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 423.

 

버지니아주, 프린스에드워드 카운티에서는 16, 흑인 학생이던 바버라 존스는 동료 학생들을 이끌고는 학교에서 인종 차별, 열악한 환경에다 항의하는 파업에도 나섰다. 같은 학교는 대법원도 검토한 사례 연구 대상 가운데 한 곳이었고, 대법원은 인종 분리로부터 위헌이라고도 선언했다. 그러나 지역 학교 위원회는 인종 분리를 폐지하는 대신, 모든 학교를 폐쇄했고, 현지 백인 아이들도 다니던 사립 학교들은 1986년까지도 인종 분리를 폐지하지도 않았다.

 

1953, 613.

 

영국군, 부대는 마우마우 반란 용의자들을 쫓아내고자, 케냐 추카 지역에도 파견하면서부터,

추카 학살로 이어진 사태를 시작했다. 뒤로는 5일간 무장하지도 않은, 케냐 민간인 20명을 살해했다. 일부로는, 구타, 고문을 당하고는 사지마저 절단된 상태였다. 영국군은 희생자, 6명 손을 자라서 자루에다 담고는 막사로 가져갔다. 살인죄로 기소된 영국 군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1959, 33.

 

영국, 케냐인 강제수용소 사령관은 수감자 88명을 몽둥이로 가혹하게 때리면서 홀라 학살은 벌어졌다. 11명은 사망했으며, 77명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식민 지배에 항거하는 마우마우 봉기를 짓밟고자 영국 정부는 민간인 약 40만 명을 강제수용소에다 집어넣고는 추가로 100만 명을 군대로부터 감독하는 마을들에 몰아넣었다. 따라서 감옥이었다.

 

1959129.

 

영국 정부가 영제국 시절 식민지에서 저지른 범죄에 관한 공식 기록을 파기하는 계획인 레거시 작전의 일환으로 비밀 제안서를 회람했다. 제안서는 문서철의 소각을 지시했는데, 이후 정부는 문서들을 무거운 상자에다 넣어서 해안에 최대한 멀리 떨어진 바다로 가져가 수심이 아주 깊고, 조류가 없는 물 속에다 가라앉혀야만 한다고 명령했다. 레거시 작전은 성공적으로 수행됐고, 영국의 끔찍한 식민 지배 유산은 자국 안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961, 117.

 

1960,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콩고에서는 최초로 민주 선걸로 선출된 총리 파트리스 루뭄바는 미국, 벨기에로부터 지원한 쿠데타는 벌이진 뒤로부터 살해됐다. 처음에는 CIA는 사회주의로부터 독립 지도자를 암살하고자 했지만, 쿠데타 세력으로는 루뭄바, 동료 2명을 체포한 뒤로부터 잔인하게 구타, 고문한 다음 총으로 쏴 죽였다. 벨기에 군대는 3명 주검을 파내서 조각낸 뒤로 황산에 넣어 녹이고는, 나머지를 고운 가루로 만들어 뿌려버렸다.

 

1962729.

 

영국의 파시스트 오스왈드 모슬 리가 맨체스터 시내에서 행진을 하려 하자 반파시스트들이

그를 습격해 때려눕혔다. 경찰관 250명이 모슬리를 구해 호위하려 했지만, 토마토와 계란, 동전과 돌멩이 세롈를 막아주지는 못했다. 행진 이후 연설에 나선 모슬리의 목소리는 반파시스트 5000명의 함성에 묻혔다. 결국 경찰이 7분만에 집회를 중단시켰다. 한동안 지역 주민들과 파시스트들 사이에서 충돌이 잇따랐고 경찰은 47명을 체포했다.

 

196292.

 

영국 국민당이 이스트런던 돌스턴에서 집회를 시도하 인근인 리들리 거리에서 오스왈드 모슬리와 파시스트 블랙셔츠단이 집회를 열려고 했다. 민족사회주의운동이 트라팔가광장에서 반유대주의 집회를 여는 데 대응해 19627월 출범한 황색별운동 소속 반파시스트들은 모슬리가애용하는 장소에서 집회를 하지 못하게 하고자 연속 집회를 진행했다. 모슬리는 결국 베스널그린에 있는 빅토리아파크광장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돌멩이와 계란, 과일 세례가 쏟아져 도망쳐야 했고 집회는 무산됐다. 항의 시위대는 모슬리 자동차 창문에 주먹세례를 퍼부었다. 모슬리 집회가 불과 몇 주 사이 네 번째로 군중으로부터 무산된 사건이었다.

 

1963, 430.

 

영국, 잉글랜드, 브리스틀에서는 카리브 출신, 이주 노동자 한 무리는 버스 승무원에서 흑인, 아시아계 노동자를 배제하는 데 항의하고자, 버스 불매 운동을 개시했다. 유색인 배제 조치로는 백인 노동 조합원들로부터 유색인 노동자를 고용한다면 똑같이 파업을 벌이겠다고 위협한 끝에, 운송일반노동조합(TGWU), 국유 기업 브리스톨옴니버스(BOC)에서 시행했다. 몇 달 간, 불매 운동, 대규모 시위도 벌어진 뒤로, 버스 노동자들은 8월에 열린, 대규모 회의로부터 배제 조치를 끝내기로 의결했다. 같은 해, 9, 첫 번째, 유색인 버스 차장을 채용했다. 2년 뒤로는 공공 장소에서도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인종 관계법(RRA)도 제정했다.

 

19641015.

  

영국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한 뒤 노동장 지도자 해럴드 윌슨이 총리에 올랐다. 그가 집권 중 한 일 가운데 하나는 오만에 영국군을 보내 민중 항쟁으로 위기에 빠진 술탄 사이드 빈 타이무르의 중세적인 꼭두각시 통치를 보호한 것이었다. 오만은 세계에서 노예제가 합법인 유일한 나라였고, 병원과 학교가 각각 1, 3개에 불과했다. 유아 사망률은 30%가 넘고, 라디오, 자전거, 축구, 선글라스, 바지가 모두 불법이었다. 영국은 오래 전부터 사이드의 통치를 떠받쳐줬는데, 노동당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민간인을 학살하고, 우물에 독을 타고, 마을에 불을 지르고, 반란자를 고문하고, 가축을 총으로 죽이는 양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1965, 130.

 

전 영국 총리, 위스턴 처칠, 장례식은 거행됐다. 관을 실은 바지선이 지나갈 때, 런던 곳곳 부두에 있던 크레인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훗날 연출된 장면이었다. 처칠을 좋아하지 않아서, 크레인 숙이기를 거부한 부두 노동자들은 추가로 비용을 받고 크레인을 조종했다. 처칠은 국민적 영웅으로 소개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노동계급 사람들에게는 혐오 대상이었다. 1945, 선거에서 패배도 마찬가지다. 극렬한 인종주의를 따르던 처칠은 민간인에 대한 독가스 사용을 지지했으며, 파업 노동자들에게는 군대로 보냈으며, 최대 400만 명 벵골인들도 기근을 강요당해서 사망하도록 방조했기 때문이다.

 

1965118.

 

영국 노동당 총리 해럴드 윌슨이 식민지인 영국령 인도양 지역(BIOT) 수립을 승인했다. 차고스 군도의 종족 청소를 개시하는 첫 번째 행동이었다. 이후 몇 년 간 차고스 주민 전체가 집에서 강제 퇴거되어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다. 외무부의 한 관리는 외교관 데니스 그린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우리는 이 문제를 강경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이번 조치의 목적은 암초 몇 개를 우리 수중에 계속 두는 것입니다. 갈매기들 말고는 어떤 토착 집단도 없어야 합니다.” 그린힐이 맞장구를 쳤다. “새들하고 같이 타잔이나 프라이데이들도 보내버리죠.” 주민들은 옷가방 하나만 챙긴 채 세이셸로 강제 이주를 당했고, 가축은 전부 살처분됐다. 종족청소의 목적은 영국 정부가 가장 큰 섬인 차고스를 연 간 1달러만 받고 미군 기지로 임대하기 위함이었다.

 

1968, 67.

  

잉글랜드, 대거넘에서 자리한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와 동일 임금을 요구하고, 파업에도 들어갔다. 3주 뒤,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임금, 92%를 받는 대가로 조업에 복귀했따. 파업은 1970, 평등 임금 법을 제정한 핵심적인 계기였지만, 포드는 명목상 동일 임금에 도달한 건, 1984, 또 다시 파업은 벌어진 뒤였다.

 

1969, 319.

 

영국 외교관 1명은 총부리에 위협을 받으며 앵궐라섬에서 쫓겨난 뒤로, 영국 군대와 경찰들은 섬을 침공했다. 영국 식민 정부는 앵귈라섬, 네비스섬을 세인트키츠에 있는 정부, 총리 로버트 브래드쇼에 대한 권한 아래 뒀다. 브래드쇼는 앵귈라에 대한 혐오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면서, 섬을 사막으로 만들어버릴 작정이라고도 말했다.

 

1960, 브래드쇼는 앵귈라섬을 위축하게 하고자 전화 수리공을 보내 전화 체계(시스템)을 차단하고는 전기 설치도 방해했다. 앵귈라는 1967, 세인트키츠네비스앵귈라 연방에서 탈퇴하고는 세인트키츠 경찰을 무장해제시킨 뒤 돌려보냈다.

 

영국 정부는 외교관이던 윌리엄 휘틀록을 보내 해결하려고 했지만, 앵귈라 사람들은 거만했던 휘틀록을 내쫓았다. 휘틀록은 기자들에게 깡패, 마피아 부류는 섬을 장악했고, 섬사람들은 블랙파워 군복을 입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복(모닝코트)에다 흰 장갑만 꼈을 뿐이었다.

 

섬 사람들은 영국 비행기 착륙을 막고자 수 많은 염소를 대공(對空)하고자 풀어놨다. 노동당 정부는 런던 경찰로부터 해상으로 낙하산 부대원, 200명을 보내어 범죄자 무리, 흑인 급진주의와 대결하기를 예상했지만 마주한 건 염소들뿐이었다. 사건마저 큰 웃음거리 되자, 영국은 세인트키츠에서 앵귈라는 독립하기를 허용했다. 엥귈라는 영국에서는 해외 영토이자, 영국령이다.

 

197089.

 

영국 블랙팬서 당원들을 포함한 150명의 사람들이 통힐에 있는 캐리비언 레스트로아 맹그로브에 대한 경찰의 단속 중단을 요구하며 경찰서까지 행진을 벌였다. 작가 다커스 하우를 비롯한 9명이 체포되어 폭동을 선동한 음모 혐의로 기소됐으나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 뒤로 내무부 문서에서 밝혀진대로, 단속은 영국에서 세를 키워가는 블랙파워 운동을 파괴하려는 음모의 일환이었다.

 

1970108.

 

영국 보수당의 법무상 피터 롤린슨의 자택에서 불과 몇 주 사이 두 번째 폭탄이 벌어졌다. 도시 유격 단체 성난여단이 설치한 폭탄은 노동 운동과 아일랜드 시민권 운동에 대해 정부가 점차 억압적인 전술을 사용하는 데 대한 항의 표시였다. 성난여단이 구사하는 폭탄 공격이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인명살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고안된 폭탄이었다. 성난여단은 공식 성명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용병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재산을 공격한다.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로버트 카, 롤린슨, 존 월드론은 모두 주검이 됐을 것이다.

대중을 공격하는 건 파시스트들과 정부 앞잡이들뿐이다.

우리는 반격을 시작했고, 폭탄을 손에 쥔 조직된 노동 계급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1971, 423.

 

천 명에 육박하는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들은 무공 훈장을 정부에다 반납했다.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들은 무공 훈장들을 시체 운반용 자루에다 담아 반납하고자 했으나, 당국은 의사당 주변에다 울타리를 세웠기 때문에, 울타리 위로 훈장을 던졌다. 일부 참전 군인들은 훈장을 던지기 전에 전투 가운데서 사망한 전우들, 미국인, 베트남인 모두에게 훈장을 바치며, 말을 외쳤다. 시위에도 참가한 피터 브래니건은 훈장을 던진 의사당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기서는 미군에서 전투 가운데 부상을 입은 군인들에게만 수여한다는 퍼플하트 훈장을 받았고, 후레자식들하고도 싸워서 받을 수 있는 훈장도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19711128.

 

전투적 유대인 반파시스트들이 모인 62 모임 구성원들이 잉글랜드 브라이턴 로열파빌리언호텔에 모인 극우파 북부동맹 모임을 무산시켰다. 모임에서는 국민 전선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독일 나치 친위대 장교 출신들도 참석했다. 파시스트 몇 명이 병원으로 실려 갔고, 반파시스트들은 연막탄을 터뜨리고는 유유히 탈출했다.

 

1972111.

 

잉글랜드 러프버러에 자리한 맨스필등양말공장에서 일하는 인도계 노동자들이 백인 노동자만 할 수 있는 승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과 함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10월에 남녀 노동자들이 처음 파업에 들어갔을 때 전국양말·니트웨어노동조합(NUHKW)은 지원을 거부했다. 결국 파업 노동자들이 조합 사무실을 점거하고 나서야 파업을 지원하고 나섰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여전히 백인 조합원들에 대한 파업 명령을 거부했다. 백인 노동자들은 어쨌든 인도계에 대한 차별에서 이득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이 지역의 아시아계 섬유 노동자들은 동맹 파업을 벌였다. 노동자들이 사측 양보를 얻어내면서 쟁의는 12월에 끝났다.

 

조사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는 노동조합이 인종차별 관행에 공모하고 있음을 자세하게 밝히면서 노동조합이 이러한 차별을 그만두지 않으면 흑인과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독자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

 

1973, 116.

 

서식스 대학교 학생들은 정부 학자금 지원, 삭감 계획에도 맞서 기숙사, 월세 납부 거부 운동에도 나섰다. 영국 각지 학생들도 움직임에 가세했으며, 2월 말에 이르러서는 44개 대학은 월세 납부 거부 운동에도 참가했다.

 

1973, 321.

 

런던, 소수 정신질환자, 지지자들도 모여 정신질환자연합(MPU)를 창설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도 정신의학은 노동계급을 통제하는 한 형식이고, 노동자들도 자신들에 대한 이익을 내세우고자 조직하는 같은 방식으로, 정신질환자도 조직을 이뤄야만 한다고 내세웠다.

 

1974, 36.

 

영국 석탄 광부들은 35% 임금인상안을 받아들이면서 예정했던 4주간 파업을 철회했다.

이미 보수당 정권을 무너뜨린 거대한 승리 가운데 하나였다.

 

1974, 43.

 

런던, 브릭스턴, 경찰들은 브록웰 공원에 모인 군중을 공격한 뒤로 흑인 청소년 3명을 수감했다. 대부분 흑인들은 여러 학교에서 학생 1000명을 수감된 흑인 청소년들을 지지하는 파업에도 들어갔다. 학생들은 집회를 조직했고 지방법원, 경찰서에서도 털스틸중고등학교는 학교 학생 100명도 시위 대열로도 합류했다. 그리고 브록웰 공원까지 행진했다.

 

1974, 51.

 

잉글랜드, 레스터, 임페리얼 타자기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 수백 명은 3개월 파업에 돌입했다. 대부분은 동아프리카, 아시아계 여성 노동가들이었다. 파업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영국 안에서 아시아계 노동계급 저항을 활성화한 핵심 계기였다.

 

1975928.

 

토요일 저녁, 흑인 해방 활동가 3명이 체인점 스파게티하우스의 런던 나이츠브리지 지점에 총기를 들고 들이닥쳤다. 이들은 일주일치 매상을 강탈하고자 했다. 강도는 실패했고 이내 경찰이 도착했다. 흑인해방군을 자처한 이들은 직원을 인질로 삼고 안전하게 영국을 떠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경찰 수백 명이 포위한 가운데 5일 동안 이어진 인질극 끝에 모두 항복했다.

 

1976, 417.

 

영국, 극우 정당, 국민 전선은 잉글랜드, 북부, 브래드퍼드, 아시아계 지역에서도 행진을 조직했다. 지역 정치인들은 도심에서도 대항 집회를 열었지만, 아시아계 젊은이 수백 명들도 떨어져 나와 경시줄 혹은 경찰줄(폴리스라인), 곳곳에서는 싸움을 벌이고는 인종주의들을 공격했다. 다수 젊은이들은 브래드퍼드아시아청년운동(BAYM) 소속이었다. 단체로는 인종주의 반대 운동(캠페인)을 벌이는 남아시아계 조직으로, 거리에서는 파시스트들과 싸우고, 노동 투쟁, 식민 지배 반대 투쟁도 지지했고, 이민자 가정을 지지하는 운동(캠페인)도 버렸다.

 

1976, 64.

 

런던, 사우솔에 자리한 도미니언 극장 아펭서, 18, 시크교도 학생, 구르딥 싱 차가르는 인종주의 칼에 찔려 사망했다. 어느 행인은 경찰관에게 누가 죽었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그냥 아시아인이에요. 차가르 사망으로 지역 폭동도 일어났고, 지역 아시아계, 흑인 젊은이들은 사우솔청년운동(SYM)을 결성해서는 거리에서 인종주의와도 맞서 싸웠다.

 

1976820.

 

사진 인화소에서 일하던 데브시 부디아가 작업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해고되자 동료 3명이 그를 지지하며 일손을 놓으면서 노스웨스트런던에서 그러닉 파업을 시작했다. 3일 뒤, 동아프리카계 아시아 여성 노동자들이 주축을 이루어 시작한 피케팅은 2년 가까이 이어졌다. 파업은 결과적으로 패배했지만, 영국 노동운동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노동자들이 벌인 놀라운 투쟁과 영국 각지에서 일어난 연대 물결은 백인 중심 노동조합 조직들이 아시아계와 이주 노동자들을 경쟁자가 아닌 동료 노동자로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1977716.

 

잉글랜드 노샘프턴종합병원에서 가정주부 리타 워드가 누워 있기 시위를 시작했다. 담석 때문에 고통에 시달리던 리타는 수술을 받고자 16개월을 기다렸지만 또 다시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개인병원에서는 500파운드를 내면 바로 다음 날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리타는 병원 노동자들지지 속에서 병상을 차지하고 치료를 해줄 때까지 일어나지 않겠다고 버텼다. 병원 경영진은 결국 굴복했고 며칠 뒤 수술이 이뤄졌다. 수술로 인해 지여된 수술은 한 건도 없었다.

 

1977813.

 

훗날 루이셤 전투라고 불리게 되는 사건에서 영국 사우스런던 주민들과 반파시스트들이 파시스트 집회를 저지하고자 경찰과 극우 정당 국민전선 성원들을 상대로 장시간 싸움을 벌였다.

 

19771112.

 

영국 리즈, 요크, 브리스틀, 맨체스터, 뉴캐슬, 브라이튼, 런던에서 제1밤을 되찾자행진이 벌어졌다. 지난 430일 서독 각지 도시에서 성추행에 항의하는 밤을 되찾자행진이 여성들만 참여한 가운데 일사불란하게 열렸다는 소식에 고무한 리즈혁명적여성주의모임(LRFG)이 주최한 행사였다. 언론으로부터 요크셔의 살인마라는 이름이 붙은 연쇄살인범 피터 서트클리프는 1975년부터 1980년까지 리즈를 비롯한 요크셔 전역에서 여성 13명을 성폭행하고 살해했다. 따라서 요크셔에서는 밤을 되찾자가 특히 의미심장한 행사였다. 요크셔의 여성들은 경찰이 살인 사건에 늑장 대응을 하고 언론은 제대로 보도조차 하지 않는 데 분노했다. 살해 당한 피해자는 주로 성노동자였다. 젊은 여학생이 살해됐을 때에야 언론과 경찰은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듯했다. 경찰은 당시 공식적으로 여성들에게 밤에 외출을 삼가라고 조언함으로부터 사실상 통금을 내렸다. 밤에 외출할 수밖에 없는 야간조 여성 노동자나 성노동자에게는 무용한 소리였다.

 

1978716.

 

런던 최대의 벵골인 지역에 위치한, 브릭레인 거리와 베스널그린 거리가 만나는 모퉁이에서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책자가 판매되는 것을 막고자 대규모 반인종주의 연좌시위가 벌어졌다.

 

1978717.

 

해크니·타워햄리츠 방어위원회가 인종주의자들의 공격에 맞서 하루 동안 파업을 벌이면서 런던의 타워햄리츠 자치구를 마비 상태에 빠뜨렸다. 아시아계 영국인이 대다수였던 로버트 몬테피오리 학교의 학생 400명도 파업에 동참해 학교 안팎에서 벌어지는 인종주의적 폭력에 항의했다.

 

1980, 42.

 

잉글랜드, 브리스틀, 경찰들은 혼혈 흑인이 소유한 카페를 단속하자, 흑인 주민 수백 명은 경찰에도 맞서 싸웠다. 항쟁에서는 브리스틀 백인 주민 수백 명도 가세했다.

 

1980, 623.

 

버밍엄, 롱브리지에 있던 브리티시레일랜드 자동차 공장에서는 도장공 100명은 파업에도 돌입했다. 노동자들은 매일 2차례 갖는 홍차 휴식 시간을 축소하고는 노동자 간 휴식 시간에 시차를 두겠다고 발표한 데 항의하는 행동이었다. 파업은 확대되고, 공장 생산은 완전하게 멈춰선 결과, 미니, 알레그로 모델, 생산 차질 인해 회사는 최소한 약 290억 원(1000만 파운드) 손실을 입었다고 추산했다. 10일 뒤, 노동 조합은 브리티시레일랜드 휴식 시간을 변경해야만 하는 실질적인 근거가 있는지를 파악하고자, 검토한 대가로부터, 경영난에 빠진 회사 자구책 가운데, 휴식 시간과 관련된 조항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다.

 

1981, 25.

 

스코틀랜드, 그리녹에 있는 리(Lee) 청바지 공장에서 문을 닫고는 다른 곳으로 생산을 이전할 예정이라는 소식도 전해지자, 여성으로부터 주축을 이룬 노동자, 240명은 작업장을 점거했다.

노동자들은 문 마다, 의자로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피시앤칩스, 아이언브루, 240인분을 사고자,

노동자 2명은 지붕 위로 올라가 배수관을 타고 내려왔다. 7개월 간 점거는 이어졌으며, 경영진도 결국 굴복해서 공장 인수에 동의했다. 공장을 점거하던 노동자 140명은 일자리를 확보했다.

 

198173.

 

남아시아계 인구가 많은 런던 사우솔 지역에서 폭동이 발발했다. 술집 햄브로 태번에서 공연을 보던 인종주의자 스킨헤드족들이 아시아계 사람들을 공격하면서부터 시작했다. 스킨헤드들은 아시아계 여성 한 명을 폭행하고, 아시아 식료품점 창문을 깼고, 아시아인들이 사는 주택을 공격하려고 찾아다녔다. 경찰이 제대로 대응하지도 않자 아시아계 공동체가 자위를 위해 인종주의자들과 맞서 싸웠다. 결국 파시스트들뿐만 아니라 경찰과도 맞서 싸워야만 했다. 동틀 무렵 술집은 전소됐고, 경찰관 60명 정도가 부상을 입었고, 33명의 사람들은 체포됐다.


1981821.

  

스코틀랜드 그리녹에 있는 리 청바지 공장에서 일하는, 대부분이 여성인 140명 노동자들이 공장 폐쇄를 막고 일자리를 지키고자 7개월 동안 벌인 점거를 끝내고 작업에 복귀했다.

 

1982, 426.

 

영국, 리즈 형사 법원에서는 브래드퍼드 12, 재판을 시작했다. 12인들은 파시스트들에도 맞서고, 공동체를 지키고자 대비를 했다는 이유로, 음모죄 혐의로 체포된 흑인 청년 연합(UBYL) 활동가들이었다. 재판은 9주 간 이어졌고, 피고인 측에서는 경찰은 인종주의 공격으로부터 아시아계, 아프리카계, 카리브인을 보호하지도 못한 탓에, 공동체들은 자위권을 행사해야만 했다. 기념비적인 판결에서는 12, 모두 무죄 방면했다.

 

19831025.

 

잉글랜드 헤이스코티지병원 노동자들이 다음 주로 예정된 폐업에 항의하며 병원을 점거했다. 노동자들은 정부가 굴복할 때까지 스스로 병원을 운영했다. 병원은 1990년대까지 운영되다가 사설 요양원으로 바뀌었다.

 

19831026.

 

잉글랜드에 자리한 노스우드앤드피너코티지 병원 노동자들이 폐업 계획에 항의하고자 병원을 점거했다. 노동자들은 점거 이튿날이던 1027일부터 직접 병원을 운영했고, 결국 싸움에서 승리했다. 병원은 이후 25년 간 계속 운영됐다.

 

19831211.

 

영국 그린햄 군사 기지에서 크루즈 미사일이 반입되고 3주 뒤, 여성 5만 명이 기지를 에워싸고, 항의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군대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거울을 들었다. 시위가 마무리 될 무렵 여성들은 기지 주변 펜스를 잡아 뜯었고, 경찰은 수백 명을 체포했다.

 

19831224.

 

1972년과 1974년 광부 파업을 지지한 배우들로 구성된 팝 그룹 플라잉피켓츠가 야주(Yazoo) <온리 유>를 아카펠라 버전으로 리메이크해 영국 크리스마스 넘버원 싱글에 올랐다. 플라잉피켓츠는 전국 각지를 돌면서 노동자들의 피켓 시위에 연대한 파업 노동자들의 모임이었다.

 

같은 전술은 1974년 보수당 정부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다. 전투적 사회주의자들인 프라잉피켓츠는 이후 1984년 광부 파업 시기에 드랙스 발전소에서 피케팅을 하면서부터 레코드 레이블과 갈등을 겪었고, 일부 음반 가게는 이들의 음반 판매를 거부하기도 했다.

 

1984, 35.

 

영국 보수당 전부는 탄광 폐쇄 계획을 발표한 데 대응해서 코턴우드 탄광 광부들은 파업을 개시하면서부터 광부 대파업을 시작했다. 다른 탄광에서도 분쟁으로 파업했지만, 폐쇄에 항의하고자 같은 파업은 요크셔 주 전역으로 확산했으며 4일 뒤, 전국광산노동조합(NUM)은 전국적 파업을 호소했다. 전국 각지 대다수 광부들도 호소에도 호응했다.

 

광부 부인들도 주축을 이룬 여성 파업 지지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부터 1년 가까이 파업을 벌이도록 도왔다. 마거릿 대처 총리와 보수당 정부는 노동자 조직 힘을 분쇄하고자, 대규모 민영화, 자유시장 개혁을 밀어붙이고자 마음 먹었다. 정부는 앞서 1972, 1974, 광부 파업에서도 패배하면서부터 배운 교훈을 깊이 새겼다. 석탄을 넉넉하게 비축하던 장기간 파업에 대응했으며, 추운 겨울에 비하면 석탄 수요도 저은 봄에 탄광 폐쇄 계획을 발표하고자 일부러 파업을 도발했다. 영국에서 매우 조직력도 강하고, 전투적인 노동자 집단이던 광부는 패배해서 노동자, 고용주 사이에서 힘 균형은 달라진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1984811.

 

광부 대파업 기간 중 무려 25000명의 여성이 광산 폐쇄에 반대하며 런던을 행진했다.


광부 부인들을 비롯한 여성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 광산폐쇄에 반대하는여성들(WAPC)은 장기간 파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41210.

 

광부들을지지하는레즈비언게이모임(LGSM)이 런던 캠던의 일렉트릭볼룸 공연장에서 자선 공연을 열었다. 팝 밴드 브론스키 비트를 내세운 공연은 대규모 광산 폐쇄에 맞서 몇 달째 파업을 벌이던 광부들을 지원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공연으로 사우스웨일스 파업 노동자들을 위한 기금은 5000파운드가 넘게 모였다. LGSM은 지난해 열린 런던 프라이드 시위 뒤로 만들어진 단체로, 정부는 사실상 파업 광부들이 굶주림에 지쳐 작업에 복귀하도록 만들려고 기를 쓰는 가운데 광부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LGSM은 영국 노동 운동과 성해방 운동을 하나로 묶고는 노동 운동은 성해방 권리를 지지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5106.

 

경찰이 런던 브릭스톤에서 도러시 체리 그로스에게 총을 쐈고, 불과 며칠 뒤 이번에는 아무런 죄 없는 아프키라 카리브계 여성인 신시아 재럿의 집을 수색했다. 가택 수색 중에 신시아 재럿이 심장 마비로 사망하자, 브로드워터팜 지구 주민들이 경찰의 폭력에 항의하며 들고일어나 토트넘이 불길로 휩싸였다. 경찰은 몇몇 남성과 소년에게 소요 와중에 경찰관 한 명을 살해한 혐의를 씌우고자 했고, 세 명이 몇 년이나 수감됐다가 항소심을 거쳐 풀려났다.

 

19851128.

 

쉘오일컴퍼니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내부 문서가 돌았다.

 

지난 100년 동안 지구 온난화가 진행됐다. 0.5도 온도가 상승한 것은 이산화탄소가 증가한 결과이고, 향후 40년 간 1-2도가 더 올라갈 것이다. 온도 상승은 지난 1000년 간 일어난 어떤 변화보다도 더 크다. 지난 100년 간 지구 평균 해수면은 15cm 정도 상승했다. 2025년에 이르면 정확하지는 않아도 20-120cm 더 상승할 것이다.

 

문서는 1988년 쉘이 온실 효과에 관한 폭 넓게 작성한 극비 내부 보고서 일부였다. 쉘이 최소한 1981년부터 기후 변화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 쉘은 기후 변화가 인간 때문이라는 것, 화석 연료 연소가 주요한 원인이고, 이대로 간다면 재앙과도 같은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쉘은 수십 년 동안 연구 결과를 은폐하면서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 가짜 공공 연구를 후원했고, 이산화탄소 배출을 제한하려는 정부 모든 시도에 저항했다.

 

198822.

 

레즈비언, 4명은 5월에 발효된 동성애 혐오적 내용에 대한 28조 법안 도입에 대한 논의에서 항의하고자, 영국 상원 옥상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왔다. 1988, 지방정부법 28조는 학교를 포함한 지방 당국에서도 이른바 가족관계로 동성애를 수용하거나, 가르치지 못하도록 금지한 내용이었다. 2017년 또 다른 레즈비언 4명은 1988, 행동을 기념하는 파란색 명판을 붙이고자 국회의사당으로 기어올랐다.

 

1988, 23.

 

영국 각지 간호사, 2500명은 물가 상승률은 5퍼센트에 육박하는 와중에 3퍼센트에 불과한 임금 인상에는 반대하며 파업에도 들어갔다. 자동차 제조업체였던 복스홀 노동자들과 일부 광부들도 연대 파업을 벌였다. 언론 공세에도 불구하고, 다수 사람들은 파업을 지지했으며, 노동자들은 결국 일정한 양보를 얻어냈다.

 

198875.

 

영국 이스트런던에 있는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여성과 소녀 1400명이 공장의 끔찍한 노동조건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한 노동자와 연대하고자 파업에 나섰다. 경영진은 신속하게 해고 노동자를 복직시키겠다고 제안했지만, 노동자들은 부당한 임금공제 중단 등 경연진이 다른 많은 양보 조치를 취할 때까지 작업 복귀를 거부했다.

 

1991, 614.

 

50만 명에 이르는 스위스, 여성들은 전국적인 여성 파업에도 참가해서, 1981, 614,


연방 헌법에 통합된 성평등 법률 시행을 요구했다. 주요 관심사로는 지속된 남녀 임금 격차였다. 여성들은 2011년 같은 날에도, 다시 파업을 벌였고, 2019년에도, 다시 파업에도 나서면서부터, 돌봄 노동을 제대로 인정하고, 보수를 인정하고, 성추행을 종식하고, 임금 불평등에 대해서도 행동으로 나서기를 촉구했다.

 

스위스 여성들은 평균적으로는 남성들보다 20% 정도 임금을 적게 받는다. 임금 격차에서 40%는 직종 차이 같은 요인들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1993, 422.

 

영국, 10대였던 흑인 스티븐 로런스는 엘단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가운데 인종주의들에게 공격 당해서는 사망했다. 런던 광역시 경찰은 살인자를 찾고자 충분한 자원을 투입하는 대신, 정의를 외치는 로렌스 가족 운동(캠페인)에 침투해서는 가족을 꾀하고는 신뢰를 해치고자 방법을 모색했다.


운동으로는 몇 년 간 지속하자, 정부는 할 수 없이, 경찰로부터 제도적인 인종주의를 인정했고, 2012, 살인자 2명을 기소했다.

 

199977.

 

노동자 100명이 지난 3주간 일한 급여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건설 노동자 300명이 센트럴런던의 한 건설현장에서 피케팅을 벌이며 현장을 폐쇄했다. 파업을 계기로 영국 노동자들은 동유럽과 서유럽 각국에서 온 동료 노동자들과 연대했고, 체불된 임금 또한 거의 전부 받아냈다.

 

2005810.

  

런던에서 게이트고메 분쟁이 시작됐다. 아시아계 여성 노동자가 대부분인 게이트고메는 브리티시항공으로부터 기내식 생산 외주를 받았다. 게이트고메는 임금을 삭감했고, 노동조건도 더 나빠졌다. 노동조건을 더 악화시킬 계획으로 회사는 임시 파견 노동자 수백 명을 채용해 정규직 업무를 맡겼다. 정규직 자리에서 일하는 파견 노동자들을 본 기존의 노동자들은 눈 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논의하고 항의하고자 구내 식당에 모였다. 게이트고메는 700여 명을 해고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브리티시항공의 수하물 처리 노동자들은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이례적인 연대 활동으로 살쾡이 동맹파업으로 들어가 48시간 동안 시트로 공항을 완전히 폐쇄했다. 하지만 상급 노동조합인 운송일반노동조합은 조합원들에게 작업 복귀를 지시했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피켓라인을 설치했지만, 운송일반노조 간부들이 경영진과 합의에 도달했다. 애당초 노동자들이 반대한 것보다도 악화된 노동조건으로 일부 노동자를 복직시킨다는 내용이었다. 많은 노동자가 이듬해 4월까지 계속 싸웠지만 노동조합은 이들 조합원의 행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고, 노동자들은 결국 패배했다.

 

200791.

 

영국 식민 당국이 현재 파키스탄 지역에 주둔한 인도 병사들에게 1930년대부터 화학무기를 실험해왔다는 사실이 <가디언>을 통해 폭로됐다. 영국 정부 산하 군사연구 단지인 포턴다운에서 온 과학자들이 진행한 실험에서 다수 병사들이 화상을 입었다. 겨자가스가 백인보다 남아시사인 피부에 더 큰 손상을 입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었다.

 

201184.

 

6명의 자녀를 둔 29세 흑인 마크 더건이 런던 수도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사건이 벌어진 당시 경찰의 직권남용을 수사한 독립 기구 경찰민원처리위원회(IPCC)는 더건이 경찰관에게 먼저 총을 쏘았고, 총알이 무전기에 맞아 경찰이 목숨을 건졌다고 주장했다. 이는 후에 거짓으로 밝혀졌다. 더건은 총을 쏘지 않았고, 해당 경찰관은 동료의 총에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찰민원처리위원회가 더건의 사망을 조사하는 책임을 맡았다. 경찰이 사람을 살해했다는 사실에 잉글랜드 전역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운동에 앞서 영국에서 일어나는 항의 시위였다.

 

2017, 68.

 

7일 간 파업, 2차례 점거를 포함해서, 10개월 동안 지속한 운동 끝에, 런던정경대학교(LSE) 미화원들은 외주 노동자 최초로 대학에서 다시 직접 고용 성과를 얻어냈다. 모든 유색인 이민자, 노동자들은 하나된세계목소리(UVW)라는 풀뿌리 노동조합으로부터 조직화했다. 노동조합은 런던 곳곳에서도, 지속적인 파업을 벌이고는 비슷한 처지, 하청 노동자들과 함께 많은 승리를 쟁취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