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패티 유미 코트렐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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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할하는 선이 없으면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보통의 기억력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아주 사소한 부분이 달라졌지만 그들은 전혀 다른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보르헤스의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가 대표적이다. 푸네스는 "보면서도 보지 않고, 들으면서도 듣지 않았고 그래서 모든 것, 거의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중략) 그에게 현재는 거의 견디기가 힘들 정도로 너무 풍요롭고, 너무 예민하게 변해 버렸다."(「기억의 천재 푸네스」, 『픽션들』183쪽) 그의 대단한 기억력에는 사고가 없다. "사고를 한다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며, 또한 일반화를 시키고 개념화를 시키는 것이다. 푸네스의 풍요로운 세계에는 단지 거의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세부적인 것들밖에 없었다."(같은 책 188쪽) 그는 결국 기억하는 순간을 기억하는 지경에 이르었고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기억 나무는 죽음에 도달해서야 끝이 난다. 인식의 분할선이 사라진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죽음은 그의 끔찍한 기억력에 내리는 구원의 순간처럼 보인다.

문학은 이 인식론의 정체에 의문을 던지는 행위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인식하는가. 그 인식이 배제한 외부는 무엇인가. 왜 인식되지 못한 존재가 있는가. 그러므로 어떻게 재인식해야 하는가. 랑시에르는 『문학의 정치』에서 이렇게 정리한다. "정치행위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며, 킁킁대는 동물로 취급되었던 사람을 말하는 존재로 만든다. 그런 까닭에 "문학의 정치"라는 표현은 문학이 시간들과 공간들, 말과 소음,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등의 구획 안에 문학으로서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랑시에르.『문학의 정치』 (인간사랑, 2009) 11쪽)

『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이하 『평온』)은 자살 유가족의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어 분할선에 침윤하는 문학의 정치가 가동된다. 뒤르켐이 『자살론』에서 밝히듯이 "각 사회는 그 국민을 자살로 이끄는 일정한 양의 에너지로 이루어진 집단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에밀 뒤르켐. 『자살론』 378쪽) 그러나 사회는 그 에너지만큼의 책임감을 보여주지 않는다. 자살 유가족에 대한 지원이나 언급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의 경우 지난 십 년 간 누적 자살자 수가 14만 1,233명이고 자살 시도자는 13만 2,401명이다. WHO에서 자살자 한 명당 5~10명의 유가족이 발생한다고 본다. 7명으로 계산하면 유가족의 수는 약 200만 명에 육박한다. 이런 상황에서 『평온』은 자살 유가족이라는 보지 못한 존재에게 인식의 일부를 내어준다.

『평온』의 서사는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동생의 자살 원인을 찾기 위한 사 일 동안의 누나의 조사. 한국에서 입양된 헬렌은 32살의 나이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입양된 양동생은 29살에 자살했는데 헬렌은 양동생의 죽음을 듣고 "입양아 남동생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야겠다는 마음"(13쪽)으로 양동생이 살았던 양부모의 집으로 간다. 장례식까지 남은 사 일 동안 헬렌은 동생의 자살 이유를 찾기 위해 동생과 함께했던 과거를 복기하고 동생의 방을 뒤져보며 이웃집을 방문하거나 부모님과 대화한다.

이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소설의 서술이다. 우선 나열식이다. 헬렌의 일인칭은 자신의 모든 감각을 열어놓는다. 냄새, 눈, 귀, 마음이 서로를 오가며 이어진다. 또한 매우 구체적이다. 과거의 기억은 물론, 상상마저도 가상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다. 꿈이나 누군가의 이야기라고 서술된 부분도 쉽게 지나치기 어렵다. 이 두 가지는 공명하며 과잉 서술로 합쳐진다.

이런 과잉 서술에 비해 그가 만나는 인물은 빈약하다. 그에게 처음으로 자살 소식을 알린 제프 숙부는 그가 양아버지에게 "그분이 진짜 제 숙부인가요?"(234쪽)라고 물을 정도로 엉성한 캐릭터다. 그런가 하면 "양어머니는 하얀 가운 차림으로 다가왔다. 창문에 비친 하얀 가운이 결국 유리창을 전부 차지했다. 흡사 유령 같았다!"(61쪽) 결정적으로 동생의 이름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동생의 이름의 부재는 애도의 공간인 묘지에서도 반복된다. 동생의 묘지에는 "표지판도 비석도 명판도 이름도 날짜도 아무것도 없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작은 흙더미"(245쪽)만 있었다. 동생의 자살 원인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밝혀내지 못하는 것처럼 동생을 감싸는 사물은 전부 흐릿하다.

동생의 자살 원인을 추적하는 헬렌은 자살 원인을 정신적, 신체적 이유 등이 아니라 철학적 이유라고 본다. 철학은 정확한 답의 도출이 아니다. 오히려 질문 도출에 가깝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문제점은 '내 동생이 왜 죽었나'라는 질문이 답으로 향하는 과정을 그리는 게 아니라 과연 그 질문이 정확한가 물어야 했고, 정확하다면 얼마나 정확한지의 여부로 뻗어나갔어야 한다는 데 있다. 헬렌은 질문에게 질문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상하게 강박적인 희망으로 치닫는다. 평온을 깨는 여러 힘의 종류(인종차별, 성차별, 신체, 정신적 차별)로 인한 상처에만 기반했기 때문이다. 윤리적으로는 옳을지 몰라도 미학적으로는 답습되었다.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위선적 인간들 가운데서 드러난 동생의 순수를 반딧불의 미광으로 담는다면 『평온』은 동생을 과잉 긍정해서 동생을 잊지 못하는 자신을 위로하려는 듯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헬렌의 이 말은 다소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내 동생의 죽음을 조사함으로써 내 삶에 다시 활기가 생길 수도 있고, 최종적으로 알아낸 사실들을 양부모에게 알리면 그들의 삶도 안정되고 강해질지 모른다."(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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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베첸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최정윤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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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산드로 바리코 <노베첸토>-배 위의 바다와 육지의 바다

노베첸토는 버지니아라는 거대한 배의 피아노 위에서 발견되어 배에서 자란다. 그는 배에서 한 번도 내리지 않고 피아노를 치며 평생을 산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스케이팅을 하듯 움직이며 피아노를 치거나 유명한 피아니스트와 피아노 대결을 하는데 너무 빠르게 연주해서 피아노 줄에 담배를 올려 태웠다는 것이 재미요소로 들어갔지만 이야기의 구성에도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고 그 파트가 어딘가에 쓸모없이 끼여있다는 분위기가 강했다. 이게 연극을 위한 글이고 영화로도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상적일 수는 있으나 필요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후반부에 노베첸토가 바다를 보기 위해 육지로 간다(그는 배에서 평생을 살았다. 바다는 얼마나 지겹게 봤을까.)고 했을 때의 시적인 순간이 기억난다. 그는 육지에서 오래 살아보고 바다의 외침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육지로 가지 않았고 버지니아호가 폭탄에 의해 해체되는 순간까지 거기서 나오지 않았다. 거기서 그는 "내가 걸어온 길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 이 이상한 여정을 표시하고 있는 욕망들을 하나씩 발견하게 될 거"(82쪽)라고 말했다. 그는 배를 벗어나지 않았지만 피아노 안에서 평생을 다양한 욕망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정말 얇고 빠르게 20분이면 읽기에 이동할 때 읽기 좋다. 나는 알바하면서 쉬는 시간마다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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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 고양이
모자쿠키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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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쿠키. <잔소리 고양이>-가볍고 귀여운

만화의 운동성을 느낄 때 가장 큰 부분은 바로 화면비와 컷이다. 거의 대부분의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물론 대사가 있는 시나리오지만 그만큼 촬영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콘티다. 따라서 동일한 비율이 두 번 반복 되는 네 컷 만화는 참 특별하다. 물론 트위터에서 출발한 만화이기에 이미지를 네 장 밖에 올릴 수 없는 한계가 네 컷 만화라는 형식으로 제작되었을테다. 아무튼 네 컷 만화는 프렉탈 구조와 같이 전체와 부분에서 같은 화면의 구성이 주는 정갈함과 안정성이 있다.

모자쿠키 작가는 네 컷 만화 형식을 적절히 활용한다. 또 그 오래된 형식을 이용해서 153쪽에 걸쳐서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고 트위터에서 약 26만명의 팔로워를 보유할 수 있는 이유가 분명 있다. 그것은 잔소리 하는 고양이가 해주는 잔소리가 '맞아맞아 ㅋㅋㅋ'하면서 끄덕이게 될 정도로 가볍고 그렇게 잔소리를 하는 표정은 참 다양해게 귀여워 다음 장이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작가의 트위터에 원본이 있는데 한국어역과 비교해봐도 아쉽지 않다. 일본어의 산들거림과 세로쓰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폰트도 특유일 날림과 둥글둥글함을 한국어에 맞는 방식으로 써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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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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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는 한길사 대학생 서포터즈 자격으로 증정받은 책입니다

 

운동은 인간 존재를 몸이라는 격자로 밀어 넣는다. 이때 인간은 신체의 유한성을 격렬하게 느끼며 움직이기에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기 가장 적절한 지표며 실제로 선명한 신호를 보낸다. 이러한 이유가 건강이나 육체미보다 운동을 매일 하게 하는 동기 부여가 된다. 그렇게 달리기를 격일로 한 지 3달 째고 3주 전에는 달리기 쉬는 날에 턱걸이 하면서 매일 신체의 다른 부위를 자극, 휴식하는 리듬이 자리 잡았다. 그런데 어느 날 기록의 한계에 도달했다. 달리기는 점점 빨라지지만 턱걸이는 아직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래서 발돋움으로 뛰어올라 천천히 내려오는 네거티브 풀업(negative pull-up)을 했는데 무척 지루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글링하니 풀업 밴드라는 장비가 있었다. 고무 밴드로서 철봉에 매달고 몸을 밴드 위에 올려 그 탄성으로 턱걸이를 보조하는 기구다. 이렇게 하니 6개까지 가능했다. 턱걸이한다는 환상을 주기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고이 접어 넣게 해준 감사한 도구다.

 

책도 운동처럼 사고라는 틀로 묶는다. 문장을 읽고 해석하여 의미를 종합하는 과정이 책 읽기에 들어있다. 책을 읽는 순간은 자신의 사고 역량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렌트라는 책은 다소 험난하다. 마치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턱걸이를 갑자기 한다고 10개씩 할 수 없는 것처럼 아렌트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리처드 번스타인의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는 풀업 밴드처럼 아렌트를 읽는 고된 길을 편안하게 보조한다. 이는 어려운 아렌트 읽기를 도와준다는 은유이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길을 걸으며 읽기 좋은 책이기도 하다. 158g의 원서만큼은 아니지만 한국어 역본도 353g으로 나쁘지 않다. B6 사이즈에 196쪽을 담아서 휴가나 나들이, 산책과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한 손에 잡힌다. 양장 표지는 그만큼 무거워진 무게가 아쉽지 않게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고 가름끈도 반갑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기 전에 사물이며 돈으로 교환되는 재화이기에 편집과 디자인도 중요하다.

 

찰랑거린다는 형용사가 어울리는 이 책의 정교하고 세련된 디자인만큼이나 저자인 리처드 번스타인은 아렌트를 계획적으로 담아낸다. 그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범주화할 수 있다. 먼저 적시성이다. 책의 원제는 왜 지금 아렌트를 읽는가 Why Read Hannah Arendt Now인데 방점은 '지금Now'에 있다. 한길사는 '지금'을 생략하고 대신 '난민, 악의 평범성, 혁명정신'으로 '지금'을 풀어서 표지에 기재했다. 현재 일어나는 국제적 문제, 철학적 난제와 실천이 아렌트의 사유와 얼마나 깊이 연동하며 지금 필요한 아렌트는 무엇인지 인용과 내용 정리를 통해 소개한다.

 

특히 난민 문제와 관련해 아렌트 자신이 독일을 탈출한 이후 미국 시민이 될 때까지 공식적으로 18년간 무국적 상태”(20)의 난민이었다. 독일을 탈출해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파리에 도착하지만 수용소에 갇혔다가 겨우 나온다. 이후 미국으로 가는 비자를 마련하고 포르트갈로 가서 뉴욕행 배를 타는 일도 운이 좋게 성공한다. 이 경험은 그에게 난민 문제를 평생에 걸쳐 사유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통해 난민의 대량 발생을 현대 정치의 가장 문제적인 징후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 최초의 주요 정치사상가 중 한 명이다.”(35)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독재, 참주제와 같은 체제보다 사회, 경제적 문제가 발생하면 언제나 등장할 수 있는 운동에 가깝게 묘사한다. “그 어떤 체제도 인간을 인간이 아닌 어떤 사물로 변형하려고 했던 적이 없”(59)었는데 전체주의는 인간의 자발성과 개성, 인간 본질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프리모 레비는 죽음을 마주해도 죽음을 생각하기 너무 피곤해서 공포조차 느끼지 못하는 아우슈비츠의 사람들을 단 하나의 생각의 자취도 보이지 않는 인간”(56)으로 이미지화한다.

 

두 번째 범주는 객관성이다. 아렌트의 입장 중에서 모순되거나 비판된(혹은 될) 지점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드러냄으로서 번스타인이 소개하는 아렌트는 오히려 견고해진다. 아렌트가 인간을 조건을 출판하며 지식인으로 명성을 얻을 때쯤, 미국 연방대법원이 공립학교에서 흑백 분리 교육에 위헌 결정을 내렸고 남부의 많은 주는 이에 반발한다. 주지사가 방위군을 투입해 등교를 막았지만 14세의 흑인 엘리자베스 엑포드는 당당하게 리틀록 센트럴고등학교로 향했고 이 모습은 전 세계에 보도된다.

 

아렌트는 이 사건 관련 글을 청탁받아 제출하는데 놀랍게도 통합 교육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 글의 핵심은 "정부는 사회적 차별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합법적으로 취할 수 없다."(80)는 것이다. 번스타인은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적대적인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차별의 재앙적 귀결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81)면서 수 쪽에 걸쳐 아렌트를 강하게 비판한다. 다행히도 아렌트는 당시에 그를 비판하던 입장을 인정하며 이 입장을 번복한다. 흑인 작가인 랄프 엘리슨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적은 편지를 보낸다.

 

번스타인은 현재에도 반복되는 이 글을 향한 비판을 아렌트 스스로 방어케 한다. 예를 들어 아렌트는 1967년에서야 인종 간 금혼법 위헌 판결을 내린 대법원보다 먼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권리는 인권이라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인종주의와 관련된 아렌트의 저술을 인용하며 인종주의에 저항하는 아렌트를 재확인시켜준다. 이러한 논쟁 속으로 아렌트를 끌어들이며 번스타인은 그를 입체적이고 현실적이며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도와준다.

 

세 번째 범주는 핵심성이다. 번스타인은 아렌트의 생애를 미련하게 나열하지도 않고 사상적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무리하게 개념을 주조해 안 그래도 어려운 아렌트를 더 어려운 설명으로 덮어버리는 실수도 하지 않는다. 또 유행에 편입하기 위해 현실 정치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하지도 않는다. 번스타인은 월터 아이작슨 같은 전기 작가도 아니고 이 책은 학술지에 투고하는 논문도 아니다. 물론 신문에 투고되는 칼럼도 아니다. 그러니 이 세 가지의 여집합 속에서 그는 요약에 집중한다. 그리고 요약하기 자체가 어떻게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는지 증명한다. 아렌트의 주요 저작인 전체주의의 기원,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인간의 조건, 혁명론, 공화국의 위기, 과거와 미래 사이, 정치의 약속을 요약된 상태로, 한 줄이라도 읽어보는 게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장점은 동시에 강한 의문이자 약점으로 뒤바뀐다. 이 책이 2018618일 미국에서 출판되어 같은 해 1019일 한국에 소개될 때까지 단 4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말은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난민 문제가, 악과 폭력의 문제가, 혁명정신의 문제가 시급하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환경과 핵 문제는 언급되지 않는가. 이는 김홍중이 2016년에 이미 던진 질문이다. "핵시대의 인간, ... 태어나지도, 낳지도, 그리고 죽지도 못하는 존재, 그것을 우리는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 이 물음을 아렌트는 왜 던지지 않았을까?"(김홍중.사회학적 파상력(문학동네, 2016) 33)

 

또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은 사회적 문제, 즉 빈곤의 질곡에 압도되어버려, 결국 폭력과 공포로 이어졌"(149)기에 자유를 논의하는 진짜 정치를 실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반란'에 그쳤으며, 미국 혁명이야 말로 "해방과 자유를 모두 포함"(149)하는 '혁명'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유럽인이 소위 인디언으로 부르던 북미 원주민에게 가한 무차별적 살인과 강탈, 강제 이주, 20세기까지 실질적으로 가동된 노예제와 인종차별이라는 폭력이야 말로 먹고 살기 위해 아니, 더 잘 살고 싶은 욕망의 문제에 압도된 테러이자 폭력이 아닌가. 이에 대해 번스타인은 나름 꾸준히 유지했던 객관성을 잃고 만다. "미국의 식민지에도 비록 가난과 노예제도가 분명히 존재하기는 했지만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숨겨졌다. 그것은 프랑스의 극단적인 상황과는 비교될 수 없었다. 절대군주제에서 고통받았고 또 진정한 자치정부를 실천해본 경험이 없는 프랑스와 달리 미국의 식민지들은 메이플라워 협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자치정부의 오랜 전통을 경험했다."(150)

 

대중을 위한 인문 서적이라는 점에서 번스타인이 여기서 감당하는 무게는 조각낸 아렌트의 일부며 아렌트가 이미 질문하고 답한 문제에 그친다. 그러므로 아렌트가 하지 않은 질문을 하는 일, 아렌트가 건너뛴 문제에 천착하는 일은 이 책을 덮고 난 후에 시작된다.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그 이유는 그를 상찬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가 보지 못한 새로운 장을 열고 그를 관통하는 질문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0만 년의 반감기를 가진 핵폐기물의 현재성이 먹어 치운 10만 년의 미래와 반란으로 취급되는 프랑스 혁명의 의미를 따져야 한다. 그러니까 모든 이는 언젠가 풀업 밴드를 버리고 맨몸으로 턱걸이를 하는 순간을 맞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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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 묵상법
김기현 지음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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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어라'.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난 김기현 목사님의 생애도 그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진경 교수님의 책 『삶을 위한 철학 수업』(문학동네, 2013) 130쪽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건축가가 바우하우스의 총장이었던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를 사사했습니다. 나중에 그가 건축가로 활약하며 회상하기를, 미스는 그를 기억하지도 못했지만, 그는 미스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긴장하며 좋은 건축가가 되기 위해 공부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김 목사님은 미스 반 데어 로에 같은 분입니다.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같이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실 때,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시거나 카톡을 할 때면 성경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시지 않았는데 어쩐지 성경을 읽지 않은 제가 생각나 괜히 성경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 묵상법』을 김기현 목사님의 소위 말하는 인생작이라고 표현한다면 그건 『죄와 벌』이나 『논어』와 같은 희대의 역작이어서가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목사님의 인생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책이 김기현 목사님이 얼마나 성경을 사랑하는지 증언하는 책이자 그 사랑을 참지 못해 터져 나오는 고백록처럼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간절함이 읽힙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라'는 말을 300쪽에 걸쳐서 풀어놓아도 부족한 느낌입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무엇을 고백하고 있을까요? 먼저 성경을 왜 묵상해야 하는지 동기를 부여하고(1부 묵상의 기초) 어떻게 묵상하는지 난이도(초, 중급자)별로 상황(목회자, 직장인)별로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2부 묵상의 방법) 이에 그치지 않고 묵상을 적용, 기도, 나눔, 예배로 확장하고 지속하는 실천적 방법을 제시하며,(3부 묵상의 실천) 마지막으로 끝까지 우직하게 묵상을 놓지 않기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와 응원의 말을 남깁니다.(4부 묵상의 문제) 완독을 추천해 드리지만 필요에 따라 자신이 묵상을 왜 해야겠는지 모르겠다면 1부를, 묵상을 하고 싶지만 그 방법을 모른다면 2부를, 묵상을 하지만 실천이 어렵다면 3부를, 4부는 묵상을 하다가 지친 상황에서 읽으면 좋을 듯합니다.


예를 들어 저한테는 묵상의 이유를 찾을 1부가 필요했습니다. 직장인은 아니지만 바빠서 읽지 못한다고 생각해 또 부모님에게 권하고 싶어 2부의 직장인을 위한 한 줄 묵상을 읽어봤습니다. 교회에서라도 묵상 나눔을 잘해보려고 3부의 나눔을 집중해서 봤습니다. 4부는 묵상이 힘들어질 때 다시 읽으려고 개략적으로만 읽었습니다.


그중 1부에 등장하는 문장 "신앙의 선배들은 성경을 줄줄 외웠습니다"(21쪽)가 기억에 남습니다. 최근에 읽은 책 때문인데요.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안티쿠스, 2008)에서 이마미치는 신곡을 읽기 전에 먼저 서양문화의 원류로서 호메로스를 집고 넘어갑니다. 그러면서 그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각각 1만 5693행, 1만 2110행이나 되는데 문자로 기록되기 전에는 분명히 음유시인이 다 외워서 읊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게 도대체 가능한가 싶은데 이어진 장에 그는 키릴 열도 인근에 거주하는 아이누 민족의 서사시 유카라를 기록한 긴다이치 교스케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긴다이치는 녹음기 없이 낭송자의 말을 필사합니다. 그렇게 한 명에게서 받아 적고 다른 부락으로 가서 또 다른 낭송자의 말도 받아적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필사본을 비교해 보니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긴다이치는 이것은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거기다 노예를 해방하고 빚 문서를 불태우는 실천까지 했으니 초기 한국 교회에 일어난 일은 이런 기적이 폭격처럼 쏟아지던 때가 아니었을까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이유는 성경을 줄줄 외던 것에서 시작합니다. 성경을 번역해 자녀에게 가르쳤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했던 시기에 루터는 번역본 성경을 내놓습니다. 루터 또한 "달달 외울 정도로 반복해 읽었습니다." "도저히 성경을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루터는 성경에 쓰인 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19쪽) 도대체 성경에 뭐가 있기에 저렇게 목숨 걸고 외우고 읽었는지 궁금하다면 직접 경험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서 '묵상 이전'에서 '묵상 이후'로 넘어가고 싶은 분들에게 『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 묵상법』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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