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정 - 흔들리지 않고 고요히 나를 지키다
정민 지음 / 김영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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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책을 오랜만에 읽는다. <미치면 미친다>(푸른역사, 2004)에서 보여줬던 자신의 장기를 살려 이번에는 짧은 구절을 주제로 해설과 이야기를 덧붙인 책을 내놓았다. 큰 주제는 4가지다. 1)마음의 소식 2)공부의 자세 3)세간의 시비 4)성쇠와 흥망. 각각의 주제에 맞춰서 사자를 25개 넣고 아래 글을 붙인 형태다. 정민이야 워낙 다작을 해서 책이 언제 나와도 이상하지 않아 반갑다는 느낌은 거의 없다.(그만큼 열심히 쓴다는 말이다.)

천 년이 넘은 문장을 읽을 일은 잘 없는 편인데 오랜만에 읽으니 이렇게 문장에 미쳐서 읽고 쓴 사람들이 있다는 게 반가웠다. 대부분의 글이 형식에 맞추어 글자 수를 엄격히 지킨 상태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번역보다는 원문을 읽는 게 무엇보다 좋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정민의 번역과 해설에 의존해야 하는데 나는 그의 문장이 적절히 고전적이되 충분히 이해할만한 현대적 문장이라고 본다.

이 책은 최대 3페이지가 넘지 않는 짧은 글이 100개 모인 책이기에 글의 흐름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어디를 펼쳐 읽어도 상관없다. 자신이 마음에 들거나 새겨둘 몇 문장만 기록해 놓아도 충분하다. 언젠가 손봉호 교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은 책을 읽다가 좋은 문장이나 생각이 나타나면 즉시 책을 덮는다고 하셨다. 그 정도면 책에서 기대하는 바를 이루었다고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깊이 공감했다. 특히 이 책의 특성상 독후기를 적기보다 몇 가지 질문과 대답으로 정리해본다.

1. 누가 읽으면 좋을까?

정민의 글을 읽는 독자층은 적어도 30대 이상 남성일 가능성이 크다. 타게팅 역시 그런 독자층으로 설정했겠지만 문장은 크게 어렵지 않고 원문 역시 평이하다. 관심이 있는 누구나 읽어볼 수 있다. 워낙 방대한 인용으로 이루어져 한자에 관심이 있다면 괜찮은 문장 몇 개를 건질 수 있을 것이다.

2. 언제 읽으면 좋을까?

책의 구성이 짧은 글을 묶은 것이기에 집중력이 많이는 필요 없다. 지하철, 버스 등 이동 시간이나 잠시 시간이 나는 언제든 읽을 수 있다. 한문이 많지만 각 잡고 읽을 책은 아니다. 다소 독서에 열심히 필요한 경우 각종 연필과 펜, 포스트잇을 구비하는 편인데 이 책은 주로 자기 전에 침대에서 읽었다. 휴대폰 대신 책을 읽는 습관을 가지기 좋았다.

3. 왜 읽으면 좋을까?

100편의 글이 실려있지만 마구잡이는 아니다. 제목인 습정習靜은 고요함을 익히다는 뜻이다. 왜 고요함을 익혀야 할까? 정민은 이덕무(1741~1793)의 <원한原閒>에서 "넓은 거리 큰길 속에서도 한가로움이 있다. 마음이 진실로 한가롭다면 어찌 굳이 강호나 산림을 찾겠는가?"(13쪽)라는 문장을 인용하며 마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전제를 깔아둔다. 이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습정習靜에서 중요한 것은 정靜이 아니라 습習이다.

어떻게 마음의 고요를 익힐 것인가. 이덕무는 같은 책에서 "나는 홀로 책을 읽으며 편안하다"(13쪽)고 했으며, 강석규(1628~1696)의 <차류만춘기시운次柳萬春寄示韻>에는 "늙도록 공부 힘써 무릎 닿아 책상 뚫고 몇 번의 더위 추위 지났는지 모르겠"(41쪽)다며 무릎에 수십 년간 닳아 구멍 난 책상과 샐 수 없는 시간으로 자신의 고요를 증명한다. 그런가 하면 당나라 원진(779~831)은 비파가 너무 좋아 쓴 <비파가琵琶歌>에서 비파 연주가 "한 연주 막 끝나고 또 한차례 연주하니 고요한 밤 구슬주렴 바람에 쟁글쟁글"(43쪽)하다고 말한다.

무릎에 구멍 뚫린 책상을 가질 정도로 책을 읽거나, 연주가 끝나자마자 또 연주할 만큼 비파를 좋아하거나 중요한 것은 반복적 수행이다. 그리고 그 수행 속에서 기울이는 마음의 질문이다. 고요란 그저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과정 중 하나이다. 즉 습習해야 정靜할 수 있다. 아니, 습習이 곧 정靜이다.

4. 기억에 남는 문장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어서 적는다. 하나는 천주교 교리를 한문으로 풀이한 판토하 신부의 문장이고 다른 하나는 추사 김정희와 다산의 아들 유산 정학연의 대련 글씨 이야기다. 적절한 인용과 번역, 해석이 아름답다.

"<칠극(七克)>은 예수회 신부 판토하(Didace De Pantoja·1571~1618)가 1614년 북경에서 출판한 책이다. 한문으로 천주교 교리를 쉽게 설명했다. 다산 정약용을 비롯해 조선의 많은 지식인이 이 책을 통해 천주교인이 되었다. 서양의 여러 현자의 일화를 적고, '논어' 같은 유가 경전도 인용하다가 성경 말씀 한 단락을 슬쩍 끼워 넣는다.

"쇠를 시험하려면 붉게 달궈진 화로에 넣고, 사람을 시험하려면 칭찬하는 말속에 넣는다. 가짜 쇠는 불에 들어가면 연기를 따라 흩어지지만, 진짜 쇠는 불에 들어가면 단련할 수록 정금이 된다." 이 말은 성경 '잠언' 27장 21절의 '도가니에서 금이나 은을 제련하듯, 칭찬해 보아야 사람됨을 안다'고 한 말을 한문투로 풀어 썼다. 예화가 신선하고 설명이 알기 쉬워 심신 수양서로 알고 읽다 보면 그 안에서 어느새 신앙이 싹터 있곤 했다." (147쪽, 소구적신消舊積新)

"추사의 대련 글씨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옆에 쓴 글씨의 사연이 재미있다. "유산(酉山) 대형이 시에 너무 빠진지라, 이것으로 경계한다." 유산은 다산의 맏아들 정학연(丁學淵)이다. 아버지가 강진으로 유배간 뒤, 그는 벼슬의 희망을 꺾었다. 다산은 폐족(廢族)이 된 것에 절망하는 아들에게 학문에 더욱 힘쓸 것을 주문했지만, 그는 학문보다 시문에 더 마음을 쏟았다.

추사는 그와 막역한 벗이었다. 추사가 정학연에게 써준 시구는 이렇다. "구절을 얻더라도 내뱉지 말고, 시 지어도 함부로 전하지 말게(得句忍不吐, 將詩莫浪傳)." 마음에 꼭 맞는 득의의 구절을 얻었더라도, 꾹 참고 배 속에만 간직하고, 흡족한 시를 지었다 해도 세상에 함부로 전하지 말라는 얘기다. 정색한 얘기라면 들은 상대가 대단히 불쾌했을 테지만, 글씨도 내용도 장난기가 다분하다. 샘솟듯 마르지 않는 정학연의 시재(詩才)를 따라갈 수 없어 샘이 나서 이렇게 썼지 싶다. 농담처럼 건네는 말 속에 은근히 뼈도 있다.

누구의 시인가 궁금해 찾아보니, 소동파와 두보의 시에서 한 구절씩 잘라내서 잇댄 것이었다. 소동파는 "시구 얻고 차마 토하지 않음은, 옛것 좋아 내 뜻이 빠져서라네(得句忍不吐, 好古意所耽)"라 했고, 두보는 "술을 보면 서로 생각나겠지마는, 시 지어도 함부로 전하지 말게(見酒須相憶, 將詩莫浪傳)"라고 했다. 두 시에서 한 구절씩을 따와 나란히 잇대어 붙이니, 전혀 다른 느낌의 한 짝이 되었다.(98쪽, 득구불토得句不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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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번역의 역사
래리 스톤 지음, 홍병룡 옮김 / 포이에마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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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성경과 그리스 비극을 모른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리스 비극의 경우 천천히 <소포크레스 비극 전집>을 완독하고 임철규의 해설서를 붙잡고 있다. 이제는 성경 쪽이 약한 것 같아서 성경을 읽어보려다가 조금 옆으로 새어 나가 성경 번역사를 읽어보고자 <성경 번역의 역사>를 집었다. 나는 정보량이 많은 책을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주로 읽는 글의 형식이 극단적이다. 주석이 많은 논문과 고전이거나 반대로 여백이 많은(그러나 독서에 동원해야 되는 정보가 논문보다 훨씬 풍성한) 시집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사이에서 다소 애매한 위치에 있다. 물론 이 책 단독의 결점이라기 보다 '가볍게 수많은'을 추구하는 입문서의 특징이다.

<성경 번역의 역사>라고 번역된 책의 원제는 <성경책 이야기 The Story of the Bible>다. 10개의 조각난 챕터 안에 수천 년의 번역사를 풀어놓다 보니 싱거운 책이 돼버렸다. 하고픈 이야기는 많은데 체계적이지 않다. 조금만 더 솔직해지자면 내용보다는 양장본의 고급진 만듦새와 각종 성경 사진으로 승부하는 책이다. 책에 딸려온 여러 사본의 실물 크기 자료는 왜 이 가격(25,000원)이 책정되었는지 말해준다. 오래 소장하면서 두고두고 성경 번역의 역사를 꼼꼼히 읽으려고 했는데 개괄하는 책이어서 당황했다.

그러나 이는 나의 독서 목적이 달라서 생긴 문제다. 저자는 나름 최대한 열심히 독자를 책에 묶어두려고 노력한다. 중립적인 서술에서 벗어난 경우도 종종 있지만, 객관적인 서술 위주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성경에 관한 가장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바로 원본이 없다는 것이다. 소위 근본도 없는(!) 책이 바로 성경이었다. 그러나 성경이 수 천 년 넘게 생존한 이유는 바로 그 근본 없음 때문이다.

로마 황제와 총독들이 다스리던 중동에서 초기 기독교는 믿으면 죽는 종교였다. 로마는 종교에 관용적이었다. "정복한 지역의 신들을 로마의 만신전에 합병시키곤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중략) 일차적인 충성심을 로마 황제에게 바치지 않았"(78쪽)다. 따라서 이 불온하기 그지없는 성경은 색출되면 파괴되던 책이었다.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면서 믿음을 고수하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적 가르침의 내용만 생각했지 그 텍스트의 어구상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58쪽) 당장 급한 건 책을 살리는 일이었다. 사본은 사본으로 전승되었다. 근본 없음의 다른 이름은 유연함이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쓰인 구약은 유대인이 히브리어보다 그리스어, 아람어, 시리아어를 더 많이 쓰면서 번역되기 시작한다. 구약 번역판 중 가장 중요한 것은 BC 3세기에 시작돼 2세기에 걸쳐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 역이다. 1947년 히브리어로 적힌 사해 사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구약 사본 중 가장 중요했고 지금도 그 권위가 인정되어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2300년째 70인 역을 사용한다.

70인 역 다음으로 중요한 사본은 5세기 초, 성경 전체를 라틴어로 옮긴 벌게이트 사본이다. 382년 교황 다마수스는 그의 비서이자 언어학자인 제롬에게 이 일을 맡겼다. 제롬은 70인 역을 참조하되 히브리어 원문에서 번역했다. 벌게이트 사본이 만들어진 이유는 성경이 여러 언어와 형태로 유포되던 4세기경 여러 번 필사가 이루어지면서 변형된 번역과 문체, 질을 통합하기 위해서다. 벌게이트가 만들어진 이유를 보면 성경 사본이 얼마나 많았는지 말해준다. 그런가 하면 125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존 라일랜즈 파피루스는 요한복음 18장의 몇 절을 담고 있는데, 이 사본의 존재는 복음서가 집필된 소아시아에서 멀리 떨어진 이집트에서도 신약이 읽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성경은 꽤 인기가 많았다.

이처럼 성경은 적극적으로 번역되고 복사되고 유포되는 책이었다. 다소 과도한 상상일 수 있지만 95개조 반박문을 쓴 루터가 출교당한 후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지 않았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싶다. "비텐베르크에 있던 한 인쇄소는 불과 50년 만에 루터의 번역판을 거의 10만 부나 인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중략) 루터의 성경 번역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곧 성경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스웨덴어, 아이슬란드어, 헝가리어, 보헤미아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그리고 근대 그리스어 등으로 번역되었다."(135쪽)

독일의 가장 평범한 사람들 손에 성경이 쥐어지고 프로테스탄트가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자 가톨릭은 앞서 언급한 라틴어 번역의 벌게이트를 원본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해 프로트스탄트는 가톨릭의 많은 번역본이 라틴어 벌게이트를 원문으로 옮긴 것이지만 자신의 번역본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에서 옮긴 것이라 원문에 더 가깝다고 반박한다. 이 주장과 반박은 각각의 입장을 말해준다. 가톨릭은 궁극적으로 성서에 권위를 부여하는 주체인 교회를 높인 셈이고 프로테스탄트는 반대로 교회에 권위를 부여하는 성서에 우위에 두었다. 프로테스탄트는 오직 성서만이 믿음의 근거였다.

이제 이 책을 덮고 다시 성경을 본다. 조그마한 감정의 흔들림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부지런하게 가지런해지는 모습이 아직도 어색하다. 아마 성경 내용만큼이나 책으로서 성경의 번역사도 경이로울 것이다. 다만 이 책이 그 경이를 세련되게 전달하지 못했다. 저자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번역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걸 전혀 엉뚱한 곳에서 알게 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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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창비시선 439
이영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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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재.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창비, 2020)

1.     시를 쓰는 기계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책세상, 1993)에서 시인은 시를 쓰지 못하며 단지 시를 받아쓰는 손을 반대쪽 손으로 잡아 멈추는 소극적 행동밖에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시인은 오직 "쓰기를 멈추는 힘"(24)밖에 없다. 왜 그런가. 시인은 일상 언어의 사용자이기 때문이다. 일상어는 소통을 전제로 탄생한 의견 표명의 욕구다. 그 언어는 세계와 연결되기 원한다. 따라서 시는 시인에게 와서 시인의 일상어를 약탈하고 시의 말을 받아쓰기 원한다. 시작(詩作) "말과 나를 연결하는 끈을 끊어버리는 것이다"(25) 이렇게 시인은 시를 쓰며 비인칭적으로 죽는다.

블랑쇼는 이를 뒤돌아보는 오르페우스의 시선으로 은유한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찾으러 하데스의 세계로 내려갔다가 함께 돌아오면서 잠시 뒤돌아볼 때 에우리디케는 사라진다. 신화는 여기서 기록을 멈췄지만 블랑쇼는 오르페우스가 사라진 에우리디케 향해 다시 내려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시 뒤돌아보고 그림자만 남긴 에우리디케를 구하러 내려가는 오르페우스의 반복된 지옥 여행은 "휴식이며 침묵이며 종말인 평온한 세계의 죽음이 아니라, 또 다른 죽음, 끝이 없는 죽음, 종말의 부재라는 시련으로서의 죽음이다."(237) 에우리디케는 시인에게 오는 시의 기원 곧 영감이며, 오르페우스의 뒤돌아보는 시선은 미규정된 시를 규정하려는 금기 배반의 참을 수 없는 몸짓이다. 오르페우스는 시의 매혹으로 인해 영원한 죽음 속에서 영원히 태어난다.

이 죽음은 다른 감각을 열어젖힌다. 진은영이 "-암중모색/더듬거리기 위해 눈감기" (Modification,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사, 2008))라고 썼을 때 그 눈감기는 죽음의 한 형식이다. 더듬거린다는 감각을 발견하고 선언하기 위한 고의적 실명이다. 신체 수정(modification)이다.(modification에 관해서 더 쓰고 싶지만, 스피노자를 공부해야 발전시킬 수 있는 지점이다) 진은영은 이전에 더 잘 듣기 위해 귀를 자르는 고흐의 감각을 상상해 봤다. "왼쪽 귓속에서 온 세상의 개들이 짖었기 때문에/동생 테오가 물어뜯기며 비명을 질렀기 때문에/나는 귀를 잘라버렸다 (중략) 한 개의 귀만 남았을 때/들을 수 있었다/밤하늘에 얼마나 별이 빛나고/사이프러스 나무 위로 색깔들이 얼마나 메아리치는지"(「고흐」,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

2.     기대를 대체하는 기분

이영재는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에 이 모순을 머금어 썼다. 정확히는 시인은 어떻게 사라지면서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노래한다. 이는 시집을 여는 첫 세 시편에 연달아 나타난다. 1부 상쇄의 첫 번째 시 「흰검정」에서 "평소였던 자리에서 불에 덴 것 같은 샤먼과 볼을 맞댄" 후 새롭게 변화한 감각이 "흰검정"의 역설을 인식했다는 고백으로 시작해, "나의 안에 A a가 자라기 시작한다는 사실을"(「내가 알던 A의 기쁨」) 깨달으며, 「코끼리」에서 나는 "코끼리의 한계"로 진입한다. 코끼리가 된 나는 "쥐의 꼬리를 친구 삼고" 코끼리 역시 그의 "아비와 어미를 나의 어미와 아비로" 삼는데, 다른 코끼리 무리에서 밀려난 이 기이한 코끼리는 "나의 품으로 들어와/갈대로 이루어진 꼬리를 다정한 작위로 흔"들어 "나의 확신을 작위해는 듯" 한 감각을 경험한다.

이처럼 이영재는 시인을 수동성과 무기력으로 무장시킨다. 그리하여 기대하지 않는다. 오직 기분만 있을 뿐이다. 「슬럼」은 세계에서 유기된 화자를 "무결한 사람"으로 지칭하며 세계가 번져 나가는 화자의 사라짐을 "구출할 수 없다"고 본다. 그리하여 화자는 자신의 존재함을 세계로부터 인정받기보다 스스로 존재감()을 무한히 느낄 수 있는 "구덩이를 파고" 들어간다 "슬럼프 안에 담겨 있으면 포근하다" "보이는 걸 보고 있다 (중략) 그 사람을 구태여 하지 않는다/보다가/본다 (중략) 시간이 불타는 걸 보고 있다" 이처럼 철저한 피동과 서로를 비추는 거울 사이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선택한 화자는 무결한 포로다. "포로들은 멈춘 버스에서 단잠 중이다/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이 무기력은 그러나 전능감의 원천이다. 무기력한 전능은 불능과 다르다. '능동-'에 따라붙은 '수동-시인' "나의 일부는 내가 아니"(「임상연구센터」)라서 "저기 서 있는 여자는 나"(「카무플라주」)라고 말하는 기계가 된다. 이영재는 이 어찌할 수 없음의 자유로움을 「상태」에서 자세히 풀어 "견디지 않는 중의 상태를 견디는 중의 상태"로 기록한다. 그러나 속박된 형태로 제시되는 전능감에도 화자는 풀려나고 싶은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어찌하고 싶지 않다"는 강박으로 이동한다. 이제 시는 시인 위에 완전히 올라탔다. 때문에 화자는 "어찌하지 않기로 했다". 이 어찌할 수 없음은 발전하여 "어쩌겠나 싶어 (중략) 어찌하지 말자고"의 체념으로 결국 "어찌할 수 없고"의 단념으로 확장된다. "저 새는 비둘기가 아니다" "저 새는 비둘기다"가 상쇄되어 모순이 지워지던 내면은 "외야에 앉아 있다/외야에 앉아 있지 않다"가 옳은 문법으로 기능하는 내면으로 폐쇄된다. 그리고 "외야에 앉아 있다/외야에 앉아 있다"(「사실들」)는 연쇄로 최종 안착한다.

3.     반성을 반성하기

종종 이 수동-시인은 무의식적으로 저항한다. 로컬 푸드에 구역질해대는 여행자와 같이, 임상연구에서 신약을 투여받는 신체와 같이 의도치 않은 반응을 일으킨다. 「검열」은 자신의 존재를 잃지 않으려는 반작용을 타조에 투과해 묘사한다.

타조는 타조과의 새로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요건이 충족돼 있으며 날 필요를 잃어버린 요건이 충족돼 있다 타조는 충분한 노동자로서 먹기 위해 일하며 자기 위해 일하며 싸기 위해

생각하고,

생각된 생각을 생각하는 과정이다 타조는

과정의 일부가 충분히 교육되었기에 스스로의 타조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규정된 범주 안에서 타조를 의심하고 인식된 타조를 검열하고 있는

타조다 타조의 안쪽에는 타조가 의식화돼 있고 무의식적으로도

타조를 잃지 않는다

-            「검열」 부분

타조가 의심과 자기 검열을 거치는 이유는 먹고 자고 싸는 육신과 교육받은 생각이 종합된 지극히 일상의 신체이기 때문이다. 그 신체는 썩어 죽는다. 그 신체는 미분화된 언어의 시보다 규정과 분할을 담당하는 일기를 쓴다. "오늘과 하루, 쪼개진 하루를 문장 단위로 쪼개 (중략) 반성한다." 그 반성으로 "타조는 타조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물컹한 신체를 지속 가능한 구체적 조건은 단순한 검열이 아니라 혹독한 마음가짐을 필요로 한다. "타조를 보고도 모르는 척"하고 그래도 "괜찮다"고 하는 자위며, 타자를 섭취해 "왕성한 식욕을 통과"해야 한다. 특히 이 시편은 "상태는 정상입니다"는 문장으로 마무리되는데, 「검열」에 전혀 쓰이지 않았던 '~습니다' 체를 사용해 반성과 검열을 완벽히 수행하는 '능동'에 대한 긴장과 공포를 표현한다.

시인의 윤리는 왜 긴장과 공포로 촉발되는가. 이 두 감정은 이영재가 「흰검정」에서 플래시 포워드로 제시한 샤먼 혹은 시와의 뜨거운 만남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은 죽고 일기 쓰고 타인을 지나칠 만하게 만들어 바쁘게 먹어 치운다. 그건 신체의 원리다. 이 신체는 '무의식적'인 작용, 반작용의 논리에 충실할 뿐이다. '무의식'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런데도 왜 이영재는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 알기 위해"(「지나가면서」) 노력하는가. 무엇이 그에게 시 쓰는 자로 바뀌어야 할 강한 의무를 덧씌웠는가. 왜 그는 「검열」에서 나를 구성, 유지, 발전시키는 반성을 반성하는가. 그리하여 "내 반성의 거리는 왜 늘, 겨우 산책의 거리뿐인지" 생각하게 되는가. 그것은 앞선 문장의 끝에 등장하는 "2014,". '2014'에 붙은 이 쉼표(,)는 「검열」의 타조가 흔쾌히 "모르는 척"하고 지 나가버린 곳을 표시하는 기호이자, 결국 자신도 지나쳐 버린 연약한 범퍼다. 그래서 「지나가면서」에서 "나는 내게서 너무도 잘 지나가는 것 같아 못내 괴로워졌"다고 말한다. 괴로움의 내용은 무지다. 화자는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모르겠" "최소한의 최소한 우리는 서로에게 반성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역시 모르겠다." "혹시라도 지날 수 없는 것마저, 지나야 하지 않는 것마저 지나가고 있는 건 아닐지" 조차 모른다.

그러므로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 알기 위해, 처음으로 본다." '처음으로 본다'는 말은 '처음 본다'가 아니라 '처음'의 시선을 장착해 내 눈이 아닌 처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다. '역사학 이전의 신학', '시작 이전의 시작함', '과거 이전의 기원', 정확하게는 '시인 이전의 시'의 시선 말이다. 그리고 그 처음'으로' 보는 시선은 오르페우스의 그것일 테다. 아니고서야 "저 카페는 이제 커피를 볶지 않고 저 분식집의 젊은 여자는 이제 젊지 않다"는 문장이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 알기 위해, 처음으로 본다"는 문장 앞뒤에 동일하게 반복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볼 수 없는 것을 반복해서 보는 고통 속에서 영원히 죽어가겠다는 시의 수동적 혁명을 받아들인다.

「잔여」는 이 혁명이 사랑으로 끝남을 예언한다. "피동으로 엮인 관절들이 사랑으로 가능해질 관계라는 걸 의심할 수 없다" "교육받은 반성이 반성을," 반성하지 못하고 "......., ......., ........,"으로 침묵한다. 대신 "물음을 꾸역꾸역 삼킨다." 그리고 나의 일상적 신체가 두르던 세계 내에 함께 하는 기쁨과 소통 언어를 벗겨내고 시인으로 탄생한다. 시인은 "우리 밖의 형상이어서 불이익이 나를 쓰다듬는 걸 견디지 않고 내버려 둔다." 그 잔여 속에 도달한 그는 제일 먼저 "반성으로 이루어진 인간을 본 적 없다"는 부인의 제스쳐를 취한다.

「잔여」로 '3, 상대성'이 끝나고 ' 4, 투명에서는 시의 두꺼운 언어를 껴입는다. 반성을 반성하는 태도로 외부의 외부에 다다르려 한다. (외부로의 완벽한 도착은 불가능하다. 언급했듯이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뒤돌아볼 뿐 절대 직접 보지는 못한다.) 외부에서는 "흰색에 흰색을 더한 흰색"을 알아보고 그 흰 "벽은 나를 피하지도 가하지도 않는다 벽은 해소되지 않는 채로도 여전히, 흰 벽으로 제자리다"(「흰 벽」)는 신의 인식도 맛 본다. 또 기준에 기준을 세워 "고양이는 고양이와/구분된다"는 사실을 알고 "고양이를 구분하는 방식으로/숲과 숲을, 마당과 마당을/구분할 수 없다"(「마당을 쓴다」)는 것도 안다. "연약하게 저항하는 투명한 물을 숨"(「잔잔한 붕어 낚시」)쉬며 "당해낼 재간이 없는 설득을", 그 시의 폭력과도 같은 설득을 "당신은 (중략)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투명에 투명을 덧대며」) 묻는다.

이런 질문을 던질 정도로 일정한 경지에 올랐나 싶은데 "무릎과 허리가, 허리가 목이, 목과 슬픔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자각한다 굉장하다"(「어쩌면 조금은 굉장한 슬픔」)고 감탄을 표한다. 그래서 다시 "예측될 날카로움과 두려움에 관하여, 파편화될 감정에 관하여 의미를 피하지 않는다"(「깨지기 직전의 유리컵」)는 다짐을 곱씹는다. 그래서 왠지 시인은 시를 받아쓰고 또 멈추고 다시 받아쓰고 다시 멈추는 기계적 순환을 지속할 듯하다.

잠깐 잤다

내가 여기에 있었다 지금은

돌 위에 누운 사람

돌과 온도가 같은 사람 새가 지저귀는 사람 빛이 부서지는 사람 시냇물이 흐르는 사람 산이 완만해지는 사람

바람을

해버리자는 다짐도 하다가

다람을 여기에 두고 가버린 쥐는 헐벗었을 것만 같다 매우 더운 날이다

다람을 주워 입고 도토리를 깐다 다름없다

옅어지는 새끼 노루를 에둘러, 지금이 저기로 가는 중이다

잠깐의 다짐을

까다가

깬다

-            「노루잠」 전문

시집의 마지막에 수록된 시편 「노루잠」은 지금과 여기에 있는 를 두고 홀로 저기로 가는 지금의 대비를 통해 폐쇄회로가 된 나의 충만을 말한다. 그 충만은 다람을 내버린 쥐처럼 일부 벗겨지고 깨지고 그리고 동시에 충만하다. 닫히고 열린, 흰검정, 무력하고 전능한, 무결한 포로로서 는 돌이나 새가 된다. 빛과 시냇물이 된다. “산이 완만해지는 사람이라는 없는 문법이 되어간다. 되어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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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수수께끼 - 개정판 마빈 해리스 문화인류학 3부작 1
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 한길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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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혹은 문화 번역

마빈 해리스『문화의 수수께끼』(한길사, 2018)를 읽고

 

<기생충>에서 이선균이 맡은 동익과 조여정이 분한 연교의 아들 다송은 지하실에서 올라온 귀신을 본다. 그러나 그 귀신은 귀신이 아니라 근세다. 왜 다송은 근세를 귀신으로 볼 수밖에 없었나. 다송은 한 번도 근세와 같은 존재를 마주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폭풍우에도 텐트를 치고 여행자처럼 잘 수 있는 다송의 세계 내에서 근세는 파악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이 모순을 전유하기 위한 방안으로 귀신이 동원된다. 이때 <기생충>은 다송의 상상을 푸닥거리하는 내용에 불과하다. 다송의 생일에 일어난 여러 겹의 살인(의 동기들) 역시 이름 없는 귀신의 존재처럼 불문(그 사건은 묻지 마 살인으로 정의된다)에 부쳐지고 새로운 가족이 매끔하게 들어찬다.

이토록 쉽게 무지가 신비나 경악으로 해소되는 영역이 바로 문화다. 그러나 "아주 기이해 보이는 신앙이나 관행도 면밀히 검토해보면 평범하고 진부하며 '통속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상황, 욕구, 활동 등에 근거를 두고 있다."(31) 마빈 해리스는 모든 문화 양식을 사회적 활동과 물질세계로 환원해서 최대한 객관과 과학의 근사치에 다다른 인류학을 제시한다. 그는 "꿈꾸는 자들이 자기들의 꿈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33)는 한계를 가정하며 의지를 북돋는다.

『소, 돼지, 전쟁, 그리고 마녀: 문화의 수수께끼』라는 원제에 따라 그가 선택한 첫 번째 주제는 인도의 암소 숭배다. 굶주려 죽어가는 와중에도 암소를 죽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먼저 암소가 모든 생산을 가능케 하는 일종의 공장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수소를 낳는 암소는 늙고 병든 수소를 대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수소가 별안간 병들면 가난한 농부는 자기 농토까지 잃게 될 위험에 처"(42)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기적 몬순이 찾아오지 않아 겪는 가뭄과 굶주림마다 소를 잡아먹으면(혹은 팔면) 당장의 고통에서 벗어날지라도 비가 온 후 토지를 경작할 어떤 생산 체제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소 도살 금기는 순간을 만족시킬 욕구와 장기적 관점 중에서 후자를 택한 결과다. 결국 암소 숭배는 "복잡하고 정교한 물질과 문화의 질서에서 적극적인 능력을 개발해, 낭비나 나태가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는 저 에너지 생태계"를 완성하는 핵심으로 밝혀진다. "서구 '전문가'"(49)들이 소를 살리기 위해 굶어 죽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육을 사치품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자들의 감각을 증명한다.

이후 등장하는 돼지숭배와 돼지 혐오, 화물 숭배, 전쟁, 포틀래치와 마녀사냥, 전투적 예수가 평화의 화신으로 희석된 이유 등을 설명하면서 마빈 해리스는 물질에 근거를 둔 자신의 입장과 태도를 견고하게 다진다. 1975년 발간되고 1982년 한국에서 번역되었기에 현대 인류학과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또 학술서가 아니라 대중을 위해 쉽게 풀어 쓴 일종의 인문서이기에) 문화를 이해하고 논하는 데 있어 과학적 접근법을 채택한 것에 작은 의미를 두는 데 그쳐야 하는 게 아쉽다. 다만 그의 유물론적 관점은 책 전체에 걸쳐 꾸준히 신비주의와 정신 운운하는 자들을 비판하기 위한 일종의 무기처럼 쓰인다. 마지막 장 전체를 의식 혁명과 자연스러운 삶을 주장하는 반문화와 제3의 의식을 비판하며 끝내는 것은 그런 관점에서 당연한 결론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문장을 기록한다. "반문화 관점에 선 인류학에서 원시인들의 의식은 빛과 힘을 갖고 있으나 전기료를 지불해본 적이 없는 무당들의 의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315)

<옥자><설국열차>는 물론이고 <기생충>에서도 모스 부호를 받아 번역하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봉준호는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번역사로 만든다. 그는 폭력의 원인을 소통 부재로 인식한다. 동익과 다송은 상호 소통 가능한 무전기로 서로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한편 근세의 모스 부호는 고장 난 전등이고 근세는 귀신에 불과하다. 귀신은 소통 능력이 부재한 자에게 등장한다. 봉준호가 계급 차와 폭력을 이러한 영화적 상징으로 해결하려 하듯이 카프카는 「변신」이나 「굴」을 통해 동물의 감각을 호흡해보고 싶었다. 마빈 해리스도 그들과 같은 맥락에 있다. 비물질과 마법으로 가득 찬 식민주의와 계몽주의의 폭력을 환기하고 당대성과 역사성을 끌어와 수수께끼를 타파함으로써 문화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p.s

이 책을 읽고 생각난 책이 있다. 케네스 E. 베일리의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 고대 중동의 삶, 역사, 문화를 통해 본 복음서』 (새물결플러스, 2016). 베일리는 자신이 중동에 40년 이상 거주하면서 중동의 맥락으로 예수를 읽어낸다. 1장 예수 탄생만 읽어봤지만 상당한 내공과 연구 자료 인용이 인상적이었다. 여기서 그는 예수가 태어난 마굿간을 집어본다. 베일리는 예수가 태어난 마구간은 방이 없어서 머물 수밖에 없었던 누추하고 더러운 곳이 아니라 당시 중동의 집 구조 상 집의 내부에 있으며 가장 깨끗하고 좋은 공간이다. 따라서 예수는 집주인의 호의와 초청 속에 축복과 함께 탄생했다. 『문화의 수수께끼』를 읽고 예수가 궁금해진다면 또 다량의 학술적 근거를 확보하고 싶다면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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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기와 거주하기 - 도시를 위한 윤리
리차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임동근 해제 / 김영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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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도시를 물리적 장소인 빌ville과 정신적 장소인 cite로 구분하여 도시 건설의 역사와 의미를 사례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도시사회학적 방법론을 통해 도시 계획가들의 사상과 실제 도시의 구현, 그리고 도시 건설 윤리까지 뻗어나간다. 설명을 위해 필요한 모든 자료를 수집한 듯, 소설과 철학, 자신의 경험과 사진, 도시 비평가의 의견과 건축가의 사상적 기초, 현대적 스마트 도시와 수백 년에 걸쳐 완성된 도시까지 망라하며 제러드 다이아몬드나 유발 하라리의 책과 견줄만한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다.

저자: 리처드 세넷은 줄리아드 첼리스트로 음악대학을 졸업했지만 손목굴증후군으로 꿈을 포기했다. 이후 학계에 들어가 아렌트의 제자를 자처하며 사회학, 역사, 철학을 공부해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크게 도시와 노동을 중심으로 책을 저술해 왔으며 이 분야에 있어서 세계적 석학 혹은 장인이라 불릴 만한 학술적 위치를 보유했다.

내용: 총 4부로 구분된 이 책은 빌과 시테로 도시를 구분하여 그 둘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도시 계획가들이 의도한 물리적 도시가 실제로 작동하는 도시는 달랐다. 오스만은 파리의 바리케이드를 부수기 위해, 세르다의 바르셀로나는 평등을 위해 옴스테드의 센트럴파크는 사교성을 위해 건축되었지만 성공과 실패, 예상과 예외는 뒤섞였다. 그 이유는 군중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도시 윤리는 두 큰 학자의 입장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제인 제이콥스는 신의 관점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마스터 플랜이 아니라 점진적 성장과 거리의 사교로 발전하는 일종의 아나키적 도시 디자인을 주장했다. 루이스 멈퍼드는 제이콥스의 주장이 나이브하며 대형 개발업자와 건설회사를 상대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본다. 또한 거리의 폭력과 범죄를 통제마저도 주민의 자발적 시선 권력에 전가하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게 멈퍼드의 주장이다.

세넷은 제이콥스와 멈퍼드의 입장 소개로 1부를 마무리 지으며 도시 윤리의 실제 작동 방식에 관심을 옮긴다. 2부는 도시의 거주민을 예로 도시 거주의 곤혹을 젠트리피케이션, 계급, 향수의 보존과 기술 발전, 난민과 이웃 등을 주제로 풀어낸다. 3부에서는 이 어려움을 타파할 개선 방안으로 도시의 개방을 주장하는데 스마트 도시를 시작으로 도시가 어떤 형태로 열려있는지 예를 들며 연대의 가능성을 가늠해본다. 마지막 4부는 현재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이슈인 환경오염과 도시의 관계를 진단하며 도시의 윤리적 책임감과 미래를 정리한다.

느낀 점: 칸트, 레비나스, 아렌트, 하이데거, 발터 벤야민의 사상부터 사적 경험까지, 파리의 아케이드부터 한국의 송도까지 부드럽게 이어지는 흐름에 감탄했다. 500여 쪽에 이르는 책이 지루하지 않을뿐더러 놀랍게 자세한 자료와 예시는 책이 아니라 세공품을 보는 듯했다. 도시를 짓는 건축가의 입장과 거주자의 입장을 교차 서술하며 도시사회학의 입문서 혹은 큰 그림 그리기에 적합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여전히 중요한 저술가로 남아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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