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사랑을 위한 되풀이 창비시선 437
황인찬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황인찬의 시는 0에 닿기 위해 노력한다. 그 시는 "지워지는 시"고 그 끝에 "이미지가 없고 관념이 없고 사랑만 남는" 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좋겠다"는 기대로 쓰는 시다.(<그것은 가벼운 절망이다 지루함의 하느님이다>) 사랑이면서 사랑이 아니길 바라는 화자의 배중률은 "너를 생각하는 이 마음이 무엇인지 구분되지 않는"(<너의 살은 푸르고>) 상태다. "뜻이 있다고, 없다고 누가 자꾸 말하고"(<레몬그라스, 똠얌꿍의 재료)있는 마음, 경계를 지우는 마음. 그것은 사랑의 마음이다. 그리고 사랑은 습관 없는 사랑의 표현을 끊임없이 추심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언어화하기 쉽지 않다. 루만의 말처럼 사랑은 "반복된다는 징표를 띠지 않으면서 반복되어야 한다."(<열정으로서의 사랑> 새물결, 2009) 그래서 사랑의 표현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찰 때 사랑한다는 말 대신 창발하는 과잉의 언어다. 사랑의 언어는 과포화 될 때 결정처럼 맺힌다. 긴 기다림 끝에, 가장 늦게, 최후방에서 온다. 그러므로 "얼른 밤이 오면 좋겠어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 시는 밤이 오기 전에 끝날" 정도로 뻔한 시다. 그저 황인찬은 영원히 되풀이 된 언어를 "씻어 왔는데 아주 달고 새콤"하다.(<남아 있는 나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한길사 대학생 서포터즈 자격으로 증정 받은 도서임을 미리 밝힙니다.

신형철이 지젝을 변용하여 "김애란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도대체 가능한가?"(<몰락의 에티카>(문학동네, 2008) 693쪽)라고 했을 때, 정치철학계 버전은 "한나 아렌트를 인용하지 않는 것은 도대체 가능한가?" 정도 일 테다. <인간의 조건> 28000회, <전체주의의 기원> 17000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1000회라는 피인용수가 말해주듯이 정치철학을 논하는 데 있어 아렌트는 뒤집고 가던, 업고 가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사상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렌트를 처음 읽기 시작하는 독자는 그의 방대한 저작 중에서 무엇으로 시작하는 게 좋을지 항상 고민이다.

소위 아렌트 입문서라고 불리는 책이 한국에 여럿 있다. 좋다. <한나 아렌트>라는 영화도 있다. 좋다. 그러나 아렌트의 글을 직접 읽는 것보다 더 나은 아렌트 읽기는 없다. 그런 맥락에서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한길사, 2019)은 한나 아렌트의 서평과 강연문, 논문으로 이루어졌기에 완독의 부담이 없다. 총 15장으로 구성된 책은 각 장마다 하나의 인물을 아렌트가 평가, 소개하는 형식이다.(예외적으로 야스퍼스에게 두 장을 쓴다.) 자신이 관심 있는 인물만 집어서 발췌독을 하는 게 더 좋은 책이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고등학교 때 사르트르에 관심을 가지면서 읽은 <시대의 초상>(생각의 나무, 2009)이 떠올랐다. 땅따먹기 게임을 하듯 사르트르가 다룬 인물을 읽어가다 보면 어느덧 사르트르를 대충이나마 가늠하는 능력이 생긴다. 이후 사르트르의 강연을 묶은 두 권의 책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이학사, 2008)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학사, 2007)으로 또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1998)를 연쇄적으로 읽으며 관심이 커졌다.

그러나 아렌트의 문장은 사르트르만큼이나 길고 복잡해 읽기가 쉽지 않다. 또한 짧은 지면에 눌러 담은 서평과 연설문, 논문은 역사적 맥락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아 현재의 한국 상황에서 독서하기 쉽지 않다. 그래도 아렌트가 이 책을 묶어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로 발표한 이유를 찾아보자는 임무를 부여하고 읽어가다 보면 각각의 인물에게서 길어낸 공통의 가치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독자는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18세기 독일 작가인 레싱과 발터 벤야민, 야스퍼스와 교황 요한 23세, 누보르망의 대표 작가 나탈리 사로트와 하이데거는 어째서 하나의 책 안에서 언급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아렌트가 설명하는 '어두운 시대'의 의미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브레히트의 시 <후손들에게>에서 가져온 이 구절은 선명한 악과 절망, 증오와 분노의 시대 자체를 지목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은폐하고 기만하는 기존 체제와 공공의 발언에 가깝다. 아렌트가 공적인 대변자의 언어를 "빈말과 허튼소리", "은폐하는 언어"(60쪽)라고 강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현실적인 또는 진정한 것은 모두 공공영역에서 억누를 길 없이 터져 나오는 빈말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구타당"(62)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를 인용한 "공적인 것의 빛은 모든 것을 어둡게 한다"(62)는 문장은 공공영역의 발언이 오로지 발언 권력과 권위만 두르고 실질적인 문제의 핵심을 파고들지 않으며 오히려 덮어버리려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어두운 시대'는 "극악무도한 행위 그 자체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62쪽) 반대로 '어두운 시대'는 과도한 긍정, 획일, 동질과 계몽이라는 강력한 빛이다. 그러므로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이 가정하는 구도는 어둠과 빛의 대결이 아니라 빛과 빛의 대결이다. 아렌트가 언급하듯이 "가장 어두운 시대에도 밝은 빛은 ... 불확실하면서 깜박이는 약한 불빛이다."(63) 그건 반딧불과 같은 미광이다. 이 희미한 빛은 승리에 기뻐하기보다 승리의 완결성에 의문을 던지는 도전과 실패의 역사고 무력하게 사라질 것만 같은 연대의 가교이자 그럼에도 잔존하는 가능성이다.

아렌트가 1장에서 18세기 독일의 시인이자 비평가 레싱을 "인식의 효모"(73쪽)를 뿌리는 자로 소개하는 이유는 밑바닥에 눌어붙은 한 줌의 가능성을 레싱에게서 봤기 때문이다. 레싱은 하나의 세계관에 정박하지 않고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사유한다. 그는 기독교를 설득하는 사람은 의심하고 기독교를 깔아뭉개는 사람으로부터는 기독교를 방어하는 사람이다. 레싱의 사유는 유연하고 분방하다.

아렌트는 이동을 자유의 대표적 사례로 꼽으며 개인을 강하게 예속하는 18세기 독일에서 사유를 이동의 대체재로 정의한다. 그러나 레싱은 사유를 품은 채 고독과 칩거의 길로 향하지 않았으며 나아가 사유로 얻은 결과를 문제 해결이라는 벽으로 몰아 새우 지도 않았다. 만약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사유를 중단할 이유로 삼지 않았고 사람들의 사유를 촉발시키는 데 사용해 끊임없는 대화를 이끌어냈다. 그런 점에서 아렌트는 레싱의 18세기와 비교했을 때 20세기가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20세기는 진정한 공적 공간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공공영역의 사라짐이라는 20세기적 상황에서 아렌트는 어떤 희망을 찾을까?

이 질문 덕분에 아렌트 읽기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일처럼 여겨진다. 그는 인간이 저지르는 비인간적인 폭력과 조각난 자유 앞에서도 멈추지 않고 전진해 '행위'라는 가장 인간적인 구원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시인 레싱을 모델로 제시한 이유는 아렌트가 우리에게 "가장 넓은 의미의 '시작詩作'에 이르는 길을 끊임없이 준비하고 있"(93쪽)다고 기대를 부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장 넓은 의미의 시작이란 이 끔찍한 세계로부터 도피하거나 익명을 내세우고 정신적 망명을 시도하는 게 아니라 가장 정치적인 인간의 공공영역으로의 복귀다.

그렇다면 아렌트가 200년 전의 레싱을 소개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아렌트는 지금 레싱이 꺼내놓는가. 2장에서 다루는 로자 룩셈부르크 역시 아렌트의 어머니와 남편 블뤼허가 강한 지지를 밝혔지만 아렌트가 직접 만난 적은 없다. 오직 그의 논문과 책, 소문으로 로자를 그릴 수 있었던 그가 왜 로자를 지목했을까. 심지어 로자를 소개하는 2장은 네틀의 로자 전기에 대한 서평이 아닌가. 스승이자 친구인 하이데거, 야스퍼스, 발터 벤야민과 브레히트만큼 레싱과 로자가 이 책에 포함되어야 할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렌트는 명확히 설명하지는 않았으나 독자는 4, 5장을 장식하는 야스퍼스에게서 그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짐작할 수 있다.

야스퍼스는 과거의 철학자들을 시간적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불러와 "시간적 계기를 공간적 대체 개념으로 전환"(170쪽) 한다. 시간의 직선에서 멀고 가까운 개념을 지우고 철학 영역 위에서 모두 평면화 시켜 우리와 철학자의 관계를 "영역에 들어가 자유스럽게 선택하는 지점에 달려 있게"(171쪽) 한다. 이 영역은 정신의 영역이지만 동시에 공공영역이기도 하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철학과 정치는 모두 공공영역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철학자의 주장은 철학자의 활동 기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영향을 받아 탄생하기 때문이다.

야스퍼스가 주장하는 철학의 평면화는 그의 세계시민이론으로 이어진다. 야스퍼스에게 세계시민 실현은 단일 주권의 실현과 정반대에 있다. 단일 주권은 견제를 받지 않으며 정치적 논쟁의 기반인 다양성, 다원성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스퍼스는 전통과 민족의 가치가 생산되는 경계와 시민 자격 부여의 권위, 지역의 구속력을 인정하는 형식의 세계시민이론을 주장한다. 아렌트는 이를 "야스퍼스는 전통이 아니라 전통의 권위와 단절함으로써 철학에 참여했다."(178쪽)는 문장으로 요약한다. 사라진 권위는 곧 세계의 상대화를 의미한다. 그곳은 다양한 철학이 상호 결합, 각축, 경쟁, 사용되는 장이다. 요컨대 모든 철학 사상의 종합은 소통이다. 철학과 철학 사이의 고리, 사유와 사유 사이의 시냅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가 존재할 수 있는 곳을 야스퍼스는 세계시민의 실현으로 꿈꾼 것이다.

이 글에서는 레싱과 야스퍼스만 다뤘지만 다양한 성과 직업, 국적과 인생사가 교차하는 이 책에서 흥미롭지 않은 인물은 없다. 14명의 인물을 읽어가다 보면 그들과 아이히만을 비교해보고 싶어지기도 하고 종국에는 아렌트 본인의 생애도 궁금해질 책이다. 이들과 우정을 나누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영향을 끼친 아렌트는 도대체 누구인가. 아렌트는 무슨 말을 했고 왜 했는가. 그렇게 다음 책을 읽다 보면 우리는 영원히 아렌트를 인용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에 이른다. 아, 한나 아렌트를 인용하지 않는 것은 도대체 가능한가?

- 번외로 책에서 오탈자로 확인되는 부분을 기록한다. 발췌독을 해서 책 전체의 오탈자는 확인하지 못했다. 오탈자도 읽기를 자주 방해했지만 편집 이전에 번역도 유려한 편은 아니라 읽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아렌트의 문장은 길어서 번역의 난도가 높은 편임에도 번역에 관심이 하나도 없으면서 한글날만 열심히 지키는 한국 땅에 아렌트의 저서가 하나라도 더 번역되어야 된다는 일념으로 번역해 주신 번역자 홍원표 선생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1. 115쪽 위에서 5번째 줄: "마르크주의자인지를" → "마르크스주의자인지를"('스'가 탈락했다.)

2. 115쪽 아래서 7번째 줄: "그녀가 어떠한 장황한 비판에도 관여하느냐고 결코 신경을 쓰지 않은 이유였다." → 어떠한이 들어갔기에 "그녀가 어떠한 장황한 비판에도 관여하지 않느라고 결코 신경을 쓰지 않은 이유였다."정도가 적절하다. 원문은 이러하다. "that was why [she] never bothered to engage in any lengthy critique." 겨우 학부생이 감히 번역을 해 보자면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어떤 장황한 비판에도 관여하려고 애쓰지 않았다."로 해석할 수 있다.

3. 130쪽 주석 15번: "고대 강국인 에피루스는 기원적 279년 로마군과 아드리아해 부근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이 어렵게 승리한 데서 유래한 말로" → "고대 강국인 에피루스가 기원전 279년 로마군과 아드리아해 부근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어렵게 승리한 데서 유래한 말로"

4. 468쪽 6번째 줄: "앙드레지드" → "앙드레 지드"로 띄어쓰기해야 한다.

5. 307쪽 마지막줄: "아버지는 아들이 대학교수 자격증을 획득하더라고 매달 보내고 있는 지원금을 늘릴 수도 없고" → "아버지는 아들이 대학교수 자격증을 획득하더라도"

6. 309쪽 주석 69번: "많은 사람들이 지적 자양물인 아버지 콤플렉스는" → "많은 사람들의 지적 자양물인 아버지 콤플렉스는"이다. 원문도 소유격이다. "the father complex which is the intellectual nourishment of many"

7. 329쪽 아래에서 8번재 줄: "솔렘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당시에 베냐민은 전통과의 소외가 아마도 자신의 유대인성에 기인한다고 여전히 믿었으며, 예루살렘으로 이주하려는 친구들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열린 복귀하는 길이 존재할 수 있다고 여전히 믿었다." → 이 문장에서 어색한 것은 "자신에게도 열린 복귀하는 길이 존재할 수 있다"는 구절이다. 원문은 이렇다. "In those days, encouraged by Scholem, he still believed that his own estrangement from tradition was probably due to his Jewishness and that there· might be a way back for him as there was for his friend, who was preparing to emigrate to Jerusalem." "열린"은 한국어 문장만 봐도 없어도 괜찮은 단어다. 형용사가 두 번 나와서 어색하기 때문이다. 원문에도 '열린'의 의미를 가진 단어를 찾을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망의 두 지평 - 에른스트 블로흐와 위르겐 몰트만의 희망사상
이종인 지음 / 박영사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희망의 두 지평』은 ‘에른스트 블로흐와 위르겐 몰트만의 희망사상’이라는 부제가 보여주듯이 희망이라는 단어를 주위로 모여든 두 신학자의 주장들을 검토한 책이다. 신학에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고생을 할 것이다. 내가 그렇기 때문이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두 신학자 -그것도 현대 독일 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와 위르겐 몰트만은 저자 이종인을 거쳐 나에게 왔다.

 

책을 읽는 데 고생을 많이 한 이유는 책이 이종인의 박사학위논문을 일반 독자들에게 공개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즉, 이 책의 예상 독자는 신학박사급 논문을 펼쳐볼 여유와 지식, 필요가 상충되는 극소수의 신학생들 밖에 없다. 그러나 촘촘히 구성된 논문 구성을 따라가다 보면 충분히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둘은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하나님관을 통해 자신의 희망을 옹호한다. 블로흐는 성경의 하나님을 악하다고 규정하며 ‘하나님 없는 하나님 나라’를 희망의 근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블로흐는 ‘하나님의 언약과 신실함’만이 희망할 수 있는 이유라고 반박한다. 두 희망 사상가의 주장을 천천히 음미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울과 편견
랜돌프 리처즈.브랜든 오브라이언 지음, 홍병룡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는 갈라디아서를 7-8   동안 50 읽는 기간을 갖고 있다끼니마다  번씩 읽는데(배고플  성경을 꺼내 먹어요~) 재미있다.

시작부터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이상하게 여기" "저주를 받을"거라고 힘주고 들어간다읽어 나갈 때마다 '이거 너무 쌘거 아닌가?' 걱정이 된다 갈라디아 교회가 변질된 복음을 믿는  화날만도 하니 넘어가려는데... 이제는 예수를 직접 모시고 다닌 제자   명인 베드로를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까버린다 베드로랑 얼마 전에 "친교의 악수를 "  바울이 말이다앞으로는 웃으며 악수하고 뒤돌아서면 욕하는 이중인격 소시오패스인가내가 베드로 였으면 옛날 성질  죽이고 귀라도 하나 베어버릴 텐데().

물론 바울이 분노하는 이유는 있다베드로가 이방인이랑 식사하다가유대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방인이랑 식사를 안한다이는 이방인 차별하는 거고열심히 이방인들 전도했는데 이런 모습 보여주면 이방인 회심자들은 베드로 보고 욕하겠지그리고 복음이 뭔지구원이 뭔지 회의감들겠지 아니 중요한  베드로가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 만들었다는 거다이해를 위해   설명을 하자면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이방인과의 구별에서 찾았다그래서 식사도 따로했다 외에도 각종 정결법제사법이 수두룩하다그리고 이것들은 엄청엄청엄청 중요하고 오래되어서 유대인들은 무조건 지켜야 하며 동시에 익숙하게 몸에 붙어있다하지만 이방인들에게는  문제다그래서 유대인에게 그들은 하나님 백성이   없고되더라도 이등 백성이다결국베드로는 유대인의 풍습을 지키게 함으로서 이방인을 하나님 백성으로 끌어들이는 폭력을 행사한 셈이다바울이 소위  돈거는 이런 맥락이 있다.

갈라디아서를 비롯한 바울의 저작을 읽는데 <바울의 편견> 꽤나  도움이 된다바울의 거친 행동과 언어에서 비롯된 혐의들을 분석하고 시인하며 변호하는 책이다아직 챕터1 "바울은 얼간이였다." 밖에  읽었고 다음 챕터의 제목 역시 "바울은 흥을 깨는 자다"지만() 남성우월주의자동성애혐오자인종차별주의자로서 그의 변호가 이어지니 재판 드라마라도 보는  흥미진진하다실제로 바울의 몇몇 문장은 동성애혐오자들의 발언에 강력한 근거가 되니 말이다.

사실 기독교를 옹호하는데 있어 예수나 하나님은 최소한 신이니까 확신에 차서 변호하기가  부담스럽다아니변호해내야 한다는 강박때문에라도 어떻게든 해버린다하지만 바울은 죽어 흙이  인간이다우리와 같은 세계에 발을 디디고 있던 인간을 변호하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비록 바울의 편견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과정이 바울의 서신에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재미있게 읽도록 만들 것이다동물조련사 강형욱이 자신은 동물의 행동을 교정하는게 아니라 보호자의 행동을 교정한다고 말했다마찬가지로  책은 표면적으로는 바울을 변호하지만 궁극적으로 바울의 재판에 우리를 참여시켜 직접 성경을 읽도록 유도하고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하밥집 - 따뜻한 한 끼, 새로운 삶의 디딤돌
김현일 지음 / 죠이북스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식량에서 식사로, 홈리스에서 식구로

김현일. 『바하밥집』(죠이북스. 2017)

 

레이먼드 카버가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김현일 바하밥집 대표의 『바하밥집』은 카버의 문장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노숙인을 위한 무료 급식소 바하밥집은 ‘별것 아닌 것 같은’ 컵라면 다섯 개와 빵, 우유 그리고 약간의 밥으로 시작해 지금은 “일주일에 700명이 넘는 분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규모를 갖췄다. 또한, 주거, 법률, 의료, 직업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소개소-김현일의 말을 빌리자면 ‘통로’- 역할을 한다. 예수의 오병이어 기적이 이천 년이 지난 현재 ‘바하밥집’에서 재현되고 있다.


바하밥집은 내가 지금껏 먹은 게 마음이 깃든 한 끼 ‘식사’가 아니라 치열하게 먹어치운 전투‘식량’임을 깨닫게 했다. 처음에는 김현일 대표도 나와 같았다. 다섯 개의 컵라면을 들고 노숙인을 찾아간 그는 “무척 추웠고 배도 고팠을 테니 기분 좋게 컵라면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컵라면을 바닥에 팽개쳐 버”리는 노숙인의 반응에 당황했다. 사실 노숙인들은 친절한 척을 하면서 접근해 주민 등록 정보를 알아내고, 대포통장을 개설하는 사기꾼 때문에 경계심이 많다. 잠시 후 다시 찾아간 그 노숙인은 버렸던 컵라면을 다시 주워 담았고 이를 보며 “마음속 깊이 베인 상처를 먼저 볼 줄 알아야 했는데, 그저 배고픔만 채워 주려 했”다며 반성한다.


이 경험은 “식사하러 오는 분들을 예수님의 손님으로 대한다”는 바하밥집의 대원칙으로 자리매김한다. 덕분에 김치볶음밥에 김이 안 들어가는 불상사가 있었을 때 “예수님이 이곳에서 이 음식으로 식사하신다고 생각해 봐라. 김 떨어졌다고 그대로 있겠냐?”고 기준을 엄하게 지키고, 언제나 풍성한 음식을 가장 신선한 재료를 이용해 준비하면서도 수저 짝을 잘 맞추는 디테일을 확보해 손님으로서 대접하는 느낌이 들도록 신경 썼다.


그러나 바하밥집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공간에 그치지 않는다. 고시원을 얻어주고, 기초 생활 수급비 신청, 의료, 법률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렇게 마음이 열린 분들이 찾아오면 우선 자신이 밥을 먹은 바하밥집에서 봉사하면서 자활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맞는 맞춤형 프로그램을 만든다. 예를 들어 바하밥집에서 큰형님이라 불리는 손성일 씨는 살인과 각종 범죄로 24년을 복역한 노숙인이었다. 주폭 단속기간에 걸려 구치소에서 들어간 그는 바하밥집을 통해 알게 된 김현일 대표에게 그림을 보냈다. 그리고 그의 그림을 본 만화가가 예술 교육가 류재훈 대표를 소개해주어 그림 수업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사진과 미술 치료 수업도 추가되었다. 이 수업으로 손성일 씨는 봉사를 하다가도 화가 나면 국통을 차고 나가버리던 감정을 성숙하게 처리하게 되었고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결혼식도 올렸다.


밥집 봉사, 자활프로그램을 거친 분들은 최종적으로 일자리를 알선받는다. 이 또한 멀리 있는 공장보다 밥집이 위치한 보문동의 봉제 공장을 중점으로 연결한다. 지속적인 관심을 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바하밥집은 이미 밥을 먹는 행위를 일자리로 제공했다. 식사食事의 말뜻처럼 먹는 행위는 칼로리의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일事의 한 종류다. 또한, 식사는 집 없는 자homeless를 오직 먹는 것 아래서 같은 식구食口로 퉁 쳐버린다. 김현일 대표가 김형국 목사와 호형호제를 하는 것도, 손성일 씨가 ‘큰형님’으로 불리는 것도 모두 식탁 위에서 벌어진 일이 아닌가.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구원을 장벽을 허문 초대교회 공동체와 같이 ‘오직 밥 한 끼만으로’ 바하밥집에서는 “노숙인과 노숙인이 아닌 사람이 함께 하는 공동체” 식구가 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