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패티 유미 코트렐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분할하는 선이 없으면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보통의 기억력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아주 사소한 부분이 달라졌지만 그들은 전혀 다른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보르헤스의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가 대표적이다. 푸네스는 "보면서도 보지 않고, 들으면서도 듣지 않았고 그래서 모든 것, 거의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중략) 그에게 현재는 거의 견디기가 힘들 정도로 너무 풍요롭고, 너무 예민하게 변해 버렸다."(「기억의 천재 푸네스」, 『픽션들』183쪽) 그의 대단한 기억력에는 사고가 없다. "사고를 한다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며, 또한 일반화를 시키고 개념화를 시키는 것이다. 푸네스의 풍요로운 세계에는 단지 거의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세부적인 것들밖에 없었다."(같은 책 188쪽) 그는 결국 기억하는 순간을 기억하는 지경에 이르었고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기억 나무는 죽음에 도달해서야 끝이 난다. 인식의 분할선이 사라진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죽음은 그의 끔찍한 기억력에 내리는 구원의 순간처럼 보인다.

문학은 이 인식론의 정체에 의문을 던지는 행위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인식하는가. 그 인식이 배제한 외부는 무엇인가. 왜 인식되지 못한 존재가 있는가. 그러므로 어떻게 재인식해야 하는가. 랑시에르는 『문학의 정치』에서 이렇게 정리한다. "정치행위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며, 킁킁대는 동물로 취급되었던 사람을 말하는 존재로 만든다. 그런 까닭에 "문학의 정치"라는 표현은 문학이 시간들과 공간들, 말과 소음,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등의 구획 안에 문학으로서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랑시에르.『문학의 정치』 (인간사랑, 2009) 11쪽)

『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이하 『평온』)은 자살 유가족의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어 분할선에 침윤하는 문학의 정치가 가동된다. 뒤르켐이 『자살론』에서 밝히듯이 "각 사회는 그 국민을 자살로 이끄는 일정한 양의 에너지로 이루어진 집단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에밀 뒤르켐. 『자살론』 378쪽) 그러나 사회는 그 에너지만큼의 책임감을 보여주지 않는다. 자살 유가족에 대한 지원이나 언급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의 경우 지난 십 년 간 누적 자살자 수가 14만 1,233명이고 자살 시도자는 13만 2,401명이다. WHO에서 자살자 한 명당 5~10명의 유가족이 발생한다고 본다. 7명으로 계산하면 유가족의 수는 약 200만 명에 육박한다. 이런 상황에서 『평온』은 자살 유가족이라는 보지 못한 존재에게 인식의 일부를 내어준다.

『평온』의 서사는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동생의 자살 원인을 찾기 위한 사 일 동안의 누나의 조사. 한국에서 입양된 헬렌은 32살의 나이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입양된 양동생은 29살에 자살했는데 헬렌은 양동생의 죽음을 듣고 "입양아 남동생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야겠다는 마음"(13쪽)으로 양동생이 살았던 양부모의 집으로 간다. 장례식까지 남은 사 일 동안 헬렌은 동생의 자살 이유를 찾기 위해 동생과 함께했던 과거를 복기하고 동생의 방을 뒤져보며 이웃집을 방문하거나 부모님과 대화한다.

이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소설의 서술이다. 우선 나열식이다. 헬렌의 일인칭은 자신의 모든 감각을 열어놓는다. 냄새, 눈, 귀, 마음이 서로를 오가며 이어진다. 또한 매우 구체적이다. 과거의 기억은 물론, 상상마저도 가상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다. 꿈이나 누군가의 이야기라고 서술된 부분도 쉽게 지나치기 어렵다. 이 두 가지는 공명하며 과잉 서술로 합쳐진다.

이런 과잉 서술에 비해 그가 만나는 인물은 빈약하다. 그에게 처음으로 자살 소식을 알린 제프 숙부는 그가 양아버지에게 "그분이 진짜 제 숙부인가요?"(234쪽)라고 물을 정도로 엉성한 캐릭터다. 그런가 하면 "양어머니는 하얀 가운 차림으로 다가왔다. 창문에 비친 하얀 가운이 결국 유리창을 전부 차지했다. 흡사 유령 같았다!"(61쪽) 결정적으로 동생의 이름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동생의 이름의 부재는 애도의 공간인 묘지에서도 반복된다. 동생의 묘지에는 "표지판도 비석도 명판도 이름도 날짜도 아무것도 없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작은 흙더미"(245쪽)만 있었다. 동생의 자살 원인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밝혀내지 못하는 것처럼 동생을 감싸는 사물은 전부 흐릿하다.

동생의 자살 원인을 추적하는 헬렌은 자살 원인을 정신적, 신체적 이유 등이 아니라 철학적 이유라고 본다. 철학은 정확한 답의 도출이 아니다. 오히려 질문 도출에 가깝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문제점은 '내 동생이 왜 죽었나'라는 질문이 답으로 향하는 과정을 그리는 게 아니라 과연 그 질문이 정확한가 물어야 했고, 정확하다면 얼마나 정확한지의 여부로 뻗어나갔어야 한다는 데 있다. 헬렌은 질문에게 질문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상하게 강박적인 희망으로 치닫는다. 평온을 깨는 여러 힘의 종류(인종차별, 성차별, 신체, 정신적 차별)로 인한 상처에만 기반했기 때문이다. 윤리적으로는 옳을지 몰라도 미학적으로는 답습되었다.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위선적 인간들 가운데서 드러난 동생의 순수를 반딧불의 미광으로 담는다면 『평온』은 동생을 과잉 긍정해서 동생을 잊지 못하는 자신을 위로하려는 듯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헬렌의 이 말은 다소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내 동생의 죽음을 조사함으로써 내 삶에 다시 활기가 생길 수도 있고, 최종적으로 알아낸 사실들을 양부모에게 알리면 그들의 삶도 안정되고 강해질지 모른다."(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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