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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 21세기 페미니즘에 대한 7가지 질문
강남순 지음 / 한길사 / 2020년 2월
평점 :
대부분의 토론이 허무해 보이는 이유는 치열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치열하지 않은가. 토론이 아니라 곡해와 억지로 들어차기 때문이다. 왜 토론이 발생하지 않고 엉뚱한 비난이 오가는가. 단어와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토론하기 때문이다. 공동이 합의한 개념이 부재하거나 각기 다른 정의로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 토론의 방향은 상실되고 따라서 토론에서 승리하려면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는 게 효율적이다. 그게 자신의 지지자를 결속시키는 더 좋은 방법이다. 나름의 전략적 선택이다. 그렇게 점점 토론은 내용의 질보다 발언의 강도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런 토론은 지겹다. 건물을 짓는데 재료도 없이 사람을 고용해놓은 꼴이다. 답답하다. 어떤 대화이건 상대방과 맥락을 공유하고 개념어를 정의하고 시작해야 대화가 옆으로 새지 않는다.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는 페미니즘으로 대화를 시작하기 전 공통 기반을 확립할 때 필요한 책이다. 무엇보다 소통의 생산성을 방해하는 개념의 오해를 최소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제목처럼 페미니즘 앞에서, 페미니즘을 내뱉기 전에, 관련된 질문을 가볍게 훑으며 그 내용을 맛보는 책이다.
편집부에서도 이 점을 고려해 챕터마다 Key Ideas Box를 마련해 속성으로 개념을 복기할 수 있게 했다. 그래도 안심하지 못했는지 각 챕터는 이미 짧은 편이다. 대부분 다섯 장을 넘지 않으며 가장 긴 챕터가 15장 정도 된다. 달리 말하면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많은 것이다. 게임을 하다가도 세이브 포인트가 나타나면 게임을 종료했다가 다시 시작해도 그 부분에서 시작할 수 있듯이 책을 읽다가 언제 덮어도 다시 읽기 시작할 수 있는 지점이 수북하다. 짧은 챕터만큼이나 스트레이트한 단문으로 한 번 더 진입장벽을 낮췄다.
강남순이 사용하는 설명의 도입부는 대체로 개념과 이론의 최초 출처로부터 현재적 의미를 갖추게 된 경위다. 약간은 어원학적인 설명도 곁들여져 있다. 예를 들면 1837년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샤를 푸리에와 어원으로서 라틴어 fémina를 언급하면서 이때의 페미니즘은 "생물학적인 여성의 자질을 지칭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요즘 사람들이 사용하는 페미니즘처럼 정치적 입장을 담은 개념이 아니었다."(61쪽)는 사실을 밝힌다. 이후 페미니즘이 여러 정치적 입장으로 분화하면서 의미의 복합체가 되었고 페미니즘'들'을 설명한다.
여기에 근거를 확립하는 방법은 주로 출처를 각주로 처리해 구체적인 사실 아래에서 토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인데 그 각주 중 몇몇은 책도 있지만 인터넷 기사 링크도 있다. 그런데 과연 링크를 검색해볼 독자가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차라리 인터넷 기사는 미주로 넣고 기사 일부를 직접 인용해 주석으로 처리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나한테 Key Ideas Box, 어원으로 시작하는 설명, 예시의 출처 처리 등은 과도한 친절로 보였다. 2006년 출간된 (사)한국여성연구소의 『새 여성학 강의』(동녘)마저 "요즘은 여성학에 대한 독자들과 학생들의 이해가 깊어졌기 때문에 기초적인 설명은 과감히 줄이고 깊이 있는 논의와 내용을 담고자 했다"(7쪽)는데 2020년에 나온 이 책이 기본적인 이해를 필요로 하는 독자를 상정한 것은 시대적 흐름을 신속히 파악했는지 의문케 한다.
따라서 책의 문장도 도전적이거나 문학적이기 보다 건조하고 안전한 편이다. 심지어 비슷한 문장이 조금 바뀌어 복제되는 경우도 있다. 문장의 반복은 독자를 지겹게 만드는 동시에 저자의 성실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 예문은 다음과 같다. 135쪽의 "많은 여자를 만나는 '남자 바람둥이'를 의미하는 영어는 '우머나이저'womanizer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개념에 상응하는 '여자 바람둥이'라는 '매나이저'manizer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은 남성중심적 성과 권력이 사회에 오랫동안 깊숙이 자리 잡아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문장은 219쪽에서 이렇게 반복된다. "많은 여성과 관계를 가지는 남자, 즉 우머나이저womanizer는 결국 남성의 권력과 특권의 상징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영어 표현에 '우머나이저'에 상응하는 '매나이저'manizer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에서 여성이 남성과 같은 의미의 권력과 특권을 가지고 불특정 다수의 남성과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가지는 경우는 없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 책이 오롯이 설명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 자신의 주장도 있다. "모든 페미니즘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 지향점을 드러내는 담론이며 실천"(270쪽)으로서 코즈모폴리턴 페미니즘이 대표적이다. 코즈모폴리턴 페미니즘은 "국적, 젠더, 인종, 종교, 성적 지향, 장애 등의 경계를 넘어서는 권리 확장과 연대를 강조"(267쪽)한다.
이 주장의 신선도보다 내가 눈여겨본 것은 번역어에 대한 설명 누락이다. 강남순은 왜 여성주의가 아니라 페미니즘으로 음역했는지 왜 미소지니가 아니라 여성혐오로 번역해 사용하는지 설명하던 저자였다. 강남순은 "페미니즘을 '여성주의'라고 번역하지 않고 페미니즘으로 음역한다. '여성주의'라고 번역할 경우 '여성중심주의'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나 페미니즘과 달리 미소지니를 번역하지 않고 음역할 경우, 득보다는 실이 많다고 본다."(140쪽) 그러므로 미소지니는 페미니즘과 달리 생소하고 생소한 만큼 설명이 덧붙여져야 하는데 그러면 오해가 잦아지고 무관심은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친절이 코즈모폴리터니즘에서는 발휘되지 않는다. 왜 세계시민주의가 아니라 코즈모폴리터니즘으로 음역해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아 의문이다. 책에서는 "코스모스의 시민 또는 세계 시민으로 번역되는 이 개념은 후에 여러 철학자들에 의해 코즈모폴리턴 사상으로 발전한다고"(268쪽) 스치듯 언급될 뿐이다.
그렇다면 개념을 충분히 예리하게 설명했는가. 코즈모폴리턴 페미니즘은 160쪽에 26가지의 페미니즘 이론과 함게 소개된다. 그 중 국제international/global 페미니즘이 있다. 그렇다면 코스모폴리턴 페미니즘과 국제 페미니즘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설명해줘야 할 텐데 이 부분 역시 생략되었다. 되려 "코즈모폴리터니즘과 보편주의universalism를 혼돈해서는 안 된다"(269쪽)며 보편주의와 비교한다. 보편주의가 인간의 추상적 관념에서 출발하는 한편 "코즈모폴리터니즘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가적 경계를 넘어선 연대, 환대, 권리의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같은 쪽)라는 비교는 코즈모폴리터니즘을 비슷한 것과의 차이로 개념을 날카롭게 설명하는 정확한 서술이 아니라 반대 개념을 이용해 이미 있는 차이를 반복 설명하는 소극성을 띤다. 물론 각주로 자신의 저서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종교: 21세기 영구적 평화를 찾아서』(새물결플러스, 2015)를 달았지만, 책 제목 뿐이니 부대적인 정보다. 역시 인용을 각주처리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이 책을 사람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페미니즘 관련 유튜브 영상 수십 개를 합쳐도 이 책 한 권을 대체하지 못한다. 다만 도서로 분야를 옮기면 소위 입문서가 생각보다 많다. 나는 아직도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2013)을 읽었을 때의 충격과 아름다움을 잊지 못한다. 박소현, 오빛나리, 홍혜은, 이서영이 쓴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에서는 기대치 못한 이론의 확립과 함께 페미니즘의 사적인 이야기가 어떻게 공적 담론으로 이어지는 그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책의 경쟁력은 최신의 맥락과 역동적 현장을 전달하는 신속성보다는 요약과 정리, 편집에 달려있다. 따라서 이 책의 가장 훌륭한 점은 Key Ideas Box다. 굳이 문장에 줄을 치고 포스트잇을 붙이지 않아도 지하철과 버스에서 짧게 나눠 읽어도, 혹은 거의 읽지 않고 훑어보더라도 Key Ideas Box만 보면 된다. 이 점이 이 책의 좌표를 알려준다. 이 책은 논쟁을 촉발하는 벼락 같은 책이 아니라 그 번개를 차분히 정리하고 명확하게 모아주는 피뢰침 같은 책이다. 다시, 피뢰침은 벼락을 더 열심히 맞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