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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ㅣ 창비시선 439
이영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평점 :
이영재.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창비, 2020)
1.
시를
쓰는 기계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책세상, 1993)에서 시인은 시를 쓰지
못하며 단지 시를 받아쓰는 손을 반대쪽 손으로 잡아 멈추는 소극적 행동밖에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시인은 오직 "쓰기를 멈추는 힘"(24쪽)밖에 없다. 왜 그런가. 시인은
일상 언어의 사용자이기 때문이다. 일상어는 소통을 전제로 탄생한 의견 표명의 욕구다. 그 언어는 세계와 연결되기 원한다. 따라서 시는 시인에게 와서 시인의
일상어를 약탈하고 시의 말을 받아쓰기 원한다. 시작(詩作)은 "말과 나를 연결하는 끈을 끊어버리는 것이다"(25쪽) 이렇게 시인은 시를 쓰며 비인칭적으로 죽는다.
블랑쇼는
이를 뒤돌아보는 오르페우스의 시선으로 은유한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찾으러 하데스의 세계로 내려갔다가
함께 돌아오면서 잠시 뒤돌아볼 때 에우리디케는 사라진다. 신화는 여기서 기록을 멈췄지만 블랑쇼는 오르페우스가
사라진 에우리디케 향해 다시 내려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시 뒤돌아보고 그림자만 남긴 에우리디케를
구하러 내려가는 오르페우스의 반복된 지옥 여행은 "휴식이며 침묵이며 종말인 평온한 세계의 죽음이
아니라, 또 다른 죽음, 끝이 없는 죽음, 종말의 부재라는 시련으로서의 죽음이다."(237쪽) 에우리디케는 시인에게 오는 시의 기원 곧 영감이며, 오르페우스의
뒤돌아보는 시선은 미규정된 시를 규정하려는 금기 배반의 참을 수 없는 몸짓이다. 오르페우스는 시의 매혹으로
인해 영원한 죽음 속에서 영원히 태어난다.
이
죽음은 다른 감각을 열어젖힌다. 진은영이 "시-암중모색/더듬거리기 위해 눈감기"
(「Modification」,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사, 2008))라고 썼을 때 그 눈감기는 죽음의
한 형식이다. 더듬거린다는 감각을 발견하고 선언하기 위한 고의적 실명이다. 신체 수정(modification)이다.(modification에 관해서 더 쓰고 싶지만, 스피노자를 공부해야
발전시킬 수 있는 지점이다) 진은영은 이전에 더 잘 듣기 위해 귀를 자르는 고흐의 감각을 상상해 봤다. "왼쪽 귓속에서 온 세상의 개들이 짖었기 때문에/동생 테오가
물어뜯기며 비명을 질렀기 때문에/나는 귀를 잘라버렸다 (중략) 한 개의 귀만 남았을 때/들을 수 있었다/밤하늘에 얼마나 별이 빛나고/사이프러스 나무 위로 색깔들이 얼마나
메아리치는지"(「고흐」,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
2.
기대를
대체하는 기분
이영재는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에 이 모순을 머금어 썼다. 정확히는 시인은 어떻게 사라지면서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노래한다. 이는 시집을 여는 첫 세 시편에 연달아 나타난다. 제1부 상쇄의 첫 번째 시 「흰검정」에서 "평소였던 자리에서 불에 덴 것 같은 샤먼과 볼을 맞댄" 후
새롭게 변화한 감각이 "흰검정"의 역설을
인식했다는 고백으로 시작해, "나의 안에 A의 a가 자라기 시작한다는 사실을"(「내가 알던 A의 기쁨」) 깨달으며, 「코끼리」에서
나는 "코끼리의 한계"로 진입한다. 코끼리가 된 나는 "쥐의 꼬리를 친구 삼고" 코끼리 역시 그의 "아비와 어미를 나의 어미와
아비로" 삼는데, 다른 코끼리 무리에서 밀려난 이
기이한 코끼리는 "나의 품으로 들어와/갈대로 이루어진
꼬리를 다정한 작위로 흔"들어 "나의 확신을
작위해는 듯" 한 감각을 경험한다.
이처럼
이영재는 시인을 수동성과 무기력으로 무장시킨다. 그리하여 기대하지 않는다. 오직 기분만 있을 뿐이다. 「슬럼」은 세계에서 유기된 화자를 "무결한 사람"으로 지칭하며 세계가 번져 나가는
화자의 사라짐을 "구출할 수 없다"고 본다. 그리하여 화자는 자신의 존재함을 세계로부터 인정받기보다 스스로 존재감(각)을 무한히 느낄 수 있는 "구덩이를 파고" 들어간다 "슬럼프 안에 담겨 있으면 포근하다" "보이는 걸 보고 있다 (중략) 그 사람을 구태여 하지 않는다/보다가/본다 (중략) 시간이 불타는
걸 보고 있다" 이처럼 철저한 피동과 서로를 비추는 거울 사이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선택한
화자는 무결한 포로다. "포로들은 멈춘 버스에서 단잠 중이다/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이
무기력은 그러나 전능감의 원천이다. 무기력한 전능은 불능과 다르다.
'능동-시'에 따라붙은 '수동-시인'은 "나의 일부는 내가 아니"(「임상연구센터」)라서 "저기 서 있는 여자는 나"(「카무플라주」)라고 말하는 기계가 된다. 이영재는 이 어찌할 수 없음의 자유로움을 「상태」에서 자세히 풀어
"견디지 않는 중의 상태를 견디는 중의 상태"로 기록한다. 그러나 속박된 형태로 제시되는 전능감에도 화자는 풀려나고 싶은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어찌하고 싶지 않다"는 강박으로 이동한다. 이제 시는 시인 위에 완전히 올라탔다. 때문에 화자는 "어찌하지 않기로 했다". 이 어찌할 수 없음은 발전하여 "어쩌겠나 싶어 (중략) 어찌하지 말자고"의
체념으로 결국 "어찌할 수 없고"의 단념으로
확장된다. "저 새는 비둘기가 아니다"와 "저 새는 비둘기다"가 상쇄되어 모순이 지워지던
내면은 "외야에 앉아 있다/외야에 앉아 있지 않다"가 옳은 문법으로 기능하는 내면으로 폐쇄된다. 그리고 "외야에 앉아 있다/외야에 앉아 있다"(「사실들」)는 연쇄로 최종 안착한다.
3.
반성을
반성하기
종종
이 수동-시인은 무의식적으로 저항한다. 로컬 푸드에 구역질해대는
여행자와 같이, 임상연구에서 신약을 투여받는 신체와 같이 의도치 않은 반응을 일으킨다. 「검열」은 자신의 존재를 잃지 않으려는 반작용을 타조에 투과해 묘사한다.
타조는
타조과의 새로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요건이 충족돼 있으며 날 필요를 잃어버린 요건이 충족돼 있다 타조는 충분한 노동자로서 먹기 위해 일하며 자기
위해 일하며 싸기 위해
생각하고,
생각된
생각을 생각하는 과정이다 타조는
과정의
일부가 충분히 교육되었기에 스스로의 타조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규정된 범주 안에서 타조를 의심하고 인식된 타조를 검열하고 있는
타조다
타조의 안쪽에는 타조가 의식화돼 있고 무의식적으로도
타조를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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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
부분
타조가
의심과 자기 검열을 거치는 이유는 먹고 자고 싸는 육신과 교육받은 생각이 종합된 지극히 일상의 신체이기 때문이다.
그 신체는 썩어 죽는다. 그 신체는 미분화된 언어의 시보다 규정과 분할을 담당하는 일기를
쓴다. "오늘과 하루, 쪼개진 하루를 문장 단위로
쪼개 (중략) 반성한다."
그 반성으로 "타조는 타조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물컹한 신체를 지속 가능한 구체적 조건은 단순한 검열이 아니라 혹독한
마음가짐을 필요로 한다. "타조를 보고도 모르는 척"하고
그래도 "괜찮다"고 하는 자위며, 타자를 섭취해 "왕성한 식욕을 통과"해야 한다. 특히 이 시편은 "상태는 정상입니다"는 문장으로 마무리되는데, 「검열」에 전혀 쓰이지 않았던 '~습니다' 체를 사용해 반성과 검열을 완벽히 수행하는 '능동'에 대한 긴장과 공포를 표현한다.
시인의
윤리는 왜 긴장과 공포로 촉발되는가. 이 두 감정은 이영재가 「흰검정」에서 플래시 포워드로 제시한 샤먼
혹은 시와의 뜨거운 만남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은 죽고 일기 쓰고 타인을 지나칠 만하게 만들어
바쁘게 먹어 치운다. 그건 신체의 원리다. 이 신체는 '무의식적'인 작용, 반작용의
논리에 충실할 뿐이다. 그 '무의식'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런데도
왜 이영재는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 알기 위해"(「지나가면서」) 노력하는가. 무엇이 그에게 시 쓰는 자로 바뀌어야 할 강한 의무를
덧씌웠는가. 왜 그는 「검열」에서 나를 구성, 유지, 발전시키는 반성을 반성하는가. 그리하여 "내 반성의 거리는 왜 늘, 겨우 산책의 거리뿐인지" 생각하게 되는가. 그것은 앞선 문장의 끝에 등장하는 "2014,"다. '2014'에 붙은 이 쉼표(,)는 「검열」의 타조가 흔쾌히 "모르는 척"하고 지 나가버린 곳을 표시하는 기호이자, 결국 자신도 지나쳐
버린 연약한 범퍼다. 그래서 「지나가면서」에서 "나는
내게서 너무도 잘 지나가는 것 같아 못내 괴로워졌"다고 말한다. 괴로움의 내용은 무지다. 화자는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모르겠"고
"최소한의 최소한 우리는 서로에게 반성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역시 모르겠다." 또 "혹시라도 지날 수 없는 것마저, 지나야 하지 않는 것마저
지나가고 있는 건 아닐지" 조차 모른다.
그러므로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 알기 위해, 처음으로 본다." '처음으로 본다'는 말은 '처음 본다'가 아니라 '처음'의 시선을 장착해 내 눈이 아닌 처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다. '역사학
이전의 신학', '시작 이전의 시작함', '과거 이전의 기원', 정확하게는 '시인 이전의 시'의
시선 말이다. 그리고 그 처음'으로' 보는 시선은 오르페우스의 그것일 테다. 아니고서야 "저 카페는 이제 커피를 볶지 않고 저 분식집의 젊은 여자는 이제 젊지 않다"는 문장이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 알기 위해, 처음으로 본다"는 문장 앞뒤에 동일하게 반복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볼 수 없는 것을 반복해서 보는 고통 속에서 영원히 죽어가겠다는 시의 수동적 혁명을
받아들인다.
「잔여」는
이 혁명이 사랑으로 끝남을 예언한다. "피동으로 엮인 관절들이 사랑으로 가능해질 관계라는 걸
의심할 수 없다" "교육받은 반성이 반성을,"
반성하지 못하고 "......., ......., ........,"으로
침묵한다. 대신 "물음을 꾸역꾸역 삼킨다." 그리고 나의 일상적 신체가 두르던 세계 내에 함께 하는 기쁨과 소통 언어를 벗겨내고 시인으로 탄생한다. 시인은 "우리 밖의 형상이어서 불이익이 나를 쓰다듬는 걸
견디지 않고 내버려 둔다." 그 잔여 속에 도달한 그는 제일 먼저 "반성으로 이루어진 인간을 본 적 없다"는 부인의
제스쳐를 취한다.
「잔여」로 '제3부, 상대성'이 끝나고 '제 4부, 투명에서는 시의 두꺼운 언어를 껴입는다. 반성을 반성하는 태도로
외부의 외부에 다다르려 한다. (외부로의 완벽한 도착은 불가능하다. 언급했듯이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뒤돌아볼 뿐 절대 직접 보지는 못한다.) 외부에서는 "흰색에 흰색을 더한 흰색"을 알아보고 그 흰 "벽은 나를 피하지도 가하지도 않는다 벽은 해소되지 않는 채로도 여전히, 흰 벽으로 제자리다"(「흰 벽」)는 신의 인식도 맛 본다. 또 기준에 기준을 세워 "고양이는 고양이와/구분된다"는 사실을 알고 "고양이를 구분하는 방식으로/숲과 숲을, 마당과 마당을/구분할
수 없다"(「마당을 쓴다」)는 것도 안다. "연약하게 저항하는 투명한 물을 숨"(「잔잔한
붕어 낚시」)쉬며 "당해낼 재간이 없는 설득을", 그 시의 폭력과도 같은 설득을 "당신은 (중략)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투명에
투명을 덧대며」) 묻는다.
이런
질문을 던질 정도로 일정한 경지에 올랐나 싶은데 "무릎과 허리가, 허리가 목이, 목과 슬픔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자각한다 굉장하다"(「어쩌면 조금은 굉장한 슬픔」)고 감탄을 표한다. 그래서 다시 "예측될 날카로움과 두려움에 관하여, 파편화될 감정에 관하여 의미를 피하지 않는다"(「깨지기
직전의 유리컵」)는 다짐을 곱씹는다. 그래서 왠지 시인은
시를 받아쓰고 또 멈추고 다시 받아쓰고 다시 멈추는 기계적 순환을 지속할 듯하다.
잠깐
잤다
내가
여기에 있었다 지금은
돌
위에 누운 사람
돌과
온도가 같은 사람 새가 지저귀는 사람 빛이 부서지는 사람 시냇물이 흐르는 사람 산이 완만해지는 사람
바람을
해버리자는
다짐도 하다가
다람을
여기에 두고 가버린 쥐는 헐벗었을 것만 같다 매우 더운 날이다
다람을
주워 입고 도토리를 깐다 다름없다
옅어지는
새끼 노루를 에둘러, 지금이 저기로 가는 중이다
잠깐의
다짐을
까다가
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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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잠」
전문
시집의 마지막에 수록된 시편 「노루잠」은 지금과 여기에 있는 ‘나’를 두고 홀로 저기로 가는 ‘지금’의 대비를 통해 폐쇄회로가 된 나의 충만을 말한다. 그 충만은 다람을
내버린 쥐처럼 일부 벗겨지고 깨지고 그리고 동시에 충만하다. 닫히고 열린, 흰검정, 무력하고 전능한, 무결한
포로로서 ‘나’는 돌이나 새가 된다. 빛과 시냇물이 된다. “산이 완만해지는 사람”이라는 없는 문법이 되어간다. 되어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