

 

아일랜드, 사회주의, 노동 조합 활동가, 독립 운동가, 제임스 코널리는 더블린, 킬마임햄 감옥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비롯한 15명 수감자로는 영국 식민 지배에도 맞서 부활절 봉기를 이끈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싸움 가운데 입은 부상으로는 총살형 집행대 앞에 설 수 없었던 코널리는 의자에 묶인 채로 총 맞았다.

 

1920, 510.

 

잉글랜드, 런던, 이스트인디아 부두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SS 졸리조지호에서 러시아 혁명에 맞서 싸우는 데 사용할 탄약이 실려 있음을 알자, 작업을 중단했다. 노동자들은 무기를 내릴 때까지 하역 작업을 거부했고, 석탄 운반부들도 선박 엔진에다 쓸 석탄을 싣기를 거부했다.

 

노동자들은 승리했다. 515, 탄약은 다시 부두에도 내려졌다. 전 여성참정권 활동가, 좌파 공산주의,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불매 운동에서 핵심 역할을 했고, 타워햄리츠구, 포플러 출신 워커 여사라고만 알려진 또 다른 사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01019.

  

실비아 팽크허스트가 체포되어 국토방위법 42조를 근거로 기소됐다. <워커스드레드노트>, 1016일자에 기사 2개를 편집, 게재해서 해군의 폭동을 선동하려 했다는 혐의였다. <수병들의 불만>이라는 기사는 스프링힐이라는 젊은 해군 수병이 쓴 편지를 바탕으로 가명을 쓴 기사였고, <황화와 부두 노동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인종주의를 다룬 기사는 클로드 맥케이가 리온 로페스라는 가명으로 쓴 글이었다. <황화와 부두 노동자들>은 부두 노동자들에게 러시아의 반공 세력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선박에다 짐 싣는 일을 하지 말라고 촉구했는데, 510SS졸리조지호에서 벌어진 작업 거부 행동이 성공하고 불과 몇 달 뒤에 나온 기사였다.

 

1924, 216.

 

20만 명에 육박한 영국, 부두 노동자들은 파업에도 돌입했다. 당시 영국은 사상 처음으로 노동당 집권 가운데, 램지 맥도날드 총리는 파업 노동자들에게 법을 최대한 강제하면서부터, 1920년 비상 대권까지 발동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끈질기게 버텼으며, 일주일 뒤로 투표로부터 하루 2실링, 임금 인상안을 받아들였다.

 

1925, 530.

 

영국, 지휘하던 상하이 경찰들은 일본인, 소유 면직 공장에서 벌어진 파업을 지지하는 노동자, 학생, 12명을 학살했다. 노동계급은 대규모 파업으로 대응했다. 몇 주 만에 상하이, 광저우, 홍콩은 완전하게 마비했고, 노동자들은 홍콩 대부분을 점령했다. 파업은 이듬해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분쇄했다.

 

1926, 53.

 

오후 1159, 200만 명에 가까운 영국 노동자는 임금 삭감에도 직면했다. 직장 폐쇄로 쫓겨난 광부들을 지지하고자 연장을 내려놓고는 총파업을 시작했다. 일주일 넘게 끈질긴 행동을 지속했지만, 전국 노동 조합 연맹체로는 노동조합회의(TUC)로는 어떤 양보도 얻어내지 못한 채로 굴복하고 말았다.

 

19261126.

 

영국에서 벌어진 전국적인 탄광 파업이 패배로 끝나면서 광부 대표들이 남은 파업자들에게 작업에 복귀하라고 조언했다. 임금 삭감과 노동 시간 증가, 임금 교섭에서 노동 조합 배제 등에 항의하며 51일부터 시작된 파업이었다. 전국 노동조합 연맹체인 노동조합회의는 처음에 광부들을 지지하는 총파업을 소집했는데, 총파업이 성공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지레 겁을 먹고는 아무 양보도 얻어내지 못한 채 파업을 철회했다. 결국 광부들만 남아서 싸움을 이어갔다. 10월에 이르러 굶주림과 생활고 때문에 상당 수 파업 광부가 작업에 복귀했다.

 

1934, 115.

 

영국 대중적인 타블로이드 신문, <데일리 메일>은 오스왈드 모슬리, 파시스트 운동을 지지하고는, <블랙셔츠단 만세!>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를 쓴 로더미어 자작(子爵) 가문은 지금도 <데일리 메일>을 소유한다. 신문은 줄곧 영국에서 매우 우파적인 타블로이드 신문이고, 반 파시스트를 비롯한 가짜 뉴스를 양산한다.

 

193497.

 

반파시스트들이 주말로 예정된 오스왈드 모슬리와 영국파시스트연맹(BUF)이 여는 집회에 맞서는 시위를 광고하는 현수막을 BBC 방송국 본관에 내걸었다. BBC는 모슬리를 초청해 나치에 동조하는 견해를 홍보하고 시위를 선전한 바 있었지만, 다른 언론들과 마찬가지로 반파시스트들에게 발언 기회를 주거나 반대 시위를 언급하기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이날 런던에 모인 10만 명이 넘는 인파는 파시스트들과 경찰 호위대를 압도하면서 그들을 하이드파크에서 몰아냈다.

  

1936104.

 

오스왈드 모슬리의 영국파시스트연맹이 이스트런던의 유대인 지구를 관통하는 행진을 계획하면서부터 케이블스트리트 전투는 벌어졌다. 10만 명이 넘는 지역 주민과 노동자들이 그자들은 절대로 통과하지 못한다고 결의하면서 파시스트 대열과도 맞섰고, 블랙셔츠단과 그들을 보호하는 경찰에 대항함으로부터 결국 행진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1944123.

 

영국이 훈련과 장비를 제공한 그리스 경찰이 나치 부역자들과 함께 아테네 반나치 시위대에게 발포해 28명이 사망했다. 당시 미군과 영국군은 지켜보기만 했다. 앞서 영국군은 군중을 해산하고자 시위대 위로 예광탄을 쐈으나 허사였다. 이런 공격은 반나치 파르티잔을 약화하기 위함이었다. 영국 윈스턴 처칠 총리는 지난 3년 간 영국 편에서 싸운 그리스 파르티잔 안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크다고 판단했다.

 

1945731.

 

영국에서 새로 당선된 노동당 정부가 징집 병력 600명을 런던의 서리 부두로 보내 생산 지연 선술로 임금 인상을 위해 싸우는 부두 노동자들을 진압하려 했다. <텔레그래프>의 한 기자는 생산 지연 전술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노동자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의도적으로 느릿느릿 작업을 했다. 그들의 행동이 계획적이라는 증거가 있었다. 크레인을 운전하고 부둣가에서 배로 물품들을 나르기는 했지만, 노동자들은 모든 일을 마지못해 하는 것처럼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이유는 금새 알 수 있었다. 작업자들이 크레인에 연결된 로프로 설탕 포대를 배에 싣고 있을 때, 어디선가 왜 평소처럼 12포대씩 걸지 않고 4포대씩 거느냐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1945109.

 

영국 노동당 정부가 에스파냐 내전과 반나치 전쟁에서 싸운 레지스탕스 투사 226명에 대한 투옥을 옹호하면서부터 그들에 대해 적국의 준군사조직 구성원들이라고 설명했다. 프랑스에서 억류됐다가 탈출해 레지스탕스에 가세한 이들이었다. 독일에게 포로로 잡힌 그들은 해방되자마자 일제히 검거되어 잉글랜드 랭커셔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한 명이던 아구스틴 솔레르는 수용소에서 자살했고, 에우스타히오 부스토스 등은 박해를 받아 정신이상자가 됐다. 구금자들이 단색 투쟁을 벌이고 대중적인 시위가 벌어지자 랭커셔주 촐리에 있는 수용소로 이송됐는데, 그곳에서는 적어도 공화파라는 신분을 증명할 수 있었다. 이듬해 1월 수용자들은 그곳에서 파업을 벌였고, 같은 해에 풀려나거나 국외 추방됐다.

 

1950, 64.

  

잉글랜드, 런던에서, 열린 임시 총회에서 전투적 반파시스트 유대인 재향군인, 남녀로 구성된 단체 43모임, 표결로부터 해산을 결정했다. 43모임은 2차대전 당시, 나치에도 맞서 영국군에서 싸운 유대인들은 4년 전, 결성한 단체로, 강제 수용소 참상을 직접 목격했고, 영국에 귀국한 뒤로는 거리 파시스트들은 공공연하게 조직화 시도를 하기도 했다. 43모임, 구성원들은 필요한 모든 수단들을 동원해서, 파시즘, 인종주의, 반유대주의와 싸우자고 결의했다.

 

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 제리 플램버그, 미용사 수습생 비달 사순, 장교 출신 게이 해리 비드니, 파시스트 단체에도 진입한 도리스 케이, 열렬한 거리 투사로 손꼽히는 줄리 슬로건, 같은 여성들은 43모임 구성원이었다. 보통 전국 각지, 여러 도시에서도 파시스트들 경찰 호위대를 돌파한 뒤로부터, 파시스트 귀족 오스왈드 모슬리, 추종자들을 괴롭히는 식으로 파시스트 집회를 방해하고는 해산했다. 모슬리는 도망치듯 해외로 떠났고, 파시스트 세력도 작아지자마자,

 

43모임도 해산을 결정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르러 모슬리는 재기를 시도했을 때, 모임 베테랑 선수들은 다시 운동에도 뛰어들었다.

 

1950, 623.

 

런던, 스미스필드, 육류시장에서 일하던 배달 노동자들은 살쾡이 파업에도 들어갔다

노동당 정부는 7월까지 지속된 파업을 비난하고는, 깨뜨리고자 군대를 파업 대체 인력으로 동원했다. 전쟁 뒤 노동당 정부는 노동계급에 대항하고자 군대를 동원한 많은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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